생명의 말씀 - 설교

[스크랩] 이삭의 순종과 축복

kaporet 2006. 8. 30. 13:42
 

2006.6.18(주일예배)

이삭의 순종과 축복

창세기 26:1-14


I. 들어가는 말


    우리는 지난 주 아브라함의 축복과 예배에 대하여 말씀을 들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약속하실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명령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서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에 대하여 순종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간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시어 다시 한번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이에 대하여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림으로 자신의 믿음을 표현하므로 아브라함은 마침내 하나님께서 약속하시는 축복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약속의 아들로 이삭을 주십니다. 이삭은 어릴 때 아버지 아브라함과 함께 모리아산으로 여행을 간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삭이 제물로 하나님께 바쳐지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처음에는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다만 이상한 것은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불과 장작나무는 있는데 제물로 드릴 양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묻습니다. “아버지” “왜 그러니 아들아” “나무와 불은 있는데 제물로 드릴 양은 어디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비해놓으신단다” 이 대화 속에서 이삭은 아마도 어렴풋이 자신이 어쩌면 희생제물이 되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결박하여 죽이려 할 때 그는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고 순순히 죽음을 기다렸습니다. 그때 주의 천사가 아브라함을 말하여 이삭에게 손을 대지 못하게 하고 대신 하나님이 예배해놓으신 양을 잡아 드리게 합니다.

    이 날 이후 이삭은 순종을 더 깊이 배웠습니다. 물론 이삭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 아브라함이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는 모습을 배우면서 자랐습니다. 그러나 모리아산에서의 경험이후 이삭은 더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것이 무엇인가 확실하게 배운 것입니다. ‘순종은 자신의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가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순종이야말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비결임을 아브라함의 모습을 통하여 보아왔던 것입니다.


II. 이삭의 순종과 축복


1. 하나님의 명령(1-2절)


    (1)흉년의 때에(1절)


    오늘 본문의 시작은 두 번째 흉년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척박한 팔레스틴 지방에서 기근은 흔한 일입니다. 아브라함이 경험한 첫 흉년(B.C. 2090년경)은 이삭의 때에 발생하였던(B.C. 1990년경) 것보다 약100년전의 일입니다(12:10). 이 대흉년은 하나님의 비상한 섭리에 의해 일어난 것으로, 야곱의 역사에서 한 번 더 일어납니다(42:5).  팔레스틴의 농사는 거의 비와 이슬에 의존하는바 흉년은 거주민의 생계에 막중한 손해를 끼쳤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생명에 관련된 것입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야곱의 아들들이 애굽으로 식량을 사러간 것도 그 가족의 생명 때문인 것입니다. 흉년의 이야기는 이삭의 곤란한 모습을 말해줍니다. 이삭은 어찌하든 가족을 이끌고 흉년을 피할 길을 찾아야함을 보여줍니다.

    이삭이 흉년으로 인해 도착한 곳은 ‘그랄’이었습니다. “그랄”은 '거주지'란 뜻으로, 가사에서 남동쪽으로 약 17Km 떨어진 현재의 텔 아부 후레이라(tell abu hureira)입니다. 가나안의 남쪽 경계선 서남쪽에 위치한 풍요한 곡창지로서 약 70년전에 아브라함이 머물렀던 곳이기도 합니다(20:1).

   그랄 땅은 블레셋왕인 아비멜렉의 통치하에 있었습니다. “아비멜렉”이란 이름은 ‘아버지는 왕’이란 뜻으로 애굽 왕이 바로로 통용되듯이 그랄 왕의 공식적인 칭호이었습니다(시 34편의 표제에 나오는 아비멜렉의 실제 이름은 '아기스'입니다). 이삭이 만났던 아비멜렉과 아브라함 당시의 아비멜렉은 약 70년 시차가 있으므로 동명이인(同名異人)임이 확실합니다.


