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있는 사람이 되자
시편1편 1-6절
(2008년1월1일 신년예배)
들어가는 말
이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복 받기를 좋아합니다. 복을 받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진자에 가서 하츠모우데를 하고 절에 가서 빕니다. 그러나 사실 복이라는 것은 우리가 구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해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복에 대해서 말씀할 때 언제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조상이요 우리의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복을 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아브라함이 그것을 믿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어떻게 해야 복을 얻을 수 있는지 살펴봅시다.
1. 복있는 사람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시 1:1-2)
복이란 무엇인가?
성경에서 복을 말씀할 때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이 있습니다. 시편은 구약성경 전체를 압축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구약성경 중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편의 서두(序頭)에는 '복'이라는 말로써 시작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기로 약속하셨고 그 후손에게도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복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아쉬레이’는 '올바르다', '번영하다'라는 의미의 동사('아솨르')에서 유래된 복수 명사입니다. 즉 복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사는 성도가 받는 축복으로 그 하는 일이 올바르고 번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약 성경에서 '복'이란 뜻을 가진 단어로는 '바라크'와 '아솨르'가 있습니다. 먼저 '바라크'는 파생어까지 포함하여 415회 정도 나오는데 주로 하나님이 누군가를 축복할 때 하나님에 의해 사용되었거나(창 1:22; 2:3; 12:2; 17:16; 22:17; 25:11; 35:9; 민 6:27; 대상 13:14; 말 3:10), 신적 권위를 가진 대리인에 의한 축복선포 때 사용되었습니다(창 27:4; 47:9; 출 39:43; 신 1:11; 삼하 19:39). 이 단어는 또한 복을 간구하거나 축원할 때에도 사용되었습니다(3:8; 왕상 1:47; 잠 3:33). 이처럼 '바라크'는 하나님의 축복을 나타내는 가장 일반적인 단어로 인간의 선행과 관계없이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의 큰 긍휼과 자비를 인하여 인간의 산업과 후손과 육체에 내려주시는 복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단어의 또 다른 특징은 항상 하나님의 언약과 관계가 있다는 점입니다.
다음으로 '아솨르'는 거의 복수 연계형인 '아쉬례이'로 사용되었는데 구약에 총 44회 중 시편에 26회, 잠언에 8회가 나오고, 욥기와 전도서에서는 각각 1회씩 나옵니다(욥 5:17; 전 10:17). 이 단어는 신명기 33:29에서 맨 처음 나오는데 성문서 외에는 왕상 10:8; 대하 9:7; 사 30:18; 32:20; 56:2; 단 12:12에서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솨르'는 대개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 안에서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 대한 보상으로 내리는 복에 대하여 인간이 고백 혹은 기원하는 형식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한편, 70인역에서는 이 단어가 '마카리오스'로 번역되었습니다. 이 '마카리오스'의 독특한 특징은 하나님 나라에의 참여를 통해 오는 특이한 즐거움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구약 지혜 문학의 첫 권인 시편의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말씀, 즉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는 자의 복에 대한 선언은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하나님 나라의 복을 예표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대상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모든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사람'('이쉬')이라는 말은 원래 남성을 뜻하는 단어입니다(창 2:23). 그러나 여기에서는 모든 인간을 가리키고 있는 바, 여성도 축복의 대상에서 제외되지 않습니다. 특히 사람이란 단어는 그 앞에 정관사 '하'(the)가 붙은 단수인 반면 복이란 단어는 복수임을 주목해 보아야 한다. 이에는 누구든지 야훼의 율법에 따라 사는 그 사람만이 여러 형태의 복을 누릴 것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있습니다. 따라서 시편 기자는 복을 기원하는 큰 탄성으로 시편이라는 대단원의 막을 열면서 그러한 복을 누릴 사람의 삶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이 되려면
성경은 복있는 사람이 되려면 소극적으로 악을 떠나야하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함을 말씀합니다. 소극적인 면에서 악을 떠난 삶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먼저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삽니다. 여기서 '악인'('라사')은 '유죄한자', 곧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자'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하나님의 율법 앞에서 죄인으로 입증된 자를 말합니다.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율법 대신에 자신의 삶의 원리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꾀’('에차')입니다. 이 말은 의도, 도모 등으로 번역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는 인간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즉 세상 사람의 지혜를 따라가지 않는 것입니다.
