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말씀 - 설교

십자가의 사랑

kaporet 2006. 8. 25. 15:49
 

2006.4.9(고난주일)

십자가의 사랑

누가복음 23:32-43


I. 들어가는 말


    성도들이 하나님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의 죽음에 내어주셨습니다(롬 5:8). 그 결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잘 표현한 요한복음 3장16절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이 시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랑을 체험하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II. 십자가의 사랑


1. 저희를 사하여주옵소서(32-38절)


    (1) 두 행악자와 함께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32-33절)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32절)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누가는 예수가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장면을 상세하게 묘사하며 이와 더불어 두 사람의 사형수를 소개합니다. 이 두 명의 사형수는 십자가상에서 신학적으로 의미심장한 질문과 대답을 끌어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사람입니다(39-43절). 뿐만 아니라 다른 사형수와 함께 형장으로 끌려가는 예수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예수가 일반 사형수와 같이 강도나 범죄자와 동일한 취급을 당하여 처형되신 것임을 말합니다. 아울러 이는 22:37과 사 53:12에서 언급된 예언의 성취를 확인시켜 줍니다. 그러나 이두 행악자가 구체적으로 어떤 범죄를 저질렀는지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있으나 마태(마 27:38)와 마가(막 15:27)에 의하면 그들은 강도였다 합니다. 아마 살인과 방화 등을 서슴지 않은 흉악범(凶惡犯)이었을 것입니다(41절 참조).

    “해골이라 하는 곳”(33절)    예수가 처형되신 사형 집행 장소가 처음으로 언급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정확한 지명은 언급되지 않고 ‘...라 불리워지는 곳’이라는 불명확한 어투가 사용됩니다. 이 어투와 같이 이 장소가 어디를 말하는지 고증하기가 어려운 문제로 남아있습니다. 다른 사형수와 함께 처형한 점으로 보아 로마군의 공식적 처형 장소로 보이며 성 밖의 어느 곳에 있는 무덤 근처였을 것으로 생각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 지명은 해골(骸骨)이 많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붙여졌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물론 지형이 해골을 닮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일 수도 있습니다(Bengel). 다만 분명한 점은 성문 밖이었다는 것입니다(히 13:12). 불가타(Vulgate)역 성경에서는 ‘해골’이라는 말을 칼바리움(Calvarium)으로 번역하여 갈보리(Calvary) 언덕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이곳을 마태와 마가는 히브리 말로 ‘골고다’라고 언급하고 있는데(마 27:33; 막 15:22) 누가만은 헬라어로 번역하여 ‘해골’이라는 뜻을 지닌 ‘크라니온’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 점으로 보아 누가는 헬라 문화권에 속한 이방 나라들에 대한 배려를 엄두에 두었음을 다시 확인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누가는 예수의 양 쪽에 범법자 두 명이 같이 못 박혀 있음을 말하고 마태와 마가는 ‘강도’(레스타이)들이 양 쪽에 못 박혀 있는 것으로 묘사했습니다(마 27:38; 막 15:27). 마태와 마가는 예수의 좌우에 사랑하는 제자가 아닌(막 10:37 참조) 흉악한 강도가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예수의 치욕스러움과 제자들의 비겁함을 부각시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 누가의 의도는 제자들의 비겁함이나 예수의 치욕을 강조하기 보다는 22:37의 예언 성취를 강조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누가가 ‘강도’라는 말 대신 다소 부드러운 표현인 ‘행악자’(카쿠르구스)를 사용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됩니다.

    “십자가에 못박고”    마침내 예수가 가장 잔인한 처형의 방법에 따라 못 박히는 모습입니다. 누가는 못 박았다는 단순한 묘사를 하고 있지만 마태와 마가는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했습니다. 마태는 못 박힌 시각이 제 3시경이라고 밝히는데 유월절(Passover) 다음날 오전 9시경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마태와 마가는 십자가에 못 박은 것과 동시에 명패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씌어진 사실을 언급하는 반면(마 27:37; 막 15:26) 누가는 이후에(38절) 언급합니다. 따라서 마태와 마가는 조롱하기 위해 써 붙인 명패를 강조하는 반면 누가는 나중에 조롱하는 장면과 함께 언급함으로써 그 효과를 다소 완화시킨 듯합니다.


