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7.23(주일예배)
하나님은 누구신가?
창세기 1:1
I. 들어가는 말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른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신들이 있습니다. 흰두교에는 절대자, 이슬람교에는 알라신, 불교에는 부처, 일본의 신도에는 진자에 조상신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만, 그들이 알고 있는 신(神)이란 실제는 하나님이 아닌 것을 신이라고 생각하는 것뿐입니다. 사도바울은 그것을 귀신이라고 말하고 신이라 칭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즉 신이 아닌 것을 신이라고 칭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누구신가? 라고 질문이 나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우리 인간을 창조하시고 축복하시고 인간이 죄를 지었을 때에 구원의 계획을 세우시고 메시야, 즉 구원자를 보내시어 구원해주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신 분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II. 하나님은 누구신가?
1.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1)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창 1:1)
성경에서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하는 것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조하시니라”(창 1:1)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에 대한 모든 것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창조는 하나님의 사역에만 한정되어 사용하는 단어로서 무에서 유가 이루어지는 상태를 말합니다.
“태초에”(베레쉬트)라는 말의 원래의 뜻은 하나님이 천지 창조를 개시함로써 시작된 역사적 ‘시간의 출발점’을 가리킵니다. 이는 창세기가 영원 전 사건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우주 및 인류가 탄생하는 시점으로부터 시작되는 태고사에 관한 서술임을 암시합니다.
“하나님”(엘로힘)은 '두려워하다'(알라) 혹은 '강하다'란 뜻에서 과생된 말로 곧 '두려워해야 할 강하고 능력 있는 자', '경외해야 할 최고 존재'란 의미입니다. ‘여호와’란 명칭이 ‘언약을 지키시는 자’, ‘택한 백성을 구속하자’란 의미로 쓰였다면(출 6:3)이 ‘엘로힘’이란 명칭은 성경에서 주로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강조할 때 쓰였습니다(출 20:1; 신 6:4; 삼하 22:32). ‘엘로힘’은 비록 형태는 복수형이나 실질적으로는 단수로 취급되었다는 점에서 오히려 이를 삼위이시나 일체이신 하나님의 존재 양식에 대한 암시로 볼 수 있습니다(26절).
“천지”는 문자적으로는 '하늘과 땅' 곧 지구를 뜻하나 여기서는 지구를 포함하여 은하계가 자리잡고 있는 전우주를 가리킵니다(2:1).
“창조하시니라”(바라)라는 말은 무에서 유에로의 완전한 신적 창조 행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순수한 의미의 창조를 가리킵니다. '바라'는 무에서 유에로의 존재 창조를 가리키는 1절, 생물에게 생명의 근원을 주시는 창조 행위를 가리키는 21절, 그전까지 전혀 없었던 영적 존재의 창조를 가리키는 27절에서만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의미와 그 기사의 정확성을 간추려 봅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창조 활동은 그분의 자유로운 의지에서 기인한 단독 사역이며, 둘째는 하나님의 창조능력은 제한적이거나 부차적이지 않고 완전한 무에서 유에로의 창조를 가능케 하는 새롭고 신비한 성격의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존재인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의 주인으로서 그 모든 것을 자신의 기쁘신 뜻에 따라 말씀에 의해 만드셨습니다(시33:6-9; 렘10:12). 넷째는 성경기록이 비논리적이거나 비과학적이라는 주장을 일소시켜 줍니다.