두 번째 복있는 사람은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삽니다. 여기서 '죄인'('하타임')은 표적을 빗나가거나 또는 길을 잃어버린다는 의미의 '하타'에서 파생된 말로서 하나님의 율법에서 빗나간 자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하나님의 길(율법)을 가지 아니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갑니다. 그러므로 복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자들과 함께 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 번째 복있는 사람은 ‘오만(傲慢)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합니다. 여기서 '오만한 자'('레침')는 '조롱하다', '비웃다'는 뜻의 동사 '루츠'에서 파생된 명사형으로 '조롱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을 향하여 악한 말로 조롱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이들이 조롱하는 말들은 73:8-11; 사 28:15; 말 3:14 등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복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없다고 조롱하는 자들과 함께 하지 않고 그런 자들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적극적인 면에서 복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자입니다. 여호와의 율법('토라')은 유대인들에게 흔히 모세 오경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넓은 의미로는 하나님의 깊으신 뜻의 계시라는 점에서 이 용어는 하나님의 교훈 또는 훈계라는 의미를 가지며 아울러 하나님의 교훈은 기록된 말씀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성경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적어도 본시가 전체 시편의 서문의 성격을 가지므로 이 용어는 모세 오경뿐만 아니라 시편 전체에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교훈을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낫습니다. 그러므로 복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그 말씀에 순종하는 일을 즐거워하는 자입니다.
또한 복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입니다. 여기서 복있는 사람의 특성은 (1)하나님의 율법에 대하여 기쁨으로 반응하는 것이며 (2)계속적으로 그 율법과 관계를 맺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수 1:8). '즐거워하여'라는 말은 복있는 사람이 토라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기뻐하는 상태를 묘사하는 말입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 안에서 즐거움을 취하는 것은 바로 복있는 사람, 즉 의인만이 누릴 수 있는 행복한 삶의 핵심을 구성하는 요소입니다(112:1). 율법을 '묵상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조용히 속삭이며 읊조린 것으로서, 의인은 묵상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조용하게 암송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2. 복있는 사람이 받는 축복과 악인의 고통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시 1:3-6)
복있는 사람의 축복
하나님께서 복있는 사람에 대해서 축복하심을 말씀합니다. 복있는 사람의 받는 축복은 영적인 축복과 육적인 축복으로 나타납니다. 먼저 영적인 축복은 ‘저가 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즉 의인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항상 기쁨을 공급받는 상태를 시냇가에 심은 나무에다 비유한 것입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언제든지 생수를 공급받습니다. 여기서 '시내'('팔라그')는 팔레스틴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간헐천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수로(水路)를 말합니다. 복있는 사람은 하나님께 말씀을 통하여 끊임없이 은혜를 공급받아서 모든 삶이 윤택해집니다. 그것은 마치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항상 수분을 충분히 취하여 풍성한 과실을 맺고 그 잎이 무성한 것과 같습니다.
복있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을 것입니다. '시절을 좇아'란 문자적으로 '그의 때에'이며 이는 곧 인생의 추수기를 의미합니다. 나무가 추수기에 열매를 맺는 것은 자연스런 결과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죄악을 멀리하고(1절)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끊임없이 기쁨을 누리는 의인은 인생의 추수기에 자연스럽게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이 열매는 추수기에 맺히는 열매이므로 겉으로는 화려하나 속은 비어 있는 악인들의 열매와는 달리 완전히 익은 열매임에 틀림없습니다. 이처럼 의인의 행복은 인간의 잔재주로 인해 얻는 그런 종류의 행복이 아니라 끊임없는 경건의 노력을 통해 얻는 완전무결한 행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있는 사람은 그 행사가 다 형통할 것입니다. 행사가 다 형통하다는 것은 그의 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되어진 결과입니다. 복있는 사람은 하는 일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모든 일에 막힘이 없이 형통할 것입니다. 때로는 인간의 눈에 고난처럼 보여도 오히려 그것이 나중에 유익하게 될 것입니다. 요셉이 형제들에 의해서 애굽의 노예로 팔려갔지만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므로 형통하여 비록 옥에 갇히는 데까지 갔으나 결국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야곱의 전 가족을 흉년 때에 구원할 수가 있었습니다. 또한 다윗이 사울에게 쫓기는 신세였지만 하나님만을 의지함으로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어 형통케 하심으로 전쟁에서 승리하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으며 계속하여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악인의 고통
