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6.11(주일예배)
아브라함의 축복과 예배
창세기 12:1-9
I. 들어가는 말
이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축복을 받아 살기를 원합니다. 축복을 받기 위해서 저마다 신들을 찾아갑니다. 진자나 절간을 찾아 복을 비는 이들은 모두 축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축복은 인간이 빌어서 얻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셔야 받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축복받은 사람들 중에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이 축복받은 자의 대표자가 된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를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 약속하셨기 때문이고 아브라함은 이것을 그대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아브라함이 어떻게 축복을 받았는지 살피면서 우리도 동일한 복을 받아서 누리기를 원합니다.
II. 아브라함의 축복과 예배
1. 축복의 약속(1-3절)
(1)떠나라는 하나님의 명령(1절)
하나님의 이름으로서 ‘여호와’란 신(神)명칭을 본장에서 일관되게 사용하고 있는 것은 본서 기자가 계속해서 하나님의 구원 사역과 선택된 백성을 향한 그 분의 언약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증거 해줍니다(2:7).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일반 사람들도 들을 수 있는 말씀으로 아브람의 계시를 받았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이 아브람의 심령 속에 내적으로 임했는지 분명치 않습니다. 다만 ‘이르시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마르’의 의미가 대개 ‘말한다’, ‘이야기한다’란 점에 비추어볼 때 전자일 가능성이 큽니다.
“본토” 혹자(Calvin)는 이를 '우르'로 이해하고 아브람이 구체적 소명을 받은 것을 우르에 있을 때였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11:31). 그러나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후 떠난 곳이 '하란'인 점에 입각할 때(4절) 이는 하란 , 더 나아가 우르와 하란을 포함하는 메소포타미아 전지역을 가리키는 것임에 분명합니다.
“떠나 ....가라” 이것은 ‘누가 네 뒤에 남든지 상관 말고 너를 위하여 떠나라’ 는 의미입니다. 기독교 역사는 이러한 떠남과 분리의 역사인데 오늘날 우리 성도들 역시 죄악된 이 세상에서 분리되어 의와 거룩을 좇는 순례의 길을 떠나야 합니다(롬 12:2).
“내가 네게 지시할 땅” 직역하면 ‘내가 네게 보여 줄 그 땅’입니다. 여기서 ‘보여 줄’은 미래 미완료형으로 아직까지는 보여지지 않으나 미래에는 구체적으로 보여질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땅’은 아브람으로서는 불명확하나 하나님으로서는 이미 작정해 놓은 가나안 땅을 의미합니다.
(2)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2절)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Living Bible은 문두(文頭)에 ‘네가 그렇게 하면’(If you do)이란 말을 부기하고 있습니다. 한편 여기서 ‘큰 민족’ 이란 단순한 숫자적으로 인구가 많은 것 뿐 아니라 영적으로 위대한 민족을 가리키는바 곧 ‘이스라엘’에 적합한 명칭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이 그의 적은 수의 친척을 떠나기만 하면 (1절) 그 보상으로 오히려 큰 민족을 이루게 해주시리라고 보장하셨습니다.
