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말씀 - 설교

[스크랩] 성도가 바라봐야 할 것

kaporet 2008. 7. 16. 12:16

성도가 바라봐야 할 것

골로새서 3:1-11

2008.7.13(주일예배)


들어가는 말


    고아원에서 자라던 한 아이가 어느 부잣집의 아들도 입양을 가게 되었습니다. 새로 입양된 아이는 그날부터 부잣집 도련님으로서 남부럽지 않게 살게 되었습니다. 이제까지는 고아원의 다른 아이들과 같이 식사시간에는 배식을 받기 위해 줄을 서야했고, 놀이터에서 놀이터에서도 순서를 기다렸다가 한번 타고 또 기다려야했습니다. 또 잠을 잘 때도 잠이 안와도 억지로 잠을 청해야했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집에서는 식사도 식탁에 앉아서 하인들의 시중을 받으며 먹고 싶은 것은 얼마든지 자유롭게 먹게 되었고, 놀이기구도 갖고 싶은 것은 얼마든지 손에 넣을 수가 있습니다. 저녁에 자기 방에 들어가면 억지로 잠을 청할 일이 없이 책을 보든지 텔레비전을 보든지 하다가 잠이 오면 잠자리에 들면 됩니다. 그런데 한 가지 규칙이 있습니다. 항상 가족과 함께 식탁에서 식사를 하고 식사 때 아무렇게나 먹는 것이 아니라 예의를 갖추어 먹어야합니다. 또한 말씨도 이제와는 다르게 부잣집 도련님답게 점잖게 말을 해야합니다. 복도를 다닐 때도 조심스럽게 다니고 다른 사람들과 만났을 때 항상 웃는 얼굴로 대해야합니다. 잠을 잘 때도 침대 위에서 잠을 자야합니다. 편하다고 바닥에서 뒹굴며 잘 수가 없습니다. 새로 입양된 아이는 풍요로운 삶이 시작됨과 동시에 이제까지의 삶의 방식을 바꿔서 새로운 가정의 법도를 따라서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우리가 하고 싶은대로 해도 상관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고 구원받은 후에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아야합니다. 예수님을 믿고도 여전히 이전의 생활방식대로 산다면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지 못함으로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성도가 세상초등학문을 따르는 것은 안된다고합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와 연합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에 참여한바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생명으로 살게 된 성도는 이제는 당연히 우리의 육체가 속한 이 땅의 것을 생각하기보다는 먼저 하늘의 것을 생각해야만 할 것입니다.


1. 위엣 것을 찾으라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골 3:1-2)


    위의 것을 찾으라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로 인해 성립된(벧전 1:3) 신자들의 영적 중생을 의미합니다. 성도가 구원을 얻는 일에 있어서는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충분합니다. 우리의 다른 노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이외에 것에서 무엇을 찾으려는 노력을 중단해야합니다. 영적으로 중생한 자들은 필연적으로 말일(末日)에 부활의 복도 받게 되어 있습니다(요 6:44).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성도는 그리스도의 부활하심과 같이 부활의 생명으로 살게 되어 영적으로 이미 살리심을 받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며 장차 그리스도의 재림시에는 육체도 함께 부활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산 소망을 갖고 있는 성도는 마땅히 땅엣 것이 아닌 위엣 것 즉 하늘엣 것을 찾아야합니다. 성도들이 ‘위엣 것을 찾아야할’ 이유는 ‘거기에(하늘에)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즉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우리를 위해서 중보기도를 해주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함께 죽었고, 그의 부활하심과 합하여 함께 부활하였습니다(롬 6:5). 우리는 영적으로 부활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한 새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인 것 곧, 하늘에 속한 것을 구할 근거를 지니고 있습니다(마 6:33; 갈4:26 ;빌 3:20). 우리의 머리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우리는 그의 계신 곳을 바라보며 거기 속한 것들을 탐구해야 됩니다. 이것이 곧, “위엣 것을 찾으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위엣 것”이란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것은 승리하신 그리스도와 그리스도 중심한 영적 사실들을 가리킵니다(요 8:23; 빌3:20-21). 우리가 믿음에 의하여 위엣 것을 사모하며 그것을 찾아 거기서 살면 참 자유(고후3:17; 갈4:26)와 참 지혜(약 3:17-18)를 얻게 됩니다. 그것은 골로새의 이단자들이 선전하는 의식주의나 고행주의와 달라서 그리스도의 승리에 의한 성결과 평강과 영적 자유를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찾으라”는 말은 ‘계속 힘들여 찾음’을 의미하는데, 이 말을 보아서도 구원의 은혜를 받는 것이 사람의 노력과 긴밀하게 관계되어 있습니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것이지만 그것을 받는 데는 우리의 노력이 요구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심’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음과 하나님의 천국 통치에 동참하고 있음을 가리킵니다(눅 20:43; 행2:35; 롬8:34; 엡1:20; 히10:12; 계3:21). 예수님이 거기 계시니 만큼 우리는 우리의 찾는 "위엣 것"을 예수님의 중보사역에 의하여 얻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받을 복의 원천이시고 방법이십니다(롬8:34).


