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말씀 - 설교

[스크랩]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

kaporet 2009. 9. 25. 16:51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

로마서 8:26-30

2009.9.20(주일예배)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을 때 그 심령 속에 성령께서 들어와 계십니다. 성도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며 살게 됩니다. 비록 육체의 연약함 때문에 실수하여 죄를 짓지만 장차 부활의 영광의 몸으로 변화될 날을 기다리며 삽니다. 이를 위해서 성령께서 아들의 영으로 오셔서 성도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십니다. 그리고 성도는 성령을 통하여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인내를 하면서 몸의 구속을 기다려야할 것입니다. 성도가 몸의 구속을 바란다면 참음으로 기다려야할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갈 날을 기다리면서 이 땅에서 사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1. 성령의 간구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의 간구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기뻐하면서도 실제의 삶속에서 거룩한 삶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탄식하게 됩니다. 성도는 탄식하면서 양자될 것 곧 몸의 구속을 참음으로 기다립니다. 마음으로는 성령을 좇아 살기를 원하지만, 육은 연약하여 갈등을 느끼며 주님의 재림과 몸의 부활을 기다립니다. 그때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십니다.”(26절) 성령은 성도를 양자로 보증해 주는 것으로 끝내지 않으시고 최종적으로 구원이 완성될 때까지 도와주십니다. 성도는 연약한 육신을 입고 있기에 성령께서 성도 가운데 계시면서 성도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며(요 16:13) 양자로서의 보증이 성도 안에서 확실히 성취되도록 도와주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령은 보혜사(保惠師)이십니다(요 14:16, 26;16:7). ‘도우시나니’는 ‘다른 사람의 손을 붙잡아 준다’는 의미입니다. 성령께서는 성도가 연약해 있을 때에 성도의 무거운 짐을 덜어 주고 곁에서 일으켜 세워주며 붙들어 주십니다.

    성령은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성도는 연약하기에 영적 힘을 공급해주는 통로인 기도를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성도는 때때로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영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단지 입술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어야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기도함에 있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인됨을 철저하게 자각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성령의 도움을 간구해야 합니다. 성령의 도움이 아니면 기도의 능력도, 기도할 내용도 찾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할 때 도와주십니다. 따라서 성도는 기도할 때 성령께 의지하며 기도해야합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시는 것은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연약한 성도들을 위해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며 도우십니다. 즉 성령께서 성도들 편에 서서 그들이 의식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사실들을 미리 아시고 성도들을 위해 성부 하나님께 간구하고 계십니다. 이런 면에서 기도는 성도 안에 계신 성령의 사역이라고 일컬어질 수 있습니다. 성도가 갈등으로 인해 탄식하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성령께서도 성도보다 더 심한 탄식으로 성도를 위해 간구하고 계십니다. 성령이 성도를 위해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신다는 이 사실이야말로 성도에게는 가장 큰 위로이며 구원에 대한 보증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성령


    성령이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실 때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하십니다. “마음의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십니다.”(27절)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는 성부 하나님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성령의 생각을 아십니다.” 본 구절에서 바울은 성부나 성자 하나님과는 독립된 인격체로서의 성령에 대해 진술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바울은 성부 하나님과 성령의 활동을 구별합니다. ‘성령의 생각’은 하나님의 구원 계시와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그 구원 계시를 바탕으로 해서 성도를 위해 이루어진 것입니다(요 14:26; 16:7-14). 성령의 생각은 성도의 연약함을 돕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위하여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시는 성령의 생각을 아심으로, 성령께서 성도들 위하여 기도하면 성부 하나님께서 아시고 그에 응답하실 것입니다.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십니다.” ‘하나님의 뜻대로’는 직역하면 ‘하나님을 따라’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구원을 얻고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요 6:40). 그러므로 성령은 성부 하나님이 구속 사역을 위해 긴밀한 관계를 갖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십니다. 성령은 성부 하나님과 별개로 활동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께서 세워 놓으신 거대한 구원 계획에 따라 활동하십니다. 성령께서 성도를 위해 기도하시는 것도 성부의 구원 계획을 완성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성도들이 연약하여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면서도 육체로는 실수하는 모습 속에서도 어찌하든지 성도들이 믿음으로 환경을 극복하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십니다. 성도가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면서도 육체로는 정욕 때문에 실수할 때마다 성령께서는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시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룸


