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를 믿는 자의 축복 로마서 4:16-25 2009.8.16(주일예배) 성경은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을 행함으로 하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것을 가르치면서 이제 구체적으로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을 소개합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입니다. 그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고 믿음의 조상으로 불렸습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을 말하면서, 성경은 우리에게 일하지 않고도 의로 여기심을 받는 자의 복에 대해서 가르칩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여기심을 받고 하나님의 주신 기업을 받은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그의 후손들 동일하게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이제 그 축복이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었다고 가르칩니다. 1. 믿음으로 후사가 된 아브라함 모든 자의 조상이 된 아브라함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입니다.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입니다.”(16절) ‘후사가 되리라’는 약속은 은혜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취되었습니다. ‘믿음으로’라는 말은 구약에 약속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믿음은 약속이 내용이며 동시에 약속 그 자체입니다. 따라서 믿음은 약속이 성취된 곳에 나타나는 결과이며 동시에 약속이 하나님에 의하여 성취되었음을 나타내는 증거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다시 말해서 약속이 은혜로 말미암아 성취되도록 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보다 강조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은혜’라는 개념입니다. 믿음에 의하여 은혜가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은혜에 의하여 믿음이 좌우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믿는 자로 하여금 믿음의 의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신앙의 확실성을 갖게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궁극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영광과 신실하심을 선포하심으로써 믿는 자들의 의를 성취하도록 하는 방편이며, 또한 궁극적인 의의 보증입니다. 율법은 진노를 이루는 것이기에 율법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약속이 보증될 수 없습니다(15절). 하나님의 약속이 보증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만이 유효하며, 이 하나님의 은혜는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따라서 믿음과 하나님의 은혜만이 하나님의 약속을 확증하고 보증해 줍니다. 바울은 ‘그 모든 후손’이 누구인지를 설명하기를 ‘율법에 속한 자’와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라고 했습니다. 통상적으로 ‘율법에 속한 자’는 단순히 유대인을 총칭하는 의미로 사용됩니다(14절). 그러나 전반부에 언급된 ‘그 모든 후손’ 곧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약속을 보증받은 ‘그 모든 후손’에는 분명히 '믿지 않는 유대인'은 배제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율법에 속한 자’는 율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원리를 따르는 '유대인'을 의미하며, 그리고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는 믿음의 원리를 따르는 '이방인'을 가리킵니다(12절).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기”때문입니다. 바울이 ‘우리’라고 표현한 것은 믿음 안에 있는 ‘신앙의 공동체’에 대한 것입니다. 이 신앙의 공동체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별없이 오직 믿음의 원리를 따르는 모든 족속이 포함됩니다. 지금 바울이 논하고 있는 것은 혈통적인 조상이 아니라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 대한 것입니다. 14절에서 바울은 혈통적으로만 '율법에 속한 자들'은 후사가 될 수 없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실 수 있는 후사는 믿음의 원리를 따르는 자들뿐입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부르신 하나님 아브라함은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는 창세기 17:5의 말씀처럼 혈통과 관계없이 모든 사람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17절) ‘많은 민족’은 문자적으로 ‘혈연 공동체’이면서 동시에 영적으로 ‘믿음의 원리를 좇는 모든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모든 믿는 자들의 새로운 공동체’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둔 이유로 인하여 아브라함의 후사에게 주어진 특권과 유익을 함께 소유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모든 사람의 조상이 됨으로 말미암아 인종적 보편성이 성취되었습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우심을 받았다는 표현은 ‘무할례자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라는 표현과 ‘할례자의 조상’이란 표현을 포괄하는 보다 광범위한 표현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들이 차별없는 동등한 부르심을 받았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세계 도처의 모든 민족들이 아브라함의 믿음의 자취를 따름으로 후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십니다.”(17절) 아브라함이 믿었던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으로서 그분은 모든 사람들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모든 자의 조상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을 모든 사람의 조상으로 삼으신 하나님, 곧 예수님을 죽인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은 살아 역동하는 하나님의 속성을 말해주며 또한 생명을 부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고 있습니다(엡 1:20). 여기서 그 의미는 이삭의 출생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입니다. 바울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자식을 낳지 못하는 상태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후손에 대한 약속을 저버리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끝가지 기다렸던 역사적 사건을 상기하면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유추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출생을 기다리며 장차 있을 메시야의 세계와 그의 승리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이’라는 표현은 유대인들이 흔히 부르는 하나님에 대한 일반적인 표현이었으나, 바울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모든 믿는 자들에게 적용함으로써(24절)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과 또한 그것을 믿는 자들을 의로 여기신다는 진리를 동시에 증거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십니다. 