    위엣 것을 생각 하고 땅의 것을 생각지 말라


    이제 단순히 “위엣 것을 찾으라”는데 그치지 않고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생각하라’란 말은 ‘애착심을 가지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위에서 것을 생각한다면 땅엣 것을 생각하지 말아야합니다.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는 말은 염세주의(厭世主義) 사상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땅의 것에 지나친 애착을 가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땅 위의 것들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니고, 그것들을 오용(誤用)함이 악한 것입니다(고전 6:12,10:23). 우리가 발로는 땅을 딛고 머리는 위를 향하였으니, 천상(天上)의 것을 사모하고 섭취하여 땅 위의 것들을 하늘 위의 것보다 더 사랑하고 그것들에게 복속하는 행동들은 죄악입니다(빌 3:19).

    우리의 진정한 소망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의 은혜로 말미암아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의 영광의 자리에 들어갈 소망을 가진 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되었다면 성도가 그리스도의 계신 하늘을 바라고 소망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소망을 갖게 될 때 위엣 것을 생각합니다. 그리스도가 계신 하나님 나라가 어떠한 곳인지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누리게 될 축복은 무엇인지 그리고 비록 이 땅에 살면서도 하늘의 축복을 누리는 삶은 어떠한 것인지 생각합니다.

    그 때 성도는 이 땅엣 것을 생각지 않습니다. 물론 이 세상을 살면서 전혀 땅엣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우선순위가 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일에 최우선이 하나님 나라의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또한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마 10:37)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보다 더 생각하는 것은 이 땅엣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인 생명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골 3:3-4)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인 생명


    성도들이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하지 말라”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 인생의 유일한 소망인 영생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그들의 대표자이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서 그와 함께 죽었습니다. 그 죽음은 첫째는 죄에 대하여 죽음이고(롬 6:6,11), 둘째는 율법에 대하여 죽음이고(롬7:4), 셋째는 세상에 대하여 죽은 것입니다. 그것은 곧, 땅엣 것을 애착하여 추구하고 의지하는 이 세상 생활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입니다(갈 6:14). 그리스도의 성도는 원칙적으로 땅엣 것에 대하여 전혀 죽은 자와 같은 관계를 가집니다. 성도는 하나님이 계신 곳을 영원한 집으로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오로지 그곳을 생각하고 바라보고 노력해야 됩니다.

    성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대표되어 골고다의 십자가에서 죄에 대하여 죽은 참 성도들은, 또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에 동참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그의 지체(肢體)된 참 신자들의 부활도 성립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는 신자들의 생명이 포함된 셈입니다.

    ‘하나님 안에’란 말은 하나님과 밀접하게 연합된 상태를 가리킵니다(요일 3:2). 그리스도 자신이 부활 승천하셔서 세상에 나타나지 않고 천졔(天界)에 감취어 계신 것과 같이, 그 안에 있는 신자들도 그러합니다. 그리스도는 대신원리(代身原理)에서 우리의 생명이니(4절),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사 감취었음과 함께 우리의 생명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생명은 우리의 생명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신자의 영적 생명의 신비성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날 생명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아야할라’ 두 번째 이유는,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우리도 영광중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대표자이신 그리스도의 부활과 영생은 곧, 우리의 부활과 영생으로 그와 함께 나타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부활의 원인자(原因者)이시요 또 원천(源泉)이십니다(요 11:25). 그리스도가 ‘나타나신다’는 말은 재림(再臨)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의 초림(初臨)도 어느 정도 그의 "나타나심"이라고 할 수 있으나 재림에 비교하면, 그렇지 못합니다. 초림하신 그리스도는 인류의 일부가 보았거니와, 재림하실 그는 온 인류가 다 보게 될 것입니다(계1:7). 그러므로 사도들은 그의 재림을 가리켜 "나타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나타나실" 그 때에는 모든 사람들의 모든 행한 일들도 선악(善惡)간에 다 나타납니다(고전 3:13).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는 우리 신자들이 그와 같은 영광의 부활을 얻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미천하던 우리가 영광스러운 존재로 나타날 것입니다(롬 8:18-19; 요일3:2).


