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된 인생 마태복음 9:9-13 2008년12월28일(주일예배) “9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 9:9-13) 들어가는 말 이제 얼마 안 있으면 2008년도 역사의 한 장으로 넘어가고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한해를 보낼 때마다 사람들은 마음 한 구석에 허전함을 느낍니다. 이것은 단지 나이를 한 살 더 먹은 것 때문만은 아닙니다. 자신이 한 해를 정말 보람있게 살았는지에 대해서 자신이 없기에 아쉬움과 허전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열심히 산다고 다 보람있게 사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최근 아이들을 프로 야구나 축구선수로 만들기 위해서 프로 선수들의 운영하는 캠프에 넣어 훈련받게 하는 부모들이 늘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자신이 목표하는 선수를 본받아서 훈련을 받습니다. 어떤 사람은 어릴 때 고아로서 소매치기에 의해서 자라나게 되어서 나중에 소매치기 왕이 되어서 많은 죄를 지었다가,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를 만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고 변화되어서 복음 전도자가 되었다고 간증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는 인생을 열심히 살았는데 잘 못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그의 인생은 달라집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본문에 소개되는 마태는 마태복음의 저자입니다. 만일 마태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는 세리로서 자기 인생을 살다가 죄인으로서 그의 인생을 마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주님의 제자가 되고 복음 전파를 위하여 헌신하다가 끝내는 마태복음을 썼습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쓴 복음서이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메시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구약의 성경을 다른 복음서에 비해서 가장 많이 인용하면서 쓴 책입니다. 이처럼 놀라운 저작이 나오게 된 것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1. 나를 좇으라. 세리 마태를 부르신 예수님 예수님이 마태를 만나시는 장면은 정말 극적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역을 다니시며 전도를 하시다가 갈릴리 호숫가의 가버나움 지방의 변두리에서 마태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십니다(막 2:13, 14). ‘마태’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선물'이란 의미를 가진 '맛다냐'(대상 9:15)에서 유래한 것으로 봅니다. 마가와 누가는 세리 마태를 '레위'란 이름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12제자의 명단에는 그를 '마태'란 이름으로 기록하였습니다. 이는 유대인들의 경우에서 흔히 볼 수 있다시피 동시에 두 서너개의 이름을 가졌던 때문인 것 같습니다. 아마도 레위는 소명받기 전의 이름이고 마태는 소명 후에 부여된 호칭인 듯합니다. 마태 자신은 '마태'란 이름만 사용하고 있습니다. 마태가 ‘세관에 앉았다’는 말은 그 일에 종사하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당시 이곳 세관은 그 당시 유대를 속국으로 하고 있던 로마를 위해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곳이었고, 분봉왕 헤롯 안디바의 정치 자금의 출처이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 이곳 가버나움은 상업과 교통이 발달했었던 다메섹과 갈릴리의 해안 도시들과 연결되는 길목에 위치했습니다. 따라서 육상 및 해상으로 운반되는 상품들에 대해 관세를 부과하기에 적합했던 곳입니다. 당시 세관은 대로로 통행하는 상인들에게 관세를 부과키 위해 길가나 마을 입구에 간이 건물로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이곳 관리들은 밤낮없이 세관 업무에 종사했을 뿐 아니라 거의 모든 상품에 대해 세금을 부과했습니다. 실로 그들은 세금의 강제, 부당 징수 등으로 유대 사회 내에서 가장 악질적 인물 중의 하나로 평가되기도 했습니다(5:46). 마태는 세관에 앉아 있으면서 자신의 직업에 대해서 고통을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직업이 로마의 세금징수 대행 역할을 함으로 인해 사람들의 비난을 받고 있음을 느끼면서 항상 세리의 직업을 청산하고 인생의 새로운 일을 찾고 싶어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관에 앉은 마태를 보시고 그에게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마태의 괴로워하는 마음을 보시고 그에게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새로운 인생을 살고 싶어하는 마태를 부르신 것입니다. 여기서 '좇으라'는 말은 ‘조금도 지체하거나 주저없이 당장 좇으라’는 뜻입니다. 이는 신앙 결단의 시급성을 강조한 말로서 ‘내 제자가 되라’는 의미와 상통합니다(4:19; 19:21). 마태는 예수님이 자신을 향해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즉시 ‘일어나 좇습니다.’ 이는 미련이나 후회가 있을 수 없는 과거와의 완전한 단절을 나타냅니다. 마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의 직업으로 인해 고통을 당하던 마태에게 예수님의 부르심은 새로운 빛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즉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것입니다. 마태를 부르신 예수님은 동일하게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죄의 어두움에 있던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에게 빛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잔치에 초청한 마태 예수님을 따르게 된 마태는 예수님을 위하여 잔치를 배설했습니다. 마태는 이제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단한 후 그의 동료들과 죄인들을 불러서 예수님과 그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합니다. 이것은 마태가 자신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함께 식사를 한 것을 보아, 마태가 예수님을 위해 베푼 잔치는 일종의 송별회 성격을 띤 것 같습니다. 즉 마태는 이 자리에서 자신의 옛 생활을 모두 청산하고 새 삶을 시작함과 동시에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제자의 길을 걸었던 것입니다. 자신은 더 이상 세리의 삶을 살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동료 세리들에게 작별을 고하는 것이요 모든 사람들 앞에 죄를 청산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동료 세리들과 죄인들에게 예수님을 만나게 해주는 전도 현장이고 합니다. 