    (2)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34절)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34절)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뒤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무리를 향해 측은한 마음으로 기도를 시작하십니다. 이 기도문은 누가만이 언급하고 있으며 본문에 대한 진정성 시비가 문제로 남아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본은 본문 구절을 괄호 안에 넣어 언급하는 반면 대다수 사본은 본문을 생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을(마 5:44) 친히 실천하고 증명해 보이셨다는 점에서 적절한 문구로 보입니다. 여기서 용서의 대상을 지칭한 ‘저희’는 사형 집행자인 로마 군인들만이 아니라 주범인 산헤드린(Sanhedrin) 대표와 그 음모에 가담했던 모든 죄인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본 구절을 28-31절에 언급된 내용과 연관지어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겠습니다. 고전 2:8의 증언대로 그들은 무지 가운데서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았으며, 베드로의 설교 내용처럼 ‘생명의 주’를 죽였습니다(행 3:15). 그러나 예수는 그들의 무지를 오히려 긍휼히 여기시고 그러한 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회개와 죄 사함의 자리로 초청하고 계신 것입니다. 한편 이 말씀은 사복음서의 기록을 통해 접할 수 있는 소위 예수의 ‘가상칠언’(架上七言) 중 첫번째에 해당합니다. 가상칠언의 내용을 한마디씩으로 요악해보면 (1) 용서하심(본절) (2) 낙원을 허락하심(43절) (3) 아들을 말하심(요 19:26) (4) 하나님께 부르짖으심(마 27:46; 막 15:34) (5) 갈하심(요 19:28) (6) 다 이루심(요 19:30) (7) 영혼을 맡기심(46절) 등입니다.

    처형자들이 사형수의 옷을 제비뽑아 나눠갖는 것은 당시의 관습에 따른 것으로 봅니다(Blinzler). 뿐만 아니라 시 22:18에서 언급된 예언의 성취로 볼 수 있습니다.


    (3)조롱하는 관원들(35절)


    누가는 십자가 형장에 있던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으며 마치 백성들은 조롱하는 일에 가담하지 않는 것처럼 묘사합니다. 반면 마태와 마가는 지니가는 사람도 예수를 모욕하며 조롱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도 누가의 의도가 넌지시 드러나는데 누가는 예수에 대한 모욕 행위의 내용과 범위를 가능한 약화시키려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대신 지도자들의 모욕 장면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여기서 ‘구원하다’라는 말은 예수의 활동 가운데 치유 기적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택하신 자’ 란 십자가 처형을 바라보며 군중들이 예수를 조롱하여 내뱉은 말이지만 기실은 중요한 의미를 내포한 말입니다. 구약의 외경 에녹서에서는 이 말이 ‘하늘의 인자’를 가리키며 본서 9:35에서는 ‘택함을 받은 나의 아들’이라고 나옵니다. 본절에서 누가는 이 단어를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택하신 자’란 의미로서 사용하였다고 봄이 타당합니다. 즉 누가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택하신 분으로서 세상 구원을 위한 마지막 사역을 감당하고 계셨던 사실을 기록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한편 이 같은 조롱 행위는 시 22:6-8에서 이미 예언된 바의 성취라고 볼 수 있습니다.


    (4)함께 조롱하는 군인들(36-38절)