    (2)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2절)


    이삭이 그랄에 도착했을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나타나시었습니다.    “여호와”(예호와)는 언약의 당사자로서의 신실성을 강조하는 하나님의 명칭입니다. 구속사의 전개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삭에게 하나님의 언약은 큰 비중을 차지하므로 '여호와'란 이름이 강조되었던 것입니다. 반면 언약과 관계없는 일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강조되는 '엘로힘'이라는 명칭이 통상적으로 사용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그 자손이 애굽으로 갈 것을 예언하셨고(15:13), 이는 후에 요셉을 통하여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삭이 애굽으로 내려감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는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에 굽의 팽배한 우상숭배로 인해 이삭의 신앙이 동요됨을 예견하셨기 때문입니다. 아직 이삭은 애굽으로 내려가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언젠가 아브라함에게 예언하신대로 이삭의 후손인 야곱의 가족이 애굽으로 내려갈 때가 오겠지만, 아직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언제나 선민에게 있어서 애굽을 ‘죄악과 타락의 도성’이자 ‘신앙 연단의 장소’로 이해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사 31:1; 렘 42:19; 겔 23:3).


2. 축복의 약속(3-5절)


    (1)축복의 조건은 순종: 이 땅에 유하면(3절)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축복을 약속하시면서 조건을 제시하십니다. 그것은 그랄 땅에 거하며 흉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 땅에 유하면”(구르 바아레츠 하조트)이란 말을 직역하면 ‘이 땅에 거처하라’입니다. ‘이 땅’은 이삭이 머물던 블레셋 땅이 아니라 그의 아비 아브라함에게 약속으로 주어진 가나안 땅 전체를 가리킵니다(calvin).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대로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성실하게 지키시기 위하여, 이삭을 애굽으로 가지 못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땅에 머물 것을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순종할 때 축복해주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약속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약속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동행과 임재를 약속하신 말입니다. 선민 이스라엘과 항상 함께 하신 하나님은 후에 성막과 성전의 지성소에 거하셨으나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이 약속은 완전히 성취되었습니다(요 1:14). 예수의 이름인 임마누엘, 즉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란 말씀은 이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마 1:23).

    하나님께서 이삭과의 동행과 임재를 약속하시는 이유는 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네게 복을 주고.”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약속하신 복은 이미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22:16-18)의 재확인이자 계승으로 그 핵심은 자손과 땅에 대한 축복입니다. 이후 이러한 약속은 야곱에게도 주어졌으며(28:15) 부분적, 일시적으로나마 이스라엘 역사속에서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영적 축복으로, 그 궁극적 성취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어 질 것이란 점입니다.

    오늘날 신약 시대의 성도들은 이제 이러한 축복을 온전히 누리는 자들이라 하겠는데 그 증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칭함 받고 있다는 점과(롬 8:15,16), 둘째로 성령이 그들 가운데 내주(內主)하신다는 점(갈 2:20), 셋째로 영원한 생명과 천국을 보장받고 있다는 점(요 3:16; 5:3,10) 등입니다.


    (2)축복의 약속: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4절)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축복을 약속하신 것은 아브라함에게 이미 약속하신 것을 다시 반복하시는 것이지만 한편 이삭을 인하여 성취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창 15:5)

    하나님께서는 이삭의 후손을 통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고 약속하십니다. “네 자손을 인하여”이란 말씀은, ‘자손’ (제라)을 ‘아브라함의 후손들’이란 집합적 뜻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장차 오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축복이 완성된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3:15) 그 의미는 단수로 취급함이 적절합니다(갈 3:16).

    “복을 받으리라”(히트바레쿠)를 직역하면 ‘자신들을 스스로 축복 할 것이다’입니다. 이것은 재귀형으로 ‘천하만국 스스로가 아브라함의 씨, 즉 메시야를 통해 부여될 축복을 바랄 것이다’라는 의미입니다.