“네게 복을 주어” 아직껏 무자(無子)한 아브람(11:30)이 많은 무리의 아비가 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수 있는 근거입니다. 실로 하나님께서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분이니 그분께서 원하시고 또한 복을 내려 주시기만 하신다면 인간적인 모든 제약은 사라지고 맙니다(롬 4:18).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를 직역하면 ‘내가 네 이름을 크게 할 것이다’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유명케 하여 그 이름이 길이 회자(膾炙)되게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역사 속에서 아브람의 이름은 위대하게 되었습니다. 즉 열국의 아비(17:4,5), 선지자(20:7), 하나님의 방백(23:6), 여호와의 종(시 105:5,6) 하나님의 벗(약 2:23) 등의 명칭을 부여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이름은 선민 이스라엘의 시조(始祖)로서, 또한 믿는 모든 성도들에게는 영원한 믿음의 조상으로서 길이 남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사람을 높이시는 이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이시니 겸손한 자는 높이 들림 받지만 무릇 스스로 높아지려는 자는 낮아지고 말 것이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이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헤예 베라카'는 곧 ‘너는 복이 될지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에 대하여는 다양한 견해가 제시됩니다. (1)아브라함으로 인한 물리적 풍요(슥8:12)를 의미합니다. (2)사람들이 상호 축복의 양식(樣式)이 된다는 뜻입니다. (3)여기서 복은 영적인 복으로서 곧 아브라함은 그로 말미암는 복의 기준이 되리라는 뜻입니다. 이상의 견해를 종합해 볼 때 물론 첫 번째와 두 번째 견해도 세 번째 견해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브라함으로 말미암는 영적 축복이란 단순한 아브라함 개인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궁긍적으로는 그의 가계(家系)에서 약속된 ‘여자의 후손’(3:15)인 메시야가 나리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과 영생은 누구든지 그를 믿기만 하면 미칠 수 있는 것이니(살후 2:13,14) 그 같은 메시아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가리켜 ‘복의 근원’이라 칭함은 당연합니다.
(3)모든 민족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라(3절)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 하리니” 하나님과 아브람과의 각별한 관계를 나타내는 이 말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상호 공수 맹약을 맺으시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제 아브람의 이웃은 아브람과의 관계에 따라 그들도 각각 하나님께 축복과 저주를 받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이 원리는 신약 시대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에도 적용됩니다.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여기서의 ‘저주’(칼랄)는 ‘감소시키다’, ‘낮게 여기다’는 뜻으로 곧 남을 멸시하거나 하찮게 여기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특별 맹약을 맺은 하나님의 종 아브람을 멸시여기는 행위는 곧 하나님을 업수히 여기는 행위가 된다는 뜻입니다.
“내가 저주하리니” 여기서의 ‘저주’(아라르)는 하나님의 법에 따른 공적 저주를 의미하는데 이에는 구체적이고도 직접적인 징계 조처와 형벌이 따르게 됩니다(삼상2:30,31,32,33).
“땅의 모든 족속이...얻을 것이니라” ‘복의 근원’(2절)에 대한 보충, 확대 설명입니다 (갈 3:8). 축복은 타락 결과 인간에게 주어진 저주(2:17;3:16,17,18,19)와는 정반대되는 것이니, 이러한 축복은 단순한 물질적 축복 뿐 아니라 죄를 사해 주는 영적 축복을 포함합니다. 즉 본질은 아브라함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구상의 모든 민족이 자신의 죄에 대하여 해결받고 진정한 삶의 축복을 누릴 수 있게 되리라는 복된 언약입니다(눅 24:47).
2. 믿음으로 떠나는 아브라함(4-6절)
(1)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간 아브라함(4절)
“여호와의 말씀” ‘말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다바르’는 ‘명령’을 의미합니다(27:19;왕상 12:12). 따라서 이는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행동의 절대 기준으로 삼았으며 말씀의 권위를 존중, 어김이 없었음을 나타내줍니다(22:1,2,3,4,5,6,7,8,9,10,11,12).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롯이 아브라함과 함께 메소포타미아를 떠난 사실이 거듭 언급되고 있는 까닭(11:31)은 그가 이후 아브라함과의 관계에서 많은 족적을 남겼기 때문입니다(13:1-13;14:13-16;19:1-28).
“아브라함이...그 나이 칠십오 세였더라” 아브라함의 향년이 일백 칠십 오세였으니(25:7) 이때는 그의 중년기입니다. 대개 중년기의 사람들은 현실에 안주하려 하며 변화를 기피하려는 것이 일반적인데, 갈 바를 알지 못하고서도 지체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본토 집을 나선 아브람에게서 우리는 진정한 용기와 신앙의 결단력을 보게 됩니다(마 4:18,19,20,21,22).
