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를 이기는 성도의 삶
로마서 6:1-14
2008.8.17(주일예배)
들어가는 말
성도는 교회나 그리스도교를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이며,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성도라고 부릅니다. 성도라는 의미는 ‘거룩한 무리’라는 뜻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고백하는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의롭고 거룩하다고 인정해주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성도가 구원받은 사실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사랑해주셔서 구원의 계획을 세우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의 사실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인격적으로 믿음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 중에 여전히 죄에 대하여 패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승리로 성도들로 승리한다고 가르치고 있는데, 왜 우리는 여전히 죄에 대하여 패배하고 있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죄에 대해서 승리할 수 있는 비법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죄를 이기는 승리의 삶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기를 원합니다.
1. 죄에 대해서 이겨야 할 이유
(1)성도의 구원의 의미
죄에 대한 승리의 삶에 대해서 듣기 전에 먼저 우리는 성도가 받는 구원이 무엇인지 생각해야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성도가 받는 구원에 대해서 오해를 하고 있기 때문에 신앙생활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받은 구원에 대해서 말하라고 하면 죄에서 구원받고 죽어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만을 생각합니다. 물론 이 대답은 틀린 대답은 아닙니다. 그러나 정확한 대답은 아닙니다. 분명히 구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건져내신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구원의 결과는 단지 죽어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만이 아닙니다.
구원은 영생을 얻는 것이다
먼저 요한복음 3:16을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17절에 보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이유는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분명이 구원의 결과는 영생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생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까? 요한복음 17:3을 보면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요한일서 5:20에는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라고 말씀합니다. 즉 예수님을 아는 것이 영생입니다.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시고 영생임을 아는 것입니다. 성도는 단지 성경을 통하여 얻는 지식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해야함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점점 더 깊이 알아갈 때 성도는 그 안에 하나님의 생명인 영생을 확실하게 체험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주님을 아는 지식을 얻기 위해서 이제까지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던 학문과 지식과 배경을 다 분토와 같이 여긴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단지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해주신 예수님과 하나님을 알기에 힘써야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나라로 옮긴 것이다
그리고 구원의 결과 우리는 흑암의 권세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졌습니다. 골로새서 1:13-14를 보면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환경이 바뀐 것을 깨닫습니다. 죄를 짓는 환경인 흑암의 권세아래 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순간부터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나라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즉 구원받은 성도는 장차 하나님 나라에 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영적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실감하지 못하는 성도들이 많이 있어서, 자신들이 아직 이 땅에서 사는 것이 최상인줄 압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흑암의 권세에서 하나님 나라로 옮겨진 것입니다. 이 사실을 인식하지 못할 때 성도들은 아직도 자신의 구원이 실현되지 못한 줄 알고 세상의 풍속을 좇아가려고 합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 나라에서 사는 것을 즐거워해야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왕이심을 고백하며,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소원하며, 매일의 생활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조명을 받으면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2)죄에 거할 수 없는 성도(1-2절)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1-2)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는가?(1절)
그러므로 성도는 더 이상 죄의 세상에 머물 수 없습니다. 아니 죄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으니”라고 말하며 은혜를 더 받기 위하여 죄 가운데 더 머물러야한다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는 말은 죄를 깊이 깨달을 때 더 풍성한 은혜를 체험할 것을 말한 것이지 결코 은혜를 더 받기위해서 죄 가운데 머물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율법을 통하여 그동안 감추어져 있던 죄가 드러나게 됨에 따라 인간의 회개는 더욱 깊어지며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느끼게 됩니다. 그 당시 이러한 진리를 알지 못하고 ‘죄에 거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하게 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자들이 많이 있었으며 오늘날에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들은 복음의 진리의 깊은 내면을 깨닫지 못한채 자신들의 지식을 따라 행합니다. ‘죄에 거하다’말은 ‘죄와 더불어 산다’는 의미로 죄와 더불어 전혀 투쟁하지 않을 뿐 아니라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러한 상태에 빠진 자들은 자기 욕구 충족을 위해 그리스도를 섬기는 체하는 자들입니다. 다시 말해 이런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꾸는 자들(유 1:4)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지만, 구원받은 후에는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하여 힘을 써야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명하시기 때문입니다(레 11:45; 벧전 1:16).
