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6.25(주일예배)
야곱의 기도와 축복
창세기 32:24-32
I. 들어가는 말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실 때 그에게 약속한 축복의 말씀이 이삭을 통하여 성취됨을 배웠습니다. 흉년의 때에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복을 주심으로 블레셋사람들보다 100배의 수확을 보았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리브가를 통하여 쌍둥이를 주셨습니다. 형의 이름은 에서이고 동생의 이름은 야곱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축복이 이삭을 통하여 야곱을 통하여 성취될 것을 약속하십니다.
리브가의 태중에서 아직 나지도 않았는데 하나님께서는 리브가에게 말씀하신 것은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는 것이었습니다. 형 에서가 동생 야곱을 섬기리라는 것입니다.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를 통하여 어릴 때부터 이 말을 들으며 자랐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장자가 되어야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야곱은 사냥을 갔다가 배고파서 돌아온 에서가 먹을 것을 요구할 때 팥죽을 내어놓으며 장자권을 팔 것을 요구합니다. 에서는 배고픔 때문에 장자권을 야곱에게 팔고 팥죽을 먹었습니다. 에서는 장자권을 업신여긴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장자권을 통하여 그 자손에게 이어집니다. 그런데 에서는 그 장자권을 무시한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싶어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축복을 빼앗어라도 자신의 것으로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하여 어머니 리브가가 만든 음식을 아버지 이삭에게 드리며 자신을 에서라고 속이고서 이삭으로부터 축복기도를 받았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을 이삭의 기도를 통하여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은 빼앗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것을 받아 누리는 것입니다.
야곱이 이삭을 속이고서 이삭의 축복기도를 받은 것은 자신이 받아야할 축복기도를 빼앗은 것으로 알았습니다. 에서는 전에 팥죽으로 자신의 장자권을 빼앗고 이제는 아버지의 축복기도마저 훔친 야곱을 증오합니다. 그래서 이삭이 죽기만 하면 야곱을 죽이기로 합니다. 이것을 안 리브가는 야곱을 자신의 오빠 라반의 집으로 보내기로 이삭과 상담하여 보냅니다. 잠시 동안이면 에서의 노여움이 사그라지고 그 후 다시 부를 것을 생각하면서 야곱을 보냅니다. 그러나 리브가는 그것으로 두 번 다시 야곱의 얼굴을 보지 못합니다.
밧단아람으로 가는 도중 야곱은 벧엘에서 꿈에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이심을 말씀하시면서 야곱에게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올 것이고 그때까지 야곱과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밧단아람으로 간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 동안 목동으로서 종살이합니다. 아내를 얻기 위하여 14년간, 그리고 자신의 재산을 위하여 6년간 일을 합니다. 아버지 이삭의 집에 있을 때는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목동으로서 일을 하면서 그는 훈련을 받습니다. 야곱은 라반의 집에서 일을 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빼앗아 얻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기다리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20동안 라반의 집에 머물며 수고하였어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복을 주셔야만 자신의 집을 이루게 될 것을 깨달았습니다. 라반이 야곱의 품삯을 열 번이나 변역하였기 때문에 야곱은 자신의 재산을 이루지 못함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복을 주시어 라반의 양과 염소 떼들 중에서 좋은 것을 야곱의 것으로 삼아주셨습니다.
20년 동안 라반의 집에서 목동으로 수고하던 야곱은 자신의 아내와 지식들을 데리고 그동안 모은 소유를 가지고 라반의 집을 떠나 그의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야곱이 ‘마하나임’이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의 사자들이 야곱을 만납니다. 야곱은 세일 당 에돔들에 있는 형 에서에게 사자를 보내어서 그동안 라반의 집에 있다가 이제 돌아왔다고 하면서 에서의 은혜를 구한다고 전합니다. 이때 야곱은 형 에서를 자신의 ‘주’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사자들이 가져온 소식은 야곱을 두렵게 합니다. 에서가 400명을 거느리고 야곱을 만나러 온다는 사실입니다. 야곱은 자신의 가족과 소유를 두 떼로 나누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에서의 손에서 자신과 가족을 건져주시기를 구합니다. 야곱은 가족을 전부 얍복강을 건너게 하고서 자신은 홀로 남아있을 때 하나님의 사람이 그에게 나타나 날이 새도록 씨름을 하게 됩니다.