하나님의 천지 창조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에서 창조하심을 성경은 말씀합니다. 첫째 날 빛을 창조하시고, 둘째 날 궁창을 창조하시고, 셋째 날 바다와 땅으로 나누시고 풀과 씨 맺는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를 창조하시고, 넷째 날 궁창에 광명(해, 달, 별)을 창조하시고, 다섯째 날 궁창에 새를 바다에 물고기를 창조하시고, 여섯째 날 육축과 당에 기는 것과 땅의 짐승들 지으시고 마지막에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2)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하심(창 1:26-27; 2:7)
1)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창 1:26-27)
하나님께서 6일동안 천지를 지으시고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신 것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L26-27)
“우리”라는 말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 있으나 삼위일체에 대한 구약적인 표현입니다. 후대의 발전된 계시에 비추어 볼 때 합당한 해석은 창조 사역에 나타난 각 위(位) 성부, 성자, 성령의 완벽한 협력을 나타낸 말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형상, 우리의 모양대로” '형상'(첼렘)과 '모양'(데무트) 이 두 단어는 유사한 단어로서, 비슷한 말을 연속 사용하여 강조의 효과를 나타내는 히브리 수사법을 반영한 것입니다. 그러나 굳이 분류하자면 '형상'(image)은 어떤 사물과 그것을 그린 그림이 서로 닮은 것처럼 인간과 하나님간에 찾아 볼 수 있는 구체적인 닮은꼴을 가리키며 '모양'(likeness)은 추상적인 면에 있어서의 유사성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간 전인(全人)이 하나님의 성품의 영향을 받아 지음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시 8편; 겔28:12). 이러한 사실은 (1)인간이 저급한 상태에서 고등한 상태로 진화되었다는 진화론의 허구성을 깨우쳐 주며, (2)모든 피조물들 가운데 하나님과의 교제 대상으로 인간만이 선택되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엡 4:23, 24; 골 3:10).
“사람”(아담) 창조 사역의 절정은 사람의 창조요, 창조의 면류관 역시 사람입니다. '사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담'은 이중적인 뜻을 갖고 있습니다. 첫째는 보통명사로서 일반 사람을 가리키며, 둘째는 고유 명사로서 최초의 사람인 아담을 가리킵니다. 한편 '아담'이란 말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으나, '땅'에서 유래한 것, 즉 인간이 흙으로 만들어졌음을 반영한다는 견해가 가장 타당합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은 모든 만물을 다스리는 왕같은 존재로서 지음받았음을 말씀합니다. “다스리게 하자”는 '주권을 잡다', '지배하다', '세력을 떨치다', '통치하다'라는 뜻, 즉 인간이 다른 피조물들을 주관할 수 있는 권위와 능력을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고등한 존재로서 다른 피조물들에게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온 우주의 왕으로서 인간을 이 땅을 통치하는 왕의 대리자로 세우셨다는 말씀입니다.
2)남자와 여자로 지으심(창 1:27)
하나님이 자기형상대로 인간을 지으실 때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었습니다. “여자”는 남자와 구별됨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6:19). 본절에서 남자와 더불어 여성의 창조를 특별히 언급한 것은 창조시부터 남녀 간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음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3)사람으로 생령이 되게 하신 하나님(창 2:7)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 흙으로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서 생령이 되게 하시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 2:7)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는 인간의 전인격적인 창조에 관해 기술한 1:26, 27과는 달리 본절은 특별히 인간 육신의 창조에 관해 기술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흙”(아파르 민 하아다마)은 직역하면 '땅의 티끌', 즉 '먼지'란 뜻입니다. 이처럼 인간 육신의 구성체가 먼지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부여해 주신 영혼을 떠난 인간의 가치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임을 교훈해 줍니다(3:19 ; 벧전 1:24).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인간 생명은 하나님께서 직접적인 방법으로 부여하신 '생기'로부터 유래되었음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생기”(네솨마)는 '영혼'(잠 20:27), '호흡'(사 2:22), '기운'(욥33:4) 등으로도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인간의 '혼'을 의미하나 여기서는 모든 생명체의 '기식'(氣息)을 의미합니다.
“불어넣으시니”(나파흐)는 ‘숨을 내쉬다’, ‘부풀리다’, ‘불붙이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 육체에 생명의 근원되는 자신의 기운을 불어넣으셨다는 점에서 인간 몸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고전 6:19).