(2)믿음으로 가나안땅에 들어간 아브라함(5절)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는 연로한 부친 데라로 말미암아 뜻하지 아니하게 체류하게 되었던(11:31) 하란 거주 생활이 비교적 오래 지속되었음을 나타낸 줍니다. 한편 당시 아브람과 롯은 유목인이었으니(13:5) 그들의 모든 소유물은 대부분 가축이었을 것입니다(13:2).
“얻은 사람들”을 직역하면 ‘획득한 자들’입니다. 이들은 대족장 아브라함 집에 속한 남녀 종들과 그들의 자식을 가리킵니다. 일손이 부족한 아브람에게 많은 가축을 돌보기 위해서는 부득이 종들이 필요하였을 것입니다.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라는 말은 마치 아브람이 목적지를 알고서 길을 떠난 듯이 오해할 수 있는 구절입니다. 그러나 이는 11:31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결과 필연적으로 도달할 수밖에 없는 작정된 땅이 바로 가나안임을 일깨워 주는 구절일 뿐입니다<1절>.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하란에서 가나안까지는 약 480Km정도의 거리인데 당시의 여행로로 미루어 보아 아브람 일행은 유프라테스 강변을 따라 시리아에 도착, 그곳 광야를 횡단하여 다메섹에 이른 후 가나안으로 직진하였을 것입니다.
(3)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6)
“모레 상수리나무”(엘론 모레) ‘본다’는 뜻을 가진 ‘라아’로부터 파생된 ‘모레’는 종교적인 의미에서 ‘가르치는 자’를 뜻하는데 ‘예언자’로 번역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강하다’란 뜻을 가진 ‘울’로부터 파생된 ‘엘론’은 상수리나무처럼 재질(才質)이 강하며 병충해도 잘 견디는 나무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많은 학자들은 ‘모레 상수리나무’를 고대 이교도들이 신탁(oracle)을 받을 때 사용하던 ‘예언자의 나무’로 봅니다. 그러나 ‘마므레’와 같이(13:18) ‘모레’가 단순히 상수리나무 숲의 주인이름일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그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 아브람이 세겜에 정착하지 못하고 계속 벧엘과 남방으로 옮겨 가게 된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8,9절). ‘가나안 사람’은 함의 후예(10:6)로 우상숭배 행위에 탐닉하며 배타심이 강하던 족속이었으니 아브람이 그들 가운데서 생활하기란 무척 힘들었을 것입니다.
3.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아브라함(7-9)
(1)하나님께 단을 쌓은 아브라함(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나타나’('라아')라는 말은 ‘증명하다’, ‘보이다’는 뜻으로 아브람에 대한 하나님의 현현(theophany)이 꿈이나 환상이 아닌 눈으로 볼 수 있는 객관적인 실제로 이루어졌음을 증거 해줍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영이시므로(요 4:24) 눈에 보이는 것은 온전한 하나님 자체가 아니라 그분의 임재의 상징이거나 표시일 것입니다(17:22;18:1,2;출 3:2). 그러나 이것은 계시를 받는 자가 분명히 인지할 수 있다는 특징을 지닙니다.
“가라사대” 대개의 경우 하나님의 현현(顯現)에는 선포되는 말씀이 동반됩니다. 따라서 계시 수납자는 하나님을 직접 눈으로 보고 그분의 특별 계시를 귀로 들을 수 있습니다(33:24,25,26,27,28,29,30).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이것은 1절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입니다. 이로써 아브람은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섭리에 의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곳 가나안이 자신의 후손들에게 허락된 ‘약속의 땅’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훗날 이 약속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출애굽의 원동력이 되었으며(50:24; 출 3:15,16,17, 18,19,20) 또한 민족적 일체성을 유지하는 근본 동인이 되었습니다.
“여호와를 위하여...단을 쌓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제단을 쌓은 자로는 아브람 이전에 이미 노아가 있지만(8:20) 자신에게 현현하신 하나님을 기념하여 제단을 쌓는 자는 아브람이 처음입니다. 이로써 아브람은 장차 그의 후손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될 것에 대하여서도 함께 감사하였을 것인데 참된 신앙은 이처럼 보지 못하고 장래일에 대하여서도 믿고 감사할 줄 아는 것입니다(히 11:1,13).
