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이기는 지혜
로마서 12:14-21
2007.8.24(주일예배)
들어가는 말
성도는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삶을 살아야합니다. 그러한 삶을 영적인 삶이라고 합니다. 사도바울은 영적인 삶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러한 삶의 실제는 먼저 교회공동체 안에서 하나가 되어서 받은바 은혜대로 사랑으로 섬기는 것임을 말씀합니다.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한 지체로서 섬기는 삶을 말씀합니다. 이어서 교회공동체뿐만 아니라 교회 밖의 사람들에 대해서도 용서와 선을 베풀어, 선으로 악을 이길 것을 권면합니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자신에게 해를 입힌 자를 용서하지 않고 반드시 원수를 갚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성도는 다른 이들에게 악한 마음으로 하는 복수를 하기보다는 하나님께 맡기고 대신에 선을 행하여 악을 이기라는 것입니다.
1.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으로 평화하라(14-18절)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체 말라.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롬 12:14-18)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14절)
하나님은 사도바울을 통하여 우리에게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성도들을 핍박하는 불신자들을 저주하지 말고 축복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믿음으로 살아가려고 할 때 자신을 핍박하는 사람 때문에 고통을 당하면서 그들을 향해서 저주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그들을 저주하지 말고 오히려 축복하라는 것입니다. ‘축복하라’는 말은 '좋게 말하다', '칭찬하다'의 뜻으로서, 이 말을 성도가 하나님에 대해 쓸 때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되며,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사용하면 복주신다는 뜻이며, 우리가 다른 사람에 대해 사용하면 축복하는 것이 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영향 받은 사도바울이 성령의 감동으로 말씀한 것입니다. 핍박하는 자, 즉 원수를 축복한다는 것에는 용서와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는 내용도 포함됩니다. 그런데 인간의 본성 자체로는 이것을 행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나로서는 할 수 없는 것을 내가 하기 위해서는 나의 본성의 법이 아닌 성령의 법에 따라 행해야 합니다(갈 5:16).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울라(15절)
하나님은 우리에게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자신의 일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일도 자신의 일처럼 생각하고 다른 성도의 즐거움과 슬픔에 참여하여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울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기주의적인 면이 있어서 자신의 즐거움에 다른 사람들이 함께 기뻐해주는 것은 좋아하면서 자신은 다른 사람의 일에 관심이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의 슬픔에 대해서도 무반응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요 한 자매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성도들은 다른 성도의 일에 대해서도 자신의 일처럼 즐거워하고 슬퍼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할 것입니다. 우리가 슬픔 중에 있을 때에도 즐거워하는 자들과 즐거워하며 우리가 즐거울 때에도 슬픔 가운데 있는 자들과 슬퍼하라는 권면입니다. 다른 사람의 처지를 동정하는 것, 즉 감정과 처지와 조건을 같이 하는 것은 사랑으로써 가능하며(눅10:27), 성령으로 인도받아야(갈5:16) 한 마음이 될 수 있습니다(빌2:2). 이와 같은 마음을 품는 것은 신자들 사이에서 뿐 아니라,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과의 사이에서도 필요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우셨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선한 것을 즐거워하는 자들과 선한 것을 함께 즐거워하며(빌 2:18) 곤경과 불행으로 우는 자들에 대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지체로서 같은 슬픔을 갖습니다(마 5:4;눅 6:21).
서로 마음을 같이하고 겸손하라(16절)
계속하여 하나님께서 사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교회공동체의 일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슨 일에 있든지 서로가 마음을 같이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교회공동체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지체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서 순종해갈 때 자신만이 앞서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지체와 마음을 같이하여 나가야합니다. 만일 그렇지 못할 때 우리는 지체부자유자처럼 비틀거릴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을 같이한다'는 말은 '같은 마음이 되는 것'이나 '같은 마음을 품는 것'을 뜻합니다. 사도바울은 성도들의 행동이 외부에 나타남으로써 미칠 영향을 생각하고 서로 마음을 같이할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 같은 목적을 지향하고 같은 생각을 갖는 것은 빛된 선행으로 나타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마 5:16).
특히 성도는 서로 마음을 같이 할 때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아야합니다. ‘높은 데 마음을 두는 것’은 인간이 자기의 수준을 망각하고 분에 넘치는 기이한 일에 뜻을 품는 것입니다(시131:1). 높은 데 마음을 두는 자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자신만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자들은 다른 사람을 무시하며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을 정당화합니다. 그곳에는 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오히려 자신을 낮은데 처해야합니다. '낮은 데'라는 말은 '비천한'(눅1:52;약1:9), '겸손한'(마11:29;고후10:1)의 뜻입니다. 따라서 '낮은 데' 처하라는 것은 자신을 생각함에 있어서 겸비(謙卑)하라는 것이며, 3절의 '분에 넘치는 생각을 하지 말고 지혜롭게 생각하며 처신하라'는 권유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다른 성도와 함께 서로 마음을 같이할 때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스스로 지혜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미련한 자들 즉 지혜없는 자들의 생각입니다(잠3:7). 이를 히브리어식으로 표현하면 '높은 것에 대해 심사숙고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는 남들보다 뛰어나길 원하고 우월 의식을 갖기보다는 다른 사람을 진중(珍重)하게 대하고 온순함을 가져야 할 것을 보여줍니다. 그렇지 않고 스스로 지혜있다 하는 오만함은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데에서 비롯됩니다.