“생령”(네페쉬 하야)은 '숨', '호흡'을 뜻하는 '네페쉬'와 '생존', '존재'를 의미하는 '하야'가 합해서 된 말로 ‘살아 있는 존재’란 뜻입니다. 물론 '네페쉬'가 다른 곳에서 '혼' 또는 '영혼')을 가리키는 뜻으로도 쓰였으나 여기서는 단순히 '호흡'이란 뜻으로도 쓰였습니다. 따라서 '생령'이라는 말은 인간이 '영혼'을 지닌 존재를 증거하는 직접적 증거 구절은 아닙니다. 인간의 영혼은 오히려 1:26의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란 말에 강력히 암시되어 있습니다. 여기 '네페쉬 하야'가 인간이 영적 존재임을 직접 언급한 구절로 오해되어서도 안되지만, 동시에 인간도 다른 동물들과 같이 '네페쉬 하야'가 되었긴 하나 특별히 하나님의 독특한 방법에 의해 창조 되었다는 차이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2. 인간을 축복하시고 교제하길 원하신 하나님
(1)인간을 축복하신 하나님(창 1:28)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축복하시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8)
“정복하라”( 카바쉬)는 '발로 밟다'(미 7:19), '복종케 하다'(민32:22)란 뜻으로, 이는 땅을 자신의 것으로 취급하여 마음대로 행해도 좋다는 뜻이 아니라 선한 목적을 좇아 땅 속에 포함된 광대한 자원을 개발하며 유용하게 이용하라는 문화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축복하시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땅을 다스리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켜나가기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2)에덴 동산에 사람을 두신 하나님(창 2:8)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축복하시는 구체적인 방법으로 먼저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하여 특별한 장소를 만드시고 그곳에 인간을 두시었습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동산이 에덴동산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창 2:8)
“동산”(간)은 '울타리를 치다'(가난)에서 파생된 단어로 본래는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는 안전한 장소'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70인역은 이를 '낙원'(파라데이소스)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한편 세계 여러 민족의 설화를 살펴보면 인간의 최초 거주지가 낙원이었다는 것이 의외로 많은데 이는 인류의 원조가 살던 에덴동산에 대한 변형된 전승들이라 하겠습니다.
(3)에덴의 풍요함과 아름다움(창 2:9-14)
하나님께서 만드신 에덴동산의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이 2:9-14에서 그려지고 있습니다. 먼저 그곳에는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허락하셨던 최초의 양식은 동물이 아닌(9:3) 식물이었다는 점을 기억할 때(1:29) 이는 분명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푼 또 다른 세심한 배려입니다. 이는 인간의 노동의 대가로 항상 풍성한 수확을 얻도록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죄를 지은 후 땀을 흘려 수고하여야 먹을 것을 얻는 저주와 삶과 대조되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에덴동산에는 “생명 나무”(에츠 하하임)가 있었습니다. 일차적으로 이 나무는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전제로 인간 생명을 영속시키며 늘 강건한 힘을 공급해 주는 과실나무입니다(3:22). 생명나무에 대하여 칼빈은 주장하기를, 이 나무는 아담과 하와가 그 과실을 먹을 때마다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기억토록 해주는 성례전적 의미를 지닌 나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께 범죄하므로 더 이상 이 같은 하나님의 선물을 맛보지 못하는 비극을 초래하였던 것입니다(창 3:22-24).
그리고 동산 가운데에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었습니다. 이 나무의 존재 가치는 인간이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애완동물로서가 아니라 자유 의지를 소유한 전인격체로서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데 있었습니다. 즉 이 나무는 인간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서 인정하고 자신은 하나님의 피조물인 것을 기억하도록 두신 것입니다. 인간의 행복과 평안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할 때만 얻을 수 있는 것을 말씀합니다.
10-14절에 나타나는 에덴동산의 아름다운 모습은 에덴동산이 하나님의 동산임을 상징하는 표현들입니다. 그곳은 네 개의 강이 흐르고 금과 보석이 나는 곳으로 나타납니다. 특히 보석들은 제사장들의 옷에 장식된 보석들과 유사합니다. 베델리엄은 보석으로 주로 인도에서 생산된다. 호노마는 대제사장의 흉배를 장식하는데 쓰였다.
(4)인간을 에덴동산지기로 두심(창 2:15)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에덴동산의 동산지기로 두시고 그곳을 다스리게 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사 그곳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창 2:15)
“그 사람”( 하아담)은 하나님께서 친히 육과 영을 접목시켜 만드신 바로 '그'를 뜻하는 말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이끌어”(이카츠)라는 말은 ‘라카흐’(취하다, 데리고 오다, 지정해 두다)에서 기원한 말로서 ‘정신적인 지도자’라는 의미가 강합니다. 즉 단순히 육체만을 인도하는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담의 전인격을 붙잡으시고 당신이 지정해 두신 곳으로 친히 이끄셨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강압이나 억지에 의하지 않고 그의 자발적인 의사(물론 하나님은 이 의사에서 적극 개입하셨음)에 따랐다는 점에서 신(神). 인(人)협력의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습니다.
