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말씀 - 설교

[스크랩] 하나님의 의가 나타남

kaporet 2009. 8. 14. 17:12

하나님의 의가 나타남

로마서3:19-31


본문의 배경


    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모른 채 죄를 지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자신들이 받은 할례와 율법을 자랑하며 이방인들을 판단해왔습니다. 그들은 이방인과 달리 할례를 받았고 율법을 가지고 있으므로 율법을 지키기만 하면 의인으로 판단되어 구원을 얻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의인은 하나도 없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킨다고 하지만 온전하게 지키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얻는 것은 율법을 지킴으로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의가 어떻게 나타나고 의롭다함을 얻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치고 있습니다. 


1. 율법의 역할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함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함”입니다. 여기서 “율법이 말하는바”는 앞의 10절에서 18절까지 인용 구절에서 말하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에서는 그 어느 누구도 제외될 수 없기 때문에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통치 영역하에 있는 모든 사람, 곧 온 세상을 지칭합니다. ‘모든 입을 막다’라는 말은 하나님의 법정적 선언 앞에서 최소한의 변호마저 내세울 수 없는 죄인의 상태를 묘사합니다. 율법이 모든 입을 막음으로 '온 세상'을 하나님의 심판아래 서게 합니다. 율법의 기능은 심판대 앞에 있는 피고들을 변호하거나 또는 죄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은 죄를 죄되게 하고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심판대 앞에 기소하는 일을 감당한다는 것입니다. 그 대상에는 예외가 없으며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를 동일한 심판대 앞에 서게 합니다. 창조물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이방인들이 일반 계시를 통하여 알 수 있었듯이 심판에 대한 계시를 인식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1:20, 32). 따라서 ‘온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으면서도 스스로 심판의 형벌을 해결할 수없는 전적으로 무능력한 상태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죄를 깨닫게 함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습니다.” ‘율법의 행위’는 순전한 양심에 의한 율법의 행위, 고도로 개선된 자연적인 율법 행위, 의식 율법의 행위, 도덕 율법의 행위 이 모두를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1:18-2:22와 본장 10-18절의 내용은 모두 도덕 율법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는 구약성경의 율법, 나아가서는 양심의 법, 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정의되어야 합니다. 육체는 죄와 대항하기에는 무능력하고 연약한 인간의 실존을 의미합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입니다. 율법은 행하여 의롭게 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으며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누구도 결코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요 7:9;갈 6:13). 그러면 제대로 지킬 수 없는 율법은 무엇 때문에 주어졌습니까?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갈 3:19). 율법은 인간의 죄를 낱낱이 고발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율법 앞에서 자신의 죄를 깨닫고 두려워 탄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이 죄인임을 깊이 깨달아야 하며, 그 깨달음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의를 옷입어야 합니다.


2.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의가 나타남


    “이제는 율법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습니다.” 율법으로 죄를 깨닫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율법과는 다른 차원에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십니다. 율법에도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으나 그것을 통해서 인간이 그 의를 옷 입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의 이외에 하나님의 의가 계시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한 의”는 어거스틴에 의하면, “중생의 은혜이며, 아무 자격이 없는 우리를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새롭게 하시고자 값없이 주신 은혜이고, 율법의 행위를 배제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는 인간의 타고난 도덕적 본능에 의해서 행하는 선행이나 심지어 신자들이 행할 수 있는 선행으로도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튼 '하나님의 의'는 이미 구약성경의 율법에 나타났던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의'로서 이제는 율법과 관계없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의는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입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구약성경 전체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구약성경에 대하여 어떤 때에는 단순히 '성경'이라고만 말씀하시기도 했으며(요 5:39), 또 다른 곳에서는 '율법과 선지자'(눅 16:16) 혹은 '모세와 선지자들'(눅 16:29,31)등으로 언급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구약성경과 상관없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의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를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편에서 시작한 믿음의 역사는 그리스도를 신뢰하며 영접하는 주관적인 고백에 의하여 믿는 자들의 실제적인 삶에 적용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롭다'라고 선언하는 법정적 판결은 ‘믿음을 통하여’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는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이며, 또한 신앙은 하나님의 사역에 의하여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지만, 믿는 자들의 삶 속에서는 능동적인 순종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에게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는 새로운 삶의 운동력이 되며 또한 새로운 삶을 주관하는 원리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로서 인류를 구속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신앙의 대상이십니다.

