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말씀 - 설교

[스크랩]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

kaporet 2009. 9. 25. 16:44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

로마서 7:14-25

2009.9.6(주일예배)


    하나님은 은혜로 성도를 부르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법인 율법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는 하나님 백성으로 하여금 생명을 얻도록 거룩한 삶을 살도록 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을 의지하며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하나님께는 산자로 여기며 사는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죄에 대하여 승리하는 삶을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악성으로 율법은 오히려 거룩한 삶을 살도록 도와주기보다는 죄를 짓도록 도와주는 것처럼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도 우리는 아직도 육체의 연약함에 있기 때문에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말은 하면서도 여전히 죄의 유혹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율법이 죄를 짓는데 돕는 역할을 하는 것처럼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은 선하지만 죄가 틈을 타서 우리로 죄를 짓게 함으로 죄가 죄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1. 육신에 속한 자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린 자


    사도바울은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다”고 고백합니다(14절). ‘율법이 신령하다’는 것은 율법의 기원이 하나님께로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신령하다’는 말은 신약성경에서 ‘세상적이고 육적인’것과 대조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고전 2:13, 15; 3:1; 10:3, 4; 12:1; 15:44; 엡 5:19; 골 1:9; 벧전 2:5). 그러나 율법이 비록 신적인 기원을 가진 신령한 것이지만, 그것이 지닌 약점은 아무것도 온전케 만들 수 없다는 점입니다(히 7:19). 율법이 신령한 것과 반대로 바울은 자신이 ‘육신에 속한 자’라고 고백합니다. ‘육신에 속한 자’란 죄에 대해 저항력이 없는 자를 가리킵니다. 바울이 6장에서 이미 자기가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육신에 속한 자라고 고백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성도가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율법과 관련해서 볼 때, 성도는 항상 육신에 속한 자이며 죄인일 뿐입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중생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신령한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의미에서 성도는 육신에 속한자요 죄 아래 팔린 자와 같은 것입니다. 바울은 이신 칭의(3:21-4:25)와 그것에서 비롯된 하나님과의 화해(5:1-21)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함께 거룩(성화)의 성취(6:1-23)에 대해서 논리를 전개해 왔고, 본장에서는 앞에서 설명한 것에 걸맞는 삶을 살아보려고 시도했으나 다시 율법의 굉장한 벽에 부딪힌 체험을 고백한 것입니다. 따라서 본절은 비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진술이 아니라 지극히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 겪는 신앙의 갈등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 아래 팔렸도다’라는 말은 ‘죄에서 해방되었다’(6:18, 22)는 말과 대조적인 표현으로, 성도가 믿음으로 구원받아 죄에서 해방된 신분이나 실제의 삶 속에서는 여전히 죄 아래 놓여져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함


    우리는 육체의 연약함 때문에 죄 아래 팔려서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합니다.”(15절) 이 표현은 바울 자신이 행하는 것 자체를 깨닫지 못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바울 자신이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결코 이해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뜻하는 바와 실제로 행동으로 옮겨지는 것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성도의 신앙적인 갈등은 최고조에 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회의가 찾아들게 되는 시점이 바로 이때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합니다.”(16절) 바울이 마음으로 바라는 것은 율법에 따라 의롭고 정당한 것이지만, 실제로 그 생각이 행동으로 나타날 때에는 그 원하는 바가 나오지 않고 원치 아니하는 바가 나타납니다. 이에 대한 해결책을 도출해 내기 위해 바울은 앞에서 했던 말을 다시 조건문 형식으로 반복합니다. 동시에 그는 독자들로 하여금 그가 제시하게 될 해결책에 대하여 주의를 기울이게 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인간 스스로의 힘과 의지로 지켜 질 수 없습니다. 율법을 행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죄 아래 매인 자신의 모습만 발견할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은 인간의 의지로 도달될 수 없는 지고선입니다. 율법은 바울이 원치 않는 바를 행할 때마다 그 자신을 정죄합니다. 이때 바울은 율법이 선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2. 내 속에 행하는 자


    내 속에 행하는 자는 누군가


    율법의 선함에도 불구하고 내가 죄를 지을 때 우리는 내 안에 행하는 자가 누구인가 살피게 됩니다.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거하는 죄인 것을 알게 됩니다.”(17절) 바울은 자기가 원치 않는 것을 행하게 하는 것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자기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죄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비록 죄가 자기 의지의 소산이 아니라 할지라도 자기 속에서 나온 것입니다. 즉 바울은 죄가 기회를 탈 수 있는 불의의 병기로 자기 몸을 죄에게 드렸던 점에 있어서 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본절에서 바울은 선을 행하려는 자아와 그 자아를 이기고 나타나는 죄를 구분하여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속에 죄가 실제로 존재하며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을 뿐 아니라, 비록 자기 속에 죄가 실제로 존재하며 활동하고 있어도, 자신의 실체는 이미 의롭다 인정받은 의인임을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과 죄를 구분해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악을 행하는 자는 내 속에 거하는 죄