“두사”(야니헤후)는 '쉬다', '머물러두다', '위안하다'의 야나흐'에서 유래된 말로서 외부의 침입이나 내부의 근심이 전혀 없이 절대 평안을 유지하는 가운데 살도록 거처를 마련해 둔다는 뜻입니다. 즉 인간은 하나님이 만드신 에덴동산에서 평안하게 살 수 있게 되었음을 암시합니다.
“다스리며”(레아베다흐)는 ‘아바드’(일하다, 경작하다, 봉사하다)의 단순 부정사로 아담의 평생 업이 땅을 중심한 노동이었음을 시사합니다. 여기서 노동의 원래 목적이 생계가 아니라 자연과 세계를 관리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노동(직업)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것이란 천직 의식을 가질 때 고귀하며 의미가 있습니다.
“지키게 하시고”(레솨메라흐)는 어근 '솨마르'의 뜻은 '울타리를 치다', '보존하다', '주의를 기울이다'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이 조금의 손상도 없이 보존될 수 있도록 세심한 주의를 아끼지 않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본절은 창세기 1:28에서 주어진 것과 동일한 '문화 명령'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신의 권한을 위임하시고 자신이 만든 모든 것을 관할토록 위탁하셨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즉 인간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만물을 다스리고 하나님의 동산을 지켜야할 의무가 있음을 말합니다. 따라서 인간은 만물의 주인이 아니라 청지기로서 세상을 정복하고 문화를 꽃피움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 드러낼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5)동산지로서 지켜야할 규칙(창 2:16-17)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에덴동산의 동산지기로 세우시면서 한 가지를 명령하셨습니다. 그것은 에덴동산 중앙에 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하나님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으로 접근해서는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범했을 때는 생명을 잃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6-17)
“명하여”(예차우)는 '차아'(명령하다, 지정하다, 맡기다)의 미래 강조형. 본절에 제시된 명령이 당시를 기점으로 해서 적용되는 것으로 도무지 거역하거나 불순종해서는 안될 지상 명령임을 보여 줍니다.
“임의로 먹되”(아콜 토켈)는 문자적으로는 '먹고 싶은 대로 먹되', '자유롭게 섭취하되'란 뜻입니다. 이 말 속에는 '생명나무'(9절)의 실과까지도 먹을 수 있을 만큼의 완전한 특권을 부여했음을 보여줍니다. 즉 인간에게 필요로 하는 모든 음식물이 주어졌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다음 절의 금지 조항과 조화되어 인간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모두 제공하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였을 때에 인간이 도무지 핑계치 못할 것, 곧 책임의 소지가 분명히 당사자에게 주어질 것을 포함하는 '자유에의 허락'입니다.
“먹지 말라”(로 토칼)는 단순 부정으로서 결코 먹어서는 안된다는 강한 의지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깨닫는 바는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 그 '실과'자체에 있지 않고 그것을 먹고자 하는 '의지'와 '행위'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순종과 불순종은 인간의 영원을 결정하는 핵심적 요소입니다(렘 7:23-28).
“네가 먹는 날에는”(베욤 아칼레카 밈멘누)은 먹는 '바로 그날 안에'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이는 명령 거부에 대한 하나님의 단호하고도 엄정한 심판의 확실성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준 절대 명령이자 인간과 맺은 최초의 행위 언약입니다. 즉 이는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것이 인간의 본분임을 깨우쳐 주기 위한 것일 뿐 아니라, 역설적으로 그 말씀에 순종하면 영원히 살리라는 약속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는 언약(호 6:7)입니다.
