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자
로마서 7:1-6
2008.8.3(주일예배)
들어가는 말
어린 시절 읽었던 동화 이야기 중에 ‘왕자와 거지’라는 책의 내용이 기억납니다. 내용의 줄거리는 영국의 왕자 Edward Tudor(에드워드 튜더)가 거지 Tom Canty(톰 캔티)를 만나서 옷을 바꿔입으면서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톰은 캔티 집안에서 가난하게 태어났습니다. 그는 마구간에서 태어났고 가족들은 너무 힘들어서 아들을 반기지 않았습니다. 왕자 에드워드는 아주 높은 가문인 튜더 가문에서 태어나자 영국 전체가 그를 환영했습니다. 둘 다 같은 나이 같은 날에 같이 태어났고, 둘의 생김새도 똑같습니다. 런던 시내에 사는 거지 소년 톰 캔티는 궁궐 앞을 어슬렁거리다가 근위병에게 혼이 납니다. 마침 그 광경을 보게 된 에드워드 왕자는 톰을 자신의 방으로 불러들여 장난삼아 옷을 바꿔 입어 봅니다. 톰과 에드워드 왕자는 자신들의 모습이 꼭 닮은 것을 보고 놀랍니다. 잠깐 동안 신분을 바꿔 행동하기로 한 에드워드 왕자는 거지 차림으로 나갔다가 거지로 오해를 받고 궁궐 밖으로 쫓겨납니다.
그래서 그들은 각각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궁궐에서는 톰이 왕자인 줄 압니다. 톰은 자신의 지위가 탄로 날까봐 도망가다 모두한테 나는 왕자가 아니라 거지라고 말해도 모두 그가 미쳤다고 합니다. 핸리 8세는 자기의 아들이 미친줄 알고 책과 공부를 좀 멀리하게 했습니다. 톰은 저녁 만찬, 시상식에 참석할 때 모두 신기하면서 하나도 모르니까 가슴이 답답하고 무서워했습니다. 그래도 그는 점점 적응해갑니다.
한편 에드워드 왕자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만 아무도 믿어 주지 않습니다. 톰의 가족 역시 에드워드 왕자가 톰인 줄 알고 함부로 대합니다. 하지만 헨든이라는 기사는 에드워드 왕자를 가엽게 여기고 위험할 때마다 도와줍니다. 그러던 중 왕이 죽자 톰이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대관식 날, 에드워드 왕자는 거지 차림으로 나타나서 자신이 진짜 왕이라고 주장합니다. 톰의 도움으로 다시 신분을 되찾은 에드워드왕자는 그 후 백성을 이해하는 어진 왕이 됩니다.
이 책의 내용에서 우리는 신분이 바뀐 두 사람이 본래의 신분을 감추고 살면서 당하는 고통이 얼마나 큰가하는 것입니다. 왕자가 된 거지는 자신의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환경에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지경이었습니다. 본래의 거지가 왕자로서 산다는 것은 너무도 고통입니다. 그러나 한가지씩 배워나갈 때 그는 그 생활에 적응합니다. 마찬가지로 거지가 된 왕자도 아무리 자신이 왕자로서의 품격을 나타내려 해도 자신의 모습이 거지의 모습이기 때문에 왕자로서 믿어주질 않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성도의 생활도 변화된 신분에 맞는 인격을 갖추지 못하면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어도 온 우주의 왕되신 하나님의 왕자와 공주가 되었어도 우리의 삶이 아직도 옛날 거지같은 삶을 살면 사람들에게 미친 사람 취급당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실만을 기뻐할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백성답게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1. 남편의 법에 매인 여인처럼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줄 알지 못하느냐?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찌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롬 7:1-3)
변화된 성도답게
사도바울은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의 종에서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되었으므로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다고 말씀합니다.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는 영생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성도가 추구해야할 삶은 거룩함에 이르는 삶이요 그 열매를 얻기에 힘써야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생을 얻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데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은 이제까지 살아온 삶의 방식을 청산하는 문제입니다. 육체의 예대로 살아온 지난날의 삶이 자신의 거룩한 삶에 걸림돌이 되어도 이것으로부터 벗어나질 못하고 고통을 당하는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육체로 사는 사람의 열매가 사망이기 때문에 그러한 삶을 청산하고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자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사람의 살아있는 동안만 주관함
먼저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성도가 자신의 신분을 생각할 때 율법에 얽매인 삶을 살아서는 안된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고 반문합니다. 여기서 ‘율법’은 구약에 기록된 '율법' 중 특히 '모세 율법'을 가리킵니다(3:19; 5:13; 고전 9:8, 9;14:21; 갈 3:10, 19). 바울은 율법에 대해서 결혼 규례에 비유하여 설명합니다. 결혼규례는 어느 나라에서나 통용될 수 있는 일반적인 것으로,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이와 같은 법의 강제 하에 있게 된다는 사실을 말하면서 결혼 규례에 의해서 혼인한 부부가 서로 얽매이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살아있을 동안의 규례이지 남편이나 아내가 죽은 뒤에는 서로를 얽맬 수 없음과 같이 성도들이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율법에 얽매였으나 예수님을 믿은 후에는 율법에서 자유하게 됨을 말합니다.
