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말씀 - 설교

[스크랩] 새포도주를 담는 새부대가 되자

kaporet 2008. 1. 18. 16:18

새포주를 담는 새부대가 되자

마가복음 2:18-22

2008.01.13(주일예배)


들어가는 말


    새해가 되어서 사람들은 새롭게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축복하신 것 중에 하나가 과거를 잊게 하고 새로운 미래를 찾게 하는 것인 것 같습니다. 미래는 왠지 희망이 있고 가슴이 벅차옵니다. 이처럼 인간은 새로운 것을 좋아하면서도 한가지 새로운 것을 싫어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도를 바꾸고 자신의 환경을 바꾸고 습관을 바꾸는 것입니다. 작년 고이즈미에 이어서 총리가 되었던 아베총리가 고이즈미의 개혁정책을 이어받아서 혁신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각료들을 새로운 시각을 가진 사람들로 바꿨지만 결국 기존의 정치가들에게 걸려서 중도하차했습니다. 개혁과 혁신은 말은 그럴싸하고 좋아보이지만, 만일 그 정책을 시행할 경우 자신들이 그 개혁정책의 대상이 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변화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최근의 아이들은 모든 연락을 휴대전화의 메일로 주고받고 있습니다. 요즘에는 휴대폰의 기능이 좋아져서 모든 자료를 메일로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휴대폰으로 인터넷과 접속되어서 각종자료를 다운받을 수 있고 음악도 듣고 영화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비게이트도 되어서 길을 찾아갈 때 휴대폰으로 찾아갈 수 있습니다. 요즘에는 노인들도 곧잘 휴대폰으로 메일을 하며 인터넷을 봅니다. 그리고 텔레비전도 디지털화되면서 단순한 텔레비전이 아닌 인터넷이 가능하게 되어서 편리합니다. 이런 문화적인 기능을 모르는 사람들은 점점 살기에 불편해집니다. 변화에 늦어지는 사람은 그만큼 혜택을 누리기 어렵습니다. 시대의 흐름에 민감하지 못하는 사람은 도태되고 마는 것입니다.


1. 묵은 율법과 새복음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혹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나니,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헤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막 2:18-21)


    율법이냐 복음이냐


    그런데 이것은 영적인 면에서도 동일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변화와 개혁이 반대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조상의 유전, 즉 하나님의 율법이외에 그 율법을 해석하여 전해 내려오던 전통을 지키는 것을 좋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런 유전은 하나님의 말씀과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실 때마다 그런 유전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맞지 않는다고 지적하고 이제 말씀으로 돌아가서 말씀의 본질을 따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를 들어서 복음서에서 가장 많이 문제가 되었던 것은 안식일의 문제였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을 상관하지 않으시고 병자들을 고치시는데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은 그런 예수님이 못마땅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유전에는 안식일은 아무것도 해서는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에게는 안식일은 아무것도 해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자신들은 집에서 말이나 나귀에게 물을 마시게 하고 먹이를 주는 노동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안식일의 의미를 달리 해석하셨습니다. 진정한 안식은 단지 노동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신 평안을 누리게 하는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제7일을 안식일로 정하시고 그날을 복주신 날입니다. 그날은 창조된 인간이 하나님과 대면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누리는 날입니다. 그 후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안식일을 제정하실 때도 종들에게 안식일에도 과도한 노동을 시켜서 하나님께 예배하지 못하게 하는 주인들을 금하시기 위해서 제정하신 것이 안식일입니다. 즉 주인이나 종들이나 노동을 쉬고 하나님께서 복주시는 것을 즐기며 자신들을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을 경배하라고 주신 날이 안식일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노동을 금한다는 명목으로 병자를 고치는 일을 금하여 병자가 고통속에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안식일의 본래의 의미를 회복시켜서 병든 자가 안식일에 고통을 당하는 것보다 병에서 놓임을 당하고 평안을 얻는 것이 그에게는 진정한 안식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런 일이 바리새인이나 율법학자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그들의 조상들의 전통이 더 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에 대해서도 예수님은 그들의 기도가 잘못된 점을 누가복음 18:9-14에서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비교하여 말씀하시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의인이라 생각하며 기도한 바리새인의 기도보다 자신을 죄인이라고 가슴을 치며 회개하며 기도한 세리의 기도를 들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기도는 하는 것이 의가 아니고 자신의 죄를 진정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 죄 용서함을 받고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구제에 대해서도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조금만 구제하여도 이를 나팔을 불면서 소문을 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구제를 할 때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마 6:3)고 말씀하십니다. 즉 구제를 자신이 행한 것을 자랑을 해서 보상을 받는 것이 아니고 은밀한 중에 행한 것을 하나님이 갚으신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문제는 본문과 관련된 18절에 나오는 금식의 문제입니다.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두 번(월요일과 목요일) 금식을 했습니다. 이것도 그들의 전통에 따른 것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금식과 기도와 구제를 하면서 그것을 자신들의 의로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원래의 의미에서 상당히 벗어난 것이었습니다. 금식은 원래 선지자들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을 섬길 때 그들에게 금식하고 회개할 것을 촉구하면서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금식의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자신들의 의로 삼고 금식한 것을 자랑합니다. 그리고 금식하지 않는 사람들을 비난합니다.