당시 세리는 창기와 함께 죄인으로 불리는 부류였습니다. 세리는 비애국적이고 또 욕심많고 부정직한 세관원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백성들로부터 죄인 취급을 당했습니다. 마태는 바로 이 자리에 옛 동료들과 세속적 친구들을 초대하여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말씀을 듣도록 의도했던 것입니다. 자신만 믿고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만난 예수님이 얼마나 놀라운 분이신가를 그들에게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모습을 누가는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눅 5:29)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가 '큰 잔치'란 말을 표현하지 않고 있는 것은 역시 그가 자화자찬에는 매우 인색한 겸손한 사람이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는 부분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한없이 겸손하신 주님과 더불어 이와 같이 겸손한 주님의 제자의 모범을 또한 본받아, 자기를 내세우고 자신을 칭찬하는 일에는 극도로 인색한 반면, 타인을 칭찬하고 타인을 내세우는 데는 적극적이어야 하겠습니다. '앉아 잡수신다'는 말은 유대인의 전통 식사법에서 보는대로 식탁에 거의 눕다시피 기대어 먹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유대 사회에서 함께 식사를 나눈다는 것은 상호 인정과 우의, 평화와 사랑, 언약 공동체의 확인을 의미하는 표시였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일반 백성들이 멸시하며 상종조차 하지 않던 이들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앉아 식사를 한 것은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관점에서는 가히 혁명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즉 그들은 율법을 어기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이방인과 같은 이 죄인들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할 수 없으며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지자라면 결단코 이들 죄인들과는 자리를 같이 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심판하고 벌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그들을 죄에서 해방시켜 자유함을 주려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사랑하시는 구주요 친구이며, 보통 사람들은 죄인들과 함께 함으로써 죄의 영향을 받았으나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의 악을 선으로 정화시키신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의인인척 착각하는 바리새인들보다 자신의 죄로 갈등하고 연민하는 영혼들에게 먼저 찾아가셨습니다. 불평을 말하는 바리새인들 그때 바리새인들이 보고 제자들에게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고 불평합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고 말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종교적 사회적으로 버림받은 패거리들과 함께 어울리는 이상, 그는 결단코 의인이 될 수가 없다는 논리인 것입니다. 그 당시의 시대적 배경뿐만 아니라 율법에 의해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불의를 도모하는 자들과 교제를 나누어서는 안되었던 것입니다. 이 당시 바리새인들은 식사에 초대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대신 그들은 자칭 율법의 수호자들로서 예수님의 기이한 행동에 따른 율법의 파괴 여부를 관찰, 감시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 같습니다. 따라서 분명 자기 의(義)에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던 이들 바리새인들은 세리와 죄인 또는 이방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은 율법을 더럽히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아마도 이와 같은 어처구니없는 잔치를 끝까지 지켜보며 예수님의 결점을 확보해 두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제자들에게 와서 죄인들과 어울리는, 따라서 죄인과 동류인 그를 어찌하여 선생으로 두고 따르느냐는 듯이 비난하면서 선생과 제자 사이를 이간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권능을 행하신 예수님께(2-6절) 직언할 수 없을 만큼 용기가 부족했던 자들이었습니다.
2.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병든 자의 의원이 되신 예수님 바리새인들이 제자들에게 불평을 말하는 것을 들으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바리새인들의 비난을 들으신 예수님은 그 당시 흔히 통용되던 본문의 속담을 그들에게 들이대셨는데, 즉 병든 자만이 의원의 도움이 필요하므로 의원이 있어야 할 자리는 병자들 곁이란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죄인들을 구하려고 오셨으며, 죄인들과 함께 있는 것이 자신의 임무임을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의롭다고 주장하는 바리새인에게는 예수님의 도움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절대 의인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롬 3:10). 오늘날 우리 시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죄인임을 안타깝게 여기고 절망에 빠져 있는 자들에게 필요한 분으로서 그들과는 언제나 함께 있지만, 자신의 영적인 질병인 죄를 깨닫지 못하고 의인인 체하는 바리새인과 같은 신앙인에게는 예수님이 함께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인들이 예수님을 반가이 맞이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들에게 간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다만 그들이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의 구원을 위해 그들에게 가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라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면서 율법을 빙자해서 예수님을 비난하려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성경을 다시 배워야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배우라”라는 말은 랍비들이 성경을 더 공부해야할 필요성이 있는 사람들을 깨우치고자 할 때 흔히 사용하던 상투어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성경에 능통하다고 자위하면서, 참 종교의 핵심이요 내용인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게을리하면서 외적인 의식과 형식에만 매달려 있었습니다. 