율법에서 자유케 되는 길
여인이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됩니다. 그러나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결혼 규례에 의해서 여인은 남편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남편에게 구속되어 모든 행동이 제한됩니다. 그러나 남편이 죽은 뒤에는 결혼규례에 의해서 남편에게 구속당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여인이 남편에게서 해방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 제시됩니다. 첫째는 본절의 진술과 같이 남편이 죽으면 그 여인은 남편에게서 해방됩니다. 둘째는 여인 자신이 죽게 되면 역시 남편에게서 해방됩니다. 4절 이하의 설명에 따르면 '율법'은 '남편'에 비유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율법'은 죽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인 자신이 죽음으로써 남편에게서 해방되는 것처럼, 여인에 비유되는 신자는 그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써 율법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6:3, 4, 6). 여기서 바울은 결혼 관계에 있는 여인이 그 관계를 지속시키지 못했을 때 '음부'가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율법에 의한 정죄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율법은 그 아래 있는 자들에게 조금도 자유를 주지 않으면서 그것을 범하는 자에게는 어김없이 정죄하게 됩니다. 그러나 남편이 죽을 때 남편의 법에서 해방되는 것처럼 율법에서 해방하는 것은 율법에 대해서 죽는 것입니다. 성도는 죄의 종이요 율법 아래 있던 자였으나, 그것에서 해방될 수 있는 길은 그것에 대하여 죽는 것뿐입니다(4절).
2.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죽은 이유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롬 7:4)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해서 죽임을 당한 성도
여인이 남편의 법에서 자유하기 위해서 죽는 것처럼 성도가 율법에 대하여 죽을 때 자유함을 얻습니다. 그 일이 이루어진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여인이 남편의 법에서 자유함을 얻기 위해서 죽는 것처럼, 율법이 죽을 수 없다는 이유 때문에 사람이 죽어야 그 사람이 율법에서 자유함을 얻을 수 있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율법에서 자유함을 얻기 위해 죽는 것은 바로 옛사람이며, 이 옛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음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죽은 것입니다. 즉 실제로 우리의 옛사람이 죽을 수가 없으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실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옛사람도 죽게 하신 사실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율법에 대해서 죽게 하신 이유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게 하신 이유는, 예수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옛자아가 율법에 대하여 죽음으로써 우리는 율법에서 벗어났습니다. 위의 비유에서는 율법(남편)이 죽는 것으로 묘사되었으나 율법은 죽을 수 없기에 여인이 죽어야 합니다. 이 여인도 직접 죽을 수 없고 결국 대신 죽은 자에게 붙어 있게 됨으로써 그 죽음이 인정받게 됩니다. 그 후에 여인된 성도는 율법으로부터 자유하게 되었으므로 다시 사신 자와 연합하게 됩니다. 여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란 표현은 무엇보다도 결혼 관계의 성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결혼 관계에 들어가서 두 몸이 한 몸으로 연합됩니다. 마찬가지로 성도가 그리스도와 함께 옛사람이 죽은 후 그리스도의 부활하심과 함께 다시 살아날 때 단순히 생명이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서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즉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여 한 몸을 이루듯이 성도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한 몸을 이룬 부부가 한 마음과 한 인격으로 살아야하듯이 그리스도와 연합한 성도는 그리스도와 한 마음과 한 인격으로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성도가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맺히게 될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부부가 연합될 때 둘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나듯이 성도가 그리스도와 연합될 때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성도로 말미암은 열매가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열매입니다. 이 열매는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6:22)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위해 맺는 열매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거룩과 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성도가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의'를 얻고 '거룩'하게 되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 대하여 열매를 맺는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열매'의 본질입니다.