3. 위의 것을 찾는 그리스도인의 생활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거기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골 3:5-11)


    땅의 지체를 죽이라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성도가 위엣 것을 찾기 위해서는 땅에 있는 지체를 죽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땅에 있는 지체는 곧, ‘음란과 부정과 사육과 악한 정욕과 탐심은 우상 숭배’입니다.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고 믿음이 성장해야하는데 그것은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는 것입니다. 즉 그것은 죄를 끊어 버리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인간 개조는 피상적인 것이 아니고, 먼저 죄악의 뿌리부터 단절해 버림으로(5절), 악한 행습들을 제거함에 이르고(8절), 선하고 아름다운 덕행을 옷입듯 하게 합니다(12-17). 다시 말하면, 그것은 먼저 죽고 그 뒤에 사는 것입니다. 곧, 악심과 악행을 죽이고 선하고 아름다운 새 생명을 가꾸어 냅니다. 우리 신자들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있는 것이니만큼, 세상 끝 날에 그것일 완전히 실현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땅 위에서 믿음을 착실히 지켜야 합니다. 하늘에 간직된 기업을 누릴 자들에게는 믿음이 필요합니다(벧전 1:5). 우리가 믿음을 잘 지키기 위해서는 우리의 죄를 끊어 버려야 됩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여기서부터 골로새 신자들에게 그들의 죄를 버리라고 말합니다.

    ‘땅에 있는 지체’는 우리의 부패한 성품의 각양 작용들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하반절의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을 가리킵니다.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는 것은, 악한 성품의 활동을 그것이 ‘아주 죽은 것처럼 영원히 정지시키라’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은 사람으로 하여금 땅엣 것들을 즐겨 하나님을 떠나 버리게 만드는 죄악들이기 때문입니다.

    여기 열거된 다섯 가지 죄악들을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하여 ‘음행’과 ‘탐심’으로 봅니다. 첫째로 성적 죄악들인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은 마음속에 일어나는 음란의 충동과 욕심을 가리킵니다. ‘음란’이란 말은 ‘부정’이란 말보다 범위가 좁은 말로서 불법적으로 취하는 성적 행동을 의미하고, ‘부정’은 성문제(性問題)에 대한 일체의 불합리한 언행을 가리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정 무서운 죄악은 음란입니다. 그 이유는, 이 죄악에 빠지는 자는 하나님의 성전인 몸을 더럽힘으로 하나님을 영구히 떠나기 쉬운 까닭입니다(고전 6:15-20). 둘째로 무제한의 소유욕인 ‘탐심’입니다. 탐심은 ‘우상숭배’와 같이 간주됩니다. 이것도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떠나게 하는 죄악입니다. 탐심의 소유자는 세상 것들에 애착하여 그것들을 추구하기에 전심전력하고 하나님을 떠납니다. 우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함”으로 하나님의 뜻이면 물질도 받을 수 있습니다(마 6:33). 그런데 이 말씀을 외면하고 물질을 먼저 구하면서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중요시하는 자들은 우상 숭배자들과 같습니다.

    땅에 있는 지체를 죽여야 할 이유는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기 때문입니다.’ 곧, "땅에 있는 지체"들은 위험하니 그것들 때문에 마침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끝까지 회개치 않는 자에게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그들을 그 범하는 죄 가운데 그대로 내버려두심이고(롬 1:18,24,26,28), 둘째는, 끝날 대심판 때에 그들을 영벌에 처치시키는 것입니다(계6:17). 죄인에게 장차 임할 하나님의 진노는 아주 확실합니다.


    이제는 모든 것을 벗어버려라


    우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습니다. 골로새 사람들이 중생하기 전에는 그런 죄악들이 그들의 방편이었던 것처럼 우리도 이전에 다 죄악 가운데 있던 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려라”고 경고합니다. 여기서 ‘이제는’이란 말은 개종하고 복음을 믿은 그 때를 가리킵니다. ‘이 모든 것들’은 "땅에 있는 지체들"곧, 모든 죄를 의미합니다(5절 하반).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는 말은 낡은 옷을 벗듯이 이 모든 죄들을 전적으로 내버리라는 말입니다.