    하나님의 의는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아니라 ‘모든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의가 미치는 것입니다.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부패한 인류는 스스로 믿음을 가질 만한 능력도 가지지 못했고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없었습니다. 죄인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철저하게 먼저 부르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지하여 비로소 믿음을 얻게 됩니다. 인간은 믿음 때문에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조차도 인간의 공로나 업적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일 뿐이며 그 주시는 것 외에 그 어떠한 것도 더할 수 없습니다. 특히 ‘믿는 자’를 현재분사형으로 기록한 것은 현재적인 믿음의 구체적인 것들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과거의 것으로 유효한 것도 아니며 미래의 예정으로 유효한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현재 속에서 계속 믿고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율법이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심판 아래 두고 죄 있다고 기소하는데 차별을 두지 않듯이, 새로 나타난 한 ‘의’도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는데 어느 누구에게도 차별을 두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듯이, 모든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을 받는 '마음의 손'입니다. 따라서 그 손을 내미는 모든 자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동일한 것이며 값없이 주시는 선물입니다(24절).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하심을 얻음


    그런데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기 전의 사람들의 상태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는 것은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20절)는 말씀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죄인들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이것은 죄로 인해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부여해주신 영광스러운 지위를 상실한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형상과, 만물에 대한 지배권(창 1:28)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며,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영광, 존귀, 또는 칭찬을 받지 못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지 못하는 삶, 즉 하나님의 형상에 일치된 삶을 살지 못합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나눠질 완성된 영광을 지니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없는 상태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된” 것입니다. 인류의 구원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께 이루신 십자가 구속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이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없는 자들이 아무런 대가 없이(값없이)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값없이’란 말은 '구속'이란 말이 ‘속전을 지불하고 노예를 사는 것’과 관계되어 있기에 그리스도의 구속이 하나님의 은혜스러운 행위임이 부각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히 22절에서 ‘하나님의 의’가 ‘믿는 자’에게 효력이 있음을 볼 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다”는 말은, 의롭게 되는 것이 수동적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서만 이루어짐을 의미합니다. ‘의롭게 되는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지만, 그것은 율법의 행위와는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신 하나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습니다.” “그의 피”는 '생명'을 상징하는 것으로(레 17:11), 이는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위해 피를 흘리심은 자기 생명을 속전으로 바쳐 희생시키셨음을 의미합니다. “화목 제물”은 지성소에서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속죄뿐 아니라 백성과 하나님과의 화목을 위해 제사를 드린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일차적으로 '속죄'와 관련되어 있지만, 그 속죄의 결과는 인간과 하나님간의 ‘화목’의 의미를 동시에 지니는 것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일차적으로 '속죄'와 관련되어 있지만, 그 속죄의 결과는 인간과 하나님간의 '화목'으로 나아갑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세우신 것은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신 것'은 결코 하나님의 불의하심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알지 못하던 시대에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신 것'(행 17:30)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시기 위함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간과'(看過)는 죄인된 인간이 하나님의 인내로 말미암아 죄의 가리움을 받았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하려 하심


    하나님이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신 것은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하려 하심”입니다. 이때는 정해진 때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을 실현하시는 시기입니다. 하나님의 관용으로 인간의 죄를 간과하셨던 시기와 대조를 이루는 때로서 지금 믿는 자들에게 현재적인 칭의를 제공하는 때를 의미합니다.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심”은 인간의 죄를 간과하시는 것이 오해되어 하나님의 공의에 손상이 될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죄를 간과하시고 믿는 자들을 의롭다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독생자를 속죄 제물과 화목 제물로 삼으사 그에게 하나님의 공의에 따른 진노와 저주를 담당케 하신 사실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처사는 여전히 공의로우시며 그의 공의로운 처사를 따르는 자들도 의롭다고 인정되는 것입니다. “믿는 자를 의롭다하려 하심”은 하나님이 인간을 의롭다 하려하시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의 행악을 당장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오랜 세월 동안 간과하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시고, 또한 절대적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 속에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자기 안의 의로움을 인하여 참으시기도 하셨으며 또한 죄인의 의로움을 위하여 희생적 죽음을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었으므로 대속적 죽음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의가 전가(轉嫁)되는 사건 곧 의롭다고 간주하는 신분의 변화가 현재적인 시간 속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3.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음


    믿음으로 얻는 의


    그러므로 우리가 “자랑할 데가 어디 있습니까?” 인간이 의롭게 되는 모든 과정에서 인간 자신은 조금도 개입 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활동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는 존재입니다. 특히 바울은 여기서 율법을 받은 것을 자랑하는 유대인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우리가 의롭다함을 얻은 것은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입니다. 이 믿음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바 선물에 불과합니다(엡 2:8).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행위를 자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을 우리가 인정합니다.” 여기서 '우리'라는 것은 '예수를 믿는 자'를(26절) 의미하며 바울 자신을 포함한 모든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인정하노라'는 말은 '결론을 맺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에서 나온 말로, 바울이 성도들과 더불어 확실하게 결론을 맺은 두 가지는 첫째,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이며, 둘째,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할례자나, 무할례자나 누구든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사실입니다.