II. 야곱의 기도와 축복
1. 어떤 사람과 씨름하는 야곱(24-25절)
(1)홀로 남은 야곱(24절)
야곱이 홀로 남아있을 때 어떤 사람이 야곱과 씨름을 합니다. 여기서 “어떤 사람”은 천사장 미가엘일 것이라는 견해도 있으나, 야곱은 그를 하나님이라 불렀고(30절) 선지자 호세아는 하나님과 천사를 교차하여 사용한 점(호 12:3,4)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사람은 단순한 천사(an angel)가 아니라 여호와의 천사(the Angel of the God)가 아니라 여호와의 사자로도 표기되는(22:11; 출 3:2; 삿 6:12) 성육신(成肉身)이전의 그리스도로 보는 것이 무난할 것입니다<창 16:7, 여호와의 사자>.
“씨름하다가”(네에바크)라는 말은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첫째, ‘먼지를 일으키다’란 뜻의 ‘아바크’에서 유래했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즉 땅에 먼지가 일어날 정도로 격렬하게 몸싸움을 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둘째, ‘단단히 붙잡다’, ‘껴안다’란 뜻의 ‘하바크’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즉 필사적인 싸움을 암시합니다. 여기서는 이 두 견해를 모두 수용할 수 있는데, 실제 씨름하듯 영육간의 모든 힘을 쏟아(눅 22:44) 눈물로 붙들고(호 12:4) 필사적으로 간구하는(마 26:39) 야곱의 기도 모습을 생생히 묘사해 줍니다.
(2)그 사람이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25절)
그 사람이 야곱과 씨름을 하면서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서 야곱의 환도뼈를 침으로 야곱의 환도뼈가 위골됩니다. “야곱을 이기지 못함”은 성도가 하나님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도, 즉 하나님의 은총을 받기 위해서는 오로지 기도밖에 없음을(시 91:15; 막 9:29; 눅 11:9) 역설(逆說)적으로 암시해 주는 말입니다.
“환도뼈”는 문자적으로 '엉덩이의 우묵한 구멍', 곧 넓적다리 부분의 움푹패인 곳을 가리킵니다. 원래 환도뼈는 둔부 아래쪽에 있는 좌골(坐骨)로 엉덩이의 골반을 형성하는 좌우 한 쌍의 뼈를 뜻합니다(24:2).
환도뼈는 사람의 몸을 받쳐주는 물리적 힘의 생성(生成)부분으로 종종 생명과 힘의 근원을 상징합니다(35:11; 46:26; 히 7:10). 따라서 하나님께서 야곱의 이 뼈를 치신 것은, (1)지금까지 육적 수단에 의지해 왔던 야곱을 완전히 꺾음으로써 이후로는 하나님만을 의지케 한 것이었으며, (2)또한 예표적으로는 장차 그의 허리에서 나올 이스라엘의 운명 역시 인간적 수단에 의지하게 될 때 이처럼 무력해 질 수 밖에 없다는 경고와 아울러 오직 그 허리를 치신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된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즉 이것은 바울의 고백처럼 ‘약할 때 강해진다’(고후 12:10)는 역설적 진리를 예표한 사건입니다.
2.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야곱(26-29절)
(1)축복을 요청하는 야곱(26절)
그 사람이 야곱에게 말합니다. “날이 새려 하니 나로 가게 하라.” 얼마든지 야곱을 뿌리치고 떠나실 수 있는 하나님께서 굳이 이렇게 요청한 이유에 대해서는 네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첫째는 아침이 되면 다른 사람들이 목격함으로써 헛된 호기심만 자극하기 때문이며, 둘째는 결사적인 기도로 얻어진 야곱의 승리를 확인시켜 주는 하나님의 애정어린 표현으로, 셋째는 야곱에게 새 날이 걸맞는 새 일(에서와 대면하여 사죄하는 일)이 있음을 암시하기 위해서, 넷째는 하나님을 보고 살 자가 없기 때문에 아침이 되기 전에 떠나시기 위함입니다(출 33:20).