    모든 죄는 “분과 악의와 훼방과 입의 부끄러운 말”입니다. ‘분’은 ‘노함’과 관련이 있습니다. ‘노함’은 외부에 폭발된 것이고, ‘분’은 마음속에 불타듯이 잠재한 것입니다. ‘악의’라는 죄악은 기타 모든 것들에게 원인(原因)관계를 가집니다. ‘악의’란 것은 남을 해하려는 독한 마음을 말함이니, 이것이 원인이 되어 남을 훼방하며, 남을 대면하여 욕하며, 혹은 남을 속임입니다. ‘훼방’이란 말은 하나님께 대하여 불경(不敬)하게 말함을 의미하는 때도 있으나, 여기서는 이웃이 듣지 않는 곳에서 그를 비방함을 의미합니다(롬 3:8, 14:16; 고전 4:31; 딛 3:2). ‘부끄러운 말’은 부정한 말(음탕한 말)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버릇없는 말을 의미합니다.


    새사람을 입었다


    그러나 성도는 이미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렸습니다.’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원칙적으로는 벌써 옛사람과 그 악행을 벗어 버렸으니만큼 그들로서는 그 죄악을 습성으로 범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옛사람’은 성령으로 중생되기 전의 사람이므로 옛사람이고, 타락하여 파상되었고, 또 부패해진(엡 4:22) 인성(人性)이므로 옛사악한 행습을 의미하는데, 일시적이 아니고 상습적으로 기탄없이 행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성도는 ‘새 사람을 입었으므로’ 모든 악행을 버려야합니다. 기질상(氣質上) 죄악 곧, 노함과 분을 제거하고, 또 언어상 죄악들 곧, 훼방, 욕설, 거짓말을 끊어 버려야 할 이유는, 믿는 사람들은 원리상으로 그 믿는 순간부터 옛사람(부패한 본성)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고 새 사람(중생된 사람)을 입은 사실을 인식하는 까닭입니다.(롬 6:6). ‘새사람’이란 말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중생된 자아(自我)를 가리키는 바, 고후 5:17의 "새로운 피조물"이란 말의 동일한 의미를 가집니다(갈 6:15; 엡 4:23-24).

    새사람은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실 적에 채택하신 모형이니(창 1:26-27),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개조하심에 있어서 역시 그 모형을 취하셨습니다. 이것을 보아서 우리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큰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자기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것은 그 이상 더 할 수 없는 지극한 사랑이요, 그리스도 안에서 제 2차로 인간을 개조하심에 있어서 또 그 같은 모형을 취하신 것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그 사랑의 불변성(不變性)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엡 4:24)입니다. 여기 "의와 진리의 거룩함"이란 말을 개역하면, "진리의 의(義)와 진리의 거룩함"이나, 곧, 진리가 소유한 의와 거룩함을 말합니다. 복음의 진리는 죽은 해골과 같은 생명 없는 지식이 아니고, 그것을 참으로 믿는 자들로 하여금 의와 거룩함에 이르게 합니다. 의(義)는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올바름이고, 거룩함은 하나님께 바쳐진 것을 말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는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은 자’입니다.  즉 성도가 진리의 지식에 이르도록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시는 영적으로 개조해주심을 말합니다. 곧, 하나님께서 인간을 새로 지으심에 있어서 그 모형은 자기의 형상인데, 그 방법은 인간으로 하여금 진리의 지식(복음 진리의 지식)에 이르도록 그 심령을 새롭게 하십니다. 복음 진리를 참으로 아는 데 이른 사람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형상(곧, 의와 거룩)으로 변합니다. ‘지식’이란 통속적 의미의 지식이 아니고, 성령의 역사로만 받을 수 있는 영적 통찰을 말합니다. 여기 '지식'이란 말이 의미하는 바는 이론상 지식이거나 자연적 지식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와의 연합한 생활에서 흘러나오는 신앙적 지식 곧, 영적 통찰을 의미합니다. 여기 "새롭게 하심을 받는"이란 말은 새로워짐이 계속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신자의 성화(聖化)가 단번에 성취되는 것이 아니고 점진적이고 계속적임을 말해 줍니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것은 신자가 악행을 끊은 결과로 하나님을 아는 그의 지식이 더욱 새로워진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악을 떠남도 하나님의 은혜로 되지만 그가 악을 떠날 때에 새 힘을 얻는 것도 확실합니다. 참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실행해야 그것이 축복의 원천으로 임합니다. 진리를 순종함은 믿음의 진실성입니다.


    성도는 누구나 성화해야한다.