    (3)축복의 이유는 순종함: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에 순종하고(5절)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이처럼 축복의 약속을 하시는 이유는 이삭의 믿음 때문에라기보다는 이삭의 아비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축복의 약속을 받고서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 순종함이 이삭에게까지 영향력을 미치기 때문임을 말씀합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니라“

    “순종하고”(솨마)라는 말은 ‘듣다’(3:17), ‘준행하다’(22:18)란 뜻입니다. 즉 들은 바대로 실천하는 것을 가리키는데, 우리의 신앙도 성경을 읽고 깨닫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깨달은 바를 지켜, 행함으로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갈 5:22,23).

    “명령”(미쉬메레트)은 ‘울타리를 치다’, ‘지키다’에서 유래한말입니다. '파수', '위탁물'이란 뜻이나 여기선 읽거나 듣고서 지키도록 하기 위해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뜻합니다(kalisch).

    “계명”(미츠와)은 ‘명령하다’, ‘짐을 맡기다’란 동사에서 유래하였습니다. ‘명령된 율법’이란 뜻으로 특별히 법규화되거나 명문화(明文化)된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율례”(후카)는 ‘새기다’란 말에서 유래하였습니다(출12:14). 시공간을 초월한 전인류가 마음속에 새겨 두어야 할 불변하는 하나님의 규례와 진리를 의미합니다.

    “법도”(토라) - ‘가리키다’, ‘교훈하다’란 동사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일반적인 도덕 원칙을 의미하나, 특히 ‘십계명’ 또는 ‘모세 오경’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본절에서 ‘명령’, ‘계명’, ‘율례’, ‘법도’란 말들이 사용됨은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율법을 제정하기 이전에도 이미 그 근본 사상이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3. 순종하는 이삭(6-11절)


    (1)순종하는 이삭(6절)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이삭은 그랄 땅에 머뭅니다. 물론 흉년이 끝나기까지 기다는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이삭의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기로 약속하신 것을 자신에게 주실 줄 믿고 때를 기다린 것입니다. 


    (2)이삭의 실수: 아내 리브가를 누이라한 사건(7-11절)


    1)거짓을 말하는 이삭(7절)


    이삭은 그랄 땅에 머물면서 아브라함과 똑같은 실수를 합니다. 자신의 아내 리브가의 아름다움 때문에 그랄 사람들이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이삭은 리브가를 자신의 누이라고 말합니다.

    “누이”(아호트)는 문자적으로 인척 관계인 ‘자매’'를 뜻하나 은유적으론 매우 친근하거나 유사한 관계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한편 아브라함과 사라가 이복 형제였던 것처럼 이삭과 리브가가 오촌지간이었다는 점에 근거할 때에(24:15) 본절에서 이삭이 리브가를 가리켜 ‘누이’라고 말한 것은 일면 타당성이 있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는 근본적으로 사람을 기만하려 든 거짓말이며, 하나님께서 맺어 주신 부부 사이를 부정한 것이란 점에서 지탄을 면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이 같은 잘못은 일찍이 아브라함이 범했던 것과 동일한 잘못이란 점에서(12:10; 20; 20:1-18) 우리는 부모의 그릇된 언행이 자녀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분명히 교훈받을 수 있습니다(엡 6:4).

    “아리따우므로”(토브)는 ‘좋은’, ‘아름답다’는 뜻으로 외모가 보기 좋다는 말입니다.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의 처 사라도(12:11) 야곱의 처 라헬도 (29:17) 외모가 아리따운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하여야 할 점은 하나님께선 외모가아니라 중심을 보시는 분으로(삼상 16:7) 염치와 정절, 선한 행실로 자신을 아름답게 단장하는 자를 기뻐하신다는 사실입니다(딤전 2:9,10).

    이삭은 그랄 백성이 리브가로 인하여 자신을 죽일까 걱정하여 리브가를 자기의 아내라고 말하지 못합니다. “죽일까”(하락)라는 말은 ‘죽일 의도로 때리다’, ‘쳐죽이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같은 이삭의 근심은 한낱 기우(杞憂)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앞서 하나님께선 이삭에게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3절)는 보호와 인도하심의 약속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삭이 이방 족속을 두려워한 것은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고 나약한 존재인지를 잘 드러내 줍니다.