3. 인간을 구원하신 하나님
(1)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타락한 인간(창 3:1-7)
하나님께서 인간을 축복하시고 하나님의 동산인 에덴동산에 인간을 두시고 그곳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었는데, 인간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 따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깁니다. 즉 하나님을 하나님으로서 인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여기에 인간의 비극이 시작합니다. 인간은 타락하여 죄를 범했으므로 이제 하나님이 “정녕 죽으리라”라고 말씀하신대로 죽게 되었고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하고 저주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2)여인의 후손을 약속하신 하나님(창 3:15)
그렇지만 하나님은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심문하시고 뱀을 저주하시는 과정에서 인간에게 희망적인 약속을 하십니다. 그것은 인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도록 유혹하였던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여인의 후손이 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
이 ‘여인의 후손’은 장차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려고 이 땅에 메시야(구세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한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실 때 사단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으시도록 유대인들을 책동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인간들이 죄에서 주권을 받기 위해서 대속의 제물로 죽으신 것으로 인정하시고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며,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어 인간을 살리십니다.
“원수”는 '적대감', '증오감'이란 뜻으로 그리스도와 성도들에 대해 사단과 그의 하수인들이 갖게 될 악감을 의미합니다(요 15:18, 19). 그러나 그럴수록 우리는 보다 즐거워해야 하는데 그 까닭은 하나님 나라에서 받을 우리의 상이 커지기 때문입니다(마 5:12).
“머리”(로쉬)는 신체상의 '머리'뿐 아니라(48:14; 신21:12) 지위나 장소에 있어 '최고 높은 것'(대하13:12 ; 애1:5)까지 뜻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뱀이 최고귀한 신체 부위인 머리를 상하게 된다는 것은 그가 도저히 회복 될 수 없는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된다는 뜻입니다.
“발꿈치”(아케브)의 원뜻은 '끝부분'으로 신체 기능면에서든지, 지위면에서든지 별로 중요치 않은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따라서 여자의 후손이 발꿈치를 상하게 된다는 것은 그가 비록 해를 당할 것이긴 하나 그것이 치명적이지 못할 것임을 의미합니다.
(3)구원의 표로 가죽옷을 지어주신 하나님(창 3:21)
하나님께서는 여인의 후손을 약속하시는 것에 그치지 않고 구체적으로 인간의 수치를 가릴 가죽옷을 지어 입히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창 3:21) 가죽옷을 지어 입히려면 동물을 죽여서 그 가죽으로 옷을 만듭니다. 동물을 죽일 때 피를 흘리게 됩니다. 따라서 가죽옷은 인간의 죄를 가려주시기 위하여 인간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대 흘릴 피를 상징합니다.
“지어”(아사)는 '만들다'는 뜻 외에 '지정하다'는 뜻도 지닙니다(24:14 ; 시 104:19). 따라서 이는 (1)하나님께서 천지 창조를 하실 때처럼 직접 옷을 만드신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2)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지시하시고 또한 영감을 주셔 그들이 옷을 만들어 입도록 하신 것일 수도 있습니다. 여하튼 하나님께서 동물을 잡아 인간에게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신 사건에는 다음과 같은 주요 의미가 있습니다. (1)이것은 인간 죄를 속하기 위한 첫 번째 희생이자 구약 속죄제사의 원형입니다(레 4:13-221). (2)이는 장차 인류의 죄를 대신 담당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을 예표하는 원시적 사건입니다(롬 3:25).