이는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창조주로서의 특성을 묘사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 수 있는 분이시며(마 3:9;눅 3:8) 그 어떠한 인간의 공로나 반항에도 구애받지 아니하시고 택하신 자들을 부르시는 절대 주권의 능력을 행사하는 분이십니다. 그분 앞에서는 아브라함의 늙은 육체도 문제가 되지 않으며 죄인의 추함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무엇인가 될 수 있는 것 같은 가능성 속에서 역사하지 아니하시고, 그의 미리 정하신 작정과 통치 속에서 결정해 놓으신 것들을 성취해 나아가십니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후손을 바라보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언약이 성취될 것을 확신하였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결정하시고 약속하신 것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을지라도 성취된 것으로 인정하였던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확신이 아브라함의 믿음이요 우리 성도들에게 요구되는 믿음입니다. 2. 아브라함의 믿음 바랄 수 없는 중에 믿은 아브라함 그러면 아브라함은 어떤 믿음을 소유하였습니까?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하심을 인함입니다.”(18절) 아브라함은 인간적인 차원에서 자기 아내 사라가 잉태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 앞에 자기의 상속자는 자기의 종인 엘리에셀이 될 것이라고 고했습니다(창 15:2).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번성케 하실 것을(창 15:5)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바랐기 때문에 소망이 성취된 뒤에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20절). 그는 믿고 바라는 모든 것의 근원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과학에 있어서 사실에 대한 ‘확신’은 과학자가 세워 놓은 가설을 추론(推論)하여 밝혀진 사실 또는 추론에 의해 세워진 가설에 대한 ‘확신’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신앙은 전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으로 믿고 바라는 것이며, 보다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전능성과 약속의 신실성을 믿고 바라는 것이기에 전제된 가설을 추론하여 믿는 과학적 확신과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아브라함은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였습니다.”(19절) ‘죽은 것 같음’이란 말은 아브라함에게는 이미 생식 능력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17절에서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라는 말씀이 ‘이미 생식 능력을 상실한 아브라함과 사라의 생식 능력을 회복시키시고’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24절의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라는 구절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사건은 사라의 태(胎)가 생산 능력이 없는데서 생산의 능력을 갖추게 된 사실과 영적으로 일맥상통합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생산 능력이 없는 사라가 그의 후손을 생산하게 된 것이나 죽었던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셔서 '생명을 주는 영'(고전 15:45)으로서 잠자는 자의 첫열매가 되신 것은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믿음에 견고해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아브라함 아브라함은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습니다.”(20-21절)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아니한 행위는 개인의 능동적인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의심치 않았다'는 것은 소망에 근거해서 믿음으로 살았기에 갈등할 수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믿음에 견고하여져서”는 문자적으로 ‘믿음으로 강하여져서’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즉 ‘믿음’이 ‘강하여지게 되는’ 수단이 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강하여져서’라는 말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강하게 붙들었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그런데 창 15장에 언급된 하나님의 약속을 아브라함이 끝까지 변함없이 믿었다는 사실이 창 17:17의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 세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라는 말씀에 의해 도전받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이와 같이 분명하게 의심을 나타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서 바울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강하여져서’라고 진술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이 의심을 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방법’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즉 그의 자손이 수없이 많아지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이고, 그 약속은 문자적으로 사라의 몸종인 하갈을 통해서가 아니라 사라를 통해서만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비록 하갈은 사라의 몸종이었지만 하갈의 자식은 바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 고하기를 하갈의 아들인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창 17:18)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창 15장에서 말씀하셨던 그 약속을 재차 창 17:19-21에서 말씀하심은 아브라함의 약해진 믿음을 다시 확고히 해주기 위함이 아니라 사라의 태에서 난 자만이 그 약속을 성취시킬 것이라는 점을 아브라함에게 못박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은 믿음으로 할례를 행한 것을 말합니다. 즉 창 17:19-21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재보증받은 아브라함은 곧바로 하나님께서 이전에 명하신 할례 의식을 행했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방법에 대해 확고히 믿게 되었음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약속하신 그것”의 구체적인 내용은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리라”(17절)는 것과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18절)고한 것입니다. 