더 이상 죄에 거할 수 없다(2절)
그러므로 우리가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죄에서 용서함을 받았으면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몸부림을 쳐야합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겠습니까?” 죄에 대하여 죽은 성도는 더 이상 죄의 세력에 지배받지 않습니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피흘리셨고, 이 속죄로 말미암아 성도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으며 하나님을 경배하는 거룩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의 은혜 때문에 죄가 더욱 왕성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역을 터무니없는 것으로 타락시키는 행위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죄악된 삶을 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교통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도의 죄에 대한 죽음은 실제적으로 죄의 종이었던 우리 옛 사람의 죽음입니다. 이에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갈 2;20)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해서 죄의 세력을 전혀 의식하지 않게 되거나 죄를 결코 범하지 않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 죄가 초래하는 엄청난 불행들에 대하여 죽었으며 죄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났다는 의미입니다.
2. 죄를 이기는 비결
(1)성도가 받은 세례의 의미를 알라(3-5절)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롬 6:3-5)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 받은 자(3절)
죄에 대한 승리의 삶을 위해서 구원받은 성도들이 가장 깊이 생각해야하는 것은 우리가 받은 세례의 의미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며 세례를 받을 때,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세례는 단순한 의식이나 성례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는 것을 계기로 모세에게 속하여 세례를 받았다고 설명합니다(고전 10:2). 그들은 처음으로 모세와 연합하였고, 모세의 지도권을 인정하였으며, 또한 그들이 모세에게 의존하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성도가 그리스도께 속하여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연합하여 함께 죽었다는 의미이며, 죄에 대하여 죽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세례 자체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사역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고전 12:13). 그러므로 성도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받은 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죄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그의 죽으심에 세례받아 연합되었다는 것은 성도들 역시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더불어 함께 죽은 자된 성도들은 죄에 종노릇하던 옛사람이 죽었으므로 계속 죄에서 종노릇하는 신분에 머물려고 하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4절)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도 연합한 자들입니다. 성도는 비록 잠깐 동안의 일이지만 세례를 받을 때 물속에 몸을 잠그는 일이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는 일과 유사합니다. 세례를 받는 성도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되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장사되다’는 말은 자연적인 출생으로 맺어지는 아담과의 관계에 의해 지배되던 옛 사람(엡 4:22;골 3:9)의 죽음을 상징합니다. 즉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활을 하기 이전의 거듭나지 못한 본성과 행동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의미합니다(갈 5:24;골 2:12).
그리고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되심에 참여한 성도는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에도 참여하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부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리스도를 부활하게 하신뿐만 아니라 성도가 새 생명 가운데 살게 하셨습니다.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성도가 연합될 때 성도는 ‘죄에 대하여 죽는 것’만이 아니라 나아가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으로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받은 새 생명, 즉 영생은 그리스도의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될 때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본받는 자(5절)
그러므로 성도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어야”합니다. 성도는 세례를 통하여 우리의 옛자아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사실을 인식하였으면, 그리스도의 부활에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에게 속한 자들에게 허락되는 새로운 삶의 가능성과 연관됩니다. 부활의 삶은 장래뿐만 아니라 현재에 속한 것입니다. 성도는 장차 부활할 것만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으로 살아야함을 인식해야합니다. 즉 매일 우리가 살아갈 때 우리의 인생이 우리의 것이 아닌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인생임을 자각하고 그리스도의 것으로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아가야합니다.
(2)십자가를 경험하라(6-7절)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롬 6:6-7)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6절)
그러므로 성도가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으로 살기 위해서 먼저 생각해야할 것은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우리의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함’입니다. ‘옛 사람’은 영적인 죽음 아래서 신음하며(엡 2:1;골 2:13) 본질적으로 마음이 악하여 죄에게 종노릇하는 사람이며(6절), 하나님에게서 떠난 사람입니다. ‘옛 사람’에 머물러 있는 자들은 죄를 지어도 그 죄로 인해 아무런 갈등을 느끼지 않으며, 바람에 밀려다니는 돛단배와 같이 죄의 세력에 따라 이리 저리 끌려 다닙니다. 이런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는 더 이상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생활하는 삶으로 변화합니다(고후 4:11;골 2:20). 그리고 이러한 체험을 한 사람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합니다. 비록 성도가 현재의 삶 속에서 죄를 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으나 신분상으로 이미 죄의 몸은 죽은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새 생명을 소유하게 되는 연합의 체험으로 ‘거룩한 백성’으로 불릴 수 있습니다.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하심을 얻음(7절)
그리고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음으로 “죄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성도는 죽으신 그리스도와 같이 모든 죄와의 관계에 있어서 죽었으므로 죄에 대해 무감각한 상태에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도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죄에 대하여 무감각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죄의 세력, 죄의 영역에서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승리로 죄의 세력에서 벗어나서 죄의 영향력을 받지 않게 된 것입니다. 죄에서 벗어난 성도는 “의롭다 하심을 얻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우리의 죄씻음이 이루어짐을 믿고 회개하는 자에게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해방이 이루어지고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의롭다 함을 얻는 것입니다.