즉 이들은 모양만 갖추면 종교적인 임무를 다 한 것이라고 착각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점을 지적하기 위해, 즉 그들이 성경도 참 종교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냉소적으로 랍비들이 흔히 사용하던 이 말을 빌어 바리새인들의 자만을 질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호세아서 6:6을 인용하시어 말씀하십니다.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긍휼'이란 말은 히브리어로는 '헤세드'인데 구약에서 ‘인자하심’, ‘자비’등으로 번역됩니다. 이 말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 맺어진 언약에 준한 사랑을 뜻합니다. 즉 여호와의 종교는 여호와의 사랑과 긍휼을 실천하는 종교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를 섬기며 여호와의 율법을 지킨다고 하는 종교 지도자들은 호세아 당시, 종교의 핵심은 잊고 형식적인 의식에만 치중했던 제사장들과 똑같이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등한시 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이와 같은 현상이 재현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은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이 불행한 일을 당한 자에겐 그가 누구든지 사랑의 손길을 펴서 그리스도의 긍휼의 정신을 보여주어야 할 터인데 이러한 예수님의 사랑을 보이지 않고 그가 이방인이며 불신자란 이유로 외면하는 경우가 허다하며 또한 바리새인들처럼, 기독교의 외형적 상식에만 어긋나도 마치 그를 사단의 자식인양 질타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서도 종교적 의식만 준수하고 외형적 틀 내에만 있다면 자기가 의인인 것처럼 목을 곧게 하는 것을 종종 보게 되는 것입니다.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라는 말은 제사가 필요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은 하나님은 종교적인 의식보다는 소외된 자에게 베푸는 사랑과 자비를 우선적으로 여기신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긍휼과 제사는 둘 다 필요하고 선한 것이지만 긍휼이 보다 더 선한 것이며 제사보다 먼저 베풀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제사와 같은 모든 희생 제물은 타락한 인간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무한하신 긍휼과 사랑을 지적하기 위해 의도되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사의 핵심과 내용은 긍휼과 사랑인 것이며 이것들이 결여된 제사란 아무런 실체가 없는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죄인을 부르시는 예수님 이어서 예수님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의인과 죄인 두 부류로 나누시기 위해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모두가 죄인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실로 인간은 본래부터 의롭지 못합니다(시 14:3; 롬 1:18-32; 3:10-18). 따라서 스스로 의인인 체하였던 바리새인들도 역시 죄인이었던 것입니다. 이들이 죄인이긴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부르려고 온 것은 아닌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오히려 방해하고 죄를 뉘우치려고 하지 않은 자칭 의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하신 말씀은 메시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 자신의 사역의 본질, 곧 죄인에게 은혜를 베풀며 버려진 죄인들을 구원키 위해 오셨음을 밝히신 말씀입니다. 누가는 이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2)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부르다’는 말은 ‘초대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죄인들을 불러 천국의 기쁜 잔치에 초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소외된 무리들과 교제를 나누는 것이 예수님의 고유한 사역인 것이며, 또한 그는 바로 이런 무리들을 구하고자 오신 것입니다. 나가는 말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님은 세리였던 마태를 부르시고 당신의 제자를 삼으셨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을 만나 후 그의 인생이 완전하게 바뀌었습니다. 한낱 세리였던 그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3년동안 훈련을 받고서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 성령 충만함을 받은 후 그는 복음 전도를 위해 힘썼고 마태복음을 쓰는 위대한 일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일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이 보잘 것 없고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마태를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마태의 세리로서의 삶을 다 용서하시고 그를 깨끗케 하시고 말씀으로 훈련시키심으로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복음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영접하고 구원받았습니다. 죄인이었던 우리도 예수님을 믿고서 우리의 죄를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깨끗하게 씻기심을 받았습니다.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이 나를 만나 주시고 나를 변화시켜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 우리가 마태와 다른 제자들처럼 되지 못하는 것은 단지 말씀으로 훈련받는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처럼 예수님과 함께 사는 삶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제자들처럼 예수님과 함께 살려고 애를 쓰며 말씀으로 훈련 받기를 힘쓰기만 한다면 우리도 제자들처럼 변화된 모습을 나타내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도 성경 말씀을 배우기를 힘쓰고 우리의 연약함을 그대로 주님 앞에 고백하면서 성령의 능력으로 살기를 원한다면, 예수님은 반드시 우리도 하나님 나라의 일군으로서 써 주실 것입니다. 한해를 보내면서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살 것을 새롭게 각오하며 새로운 해를 맞을 때 우리의 인생은 변화된 삶을 통하여 주변에 영향력을 끼치는 보람된 인생이 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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