1-3절에 묘사된 의인의 행복과는 대조적으로 악인의 실패 및 불행이 소개됩니다. 악인은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습니다.’ 곡식을 까부를 때 낱알은 지면에 떨어지나, 겨는 가볍기 때문에 바람에 날아가 버립니다. 따라서 여기서 '겨'란 악인의 사라져 버리고 말 허무성을 비유한 말입니다. 이러한 개념은 3절의 복있는 사람이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의 견고성과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 밖에 겨는 성경에서 무가치한 것을 상징하는 말로서 많이 언급되어 있습니다(35:5; 욥 21:18; 사 5:24; 17:13; 29:5; 33:11; 41:15; 렘 23:28; 단 2:35; 호 13:3; 습 2:2; 눅 3:17).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여기서 '심판'('미쉬파트')은 '공의' 또는 '심판'으로 번역될 수 있는 용어입니다. 또한 '견디다'('쿰')는 말은 '서다', '일어서다'라는 뜻입니다. 이 두 용어에 대해 다음 두 가지의 해석이 있습니다. (1) 혹자는 '미쉬파트'를 공의로 보고 본 구절을 '악인이 공의 가운데 서지 못할 것이다'라는 의미로 해석합니다. 즉, 악인은 의인의 공의로운 일에 동참하지 못하며 또는 의인들의 공의 앞에 설 자리를 마련하지 못한다는 해석입니다(Calvin). (2) 혹자는 '미쉬파트'를 심판으로 보고 본 구절을 '악인이 이 세상 마지막에 있을 최후 심판 때에 서지 못하는 것, 곧 부활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합니다(Briggs). 그런데 여기서 분명한 것은 이 악인이 하나님의 '율법'(토라)을 대적하는 악인이라는 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악인을 마땅히 하나님의 심판 또는 판단을 받아 하나님 앞에서 쫓겨나는 자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미쉬파트'를 심판으로 해석한 (2)의 주장은 옳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을 반드시 최후의 심판에만 국한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역사속에서 수많은 심판의 사역을 행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죄인이 의인의 회중(會中)에 들지 못할 것’입니다. 여기서 '의인의 회중'이란 하나님의 심판 또는 판단 앞에서도 부끄러움 없이 설 수 있는 자들의 총회를 말합니다. 이들은 곧 1, 2절에 묘사된 바와 같이 소극적으로는 악인의 사상과 행동에서 구별된 자이며, 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율법을 묵상하며 이를 생활화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모여 하는 일은 거룩한 곳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111:1; 118:19, 20). 그리고 15편은 이 거룩한 곳에 서서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는 자가 과연 누구인지 밝혀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회중’('에다')은 '지명하다', '...에서 만나다', '두다'는 뜻의 동사 ‘야아드’에서 파생된 명사형으로 장소적인 개념을 다분히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에다’는 거룩한 장소, 곧 하나님의 언약궤가 모셔져 있는 성소나 성전을 지시하는 것이며 또한 최종적으로 메시야께서 모든 성도를 불러 모으실 하늘에 있는 새 예루살렘을 지시하는 것입니다. 의인은 이와 같은 의미를 가진 회중에 들어가나 죄인은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결국 하나님의 심판의 때에 ‘의인의 길을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할 것’입니다. 여기서 시인은 하나님의 백성의 영원한 복과 악인의 멸망을 극명하게 대조시켜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때에 복있는 사람, 즉 의인에게는 영원한 복이 있겠으나 악인에게는 영원한 형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의인의 복과 악인의 멸망의 기준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에게 속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의인을 인정하시므로 그가 복을 받는 것이며 반대로 악인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하므로 멸망을 당합니다. 이처럼 시인은 이 시구를 통하여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대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망하리로다'('아바드')는 말이 '소멸하다'라는 뜻으로 악인의 최후를 암시합니다. 즉,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소멸되어 버리는 존재입니다.
나가는 말
새로운 해를 맞이하여 우리는 시편의 기자가 말한 것처럼 악을 떠나서 하나님의 율법을 좇아 순종하므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형통의 복을 누리는 한해가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셨듯이 우리에게도 복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고 준비하신 복들을 남김없이 받도록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에 좇아 순종하는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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