(3)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로 여기라(8-11절)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찌어다”(롬 6:8-11)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사는 줄로 믿음(8-9절)
만일 성도가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자기의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힌 것을 확신하면, 그리스도의 부활하심과 같이 부활의 생명으로 살게 됨을 확신해야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연합한 성도는 또한 그리스도의 살으심과 연합하여 반드시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예하게 됩니다. 곧 성도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새 생명을 얻게 되고 새 생명은 장래에 성도를 부활의 몸으로 변하게 할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장차 그리스도의 재림시 일어날 부활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영원한 나라의 생명을 소유하며 살아야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흠과 티가 없으셨으나 인류 구원을 위해 스스로 십자가를 지셨고 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본래 그리스도의 신성 자체는 결코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는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입고 이 땅에 오심으로(8:3) 사망의 세력권 안에서 활동하게 되셨고, 죄인이 되시어 사망의 원리를 따라 자발적으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러나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다시 죽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다시 죽지 아니하시는’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를 위한 구원의 보장이 되십니다.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로 여김(10-11절)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입니다.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짐지우신 자기 백성의 죄와 허물을 위해 죽으셨습니다(사 53:4-6). 예수 그리스도는 죄에 대해서 ‘단번에’ 죽으셨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대제사장이 백성들을 위해 일 년에 한 번씩 제사를 드렸으며 백성들은 죄를 범할 때마다 희생 제물을 가져왔으니 그 제사는 반복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되신 그리스도는 구약 시대에 대제사장들이 반복적으로 드려왔던 그 제사대신 자기 몸을 제물로 바쳐 ‘오직 한번만’ 드림으로써 구약의 제사를 완성하셨습니다(히 7:27; 9:12; 10:10). 그리고 “그리스도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할 것입니다(3:8, 14).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산자로 여겨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떠나서는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자유를 생각할 수 없고 생명의 부활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여기다’는 말은 사실을 인정하라는 말씀입니다. 성도는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인정해야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의 사건은 성도들을 그러한 신분으로 만든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3. 죄를 이기는 실제의 삶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롬 6:12-14)
죄로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는 삶(12절)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이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산자로 여긴다면,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고 몸의 사욕에 순종치 말아야” 합니다. 죄에 대한 성도의 죽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실재적으로 발생했던 사건으로, 이로 인해 죄가 성도들에게 왕 노릇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다만 죄가 연약한 인간의 몸을 통해서 역사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성도들에게는 오직 그리스도만이 주인이십니다. 그런데도 죄는 성도들의 연약한 몸을 통하여 역사하면서 자신이 주인인 체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거짓된 위장조차 허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의인이요 거룩한 자의 신분을 가지고 있으나, ‘죽을 몸’을 지닌 현재는 아직 죄와 투쟁하는 신분으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죽을 몸’은 단순한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벌로써 내려진 필연적인 죽음을 가리킵니다. 아담은 하나님께 범죄하기 전에 죽지 아니하는 '생령'(生靈)을 가졌었습니다(창 2:7). 그러나 그가 범죄한 후부터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고 이 사망의 진노는 모든 인간에게 그대로 내려졌습니다. 그러나 사망의 진노는 구속함을 받은 성도에게는 더 이상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성도는 이 땅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가면서 타락한 세상과 부딪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더 이상 죄의 유혹에 빠지기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자녀된 신분에 부끄럽지 않게 살도록 지속적으로 애써야합니다. 죄는 우리 죽을 몸을 통해서 역사하며, 죄를 짓게 하는 욕구가 일어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몸의 욕구대로 행하게 되면 죄에 대하여 죽은 성도는 도전을 받게 됩니다. 성도라면 당연히 죄와 투쟁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며 또한 투쟁해야 합니다. 비록 죄에게 패배할 때가 많을지라도, 성도는 이미 죄에 대한 승리를 보장받은 신분이므로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단의 세력은 성도가 단순히 죄와 연합하는 것을 지나 죄에게 순종할 것을 요구합니다. 일찍이 사단은 그리스도께도 '내게 엎드려 경배하라'는 조건을 내걸은바 있습니다(마 4:9).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사단의 유혹을 이기시고 꾸짖은 것처럼 성도는 죄악의 곁에 가지 말며 죄의 유혹을 단호하게 거부해야 합니다.