모든 사람에게 선한 일을 도모하라(17절)
하나님은 이어서 우리에게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도가 교회공동체 안에서 마음을 같이하여 겸손하게 살려고 할 때 우리의 연약함을 발견합니다. 자신은 하나님 앞에 그렇게 살려고 해도 잘 되지 않음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그때 성도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 관용하게 되며,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생깁니다. ‘악으로 악을 갚지 말라’는 것은 인간이 가진 본성을 제한시키는 가르침입니다. 일반적으로 악행하는 자에게 보다 큰 악으로 갚으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심리인데, 이는 이러한 인간의 자연 욕구를 제재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눈은 눈으로...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출21:24, 25)는 공식적인 형벌을 말한 것이며 이런 규정을 세운 것도 개인적으로 보복하는 것들을 금하기 위한 것입니다(잠 20:22;24:29). 바울은 인간의 어두워진 마음(1:21)을 잘 알았으므로 인간에게 이런 교훈이 필요함을 느낀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가르침(마5:38ff.)을 따라 일정한 교리가 형성된 것입니다.
성도는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은 '아무에게도'에 대칭되는 말로 신자나 불신자 모두를 가리킵니다. '모든 사람 앞에서'는 또한 '주님 앞에서'(고후8:21)와 버금가는 권위를 갖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과의 영적인 관계가 사람들과의 현상적인 관계와 별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본절에서는 '선한'이라는 말은 일반적인 아름다움, 즉 자연적이고 도덕적인 '선한 일'을 나타냅니다. '도모하다'는 '미리 생각하다', '간구하다', '몰두하다'의 뜻을 갖습니다. 따라서 어떤 일에 반응하여 선을 행하라는 소극적인 명령이 아니고, 미리 솔선수범하여 선을 행하라는 적극적인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선한 일’에 너희 자신을 몰두하라는 뜻이 됩니다.
모든 사람과 평화하라(18절)
무엇보다 성도가 해야 할 일은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모든 사람과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어려울 때도 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절은 신자들이 가능한한 모든 사람과 평화하려고 애써야 한다는 것을 교훈합니다. '할 수 있거든'이란 표현은 인간관계에 있어서 화합(和合)을 향한 욕구가 아무리 강력해도 소용이 없는 경우가 있음을 시사합니다. 진정한 평화는 인간의 애씀만으로는 이뤄지지 않습니다. 평화를 위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으며(눅 2:14), 하나님과 죄악된 인간을 화목케 하시려고(골 1:20, 22)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이는 다른 사람과 조화를 이루면서 평화를 이루어야하는 궁극적인 근거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죄악된 인간과 평화를 이루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처럼 신자들도 평화를 위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골 3:15). 그러므로 신자들은 화평케 하는 자들입니다(마 5:9).
2. 선으로 악을 이기라(19-21절)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19-21)
원수를 친히 갚지 말라(19절)
하나님은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도바울을 통하여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과의 화평을 이루는데 장애가 되는 원수의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는 로마 성도들을 사랑하는 사도바울의 마음을 전달합니다. 성도가 원수를 대할 때 직접 원수갚으려하면 성도 자신이 먼저 상처를 받게 됨으로 차라리 모든 것을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진노하심에 맡기라’를 직역하면 '진노의 자리를 주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절대 공정하게 나타나는 것이므로 지나치게 관대하거나 치나치게 냉혹하지 않습니다. 또한 심판의 권위는 하나님께로부터 유래하고 악인을 심판하는 주권은 하나님께만 속합니다. 따라서 사람이 원수를 개인적으로 보복하는 것은 공정성(公正性)면에서도 문제가 되지만 하나님의 주권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 됩니다. 바울은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자신의 주장이 정당하다는 것을 뒷받침합니다. 구약성경의 본문 신명기 32:35에는 "보수는 내것이라 그들의 실족할 그때에 갚으리로다"로 되어 있습니다. 신명기의 문맥에 비추어 보면, 적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능욕하며 기뻐하면, 하나님께서 그 백성의 원수를 갚기 위해 개입하실 것이라는 것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복수는 자신의 적들에게 뿐만 아니라 그들이 섬기는 거짓 신에게까지도 미칩니다. 이처럼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의 권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권한과 권위를 확실히 인식함으로써 많은 수욕(受辱)과 고난(苦難)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보복하지 않고 기꺼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벧전 2:23). 우리에게 대한 진노를 그리스도로 인해 거뒤가심(8:1)을 생각하며 우리의 억울함에 대한 보복은 포기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원수에게 먹이고 마시우라(20절)
성도가 원수를 하나님의 진노에 맡길 때의 태도는 관용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놓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본절은 잠언 25:21, 22을 인용한 것으로, 원수가 궁핍하며 곤경에 처했을 때 선행과 친절을 베풀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원수를 먹이고 마시우는 것은 생명과 관계되는 행위이며 궁극적인 마시움과 먹임은 생수의 근원,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입니다. 원수에게 먹이우고 마시운 결과 원수의 머리위에 숯불을 쌓아 놓게 됩니다. ‘숯불’은 '회개의 표', '마음의 불', '회개와 부끄러움의 가책으로 타는 듯한 고통', '은혜', 즉 궁극적으로 은혜를 가져오는 '후회와 부끄러움에서 오는 고통'등으로 해석합니다. 대체로 숯불을 쌓는 것은 은혜를 베푸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이것만이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허락하신 유일한 복수 방법입니다. 은혜를 베풀므로써 원수가 자신의 행동에 대한 후회와 부끄러움을 갖게 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죄악에서 돌이키게 되어 서로에게 평화와 화해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21절)
