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말씀 - 설교

[스크랩] 구원받은 성도의 자세

kaporet 2009. 8. 28. 12:27

구원받은 성도의 자세

로마서 5:1-11

2009.8.23(주일예배)


    성경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말씀합니다(엡 2:8).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아름다운 선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치른 대가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성도가 구원받은 사건에 대하여 로마서 4장 25절에서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게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고 선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으시도록 내어주셨고,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부활케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다시 한 번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성도는 아브라함과 동일한 상속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자신이 받은 구원이 얼마나 귀중한지를 깨닫고 구원받은 성도로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에 대하여 좀 더 깊이 묵상해야할 것입니다.


1.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삶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려야합니다”(1절). 우리가 구원받은 일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음을 갖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불가능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으로 ‘믿음’을 향하도록 하는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믿음’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믿음’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며,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믿음은 구체적으로 ‘순종’으로서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믿을 때에 하나님 앞에 ‘순종’하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백성들이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은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은 모두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고 원수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며 살아야하는 신세였습니다. 언제 어느 때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까 두려워 떨며 살던 존재였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화평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인간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하나님과의 화평의 길이 열렸습니다. 두려워 떨며 감히 가까이 할 수 없었던 하나님을 이제는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것”입니다.

    죄인된 인간과 의로우신 하나님 간에 화평의 관계를 맺게 해주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여기서 ‘화평’(에이레네)이란 말은, 죄인된 인간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으나(1:18;2:5),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진노의 문제가 해결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성도의 하나님과의 화평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피로 이루셨고’(골 1:20), ‘예수 그리스도는 믿는 자의 화평이 되십니다.’(엡 2:14) 그 결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가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성도가 하나님과 원수된 관계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사랑하는 호의적 관계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는 하나님과의 우호적 관계라는 사실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샘물처럼 끊임없이 흐르는 하나님의 평화를 내적으로 누리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인하여 그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인하여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구해야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다가 가까워졌다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더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서 애써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듣는 훈련에 익숙해져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듣는 훈련은 매일의 성경읽기와 기도생활로서 가능합니다. 그러한 영적 훈련이 반복되어지면 우리는 보다 더 하나님의 말씀을 잘들을 수 있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자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게 될 때에,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는 은혜를 얻은 것을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합니다. 성도가 ‘믿음으로 서 있게’ 되는 것은 오직 성령의 사역에 의한 것이며 ‘은혜에 들어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시고 약속하신 그 은혜 속으로 우리가 스스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들어감을 얻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를 구주로 믿고 그의 자녀가 되었으며 그분에 의해 존귀하심과 영광중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인도함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께서 온 우주의 통치자이심을 인정하고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사역과 섭리를 바라보며 그분의 모든 사역을 통하여 나타내시는 그분의 영광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분의 영광을 바라볼 때 그 영광을 인하여 즐거워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하나님께서 지으신 자연을 보고 감탄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아름다운 산과 강과, 하늘과 바다를 보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솜씨를 감탄하면서 그 영광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그 영광을 즐거워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것은 그러한 자연을 보면서도 가능하지만, 우리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와 같이 미천한 존재를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것을 느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합니다. 때로는 우리의 삶 속에 어려움이 있어도 하나님을 인하여 즐거워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혜를 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은혜를 얻었으니 우리의 환경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즐거워합니다. ‘즐거워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소망 가운데 있는 성도의 내적인 변화입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하며 즐거워하는 까닭은,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은 곧 성도들의 영광이 된다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며(요 14:3; 17:24),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며 성도들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구원 계획이 완성될 것이기 때문입니다(히 2:10;벧전 5:4).