(2)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아브라함(8-9)
1)예배드리는 아브라함(8절)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란 뜻으로, 아브람 당시의 본래 이름은 ‘루스’였으나 야곱에 의해 벧엘로 바뀌었습니다(창 28:16,17,18,19). 예루살렘 북방 약 19Km지점에 위치한 오늘날의 베이틴(Beitin)으로 좋은 샘들이 많아 고대로 부터 유목민들의 각광을 받던 곳입니다.
“아이”는 ‘황폐한 작은 산’이란 뜻으로, 벧엘 동남쪽 약 3Km지점에 위치한 가나안의 요새화 된 성읍입니다.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시 아간의 범죄로 일차 정복에 실패한 성읍이 바로 이 ‘아이’ 성입니다(수 7:1-26).
“여호와를 위하여...이름을 부르더니” 여기서 단을 쌓는 것은 하나님께 희생 제사를 드리는 것을 뜻하며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찬송과 기도가 있는 공(公) 예배를 드리는 것을 뜻합니다<4:26>. 즉 아브라함은 가나안 입성 후 처음으로 모든 식솔들을 불러 모아 하나님께 대한 공 예배를 드림으로써 자신의 가정에 예배 규례를 확립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아브람은 정처없이 유리하는 중에서도 하나님과의 교제를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을 향한 기도와 찬양은 성도가 멈추어서는 안 되는 영적 호흡인 것입니다.
2)점점 옮겨가는 아브라함(9절)
“점점...옮겨 갔더라” 이러한 이주 원인은 원주민과의 마찰 때문으로 추측되는데(6절) 얼마의 시간 동안에 얼마만큼 이동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가다가 장막을 치고, 다시 출발하곤 하는 일을 되풀이 하였을 것입니다.
아마도 아브라함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자신과 자신의 후손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는 시간이 되었을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할 때 더욱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III. 적용: 믿음으로 예배하는 삶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을 받고 그 축복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은 아브라함이 자신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을 믿고 나아갔으며, 하나님을 믿고 감사함으로 예배를 드린 결과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음으로 아브라함의 복에 참여되었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아브라함과 같이 복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 자신이 축복을 받은 사실에 대해서 때때로 의심하고 감사함으로 예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아브라함처럼 축복을 받는 삶을 살기 위하여 믿음으로 예배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그러면 믿음으로 예배하는 삶은 어떠한 것인지 묵상하기를 원합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신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할 때만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성경 전체에 걸쳐서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방식은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롬 5:8).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어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신 것입니다(요 3:16). 우리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는 누구나 하나님의 사랑을 직접 체험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고 확신할 때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릴 자를 찾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고 예배하는 것입니다.(요 4:23)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예배드릴 것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누구도 하나님 앞에 나아갈 자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함부로 나아가면 죽음을 당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구원받은 사실을 믿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자신의 죄를 깨끗하게 씻음 받았음을 고백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배드릴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고백하는 믿음이 없거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자신의 죄를 용서함 받은 확신이 없는 채 하나님께 예배드리려는 태도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는 하나님 앞에 축복을 받아 누리는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것은 우리의 정성을 다하는 예배가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예배드린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우리의 마음가짐과 복장을 바르게 하여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최상의 것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셋째, 감사함으로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실, 즉 영적인 축복을 받은 사실을 감사해야합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같이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할 운명이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았습니다. 우리는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토록 하나님과 영생복락을 누리며 살게 된 것입니다. 이것 한가지만으로도 우리는 감사가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감사의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우리에게 더욱 육체에 필요한 축복을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필요를 아시는 주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게 될 때 우리의 필요를 더하여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마 6:33). 우리가 그 약속을 믿고 감사함으로 예배하며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의 나라와 의가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면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우리의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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