    2)이삭이 리브가를 안은 것을 본 아비멜렉(8절)


    이삭의 자기 보호를 위한 거짓말은 아비멜렉에 의해 들킵니다. 이삭이 리브가를 껴안은 것을 아비멜렉이 봅니다. “껴안은 것”(차학)이란 말은 ‘웃다’(18:13), ‘희롱하다’(39:14) 등의 다양한 뜻이 있으나 여기서는 애무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특히 본문은 그 행동이 절정에 이르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으니 이삭이 리브가를 껴안은 모습은 누가 목격해도 오누이 간에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음을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3)아비멜렉의 항변(9-10절)


    이삭이 리브가를 껴안은 것을 본 아비멜렉은 이삭을 불러서 항변합니다. 여기서 “불러”(카라)라는 말은 ‘소리치다’, ‘부르다’란 뜻으로서, 여기에서는 아비멜렉이 창밖으로 이삭을 향해 소리쳤다기보다는 신하를 시켜 급히 ‘소환’했음을 의미합니다.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항변한 것은 리브가가 이삭의 아내라는 말을 하지 않아서 자기의 백성중에 리브가와 동침하는 자가 생겨서 죄를 지을 뻔한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아비멜렉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임을 보여줍니다. “쉬웠을 뻔하였은즉”(키므앗)라는 말은 ‘거의’(almost)란 뜻으로, 이 말은 그랄 백성 중 하나가 리브가를 범하려 할 뻔했던 위기상황에까지 이르렀었음을 암시해 줍니다.

    여기서 “죄”(아솽)는 ‘파괴하다’는 말에서 파생된 단어로 ‘큰 죄책’이나 ‘과오’를 의미합니다. 아비멜렉이 이처럼 이삭의 잘못에 대해 신중히 대처한 이유는 과거 아브라함 당시 궁정에서 일어났던 같은 종류의 사건을 잊지 아니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20:1-18).


    4)아비멜렉의 조치(11절)


    아비멜렉은 긴급조치를 합니다. 누구든지 이삭의 아내 리브가를 범하는 자는 죽이리라고 하여 누구도 리브가를 건들지 못하게 합니다. 여기서 “범하는”(나가)의 본래 의미는 ‘만지다’, ‘타격하다’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여자와 함께 ‘눕다’, 여자의 정조를 ‘유린하다’라는 뜻입니다.

    “죽이리라”(모트 유마트)는 말을 직역하면 ‘반드시 사형에 처해질 것 이다’로 절대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엄중한 선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이삭 스스로 확보할 수 없었던 안전을 이방의 왕을 통해 확보하게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이삭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통하여 그와 그 가족을 온전히 보존하시는 초월적인 섭리와 은혜를 베푸셨던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영원하심 및 역사의 주관자 되심을 보여 준 귀한 사건이었습니다.


4. 축복받은 이삭(12-14절)


    (1)농사하여 백배나 얻었고(12절)


    이삭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삭과 리브가를 보호하신 이후 이삭은 그곳에서 농사를 지어 그 해에 백배나 얻었습니다. 흉년이 들어 가뭄이 든 때에 블레셋 사람들보다 백배나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라는 기록은 가인(4:2)과 노아(9:20)에 이어 세 번째로 나타나는 족장의 농사에 관한 기록입니다. 이삭은 유목민인 아브라함과는 달리 반(半)유목민으로 간주될 만큼 농사일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이처럼 유목민이 땅을 개간한다는 것은 힘들고 고달픈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니 자연히 그들은 시시때때로 하나님의 은혜를 갈구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백배”(메아 쉐아림)는 문자적으로는 ‘백배의 분량’입니다. 이처럼 이삭이 동일한 경작 조건에도 불구하고 블레셋 족속에 비해 백배의 수확을 얻었다는 것은 이례적인 것으로서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의 결과입니다. 이러한 사실에서도 우리는 비록 인간은 연약하고 불완전하며 왕왕 하나님의 뜻을 거스릴 때가 많으나 하나님께선 변함없는 사랑으로 우리들에게 긍휼을 덧입히신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애 3:31-33).