2.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는 삶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자


    따라서 사도바울은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 들어간 것을 인하여, 비록 우리의 삶이 환난으로 인하여 어려움이 있어도 즐거워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환난’은 포도즙 틀에서 포도즙을 짜내듯이 피와 땀과 눈물과 고통을 ‘짜낸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즐거워하다’는 말은 '기뻐 날뛰다',  '자랑하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가게 된 즐거움이 복음으로 인해 받게 되는 핍박과 환난보다 훨씬 큼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괴로움과 슬픔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환난을 극복하며 오히려 즐거움 가운데 힘차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세상의 즐거움과 고통은 잠깐 피었다 사라지는 안개처럼 가변적이요 일시적인 반면,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는 즐거움과 기쁨은 불변하며 영원하기 때문입니다(고후 4:18). 더더욱 성도는 주님께서 약속하신 바, 영원한 세계에 대한 소망이 지대하고 극명하기 때문에(요 14:1-3) 현재의 모든 고난을 즐거움 가운데 상쇄시킬 수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고백한 것처럼 극심한 환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인하여 즐거워하며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합 3:17-18). 성경에 나타나는 믿음의 사람들을 보면 그들은 자신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을 봅니다. 특별히 다윗은 많은 환난 속에서도 주를 찬양하며 하나님을 즐거워하였습니다(시 13:5; 시 71:23).


    환난 중에도 즐거워해야할 이유


    성도들이 환난 중에도 즐거워해야할 이유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게 되는데 이때 인내가 요구됩니다(마 13:20-22). ‘인내’는 ‘최후까지 남다’, ‘참다’, ‘기다리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성도들이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 때 극심한 핍박과 고난이 임하나 이 모든 환난에서 성령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참고 견디며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게 됩니다. 여기서 성도의 인내는 성령의 사역의 결과로 주어지는 수동적 의미뿐만 아니라, 성도의 성품과 인격에서 우러나오는 자발적인 의미까지 함축합니다. 우리가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환난을 통하여 인내를 배우고 영적으로 성숙되었을 때 비로소 자신의 삶이 행복하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인내를 배우고 나면 그 인내를 통하여 연단을 이룹니다. 마치 용광로에서 금이 여러번 단련됨으로써 정금과 순금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성도는 여러 가지 시험과 환난을 참고 견딤으로써 그 자신이 정화됩니다. 여기에는 성령의 사역이 함께하며 이 믿음의 시련을 통과한 성도는 금보다 더 귀한 신앙인으로 증명됩니다(벧전 1:7). 성도는 이 땅에서 비록 환난을 당하여 힘들지만 주님이 계시는 그곳에서 주님과 함께 더불어 사는 그날이 기다려집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의 삶도 즐거워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날의 영광은 지금의 고난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기 때문입니다(롬 8:18). 그러면서 마음속에 소망이 생깁니다. 성도는 불 시험과 같은 연단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을 받으며 이러한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부활에 대한 소망이 구체화되고, 그 소망만을 붙잡게 됩니다. 환난을 통하여 인내를, 인내를 통하여 연단을, 연단을 통하여 소망을 이루는 것을 아는 것은 영적 체험을 통해 얻어지는 지식이며, 체험을 통해 획득한 영적 지식은 부단히 계속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는 소망은 부단한 영적 지식을 통해 성도의 삶 속에 확고하게 자리잡게 됩니다.