3.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자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찌니라.”(롬 7:5-6)
육신에 있을 때의 우리의 모습
그러나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의 정욕이 우리 안에 역사하였습니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의 특징은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서 역사한 것입니다. ‘육신’은 ‘영’과 대조되는 개념으로서 죄와 대항하기에 무기력한 인성과 그에 근거하는 삶의 방식을 나타냅니다(8:3-9). '육신'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이 '육신'을 통해서 죄가 왕 노릇하기 때문에 '육신'은 '죽을 몸'(6:12)입니다. 이런 이유로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기 이전의 인간’에 대해서 ‘육신’이라고 했으며, 또한 그리스도를 알지만 율법에 종노릇하며 죄에 거하는 자들에게도 이 말을 적용했습니다(고전 3:1, 3).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신분상으로 육신에 속한 자가 아니라 영에 속한 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신에 속한 자 같이 행동하는 것은 그 일을 행하는 사람 자신 뿐 아니라 그를 불러 의인되게 하신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2:24). 어쨌든 육신은 그리스도를 알기 이전의 상태 즉, 그리스도와 무관한 삶을 살던 때의 신분을 가리킵니다. ‘죄의 정욕’은 죄악의 성격을 갖는 정욕을 의미하는데, ‘색욕, 분노, 증오, 악한 뜻, 투기, 시기, 터무니없는 두려움’ 이외에도 좀더 포괄적인 의미로 ‘죄로 나아가고자 하는 욕구’를 의미합니다. 바울은 ‘죄의 정욕’이 타락한 인간의 본성 자체에서 일어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율법'으로 말미암는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습니다.” 여기서 ‘지체’는 ‘육신’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죄가 지체를 통해서 실제화되기 때문에 ‘역사하다’란 말과 어울리는 ‘지체’란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즉 사람의 ‘지체’는 죄에 붙잡혀 사용되면 ‘불의의 병기’이며 하나님께 붙잡혀 사용되면 ‘의의 병기’로 역사하게 됩니다(6:13). 사망을 위한 열매는 사람의 지체가 ‘불의의 병기’로 사용된 결과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맺는 것( 4절)과 반대로 죄와 연합하여 죄의 종노릇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상태에 빠진 사람은 사망 가운데 있으며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로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가 그의 열매이며, 최종적으로는 영원한 사망의 열매로 이어집니다.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겨야함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에 대하여 율법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해서 살아난 성도는 새로운 삶을 살아야합니다. 성도는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습니다.”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율법에서 벗어난 방법에 대한 설명입니다. 율법은 사람을 얽매는 것이고, 여기에서 벗어나는 것은 죽는 방법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사람의 정욕과 율법이 조화를 이루면 이처럼 과격한 방법이 아니고서는 율법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대표(代表)로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율법의 얽매는 것에 대하여 죽은 성도는 이제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입니다. 여기서 ‘영’이란 용어는 매우 포괄적인 의미입니다. 바울은 ‘영’(‘프뉴마’)이라는 단어를 다음과 같이 사용합니다. 첫째, 8장에서 ‘영’은 ‘육신’과 대조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영’이 죄에 대해서 전혀 배타적임을 가리킴과 동시에 율법에서 벗어났음을 보여줍니다. 둘째, ‘영’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갖게 된 ‘새생명’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이때에는 ‘영’이 ‘성령’과 동일시될 수 있습니다(8:14). 셋째, 본절에서와 같이 ‘영’은 '의문'(儀文)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사용됩니다. 즉 ‘의문’이 옛 시대의 지배 원리였던 것과는 반대로 ‘영’은 새시대의 지배 원리입니다. 물론 ‘새시대의 지배 원리’는 ‘성령’에 의해 주도되는 것이지만 새시대의 지배 원리 자체와 성령은 동일시될 수 없습니다. 새시대의 지배 원리에 속한 것으로는 ‘영’과 ‘복음’을 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과 사람의 영이 8장에서 구분없이 사용되고 있으며, 고전 6:17에서는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들로 볼 때 바울이 ‘영’이란 용어를 사용할 때에, 어떤 곳에서는 새 생명을 주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새시대의 지배 원리에 대해 적용하기도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본절은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것’으로 해석하기 보다는 ‘새시대의 지배 원리를 따라’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삶
성도가 율법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죽음으로 죄에 대하여 자유하고 하나님의 종으로 의로운 삶 거룩한 삶을 살게 되었지만, 사람의 방식이 잘 바뀌지 못함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성도의 삶이 거룩한 삶을 이루고 하나님을 위해서 생명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의 방식이 바꾸이어야하는데 이러한 삶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이제까지는 육신의 행동원리가 삶의 원리가 되었지만, 이제부터는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것이 삶의 방식이 되는 것입니다.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삶은 성령으로 사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7절에 성령으로 사는 삶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우리의 죄의 욕구를 제어하는 가장 효율적인 것은 우리 안에서 죄의 욕구가 나오지 못하도록 거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일은 성령께 구하며 살 때 성령께서 육체의 소욕을 거스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가 대적이 되어서 우리의 원하는 바를 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 결과 5장 22-23절에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할 법이 없느니라” 성령의 소욕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우리안의 죄의 욕구가 나올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입니다(갈 5:24).
또한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 것입니다(갈 5:25). 우리의 행동양식이 이전에는 자신의 생각대로 움직이던 것을 이제는 성령께서 움직이실 때 움직입니다. 즉 성령의 감동이 없으면 행동으로 옮기지 않습니다. 이를 통하여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 열매를 맺는 삶으로 변화되어 질 것입니다.
나가는 말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운 새로운 모습으로 살고 있습니까? 만일 아직도 자신이 이름뿐인 성도라면 다시 한번 주님 앞에 철저하게 회개하고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감동을 주시는대로 살기 위해서 주님 앞에 더 기도해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심령을 깨끗하게 씻음을 받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기도하는 삶을 통하여 점점 더 거룩함에 이르는 삶을 살도록 힘을 써야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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