    백배나 “얻었고”(마차)는 문자적인 뜻 ‘발견했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이삭이 들에 나가 수확할 것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발견하고 놀라는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이러한 백배의 수확은 하나님의 축복의 결과임을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와이바라 케후 예호와)는 ‘그리고 그처럼 여호와께서 축복하셨다’란 의미로 하나님이 일전에 약속하신대로 복을 주셨다는 사실을 내포합니다(3절). 이는 하나님의 이름에 있어 언약관계에서 많이 사용되는 여호와('예호와')란 명칭(엘로힘 대신에)이 사용된 점만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2절>.


    (2)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13절)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복을 주시므로 그의 부(富)는 점점 더해갑니다. 마침내 이삭은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됩니다. “왕성하여”(할라크)라는 말을 직역하면 ‘갈수록’이라는 의미로서, ‘진행하며’(수6:14), ‘점점’(삼상 14:19) 등으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여기서 이 말은 ‘그가 계속 번창하게 되어갔다’란 뜻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면 계속하여 번창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3) 블레셋사람이 그를 시기하여(14절)


    이삭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거부가 되었을 때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노복이 심히 많으므로” 불레셋 사람이 이삭을 시기합니다. 이삭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그랄 땅에서 모든 사람들의 눈에 띌 정도로 거부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이방인 불레셋 사람이 시기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양과 소”(미크네 촌 우미크네 바카르)를 직역하면 ‘양떼의 재산과 소떼의 재산’입니다. 이와 같이 양과 소를 따로 구분함은 이삭의 살림살이가 심히 증대된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히브리인들은 소유하고 있는 가축의 수로 부를 가늠했었기 때문입니다(12:16, 30, 43; 욥 1:3).

    “노복”(아부다)은 ‘일하다’, ‘섬기다’에서 유래한 말로 주인에 예속된 종들을 가리킵니다. 당시 이삭 가문에 노동력을 제공하기 위해 모인 종들은 주로 비 히브리계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참조 20:14).

    “시기하여”(카나)의 원뜻은 ‘열심을 내다’로 여기서는 크게 질투하며, 시샘하는 것을 뜻합니다. 타인의 번영이나 성공에 대해 이처럼 까닭없이 배 아파하는 것은 타락한 인간성의 일면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우리 성도들은 이러한 옛 성품을 벗어 버리고 오직 새사람을 입어 대신(對神) 관계에서 뿐 아니라 대인(對人) 관계에서도 성숙한 모습을 지녀가야 할 것입니다(엡 4:22).


III. 적용: 순종하여 축복받는 삶


    우리는 이삭이 흉년의 때이지만,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을 듣고 순종함으로 가나안 땅을 떠나지 않고 그랄 땅에 머물며 농사할 때 하나님의 축복으로 백배나 얻고 그가 창대하고 왕성하여 거부가 된 것을 배웠습니다. 이러한 축복은 이삭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이삭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순종할 때 우리에게도 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순종하여 하나님의 약속하신 축복을 누리며 살 것인지 묵상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시었습니다(롬 5:8). 그러므로 우리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주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은사로 주시지 않겠습니까?(롬 8:32)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치 않고 확신할 때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둘째,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천지만물을 말씀으로 지으신 분이시고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어주시는 신실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그대로 믿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신뢰할 때 우리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신뢰할 때 하나님의 약속하신 축복을 구하게 될 것이고 그 축복을 받아 누리게 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들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신뢰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믿음을 가지고 구하기만하면 다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입니다(약 4:2b-3). 우리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구하기만 한다면 우리에게 약속하신 모든 축복을 받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실수하고 넘어져서 하나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없을 지경이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은혜를 구하며 십자가의 보혈로 씻어주시기를 구하면 언제든지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여주실 것이고 다시한번 하나님 보좌 앞에 서게 해주실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다시 한번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축복을 구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축복을 하여주실 것입니다.

출처 : 동경센조쿠중앙교회-주님더알기
글쓴이 : kaporet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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