    “신 포도주를 주며”(36절)  군병들이 예수께 신 포도주를 준 사실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입니다. (1)군병들이 희롱하면서 신 포도주를 주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희롱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어서 먹기 힘든 포도주를 준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이 그러하다면, 하루 전날 밤부터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못하신 예수를 조롱하는 그들의 잔인성은 실로 지독하였다 할 것입니다. (2)요 19:28에 나와 있듯이 예수께서 '목마르다'(I am thirsty, NIV)고 하신 사실을 고려하건대 목을 축이기 위해 준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3)또 하나는 사형 집행자가 관례에 따라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의무적으로 주었다는 주장(Zahn, Farrar)도 가능합니다. 이 견해는 마취 효과를 내는 쓸개를 포도주에 탔다고 하는 마태의 기록이나(마 27:34), 시간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마시게끔 했다는 다른 두 공관복음서상의 기록 등에 의해 뒷받침 받습니다. 그러나 시 69:21의 성취로 본다면 조롱하려는 목적이 강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먹을 수 없는 것으로 주어서 고통을 가중시키고 수치스럽게 하려는 것입니다.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37절) 로마 군병이 언급한 말이라는 점에서 그들은 정치적 의미에서 예수를 희롱했다고 생각되며 그 이상의 문제에 대해서 그들은 알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특히 종교 문제에 대해서는 잘 몰랐을 것이고 다만 십자가상에 붙어있는 죄명을 보고(38절)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자칭 왕이라고 사람들을 선동하던 사람쯤으로 생각해서 왕이면 자신을 사형(capital punishment)으로부터 면죄(amnesty)받게 하여 다시 살려보라는 투로 조롱한 듯합니다. 마태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 그리고 장로들이 함께 조롱하면서 종교적인 문제 즉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지 보자면서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 증명되는지 보자고 하며 희롱한 것으로 묘사합니다(마 27:42-44). 아마도 마태는 유대인을 의식하여 문제 곧 종교 문제를 부각시키고 있는 반면 누가는 이방인을 염두에 두고 정치적 문제에다 초점을 맞춘 것 같습니다. 또 마태는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언급하여 이방인에게 익숙한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38절)  이 명패는 희롱하기 위한 목적으로 붙여진 것입니다. 요 19:20에 의하면 명패는 3개 국어로 씌어져 있었습니다. 즉 히브리어, 로마어, 헬라어로 되어 있고 또 그것을 빌라도가 직접 적은 것으로 언급됩니다(요 19:19). 이 명패는 역설적 (oaradoxical)으로 예수의 참된 신원(identity)을 밝혀주고 있는 바, 조롱하기 위해 붙여준 이름이 결국에는 부활을 통해 예수의 우주적 왕권을 확증하는 이름이 됩니다. 인류 역사상 수많은 영웅적인 왕들이 일세를 풍미하다가는 다 사라져 갔지만 예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그 절정을 보여주신 사랑으로써 오고 오는 모든 세대 모든 성도들을 통치하시는 위대한 왕이신 것입니다.


2.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39-43)


    (1)비방하는 한 행악자(39절)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예수의 좌우에서 못 박힌 두 죄수 중 한명이 예수를 비방하고 있는데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이 죄수는 유대인으로서 종교적인 의미로 모욕하고 있습니다. 두 죄수에 대한 누가의 언급은 이미 32절에서 언급된 바처럼 마태나 마가와는 달리 예수의 십자가 처형에 대한 중요한 신학적 열쇠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시(注視)될 필요가 있습니다. 엘리스(Ellis)는 두 죄인의 이야기가 예수의 처형 이야기에서 핵심을 차지하는 것이라고 까지 주장합니다. 마태와 마가는 두 죄인이 같이 예수를 욕했다는 사실만 언급하고 맙니다(마 27:44; 막 15:32). 범죄자가 예수를 비방했다는 사실이 예수께서 당하신 치욕의 정도를 한층 더해 주고 있는데 이 범죄자가 왜 비방했는지 알 수 없으나 당시 사형을 당할 정도의 죄인이라면 셀롯당(Zealot)에 속한 무력 독립 투쟁가 중의 한 사람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 죄인은 예수에게서 기대했던 혁명적 변혁이 좌절된 것에 대한 실망에서 욕을 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rengstorf). 그러나 41절에서 다른 한 명의 죄수가 정당한 벌을 받고 있다고 진술한 것을 보면 이들 두 명의 죄수는 독립 투쟁가는 아니었을 듯합니다.


