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살아야할 이유
로마서 9:30-33
2008.11.23(주일예배)
“30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31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32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33 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9:30-33)
들어가는 말
오늘날 이 세상 사람들의 모습을 볼 때 우리 사회에서 사라져 가주었으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사회의 도덕이나 법을 아무렇게나 생각하며 자신만 좋으면 다른 사람들이 어떤 괴로움을 당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감정을 폭발시키기 위하여 사람을 죽이는 사람, 다른 사람들을 속여서 송금하도록 사기를 치는 사람, 정치인의 신분으로 기업에 무리하게 정치자금을 요구하는 사람, 공무원으로서 국가의 세금을 자신의 주머니돈처럼 사용한 사람, 자신의 성욕을 채우기 위해서 어린 소녀를 유혹하는 사람 등등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사건들이 계속하여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들의 신분이 어떠하든지 함께 살아가야할 사회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자라면 그들은 사회에서 분리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스스로 사회에서 떠나지 않으면 법으로 묶어서 분리시킵니다. 법의 판결을 통하여 일정기간 사회로부터 분리하기 위하여 형무소로 보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행한 일들은 자신의 신분이 누구인지,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하는지를 잊어버렸기 때문에 생긴 일들입니다.
성도들 중에도 자신의 신분을 잊어버릴 때 동일하게 실수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 들어오면 다 천국에 가는 줄 알고 아무렇게나 살려고 합니다만, 결국 그들은 실패하고 말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유대인들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어떻게 살아야할지 잊어버렸을 때 하나님 나라에서 제외되는 불행을 겪게 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구원의 계획에 따라서 하나님의 주권대로 사람들을 구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불신앙의 유대인 대신에 이방인들 중에 하나님을 믿는 자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원하셨습니다. 이방인들을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리에서 택하시고,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생각하고 있던 유대인들 중에서는 극히 일부만을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자들은 모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이방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 할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을 듣고 그대로 순종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았습니다. 그런데 많은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사실만을 의지하고 할례를 받은 것과 율법을 행함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이 없는 자는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구원받는 자는 남은 자들 즉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진 자들만이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1. 믿음에서 난 의를 얻은 이방인
사도바울은 의의 법을 좇다가 실패한 이스라엘과 단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고 하나님의 의를 얻은 이방인을 대조시키면서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역설적인 설명을 위해서 사용되었습니다. 사도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나니”라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철저한 율법 속에서 의의 성취를 기다렸던 유대인들이 버림받고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은 것은 인간의 죄악을 무시하고는 이해가 되지 않는 문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즉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된 인간은 복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새로운 변화를 받을 때에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변화는 오직 믿음에서 난 '의'로만 가능합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섭리는 흑암에 거하던 이방인들 속에서 복음으로 나타났으며 이는 그들의 믿음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이방인들이 얻은 의는 “믿음에서 난 의요”라고 말씀합니다. 이방인들이 의를 추구하지 않았다는 표현은 이방인 속에는 어떠한 윤리와 도덕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것은 이방인들이 유대인들 보다 못한 윤리 의식을 소유하고 있었다거나 또는 절대적 진리를 추구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겠으나 그 '의'의 개념은 윤리와 도덕이 아닌 구원의 개념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의'의 성취를 위하여 그토록 노력하였으나 '의'의 성취는 불행하게도 이방인 가운데서 성취되었습니다. 사도는 이것은 믿음에서 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복음에 순종하는 자가 약속의 자녀요 의의 자녀로 부르심을 입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인해 그들은 의로 여기신바 되었던 것입니다(3:28, 30).
오늘날에도 자신의 의로운 행위로서 의에 이르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의 종교가 그렇습니다. 불교에서 좋은 일을 많이 하면 극락에 간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좋은 일만 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좋은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있는 힘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행위의 의로움으로 천국에 간다면 이 세상에서 아무도 천국에 들어갈 자가 없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죽음이후의 갈 길을 알고 싶어서 자신이 착한 일을 하고 도를 익히면 극락에 가느냐고 주지승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주지승은 “사람이 죽어보지 않고는 어디에 가는지 알 수 있는가?”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의 종교는 우리에게 장래의 일을 대답해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분명하게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는 천국에 믿지 않은 자는 영원한 형벌 즉 지옥에 떨어진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무슨 좋은 일을 해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까지의 행위가 사람들이 보기에는 형편없는 삶을 살았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으로 깨끗이 씻음받고 그는 죄에서 해방되어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2. 의의 법을 좇은 이스라엘의 결말
의의 법에 이르지 못한 이스라엘
그러나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의에 이르려고 열심히 율법을 지키던 이스라엘 하나님의 의에 이르는데 실패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율법을 지킴으로써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을 곡해하여 잘못된 의를 추구한 데 있습니다(10:2). 유대인들은 누구보다도 열심히 의를 추구하였으나 율법을 그릇된 방법으로 해석함으로써 하나님의 의와는 동떨어진 개인의 공로와 업적을 자랑하는 육신의 법으로 전락시켜 버렸습니다. 그러나 개인의 의를 자랑하는 육신의 법으로써는 의를 성취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율법의 의는 육체의 법을 좇지 않고 영을 좇아 행하는 자들 속에서 성취되었습니다(8:4). 여기서 '좇다'라는 말은 경주(競走)와 같은 의미로 유대인의 열심있는 경주는 결국 이방인들에게 승리를 빼앗기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역설적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방인의 승리는 그들이 영적, 도덕적으로 타락한 가운데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은혜와 믿음으로써 의가 주어졌다는 칭의를 증거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의지하지 않고 의를 추구한 이스라엘의 행위가 얼마나 쓸모없는 것임을 폭로합니다.