(4)약속대로 메시야를 보내신 하나님(마 1:21,23)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사실에 대해서 여인의 후손을 보내시어 사단의 세력을 멸망시키시고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가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예표하며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었습니다. 그리고 약속하신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어 인류를 구원하시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내용이 마태복음 1:18-25에 기록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났습니다. 이는 죄없으신 몸으로 태어나시기 위함입니다. 21절에 보면 예수의 이름의 뜻이 나오는데 그 뜻은 ‘그가 자기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것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는 누가가 기록한 마리아를 향한 수태고지와 거의 흡사한 메시지입니다(눅 1:31). 여기서 '낳으리니'(텨세타이 데)란 말 속에 불변사 '데'가 사용되어 '그리고 지금'이라는 의미를 내포하며 20절의 내용과 연결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의 탄생에 대한 신적 기원을 재삼(again and again) 일컫는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로써 요셉은 두려움을 완전히 물리치고 오히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영광에 자신을 동참케 한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했을 것이다. 그는 여전히 사랑하는 마리아의 남편으로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마리아에게서 날 아들이 다름아닌 "기묘자(奇妙者)요, 모사(謀士)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요, 평강의 왕"(사 9:6)이신 메시야, 바로 그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름을 예수라 하라”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녀에 대한 명명권(命名權)은 아버지에게 있었습니다(창 4:25). 본 명령에서 하나님께서는 아이의 이름을 직접 지시하심으로 친부권(親父權)을 행사하고 계시며, 예수의 법적 아버지 요셉을 그의 양부(養父)로 임명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라온 아우투)은 유대인의 통치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왕적 권위를 내포한 말로서 본래 유대인을 가리키는 말이나, 유대인에게만 한정적으로 사용되지는 않았습니다. 세례요한과 예수는 이스라엘의 경건한 자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제자로 삼았으며(3:9;8:11), 따라서 이방인들도 '자기 백성'의 범주에 포함 됩니다. 즉 '자기 백성'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와 그 통치를 전인적으로 인정하는 모든 '메시야의 백성'을 의미합니다.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여기서 '죄'(하마르티아)란 말은 화살이 과녁에서 빗나갔다는 의미의 동사 '하마르타네인'에서 유래한 말로서 하나님의 뜻(과녁)에 인간의 의지와 행동(화살)이 빗나간 상태를 일컫습니다. 즉 인간이 하나님의 뜻보다 지날 칠 때나 모자랄 때 모두를 가리키는데, 예수께서는 바로 인간의 이 같은 연약함을 적극적으로 치유(healing)하고 덮어주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결국 이 구절은 독자들로 하여금 예수께서 오신 근본목적과 다윗의 왕권을 계승하여 메시야적 왕으로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통치의 참된 본질을 깨닫게 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로마의 속박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며, 그 멍에에서 초래한 모든 악으로부터 백성들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정치적인 메시야관올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들의 죄 가운데서(in)'-로마의 속박 가운데서가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죄로부터'(from)-바로 그들의 죄로부터-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의 '구원'은 보다 본질적인 구원, 즉 죄악으로부터의 완전한 구원을 의미합니다. 신약에서 주로 소개하고 있는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가 완성시키게 될 포괄적이고도 궁극적인 구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약속의 성취임을 말씀합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마 1:23)
이 말씀은 이사야 예언의(사 7:14)의 70인역(LXX)에 따른 인용입니다. 이 예언은 북이스라엘과 아랍의 동맹군이 침략해 올 때를 배경으로 합니다. 이때 여호와를 떠나 이방 앗수르에게 도움을 구하는 유다 왕 아하스에게 선지자 이사야가 책망하며 하나님께서 친히 그에게 '징조'를 주실 것이라 예언하는 장면입니다. 이 임마누엘은 한 아기요 한 아들이며, 그 이름은"기묘자(奇妙者)요, 모사(謀事)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요, 평강의 왕"(9:6)으로서 다윗의 위(位)에 앉아 나라를 굳게 세우고 영원토록 공평(impartiality)과 정의(justice)로 왕국을 보존하실 것입니다(9:7).
“처녀”는 이사야서 7:14에서 이미 예언된 본 구절은 '처녀 논쟁'(알마 논쟁)로 유명합니다. 결국 '감추다', '숨기다'는 뜻의 '알람'에서 유래한 '알마'는 처녀성의 계속적 유지에 관심을 둔 용어인 '베툴라'와는 달리 남자와는 격리되어 순결히 자라온 처녀, 곧 동정녀임을 확증지을 수 있습니다. 또한 마태복음의 문맥의 전후 관계를 살펴 볼 때에 '처녀'는 마리아가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눅 1:34)라고 한 것처럼 '동정녀'를 의미합니다.