우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는 삶(13절)
성도는 이제 보다 적극적으로 죄에 대항하여 승리하기 위하여 ‘그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 드리지 말고’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려야’합니다. ‘불의의 병기’란 각각의 지체가 죄의 종이 되어 불의를 행하는 도구가 됨을 나타냅니다. 사실상 성도라 할지라도 자기 몸의 지체를 제어하지 않으면 이미 그의 몸은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의와 거룩함으로 지음을 받은 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로서, 새 생명을 소유한 신분으로 자기의 지체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 이유는 성도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이며(고전 6:15),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며(고전 6:19), 값으로 산 것(고전 6:20)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구약의 이스라엘백성들처럼 ‘거룩한 영적 전쟁’을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성도는 자신의 몸을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원하시는대로 사용되도록 우리의 삶을 드리는 것입니다.
죄가 주관하지 못하는 삶(14절)
이와 같이 성도가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의의 병기로 드리게 될 때 ‘죄가 주관치 못할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투쟁하는 자에게 더 이상 죄는 주관자가 되지 못합니다. 이것은 죄에 대하여 승리하는 삶을 말씀합니다. 성도가 자기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바쳤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죄와 완전히 분리된 삶을 살 수 없지만, 자기 몸을 하나님께 바치는 삶을 살고자 애쓰는 그 사람에게 죄가 왕노릇 할 수는 없습니다. 죄가 성도를 주관치 못하는 것은 장래뿐만 아니라 현재에 있어서도 확실히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 강력하고 확실성 있는 보증은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하심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성도가 자신의 몸을 죄의 불의의 병기에 드리지 않고 하나님의 의의 병기로 드리게 될 때, 죄가 그를 주관하지 못하게 되는 그 이유는 성도가 법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은혜’와 대비되어 있는 이 ‘법’은 ‘율법’을 의미합니다. 율법 아래있는 자는 율법의 종이 되어 그리스도와는 관계없이 죄의 문제만으로 고민하여 항상 율법에 의해 정죄를 받게 되니, 그 사람은 죄의 종입니다. 그러나 은혜의 원리에 따르는 자는 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한 확신과 함께 죄의 문제가 해결된 상태에 거하게 되므로 결코 죄가 그에게 왕노릇할 수 없습니다. 이 원리는 로마서 8:1, 2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기”때문이며,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기”때문입니다. 혹시 실수하여 넘어져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을 힘입어서 나아갈 때 다시 깨끗하게 씻음받고 새로운 마음으로 죄에 대해서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가는 말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죄에 대해서 승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먼저 우리의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죄에 대하여 죽었고 우리의 옛자아가 십자가에서 죽은 것을 날마다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일을 성령을 의지하며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의지하며 하는 생각은 자신의 몸의 욕망을 제어할 것이므로 더 이상 죄의 생각이 나올 수 없습니다(갈 5:17). 그리고 우리의 생활 습관을 적극적인 습관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모든 시간을 주님과 사용한다고 생각하고 시간의 우선순위를 바꿉니다. 말씀을 읽는 것과 기도하는 일을 먼저 하고 다른 일을 하는 것이 습관이 되기까지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든지 주님과 함께 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합니다. 우리의 생활 속에 주님이 거하시도록 모든 삶의 공간을 주님과 공유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늘 주님이 우리의 삶속에 들어와 계시면 그 때 우리는 자연히 주님께 의의 병기로 드리는 삶이 되어질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자신을 의의 병기로 드릴때 우리는 죄에 대해서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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