    내가 원치 아니하는 것을 행함으로 그것을 행하는 것이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있는 죄임을 알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을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이 없음”을 깨닫습니다(18절). 성도의 신분은 영에 속한 자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죄를 대항하기에 무기력한 ‘육신’을 가지고 있는 신분입니다. 이 육신이 있는 한 죄는 항상 기회를 타서 성도로 하여금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게 합니다. 이러한 체험은 바울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이러한 현실을 인정치 않는 자는 외식자가 되든지 완전주의자가 될 것입니다. 외식자는 자신의 잘못을 항상 합리화시키기에 바쁠 것이며 완전주의를 추구하는 사람은 다시 율법주의로 되돌아가서 평생 갈등과 고민 가운데서 허덕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 자신을 발견합니다(19절). 우리는 마음은 선한 것을 행하려고 결심하지만 육신이 연약하여 마음의 원하는 바를 실천할 수 없습니다(마 26:41). 이러한 사실은 인간 속에 내재하고 있는 부패의 뿌리가 얼마나 큰 가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비록 거듭나서 하나님을 믿고 따르고자 결심하지만 죄가 연약한 육신을 장악하여 성도로 하여금 선한 일을 위해서는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고 성도는 이 사실을 깨닫고 무력한 상태를 벗어나려고 애쓰면 쓸수록 철저한 패배로 인한 비참함만 맛볼 뿐입니다(24절).

    우리가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인 것을 알게 됩니다(20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믿음으로 구원받고 죄에서 해방되었다는 신분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하여 악을 행하는 자신을 볼 때 심한 죄절감과 갈등을 겪게 됩니다. 그때 깨닫는 것은 선을 행하려고 애를 쓰는 자신과는 달리 항상 자신안에 악을 행하려는 죄가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고 죄를 짓는 우리의 현실을 합리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바울은 이것이 우리의 극복되어야 할 신앙적 현실이라는 차원에서 설명합니다.


3.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의 싸움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21절) 우리는 선을 행하기를 원함에도 불구하고 악을 행하는 자신을 살펴볼 때 한 가지 법을 발견합니다. 여기서 한 법은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이 우리 몸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대립의 원리를 의미합니다. 19절에서 바울은 선을 행하고자 하는 자신의 의지와는 반대로 악을 행하는 자신의 모순된 행위에 대해서 언급했으나, 본절에서는 그러한 모순된 행위가 발생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그 이유는 자신 속에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와 함께 악이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설명함으로써 바울은 악을 외부적인 어떤 요인이 아니라 사람 내부에 존재하는 실체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악은 인간 내부에서 잠잠히 있지 않고 항상 인간의 모든 지체를 지배하기 위해 활동하고 있습니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함


    바울은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함”을 발견합니다(22절). 여기서 ‘내속사람’은 윤리적인 면에서 단순히 선을 행하고자 하는 자아로 규정하고 악을 행하는 다른 자아(옛사람)와 구분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이 ‘율법’을 의미하는지 8:2의 언급과 같은 ‘성령의 법’을 의미하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하나님의 법’을 ‘율법’으로 이해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법’이 ‘성령의 법’과 일치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반드시 율법과 동일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바울이 진술하고자 하는 것은 속사람이 가지고 있는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를 일으키는 ‘거룩한 원리나 힘’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러한 거룩한 원리를 따르기를 즐거워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법’이 ‘율법’이나 ‘계명’을 포괄하는 ‘거룩한 원리’로 해석 되어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내속에서 다른 법이 마음의 법과 싸움


    바울은 속사람이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함에도 불구하고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고 고백합니다(23절). 여기서 ‘지체’(肢體)는 ‘육신’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이 지체는 단순히 몸의 각 부분으로서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죄와 대항하기에 전혀 무기력하며 죄로 인해 사망의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의 몸’의 각 부분을 가리킵니다. 비록 ‘지체’ 그 자체는 ‘육신’과 마찬가지로 악한 것이 아니지만, 죄가 연약한 육신의 지체를 통해서 역사하기 때문에 ‘지체’는 불의의 병기로 사용되는 것입니다(6:13). 그러나 우리의 지체는 반드시 하나님께 드려져야 하는데 성령에 의해 인도함을 받을 때에라야 의의 병기로 하나님을 위해 사용될 수 있습니다.

    ‘마음의 법’은 22절의 '하나님의 법'에 상응하는 관계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법은 하나님을 위해서 살려고 하는 선한 의지를 일으키며 ‘한 다른 법’인 ‘죄의 법’과 투쟁 관계에 있는 법입니다. 다시 말해 ‘마음의 법’은 마음자체에서 일어나는 ‘법’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살려고 하는 의지를 선한 양심 안에서 일으키는 거룩한 원리입니다. 바울은 ‘한 다른 법’과 ‘마음의 법’이 투쟁 관계에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 ‘싸워’라는 동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성도안에는 이 두 가지 법이 서로 지배력을 행사하려고 투쟁하고 있으므로 성도는 자신도 모른 사이에 갈등상태에 놓여 있게 됩니다. 바울은 본 구절을 통해 성도들 가운데 일어나는 갈등이 당연한 것임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바울이 이러한 언급을 성도들에게 하지 않았다면, 성도들은 이 두 법의 갈등으로 인한 신앙적 고민을 해결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이나 ‘마음의 법’이 단순히 율법이나 계명만을 의미하지 않듯이 ‘죄의 법’ 역시 어떤 명문화된 법을 의미하지 않고 죄가 역사하는 원리 또는 죄의 세력을 지칭합니다.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이 싸워 마땅히 하나님의 법이 이겨야 함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으로 죄의 법이 하나님의 법을 이기고 성도를 죄의 법의 노예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것이 성도가 현재의 삶 가운데서 겪게 되는 실상입니다.