"임마누엘"은 '예수'를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사용되기보다 성부 하나님에 대한 성자 하나님으로서의 그분의 위격(位格)과 그분의 사역의 한 단면을 암시한 용어입니다(사 7:14). '임마누엘'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메시야와 예수가 되실 뿐 아니라 그분이 곧 죄악으로 인해 절망가운데 있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친히 이 땅에 내림(來臨)하신 하나님,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God with us)분이심을 강조한 호칭입니다. 실로 죄로 인해 원수되었던 하나님과 인간들을 화해시키기 위해 십자가에서 화목제물이 되어 주실(요일 4:10) 중보자(中保者)이신 예수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다가(요 1:14)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시는(마 28:20) 영원한 하나님 그자체이십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죄사함을 받고 그분의 실존(existence)을 날마다 인정하는 백성들은(21절) 모두가 하나님과 더불어 살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5)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요 3:16)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시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의 결과는 영생입니다. 즉 하나님이 자기백성을 구원하실 때 하나님의 백성들이 소유할 것은 영생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심이니라”(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세상'을 뜻하는 헬라어 '코스모스'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한 온 인류를 가리킵니다. 유대인의 전통적인 사고방식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은 선민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되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이 민족이나 계급을 초월하여 모든 인류에게 미친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힙니다. 이는 곧 복음의 보편성과 그 맥을 같이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개방되어 있지만 그 은혜를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은 오직 믿음뿐입니다. 그리고 본절에는 독생자를 보내신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동기가 된 것임이 밝혀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신 것은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입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궁극적인 목표가 바로 믿는 자의 구원에 있음을 15절에 이어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멸망'과 '영생' 사이에 어떠한 중립적인 선택은 없으며 그것은 절대적인 양자택일의 문제입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품을 떠나 살아가는 자들은 필경 절망과 파멸로 치달을 수밖에 없게 됨을 암시합니다. 그들의 모든 수고와 노력은 허망하며 하나님과의 친교에서 배제된다는 것은 곧 죽음과 멸망을 뜻합니다.
4. 하나님 백성을 축복하시는 하나님
(1)아브라함을 축복하신 하나님(창 12:1-3)
하나님께서 자기백성을 구원하시려고 구원의 계획중에 특별히 부르신 사람은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하나님은 그에게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당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 12:1-3)
“땅의 모든 족속이...얻을 것이니라” '복의 근원'(2절)에 대한 보충, 확대 설명입니다(갈 3:8). 축복은 타락 결과 인간에게 주어진 저주(2:17;3:16,17,18,19)와는 정반대되는 것이니, 이러한 축복은 단순한 물질적 축복 뿐 아니라 죄를 사해 주는 영적 축복을 포함합니다. 즉 본질은 아브라함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구상의 모든 민족이 자신의 죄에 대하여 해결받고 진정한 삶의 축복을 누릴 수있게 되리라는 복된 언약입니다(눅 24:47).
(2)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축복하시는 하나님(갈 3:29)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축복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에게까지 미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고 아브라함의 유업을 받게 되었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받을 자니라”(갈 3:29)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 진정한 의미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는 '그리스도께 속한 자'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자'는 신분이나 사회적 지위나 인종에 관계없이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主)로 영접한 자를 가리키는 관용구였습니다.
(3)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주시는 하나님(계 21:1-7; 22:1-5)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유업, 즉 그리스도인들에게 약속하신 유업은 하나님 나라의 유업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움을 요한계시록 21:1-7과 22:1-5에서 설명합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 마른 자에게 값 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계 21:1-7)
“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 나무가 있어 열 두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계 22:1-5)
III. 적용: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삶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우리 인간을 창조하시고 축복하시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나님의 동산에서 평안하게 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범죄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인간들은 평안을 상실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구원의 계획을 세우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어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축복을 우리에게도 주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축복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묵상합니다.
첫째, 하나님이 천지를 지으시고 나를 지으신 나의 아버지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지으셨듯이 나의 영혼을 지으신 것을 믿고 그분이 나의 아버지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 것(요 1:12)을 믿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면 내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둘째, 하나님이 나를 죄악에서 구원하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내게 영생을 주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생을 받았음으로 이제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을 반드시 주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축복을 우리가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브라함과 동일하게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성경에 약속하신 모든 축복을 주실 것을 믿고 구하는 것입니다. 믿고 구할 때 구한대로 주신다고 약속하신 주님의 약속처럼 우리에게 축복하십니다. 먼저 영적인 축복으로 나라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고 또한 우리의 육적인 것도 날마다 하나님께 구하며 나갈 때 들어주십니다. 그리고 결국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영원토록 하나님과 함께 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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