이 약속은 아브라함의 소망과 확신에 의하여 얻어낸 보증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보여 주신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하심에 근거합니다. 아브라함의 확신보다 더 확실한 것은 그분의 약속입니다. 왜냐하면 약속은 하나님 자신의 전능성과 신실성을 나타내신 목적있는 작정이기 때문입니다.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다”는 말은 ‘능치 못할 것이 없는 여호와 하나님’ (창 18:14)에 대한 확신이며 또한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라’(창 18:19)는 말씀에 대한 확신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습니다.”(22절)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확신하고 하나님께서 모든 약속을 성취할 것을 믿고 확신하였으므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의로 여기신 것입니다. 3.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받는 복 그리스도를 믿는 자의 복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입니다”(23-24절)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원리는 아브라함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의 후손 모두에게도 적용됩니다(15:4; 시 102:18). 이러한 바울의 진술은 “당신이 주장하는 것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만 적용되며 모세 이후부터는 율법만이 적용될 뿐이다”라고 주장하는 유대인들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믿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본절은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손길이 열려 있음을 시사하고 있으며, 이는 유대인의 특권을 부인하고 있는 23절의 '아브라함만을 위한 것이 아니요'라는 내용과 호응을 이룹니다. 여기서 바울은 자신의 논리를 ‘믿음의 내용’으로 옮기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화제를 끌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자기가 언급했던 하나님의 약속이 최종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고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 하나님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은 동일한 분이심을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결국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것을 믿는 것과 신약 시대에 성도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내용상 동일한 것입니다. 다만 아브라함의 믿음은 실현될 ‘약속’에 대한 것인 반면, 신약 시대 성도의 믿음은 성취된 ‘약속’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성도들이 아브라함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축복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는 우리 범죄함를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습니다.”(25절)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내어 줌이 되었다는 것은 우리 죄를 위한 대속적(代贖的)인 죽음을 의미하며, 우리를 위하여 살아나심은 대속의 결과인 ‘의’를 보증하고 선포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24절에서 믿음의 내용으로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 살리신’ 것을 믿는 성도들에게 다시 적용시키는 것입니다. 바울이 예수의 대속적 죽으심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은 것은 사 53:1-9과 같이 구약 시대에서 메시야의 고난에 대한 내용이 언급되어 있어 유대인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사건이 논리적으로 설명되고 증명되어질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방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 대해 구약 성경을 인용하면서까지 굳이 증명을 시도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내용이 지니고 있는 하나님의 비밀을 밝혀내는 것이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을 위해 더 유익한 것으로 판단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우리의 범죄함 때문에 대신 죽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으로 그 죄가 소멸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이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주시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의롭다고 인정된 것처럼 우리들도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신 것입니다. 3. 적용: 그리스도를 믿는 축복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롭다하심을 얻고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는 언약을 받은 것처럼, 오늘날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도 아브라함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약속에 참여합니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이 가졌던 믿음으로 우리도 동일하게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만 신뢰하는 믿음을 가지면 우리의 환경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환경이 비록 죽은 것 같더라도 하나님께서 그곳에 생명을 불어넣어주시고 문제를 해결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문제를 보지 않고 문제의 배후에 계신 하나님을 보았듯이 우리가 말씀으로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보게 되면 우리의 문제는 순식간에 해결됩니다. 다만 우리의 믿음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 하게 될 때까지 시간을 걸리겠지만,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성령으로 살게 될 것이고 성령의 은사를 받을 것이며, 성령의 열매를 맺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될 것입니다. 또한 장래의 하나님나라의 삶이 우리에게 보장됩니다. 아브라함이 소망했던 영원한 나라에서의 삶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갖도록 이 땅에 있을 동안에도 영적으로 하나님나라의 맛을 보게 하십니다. 롬 14:17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예수님)과의 교제를 통하여 성령으로 말미암아 날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의와 평강과 희락을 맛보며 살게 된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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