    그러면 왜 성령께서 이처럼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실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28절) 성도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요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이 말씀은 마치 성도가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은 것’이 ‘하나님을 사랑한 것’에 대한 보답으로 주어졌다는 인상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성도를 선택하시고 부르시는 것은 인간의 어떤 행위에 대한 보답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성도로 선택함을 받은 것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와 ‘부르심을 입은 자’를 동격(同格)입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은 자이며,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은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받았기에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할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려고 하나님이 구원의 계획을 세우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으니 어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이에 대한 헬라어 본문의 직역은 ‘모든 것이 선을 위해 함께 역사한다’입니다. 즉 만물 또는 모든 일이 선을 목표로 하여 협조한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본 구절이 나타내는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께서 만물로 하여금 선을 위해 역사하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절에서 ‘하나님’이 주어가 되지 않고 ‘모든 것’이 주어가 된 것은 만유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만물은 하나님의 섭리안에 포함되어 있으므로, 그 모든 것은 선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따라서 성도를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되는 원동력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해 간구하신다는 사실에 있습니다(27절).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미리 정하심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부르신 목적은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습니다.”(29절). 성도는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계획에 따라 당신이 구원하실 성도들을 미리 아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도를 구원하신 것은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구원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들의 형상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골 1:15).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던 아담이 범죄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을 잃었으나 하나님은 아담의 후손인 인류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도들이 아들의 형상으로 닮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입니다.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사건이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부활의 몸으로 완전하게 변화될 것이지만, 그리스도를 믿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때부터 계속 변화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성화(聖化)라고 합니다. 성도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이미 그의 형상을 받은 자이며,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 상태입니다. 그러나 이 상태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므로 성도는 믿음의 눈으로 소망 가운데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온전한 성화는 그리스도의 재림시 부활의 몸으로 변화되었을 때 이루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성도는 장차 영광의 부활의 몸으로 변화될 자신을 바라보며 사는 것입니다. 비록 현재의 생활이 온전하게 거룩한 삶을 살 수 없더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거룩한 모습으로 변화될 자신을 확신하며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고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 것입니다(롬 1:17). 


    미리 정하신 자들을 부르시고 의롭다하시고 영화롭게 하심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이루시는 과정은 신비롭습니다. 하나님은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셨습니다.”(30절) 하나님은 성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미리 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우리를 택정하셨습니다(엡 1:4). 천지를 지으시기 전에 이미 하나님은 구원의 계획을 세우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정하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입니까? 우리가 아무것도 알지 못하던 때에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아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정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미리 정하신 우리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여기에는 ‘믿음’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예정과 부르심이 믿음에 의해서 확정되며, 칭의와 영화도 믿음에 의해서 성도에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구원의 전 과정에 있어서 ‘믿음’이 전제되어 있으므로 바울은 굳이 그 단어를 삽입시킬 필요가 없었습니다. 바울이 본절에서 구원의 과정을 자세히 나열한 것은 성도로 하여금 성도를 향하신 하나님의 변치 않는(39절) 사랑을 알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또한 바울이 나열한 단어 하나하나에는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가 암시되어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게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고 언급했던 것처럼 구원의 모든 단계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부르신 후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셨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해 믿음을 고백한 자들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 놓으신 구속의 역사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하십니다.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단지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율법으로는 우리가 아무리 노력하여도 의로울 수 없었는데 단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의롭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의롭다 하신 그들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영화롭게 하심’은 하나님이 성도들을 영광의 자리로 옮기셨음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을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골 1:13).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골 1:15) 영광의 소망이십니다(골 1:27).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에 옮겨져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여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됩니다(엡 1:6). 하나님의 영광은 요한계시록 21-22장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장막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있는 새 예루살렘에서 성도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계 21:3,11). 그곳은 각종 보석과 정금으로 지어진 아름다움과 해와 달의 비침이 쓸데없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심이 그려져 있습니다(계 21:11-23). 그 하나님의 영광에 성도가 참여하는 것은 무엇보다 놀라운 축복입니다(계 21:27; 22:1-5). 본절에 나오는 동사 ‘의롭다 하시고’와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는 모두 과거 시제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그리스도의 재림시 궁극적으로 완성될 것이지만, 이미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확고하게 세워져 있음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현재 영적으로 이미 영화롭게 되어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성도들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을 통하여 가능합니다. 성령은 날마다 우리의 영을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로 인도하시어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구약시대에 성막위에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가 있었던 것처럼 지금도 성령께서는 성도들의 몸에 임하시어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나타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성령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며 살아야할 것입니다.


3. 적용: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삶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하여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하십니다. 이것은 성령의 말할 수 없는 기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우리의 구원의 궁극적인 것은 영화입니다. 즉 영광의 몸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이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서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심을 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것을 체험해야합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이루어지지만 그것을 체험하는 것은 우리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삶을 위하여 몇 가지 묵상합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을 더욱 확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기 위하여 그리스도께 더욱 순종하기에 힘써야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더욱 알아야합니다. 이것은 오로지 말씀의 묵상과 기도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말씀을 묵상하며 그리스도에 대해서 더 깊이 알고 그리스도를 닮도록 기도하며 순종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얻기 위해서 자신의 유익하던 모든 것을 다 포기했듯이 지금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만나는데 있어서 방해되는 것은 전부 버려야할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를 만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그리스도를 알기 위하여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일과 영적인 도서를 읽는 일과 주님께 무릎 꿇어 기도하는 일에만 전념해야할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성령께 모든 것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위하여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시는 성령을 의식하며 그분께 우리의 연약함을 맡기고 의뢰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으로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고 성령께서 주시는 말씀으로 말하고 성령께서 지시하시는 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연약하여서 실수를 하여도 낙망치 않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간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연약하여 어찌할 바 모를 때에도 성령께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심을 믿고 신뢰하면서 성령께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때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고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조금씩 변화되는 삶을 살 것이고 결국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영화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출처 : 센다바중앙교회
글쓴이 : kaporet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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