성도가 원수 갚는 것을 하나님께 맡기면서 원수에게 선을 베풀 때 선을 통하여 악을 이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악에게 진다'는 것은 원수의 악한 행위로 번민하거나 원수에 대해 악으로 갚으려고 악한 행위를 계획하는 것입니다. 즉 원수의 악한 행위로 인해 선한 상태를 떠난 것을 의미합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삶으로 곧 앞에서 말한 겸손(3, 16절), 봉사(6-8절), 평화를 유지하는 것(18절)을 가리킵니다. 또한 20절의 원수에게도 친절을 베푸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이는 현재 삶에서 승리하는 생활을 말합니다. 이 승리는 자신의 노력, 열심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을 믿는 믿음과 우리를 인도하는 성령의 힘으로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3. 세상을 이기는 지혜
성도는 영적인 삶을 살아야하는데, 먼저는 교회공동체 안에서의 섬김의 생활을 하고 , 교회공동체 밖의 사람들에 대해서 용서와 선을 베푸는 삶을 살아야할 것입니다. 특별히 성도를 핍박하는 자들에 대해서 축복하고 선한 일을 도모하고 평화하는 삶을 살아야하는데 결국 선으로 악을 이겨야합니다. 이러한 지혜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바울도 그러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삶을 위하여 몇가지 묵상합니다.
먼저 우리는 성령으로 살아야합니다.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고 다른 사람과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우는 것, 모든 사람에게 선을 도모하는 것,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서 평화하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것은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삶을 성령으로 살아야합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살기위해서는 날마다 성령께 의지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살기에 힘써야합니다. 성령께서 내 심령속에 말씀하시는 것을 잘 듣기에 힘써야합니다. 성령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물론 기도해야하지만, 그전에 먼저 말씀을 많이 읽어야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말씀이 기억나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어서 우리가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읽는 일에 최선을 다해서 노력을 해야합니다. 말씀을 많이 읽으면 그 말씀이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어 생명력 있게 우리를 인도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성령의 능력으로 원수까지도 사랑하게 될 것이며 우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고 다른 사람들과 화평하며 모든 사람들에게 선을 도모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으로 살 때, 성령의 음성에 즉각 순종해야합니다. 성령으로 산다는 것은 성령으로 행하는 것으로 말씀합니다. 성령으로 행한다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즉각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성령께서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아무리 성령의 음성을 듣는다고 할지라도 순종하지 않으면 성령은 아무런 역사를 하지 못하고 맙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성령을 소멸치않게 위해서 날마다 성령께서 말씀하실 때 즉각적인 순종이 필요합니다. 성령은 인격적인 분이시라 조용하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씀하십니다. 어느 때는 내가 너무 분주하여 성령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지나쳐버리는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음성을 듣지 못한 채 지나쳐버리는 일이 반복될 때 성령께서 더이상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않고 우리의 회개를 기다리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회개가 없는 한 더 이상의 성령의 역사도 나타나질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를 놓치지 말고 회개하여서 성령께서 말씀하시는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될 때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물론 성령의 열매는 성령께서 맺게 해주셔만 되지만 그 열매를 맺기 위해서 우리의 삶 속에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애쓰는 삶이 되어야만합니다.
나가는 말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성도의 삶은 하나님 나라의 삶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모습은 성령안에서 의와 평강과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이 속한 곳에 하나님의 의가 실현되고 하나님의 평강과 기쁨이 넘치는 것을 체험하며 살아야할 것입니다. 바로 그때 우리는 다른 사람과 마음을 함께하고 평화를 이루어갈 것입니다. 즉 우리 성도 각자가 하나님 나라의 삶이 이루어질 때 우리의 교회공동체가 하나님의 평화와 기쁨을 누리며 살 것입니다. 그리고 원수에게까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용서하고 선을 베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으로 살고 성령의 음성에 순종할 것을 다시 한번 다짐하며,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힘쓰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생명의 말씀 -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복음을 다시 들어야할 이유 (0) | 2008.09.07 |
---|---|
[스크랩] 성령을 위하여 심는 사람 (0) | 2008.09.01 |
[스크랩] 죄를 이기는 성도의 삶 (0) | 2008.08.29 |
[스크랩] 성도의 영적 예배 (0) | 2008.08.10 |
[스크랩]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자 (0) | 2008.08.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