3. 소망을 품는 삶


    소망을 품는 이유


    우리가 이 땅에서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을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성령을 부어주시는데, 그때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성도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보증해 주시는 분이시기에 신앙의 모든 과정에 함께 계시고 보증하신 그 약속이 이루어지게 하십니다. 그런데 성령은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시지만,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가까이 할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하나님께로 갈 수 없는 것입니다(요 14:6).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시므로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확증되기 때문에 우리가 실망치 않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실 상을 기대하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환난가운데서도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반드시 우리에게 상 주신다는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계심은 하나님의 사랑이 성도를 향해 물 붓듯이 부어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이 액체처럼 쏟아 부어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은 충분히 넘치게 부어졌을 뿐만 아니라 모이는 물처럼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성도들에게 베풀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절정에 이른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증거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은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입니다. ‘연약할 때에’는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때’를 가리킵니다(엡2:3). 이것은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우리가 스스로 구원의 길을 찾을 수 있는 힘이나 소망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특히 ‘우리가 아직 연약하다’는 것은 우리가 전혀 구원의 소망이나 그 길을 찾을 하등의 힘이 없었음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구체화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代贖)의 은혜를 받을만한 자격과 가치가 전혀 없었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연약한 때에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기약대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일찍이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언된 바이거니와(사 7:14; 53:2),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예정하신 계획에 따라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약대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때가 가장 ‘적절한 시기’ 즉 ‘인류에게 가장 소망이 없던 때’였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경건치 않은 자는 8절의 죄인과 같은 의미로서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없이 사는 불경건한 자들의 구원을 위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죽는 자는 혹 있습니다. 의롭고 선한 사람을 위해 극히 드물기는 하지만 가끔 죽는 사람이 존재합니다. 즉 인간 세상에서 위대한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사람이 가끔 출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롭거나 선한 사람을 위해 죽는 희생적 행위자체도 죄인을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에는 결코 견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절대적이며,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에는 너무나도 무가치하고 자격이 없는 모습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신 것입니다”(롬 5:8). 여기서 ‘죄인’은 도덕적으로 의롭거나 선하지 않은 사람일 뿐만 아니라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시작된 인간의 전적 타락성과 부패성으로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든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그리스도 안에 내재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따라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우리 죄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의 확증인 것입니다. 그 누가 죄인을 위해서 자신의 아들을 대신 죽게 하는 자리에 내어 놓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으심은 ‘하나님 자신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랑을 확증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확증하셨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은 과거의 단 일회적 사건으로 끝이 났으나,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에도 끊임없이 부어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사랑을 체험한 사람들은 사도들을 비롯하여 믿음의 선진들이 모두다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고 주님을 따른 것입니다.


4. 화목된 자로서의 삶


    하나님과 화목된 자로서의 살아야함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9절) 그리스도의 보혈에는 대속적 능력이 있어 죄인들을 의롭게 하는 근원이 될 뿐 만 아니라 한번 의롭다 함을 얻은 자들을 계속 다스리시고 역사하시는 권세와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었으며 이후에도 그리스도의 피의 권세와 능력의 작용을 받아 계속하여 성화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인한 진노하심에서의 구원이 의롭다함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은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된 것”입니다(10절).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 있을 때에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있던  것입니다. 여기서 ‘원수’에 대한 개념은 ‘하나님을 향해 적개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는 능동적 의미와 ‘하나님이 원수로 여기는 사람’이라는 수동적 의미가 있습니다. 즉 인간이 하나님께 대해 범죄함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된 것이고, 범죄한 인간의 죄에 대해서 하나님이 공의로 심판하시고 진노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우리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된 인간과 진노하시는 하나님 사이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는 “화목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죄의 상태에 머무르는 자에게는 진노의 채찍을 내리시나, 의롭다 칭함을 받은 자에게는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에 들어갈 수 있도록 은혜를 내리십니다. 

    그러므로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10절 하반절)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목된 것처럼,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죽음보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죄인된 인간의 구원과 화목에 있어 더욱 확실한 보증이 됩니다. 그 이유는 그의 부활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를 따르는 무리에게 부활을 확증시켜 주셨으며,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이 그를 믿는 성도들에게 공급되므로 성도는 그 생명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고 하나님의 후사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함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는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합니다.”(11절)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화목은 죄사함의 결과 즉 ‘칭의’를 말하며 ‘진노하심에서의 구원’을 말합니다. 즉 우리의 화목은 구원받은 결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됨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모든 과정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구속(救贖)의 은혜를 입은 자들의 즐거움입니다.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자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지심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었으며 영생을 소유하게 되었으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둘째로, 영원한 소망을 바라는 즐거움입니다. 우리에게는 장차 하나님과 그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 소망이 있기에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참된 즐거움입니다. 현재 이 세상에서 우리가 누리는 즐거움은 일시적이요 가변적이며 또한 거짓되고 기만적이나, 하나님과 함께 하는 즐거움은 영원한 즐거움이요 보증이 있는 즐거움이기에 참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는 것은 날마다 구원받은 것을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사실을 기억할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나타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감사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더욱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며 사는 것입니다. 어떤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며 살게 될 때 우리는 항상 하나님 한분만으로 즐거워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시고 새생명을 주시며, 날마다 우리에게 사랑의 확신을 주시므로,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하나님 한분만으로 즐기게 됩니다.

출처 : 센다바중앙교회
글쓴이 : kaporet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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