    믿는 자의 하나님이 되심

  

    하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뿐만 아니라 이방인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유대인은 하나님을 근동 지방의 다른 나라들과 같이 자기들만의 신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제사장 나라로서(출 19:6) 열국의 구속을 위해 살아야 할 의무를 무시했습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율법의 준행과 할례 제도의 시행이 그러한 자신들의 신앙이 옳은 것임을 나타낸다고 확신했습니다. 바울은 이처럼 유대인의 잘못된 신앙관을 비판함으로써 유대인들이 섬겼던 하나님을 이방인들이 믿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무시했던 것을 고려하면 바울이 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매우 충격적인 발언이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이름조차도 감히 부르지 않았던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을 이방 민족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신성 모독과 같이 무거운 범죄에 해당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오히려 유대인의 교만을 책망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방인의 하나님되심을 바울 자신의 개인적인 소신이 아니라 이미 구약의 선지자들에 의하여 예언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족장 시대에는 이방인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를 발견할 수 없으나(창 12:2;18:18) 시내산 계약 이후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선별 의식과 하나님의 유일한 백성이라는 민족의식에 의하여 배타 의식은 강화 되었습니다. 특히 헬라 시대에 들어와서 이방인에 대한 유대인들의 태도는 더욱 배타적이어서 '이방인'이라는 말 자체가 경멸적인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된 예언서에서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찾으며(사 11:10) 참 이스라엘의 영광을 높이는 자로서(사 60:5, 6) 묘사되었으며, 그들의 구원은 메시야가 오셔서 참 된 빛이 되시고 세상을 구원하실 때에 이루어질 것이고(사 42:6;49:6) 그때에 그들은 하나님을 예배할 것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말 1:11).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하여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에 동참한 이방인(갈 3;14)은 참된 이스라엘이 되었으며 또한 영적 아브라함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예배하는 백성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할례자도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유대인이 율법과 할례를 통해서 의롭게 되지 못한 것처럼, 이방인도 하나님을 통하지 않고는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에게 이신 칭의를 베푸시는 하나님은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할 수 없습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웁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을 사람이 없고(20절), 율법 외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고(21절), 믿음의 법(27절)을 율법과 배치되는 원리로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유대인에게 직접 주신 그 율법이 아무 쓸모없다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으며, 구약성경의 하나님과 현재 바울이 주장하는 하나님간의 단절이 생각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단절의 반론을 잠재우기 위해 바울은 신약과 율법이 서로 배치되지 않음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율법을 굳게 세운다고 말합니다. 굳게 세운다는 말은 굳게 지킨다는 의미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받았으나 율법을 굳게 지킬 수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유대인들은 율법의 원리에 따라 살지 못함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율법과 선지자들에 의해 증거된 하나님의 의를 믿는 사람은 그 의를 받게 되어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됩니다. 이러한 사람이야말로 구약성경에 증거된 율법의 원리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원리에 따라 사는 것은 율법의 증거를 더욱 확실하게 보증하며 율법이 지향하는 목적을 남김없이 성취하는 것입니다.


4. 적용: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삶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로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나타내신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도록 살아야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므로 끊임없이 은혜를 구하면서 나아가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기에 힘써야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경건의 생활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골방기도를 통하여 주님과의 교제를 힘쓰며 주님께서 공급해주시는 힘으로 말씀에 순종하기를 힘써 나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거룩한 삶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것을 사도바울은 로마서 12:1-2에서 우리의 삶속의 거룩한 삶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제사로 드리는 영적 예배라고 말씀합니다. 즉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 사람들과 같은 모습으로 살지 말며, 우리의 심령이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새로워져서 거룩한 삶을 살며,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삶이란 하나님의 의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삶입니다. 믿음으로 우리의 영적인 삶이 날마다 강건해지는 거룩한 삶을 통하여 우리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나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나는 사람들마다 나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는 삶입니다.

출처 : 센다바중앙교회
글쓴이 : kaporet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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