    (2)변호하는 또 다른 행악자(40-41절)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40절)   예수를 가운데 두고 두 죄인의 논쟁 속에서 예수의 본성이 규명됩니다. 예수를 비방하는 죄인을 향해 반박한 본절 내용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로 미루어 보건대 이 죄수는 여호와 신앙의 전통에 익숙한 유대인이었을 것입니다 .한편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여기서는 징벌에 대한 공포의 차원에서 언급되었으나, 보다 깊은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인격적 존재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경외심을 지칭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동일한 정죄를 받았다는 말은 예수가 동일한 죄를 졌다는 말로 역이해 될 수 있으나 41절의 내용으로 보아 로마 총독으로부터 받은 재판정의 판결을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42절)  예수의 의로움에 대해 말하기 전 이 죄인은 자신들의 형벌에 대해 마땅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문맥상 예수에 대한 언급을 대비적으로 강조합니다. 이 죄인은 예수를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인 듯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있게 예수의 언행(言行)에 있어서 옳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할 정도로 확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자신의 잘못을 긍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자신의 잘못을 긍정하고 예수를 정당하게 인정하는 것을 회개의 표현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여기서의 초점은 죄인의 회개에 있지 않고 죄인에 의해서 예수의 의로움이 증언되었다는 점에 있습니다. 즉 예수의 처형은 잘못된 것으로서 대적들의 음모와 모함에 의한 것이라는 표현입니다. 또한 누가는 ‘아토포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옳지 않은’, ‘본래 제 자리가 아닌’(out of place)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처형대는 예수가 계실 곳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3) 예수께 청원하는 자(42절)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죽음을 앞둔 죄수의 고백은 매우 종교적이고 종말적인 성격을 띱니다. 특히 이 죄수는 죽음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이와 같이 소망적인 고백을 하였다는 점에서 깊은 의미를 시사합니다. 당시 대다수 유대인들은 지상적(地上的)이고 정치적인 메시야(Messiah)를 기다렸고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통해 그러한 기대가 무산되고 말았지만, 이 죄수는 죽음 너머에 영존할 어떤 것으로서의 메시야 왕국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당신의 나라에’라는 표현 중에 사용된 헬라어 전치사 ‘엔’은 ‘...안으로’(into) 혹은 ‘...와 관련하여’란 뜻으로 보아도 무방합니다. 즉 이 죄수는 예수 안에서 신적인 메시야상을 보았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초월적인 메시야 왕국의 도래와 ‘관련하여’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보았던 것입니다.

    ‘밈네스코’는 ‘좋은 것을 기억하라’는 뜻으로서 너그럽게 보아 주기를 요청하는 말입니다. 매우 겸허하고 소박한 요청이라고 할 수 있는데 특히 같이 죽어가는 사람에게 이같은 큰 희망을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은 예수의 왕권적 권위도 강조하지만 죄인의 믿음이 빛나듯 돋보이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놀라운 믿음의 통찰이야말로 43절에서 언급되는 예수의 약속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4)낙원의 약속을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43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자신에게 깊은 신뢰감과 믿음을 갖고 있는 죄수에게 예수는 분명하고 확신에 찬 어조로 자신과 함께 낙원(樂園)에 있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선언합니다. 여기서 언급된 ‘낙원’(파라데이소스)은 ‘공원’ ‘정원’의 뜻인 페르시아어 파르데스(pardes)에서 유래된 것인데 칠십인역(LXX)에서는 에덴동산을 표현 할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창 2:8). 그래서 여기서 언급된 낙원은 사 51:3에 나오는 미래적 에덴동산으로서 기쁨과 즐거움이 약속된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낙원이 의로운 사람이 사후에 잠시 안식을 취하는 중간적인 장소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참고로 신약 성경을 통해 살펴보면, 16:22-31과 고후 12;1-4은 죽은 의인들이 이미 낙원에서 주와 함께 거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그리고 계 2:7의 ‘낙원에 있는 생명 과실’은 부활 이후에 누리게 될 축복과 연관된다고 생각됩니다. 한편 ‘오늘’이라는 말은 구원의 즉각성과 현재적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 단어이며(2:11; 4:21; 5:26 참고), 죄인이 죽어가는 순간에 누리고 있는 믿음의 기쁨을 강조하고 그 기쁨이 죽음 이후에도 단절됨 없이 소유할 수 있는 것임을 확신시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III. 적용: 십자가의 사랑을 받은 자


    우리는 오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보여주신 두 가지 사랑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자신을 향해 조롱하는 자들을 용서하시며 성부하나님께 기도하시는 모습과 마지막 한편 강도가 회개하고 자신의 신앙을 고백할 때 그를 용서하시고 낙원을 약속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에게도 동일한 사랑을 베풀어주신 것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아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았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그리스도를 조롱하는 자였습니다만, 그리스도는 우리를 용서하시고 은혜를 주시어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허락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토록 주님과 함께 살 때까지 우리는 결코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를 위하여 날마다 십자가의 은혜를 기억해야합니다. 십자가에서 나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기억하고 그 은혜 가운데 살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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