야곱을 뿌리치고 가려는 그 사람에게 야곱은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 하겠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아니하면 이후로 자신의 생애가 어떻게 될지 불안했습니다. 야곱은 당장 에서가 자신을 만나러 오는 것이 복수를 위해서 오는 것으로 여겨졌기에 더욱 하나님의 축복은 간절한 것이었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않은 채 산다는 것은 불안한 장래를 자신의 힘으로 살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필사적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구했습니다.
(2)네 이름이 무엇이냐(27절)
축복을 구하는 야곱에게 그 사람이 질문합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히브리인에게 이름이란 한 존재의 속성과 전인격을 대표하는 것입니다(25장). 따라서 하나님의 이러한 질문은 야곱에게 새 이름을 주기 직전 교만과 사기 그리고 속임수로 점철된 옛 이름을(27:36) 고백시킴으로써 새 이름의 의미와 가치를 부각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이해되어집니다. 야곱은 자신의 부끄러운 이름을 고백합니다. “야곱이니이다.”
야곱은 단순히 하나님의 축복을 구하지만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전에 먼저 야곱의 인격의 변화를 요청합니다. 아니 진정한 축복은 먼저 인격이 변화되어야 함을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축복을 하실 때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남이 있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성령께서 성도안에 들어와서 그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거듭남과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야한다는 자기인식을 하게 하십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의 삶속에 개입하시고 그에게 축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축복을 요구하는 야곱에게는 먼저 속임과 교만의 이름을 버리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걸맞는 이름이 필요한 것입니다.
(3)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28절)
하나님의 사람은 야곱에게 새로운 이름을 줍니다.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그 삶과 신분과 인격에 극적인 변화가 주어졌음을 암시합니다. 특히 그 이름을 명명(命名)하는 자는 그 대상에 대한 소유권과 주도권을 가진 것으로 간주됩니다. 그러므로 이처럼 야곱의 이름이 바뀐 것은 인간적 실패의 이름이 영적 승리의 이름으로 축복받은 것을 뜻하며, 벧엘 언약(28:10-15)에 근거하여 야곱이 실질적 언약의 후계로서 하나님에 의해 정식 비준(比準)된 것을 의미합니다.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뀐 것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이스라엘’이란 ‘우세하다’, ‘싸우다’, ‘왕비’라는 뜻의 ‘사라’와 전능자이신 하나님의 의미하는 ‘엘’이 결합된 형태로서 ‘하나님이 통치하신다’(Kalisch)는 뜻도 있으나 대체로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긴 자’란 뜻으로 이해됩니다.
“겨루어”(사라)라는 말은 힘, 능력 등을 총동원하여 대치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인간으로서 동원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과 집념을 기울인 상태를 가리킵니다. 야곱이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말은 야곱의 기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그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그 기도에 승복하신 것을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원하시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때까지 끈질기게 계속하여 기도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예수님도 성도가 기도할 때 하나님이 들어주실 때까지 기도할 것을 가르치십니다. 과부가 불의한 재판관에게 간청하듯이 성도가 하나님께 간청하면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어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야곱이 하나님께 간청의 기도를 한 결과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변화된 신분으로서의 이름을 받게 된 것입니다.
(4)당신의 이름을 고하소서(29절)
야곱은 자신에게 새로운 이름을 준 사람이 하나님이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그분의 이름을 묻습니다. “당신의 이름을 고하소서.” 히브리인들이 생각하던 이름의 중요성(28절)에 비추어 볼 때 이 제의는 존재와 신분과 성품을 동시에 요구하는 복합적 요청입니다. 야곱은 자신에게 새 이름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밝혀주시기를 바랐는지 모릅니다.
그 사람은 야곱의 질문에 직접 대답하지 않습니다. “어찌 내 이름을 묻느냐” 이것은 ‘여호와의 사자’의 이름을 물은 마노아에게 주어졌던 것과 동일한 답변으로(삿 13:17,18)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첫째, 야곱이 이미 그 사자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음을 전제하여 더 이상 무엇을 알기 원하는냐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둘째, 또한 한계성을 지닌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다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롭고 놀라운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이름임을 시사하기 위한 것입니다. 어쨌든 야곱은 하나님의 이름을 알 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그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알고 믿고 자신에게 나타나셔서 새 이름을 주신 분이라 사실만으로 감사할 뿐입니다.