    바울이 성도가 겪게 되는 신앙적인 현실에 대해 이토록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은, 성도 자신이 현실에서 죄에 사로잡혀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하며, 이러한 비참한 현실 가운데서 성도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가 지닌 넓이와 깊이를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성도 자신의 실존이 변화되어 있는 상태로 있기 때문에, 죄의 법이 심각한 도전을 해도 성도는 하나님의 법을 따르고자 한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바울은 비참한 현실 가운데 처해 있을 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25절)고 선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보는도다'라는 표현은 경험적으로 '알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이처럼 시각적인 경험으로 표현하여 성도가 처해 있는 비참한 현실을 강조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악을 행하게 하는 죄의 법을 깨닫고 바울은 탄식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절) 스토트(J. Stott)에 의하면, “불신자는 ‘자기 의’로 특정 지워지며 본절과 같이 자신을 ‘비참한 피조물’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성숙되지 못한 성도는 ‘자기 확신’으로 특정 지워지며 자기를 구원할 자에게 구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성숙된 성도만이 ‘자기혐오’와 ‘자기 절망’의 상태에 이르게 되며 자기 육신 안에 선한 것이 조금도 거하지 않는 사실을 뚜렷하게 인식합니다. 이 사람은 자기의 곤고함을 알아 믿음으로 구원을 위해 호소합니다.” 그가 주장한 ‘구원을 위한 호소’는 단순히 죄로부터의 구원을 위한 호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 간의 갈등을 극복케 해달라는 호소를 말합니다. ‘곤고한 사람’은 ‘심한 고난을 겪는 사람’의 의미로, ‘비참한 사람’을 말합니다. 지금 바울의 탄식은 선을 행하고자 노력하지만 항상 실패한 자신의 형편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자신이 전혀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는 절망감과 비참함을 탄식하고 있습니다. “사망의 몸”은 숙명적인 인간의 운명에 대한 표현이 아니라 죄와 사망의 세력을 벗어날 수 없는 비참한 상태의 몸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사망’은 ‘죄의 결과’로 초래되는 것이므로(6:23) 죄의 세력을 의미합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 죄의 법을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곤고한 모습 속에서 한 가지 희망의 빛을 발견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고 고백합니다(25절). 바울이 24절의 탄식에서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라고 질문한 것에 대한 대답입니다. 즉 바울은 그토록 비참한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된 구속을 자기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3:21-6:23이 교리적 차원에서 예수에 대한 바울의 이해를 보여 준다면 본절은 교리를 현실적인 삶에 적용함에 있어서 자신이 겪은 갈등을 통한 예수에 대한 바울의 이해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고 고백합니다. 앞에서 계속 진술했던 것을 다시 반복하고 있지만, 본절은 의미상 큰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같은 표현이 앞에서는(20-23절) 탄식으로 이어지는 내용이지만 본절은 진정한 해방의 선포를 위한 내용입니다. 즉 이는 탄식이면서도 몸의 구속 곧 진정한 구원을 기다릴 준비를 갖게 하는 내용인 것입니다(8:23). 이처럼 본 구절은 앞에서 진술했던 내용을 비참한 현실적 삶을 통해 여과시켜 그리스도의 구속이 가진 보다 깊은 비밀로 이끌어 가도록 전환시키는 분수령입니다.


4. 적용: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하는 삶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얻은 후에도 여전히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비참한 현실은 고통입니다. 사도는 그것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연약함을 깨닫는 순간 우리에게 비전이 보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없지만 하나님이 말씀을 그대로 지키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바로 나의 구세주이십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우리는 자신의 무능력과 연약함을 주님께 그대로 고백하기만 하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주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도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고 있는 성도는 이제 그리스도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의지하면 그분께서 우리에게 말씀에 따라 순종하는 길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미 이루어놓으신 승리에 의한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승리하신 주님과 함께 하기만 하면 성도는 그리스도의 순종하심과 같이 순종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하며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능력으로 하나씩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을 보이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순종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순종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모든 일을 할 때, 말에나 일에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고 그리스도를 힘입어 살면서 하나님께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골 3:17). 자신의 모습을 주님의 십자가에 감추고 오직 모든 일이 그리스도의 이름만이 드러나도록 힘쓸 것입니다. 그리고 설혹 실패해도 낙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는 것이므로 실패한 원인은 그리스도의 능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의뢰하지 못한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의인은 일곱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는 것입니다(잠24:16).

출처 : 센다바중앙교회
글쓴이 : kaporet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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