부딪힐 돌에 부딪힌 이스라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의의 법을 좇아가는 삶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하고만 원인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기 때문”입니다. 즉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행위에 의지한 결과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하고 실패한 것입니다. 이 인용문은 이사야서 28:16과, 8:14의 내용이 복합되어 이루어진 말씀입니다.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이라 그것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사 28:16). “그가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거민에게는 함정, 올무가 되시리니”(사 8:14). 바울은 이 두 구절의 핵심을 매우 능숙한 솜씨로 배합하여 한 문장으로 인용하며, 이사야서 8:14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씀인 '거치는 돌'을 본문에서는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민으로 모든 특권을 누리던 이스라엘에게 제시된 복음은 거치는 돌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이사야는 앗수르의 침략 속에서 그들에게 구원으로 제시된 하나님의 손길을 반석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사 8:13-15).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은 반석으로 인하여 구원을 얻게 될 것이며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다른 나라의 도움을 구하는 자는 오히려 그 반석으로 인하여 넘어지고 부러질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로 제시된 복음은 완고한 유대인들에게 거치는 돌이 되고, 넘어지는 돌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능력과 행위의 율법을 자랑함으로써 스스로 함정과 올무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행위를 자랑하고 말씀과 복음에 순종치 아니한 유대 민족들은 그들에게 제시된 구원과 십자가를 오히려 그들을 넘어지게 하는 거침돌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벧전 2:8).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 땅에 구원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으로 두시는 것입니다.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이 '돌'은 시편 118:22에 기록된 '버린 돌'과 이사야서 28:16에 기록된 '시온의 기초 돌'로서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눅 20:17). 이것은 또한 다니엘서 2:34절에 기록된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 돌'로 이는 세상의 심판자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시온에 두신 돌은 멸망과 저주를 선포하는 돌이 아니라 구원과 영광을 선포하는 피난처이었으나 유대인들은 이 돌을 거침돌로 만듦으로서 스스로 저주와 멸망 가운데 처하게 되었습니다(고전 1:18, 23). 그들은 행위와 그리스도라는 양자택일의 선택에서 행위를 선택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게 되었으나 십자가는 오히려 그들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바울의 결론은 더욱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그는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누구를 막론하고 십자가를 의지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의를 찾으려 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않을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믿음 안에서 복음에 순종하는 자는 피난처이신 시온의 반석 안에서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3. 믿음으로 사는 삶
하나님의 구원은 열심히 하나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에게 나타나지 않고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드린 이방인에게 이루어졌습니다. 오늘날 성도가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도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성도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할지 묵상합니다.
첫째, 구원의 은혜를 감사함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때 그 믿음조차 하나님의 선물입니다(엡 2:8). 그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뿐입니다. 우리는 결코 자신의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실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엡 2:9). 만일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행위에 의해서 얻은 것이라면 자랑할 것이 있겠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선물로 믿음을 얻고 그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면 결코 자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구원받은 사실에 그저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주신 목적을 기억하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하게 하시기 위하여 구원하셨습니다(엡 2:10).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것은 단순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의 선한 일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선한 일은 그리스도 안에서 화평을 이루고(엡 2:13-14)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지어져가는 것입니다(엡 2:22). 교회공동체를 통하여 성도 한사람 한사람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로서 하나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만일 몸의 지체 중에 어느 한부분이라도 병든 부분이 있다면 몸 전체가 병을 앓게 됩니다. 교회공동체 중에 한사람이라도 병든 자가 있으면 그 교회는 병들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온 성도가 그 심령을 살리기 위하여 힘을 합하여 노력해야합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건강하여 온전하게 성장하게 됨으로 하나님나라가 점점 더 확장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힘쓰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에 맞추어 사는 삶인 것입니다.
셋째,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빌 2:12).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 안에 소원을 두시고 행하게 하십니다(빌 2:13). 우리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 안에 소원을 주실 때 순종하는 모습으로 나아가야합니다. 우리가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가고자 할 때 우리가 하나님의 흠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빛들로 나타나야합니다(빌 2:15). 우리가 세상의 빛으로 나타날 때 하나님의 모습이 세상에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일에 원망과 시비가 없이 행하여야합니다(빌 2:14). 우리의 모습은 세상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에 대해서 예수님도 우리를 세상의 빛이라 말씀하시면서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지 못할 것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마 5:14). 산 위에 있는 동네가 다 드러나듯이 믿는 성도들은 세상사람들에게 완전히 노출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5:16). 우리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모든 사람들에게 다 보입니다. 우리의 착한 행실을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내는 것은 우리가 세상에 빛의 자녀로 비치기 위함입니다.
넷째,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요 6:40).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는 무엇보다도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믿는 자마다 구원을 얻도록 하는 일에 우선하여야 할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특별히 사명을 받은 자만이 하는 일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구원받은 성도라면 누구든지 행하여야할 일입니다. 이와 같은 성도의 삶은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신 목적을 잘 깨닫고 사는 삶이요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의 참된 모습입니다.
나가는 말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이방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믿음으로 사는 일에 더 힘써야할 것입니다. 날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해주신 것을 감사하고, 하나님이 왜 나를 구원해주셨는지 생각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힘써야할 것입니다. 아직도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증거해야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성경말씀을 통하여서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기에 힘쓰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기 위해서 성령님을 의지해서 더욱 기도해야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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