그 사람은 야곱에게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것을 피하고서 야곱에게 축복해줍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밝히시는 것을 피했지만 야곱이 이미 하나님의 존재를 알고 있기에 다만 그에게 축복해주심으로서 야곱이 자신을 만나주신 분이 하나님인줄로 믿게 하십니다.
3. 축복의 결과(30-32절)
(1)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30절)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서 그곳의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명명합니다. ‘브니엘’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얼굴’이란 뜻으로 뒤이어 나오는 말에서 설명하였듯이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교제하고 은혜를 체험한 사실을 기념하는 지명(地名)입니다.
야곱은 자신이 받은 은혜를 고백합니다.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생명이 보전되었다.” 야곱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서도 산 것을 감사하며 고백한 것입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죄로 오염된 인간은 그 누구도 하나님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고 살 자가 없습니다(출 34:20, 23; 딤전 6:16). 그러나 이 말은 제1위(位)되신 성부 하나님께만 적용되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사자(16:10)로도 표기되는 성육신 이전의 하나님, 즉 제2위(位)되신 성자 그리스도를 보았지만 하갈이나 야곱 그리고 기드온이나 마노아처럼 산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16:13; 삿 6:22; 13:21-23).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인간들에게 보이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요 1:14,18).
(2)절면서 걷는 야곱(31절)
야곱은 비록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받고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서는 사는 축복을 받았으나, 환도뼈의 위골로 다리를 절었습니다. “절었더라”(촐레아)라는 말은 ‘첼라’(절뚝거리다)의 분사형으로 계속해서 ‘절뚝거리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즉 이제 야곱의 몸에도 바울처럼 은혜의 흔적이 새겨진 것입니다(고후 12:7-10; 갈 6:17). 다시 말해서 이는 과거의 인간적인 자신 만만함과 교만을 깨쳐 버리고 베드로처럼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가야할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화시키는 은혜의 가시인 것입니다(요 21:18). 이제부터 야곱은 인간적인 생각과 방법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살아야함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성도는 자신의 방법을 포기하고서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아야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의 신분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바뀌어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야하기 때문입니다.
(3)이스라엘의 교훈(32절)
야곱의 환도뼈가 위골된 사건은 이스라엘 후손들에게 있어서 계속하여 지켜야할 교훈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환도뼈의 힘줄을 먹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도 히브리인들은 피처럼(9:4) 환도뼈의 큰 힘줄도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과의 접촉을 통하여 거룩히 바쳐진 것으로 믿기 때문에 먹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성경이 금하는 바가 아니나 히브리인들은 탈무드 등에 이 같은 규례를 두어 엄격히 지키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조상 야곱은 교훈을 생각하면서 인간적인 방법을 포기하며 살아야할 것입니다.
III. 적용: 기도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삶
오늘 우리는 야곱의 이야기를 통하여 하나님의 축복을 어떻게 받으며 진정한 축복이 무엇인지 배웠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하여 계속하여 기도하여야 하며, 하나님의 축복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름이 바뀌는 것이요 하나님 백성답게 살 수 있는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기도하여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면서 살아야할 지에 대하여 묵상합니다.
첫째,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들으실 줄 로 믿고 구하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축복을 약속해주셨고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그 축복을 받기만하면 됩니다. 문제는 우리그이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기로하신 축복을 받는 비결은 우리가 구하는 것은 다 들어주실 줄 믿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리라”(막 11:24).
둘째, 끝까지 기도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1-8절에서 예수님은 어떤 도시의 불의한 재판관에게 재판을 요청하는 과부의 이야기를 통하여, 불의한 재판관이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로 사람을 무시한 자였으나, 과부의 끈질긴 간청 때문에 번거로우므로 그 원한을 풀어줄 것을 말한 것을 말씀하시면서,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눅 18:7)고 말씀하시고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시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때까지 계속하여 기도함으로서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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