    성도의 구원과 성화는 누구에게나 해당됩니다. “거기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헬라인"은 희랍 민족을 가리킬 뿐 아니라, 희랍 문화를 받은 모든 다른 민족까지를 포함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헬라인"은 성경에서 문화인들을 총칭하는 말입니다(고전 1:22). 그리고 "유대인"은 구약 종교의 특혜를 받은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킵니다(롬 3:1, 9:1-5). 그리스도 안에 있어서 헬라인도 그 문화의 특수 지위를 자랑할 수 없고, 유대인도 그 소유했던 종교상 특권을 인하여 이방인들을 멸시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구원은 문화상 발달이나 종교상 특권으로 말미암아 받아지는 것이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받는 은혜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상관없습니다. 할례받은 자 즉 종교의 외부적 특권과 관련된 자들과 또한 그것과 관련되지 않은 자들의 차이가 없습니다. 외형적으로 할례를 받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심령으로 중생하여 새 사람 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롬 2:29).

    "야인"이란 말은 말이 어눌하고 명료하지 못한 자란 의미로서, 본국인은 외국인의 언어를 그런 불명료한 것으로 간주할 것입니다. 헬라 문화를 받아 헬라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처지에서는, 헬라 문화권 밖에서 외국어를 말하는 자들을 볼 때에 그들은 "야인"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스구디아"란 말은 거칠고 무례한 사람을 의미하는바, 그 윗말 ‘야인’보다 더 미개한 자들을 가리켜 사용되었습니다. "스구디아"는 본래 흑해 북편 칼파디아 산 동쪽 지역을 가리키는 명칭이었습니다. 알렉산더대왕의 정복에 의하여, 아시아에도 구라파의 스구디아인과 같은 민족이 있었다는 것이 판명되었습니다. 따라서 동쪽 구라파와 중앙아시아와 북 아시아 전부가 스구디아인의 땅이었다고 추측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문명에 낙오됨이 심하였으므로 그들의 부족 이름은 야만인을 대표하는 말로 사용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새 사람이 되어 영생을 얻는 특권은, 문화인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야만인들까지도 똑같은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미개한 민족에 속한 신자들은 이 특권을 누림에 있어서 위축하거나 자포자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당시 사회는 노예를 학대했으므로 그들의 인권이 인정되지 못했습니다. 그런 사회제도 아래 있는 노예들에게 있어서, 복음은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구원이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결정하는 것은 어떤 문화의 특권이나 종교상의 외형적 특수 관계도 아니며, 민족적 우수성이나 사회상 지위도 아닙니다. 그것들은 우리도 구원을 얻게 할 부속조건도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일에 있어서는, 그리스도께서 "만유"(전부)이십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성립시키는 유일한 원인이시니만큼, 그가 이 원인의 전부란 말입니다. 그리고 그가 "만유 안에 계시니라"고 한 말은, 피조물 중에 그리스도의 주관과 권고를 벗어 날 것이 하나도 없으므로, 그는 ‘만유’곧, 헬라인, 유대인, 야만인, 스그디아인, 노예, 자주자 할 것 없이 모든 인류에게 유일하신 구원자로 계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성도는 누구나 성화의 자리로 나아가야할 것입니다.


나가는 말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존재 이유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는 것입니다. 즉 하늘에 소망을 둔 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에 소망을 두는 삶은 어떠한 모습입니까?

    먼저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음을 인정하고 하늘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빌 3:20) 우리의 기다림의 대상이 하늘에 계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그분과의 만남을 준비해야합니다. 그것은 성결의 삶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신랑되신 그리스도의 마음에 합한 자로서 준비되어져야합니다. 다윗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로 인정받은 것처럼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기 위하여 힘을 씁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비전이 무엇인지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을 알면 우리는 즉시 그 방향에 맞추어서 자신의 삶의 목표를 수정합니다. 그리고 그 일이 성취하도록 힘쓰며 최선을 다합니다. 그때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서 이 일을 성취해 나가야합니다.

    또한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나의 왕으로 나의 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 가운데 주님만이 나의 왕이 되십니다. 그분이 원하시는대로 언제든지 행하는 삶의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주님의 왕 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주님께 인정함을 받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사람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마 10:32) 이것은 전도를 통하여 나타납니다.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나의 왕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늘의 소망을 두는 삶을 살게 될 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조금 가지지 못하고 어렵다고 해도 힘들어하지 않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기쁜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하늘에 소망을 두며 살아 항상 주님 안에서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출처 : 센다바중앙교회
글쓴이 : kaporet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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