    이와 같이 유대인의 전통을 따르는 바리새인들과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를 재해석하여 본래의 의미를 가르치시며 그대로 행하셨던 예수님과의 사이에는 언제나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금식의 문제를 가지고 나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을 하고 있는데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는지 질문하는 유대인에 대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신랑으로서 계실 동안에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금식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동안 사람들은 슬피 울며 금식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이 말은 성도가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할 때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금식할 것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난 뒤 그들은 복음을 통하여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때 그들은 자신의 손으로 예수님을 못박아 죽인 일을 통회하여 금식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이후 성령충만한 제자들이 방언으로 복음을 전할 때 각지에서 예루살렘에 올라와 있던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말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하는 것과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서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깨달은 뒤 하는 말이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고백합니다.


    복음을 거부하는 유대주의


    그러므로 금식에 대하여 질문하던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헤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21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새로운 복음의 진리를 낡은 사상에 적은 유대인의 전통으로 해석하려는 것은 결국 자신들의 전통을 지키려 하다가 진리를 왜곡할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낡은 옷이 새것에 의해서 더욱 심하게 망가지는 것처럼 새로운 진리를 순수하게 받지 않고 자신들의 전통으로 무리하게 해석하려고 할 때 그들의 상태는 전보다 더 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야를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려 왔는데 정작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이 전하시는 진리를 자신들의 전통으로 잘못 해석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맙니다. 이것은 전보다 더 악한 모습입니다. 그들의 조상들은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을 섬기다가 예루살렘이 훼파되고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지만 그들은 정작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들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는 끔찍한 죄를 저지르고 만 것입니다.


2. 새도주는 새부대에 넣어야한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부대에 넣느니라”(22절)


    낡은 가죽부대로는 새포도주를 담을 수 없다


    예수님은 새로운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 필요한 것은 옛 전통이 아니고 새로운 마음인 것을 말씀하기 위해 새포도주는 낡은 부대에 넣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부대에 넣어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전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들으려면 그들이 새로운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만일 계속하여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전통을 주장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진리를 못받아들이는 것은 물론 자신들의 지금까지의 전통 또한 진리에 의해서 망가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안식일의 논쟁이나 금식과 기도와 구제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유대인들의 전통이 틀렸음을 지적하고 맙니다. 그 결과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더 미워하게 되고 예수님을 살인하기 위하여 거짓증인을 사고, 가롯 유다의 배반으로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고가서 십자가에서 죽게 합니다. 예수님의 죄를 심문하던 유대 총독 빌라도가 예수님의 죄가 없으심을 알고 석방시키려고 했으나 끝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충동을 받은 백성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것을 요구하고 빌라도는 할 수 없이 이에 응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로마 군병들에게 넘깁니다. 바로 이것이 유대인들 스스로 자신들의 전통을 무너뜨린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산다고 했지만 결국 살인죄를 범했습니다. 그것도 베드로의 표현대로 의인을 죽인 것입니다.


    새포도주는 새가죽부대에 담아야만 한다.


    그러므로 새포도주인 하나님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오직 새부대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새부대는 전통에 얽매이지 않는 양심을 따라서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는 새로운 마음입니다. 이것은 인간 스스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단지 진리를 진리로 인정할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새로운 마음을 허락하십니다. 이러한 새마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새 영을 부어주실 때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실 것입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겔 36:26) 우리의 굳은 마음은 죄와 욕심으로 인해 굳어진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새마음, 즉 부드러운 마음은 우리 안에 죄를 고백할 때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주실 것입니다. 베드로사도는 이것에 대하여 우리가 회개하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을 때 성령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행2:38). 그때 우리가 주앞에서 유쾌하게 되는 말이 올 것입니다(행3:19).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신 자실을 믿고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믿는 자에게 성령께서 새로운 마음을 허락하십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성도의 마음에 들어오셔서 그에게 그리스도의 생명을 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새로운 마음을 주십니다. 그 때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마음 안에서 진리로서 받아들여지고 믿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말씀으로 지으신 것이 믿어지고, 예수님이 동정녀 마리아를 통하여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과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시오 참 인간이심이 믿어집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 땅에서 베푸신 이적과 기사가 믿어집니다.

    새로운 맛을 내는 새포도주


    새로운 포도주는 새로운 맛을 냅니다. 새 부대에 새 포도주를 받아들이면 이제까지 묵은 맛을 내며 떫은맛을 내던 사람이 새 포도주인 그리스도의 맛을 내면서 새로운 맛을 사람들에게 전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의 모습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치기는커녕 오히려 부담을 주고 짐을 주었는데 예수님을 영접한 후 조금씩 예수님 맛을 낼 때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줍니다. 왠지 예수님을 알고 싶은 마음을 갖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조금씩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가운데 주변 사람들이 옛날의 모습과 조금 달라졌다는 평판을 합니다.


    새부대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우리의 모습


    새로운 부대는 우리의 변화된 새로운 마음이며 새로운 습관입니다. 새 포도주를 담은 새 부대가 포도주의 향을 풍겨내듯이 우리의 마음이 새로워지면 우리의 습관이 새로워져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합니다. 전에는 자기중심적이던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서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합니다. 전에는 자기 것만 챙기던 사람이 주변 사람들에 대하여 마음을 쓰고 가난하고 어려운 자들을 만나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마음에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며 무엇인가 도울 일이 있으면 돕고 싶어합니다. 바로 이것은 우리 안에 새롭게 부어진 새 포도주이신 그리스도가 우리의 모습을 변화시켜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새 마음에 부어진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 날마다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를 성장시켜주십니다.


나가는 말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새로운 해를 맞이하여 우리 안에 새 포도주로 부어지신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더욱 하나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배우고 그분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배워서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대로 행하기를 힘쓰고, 우리의 심령이 날마다 새롭게 변화되어 작은 예수로서 주변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성도가 되기를 원합니다.

출처 : 센다바중앙교회
글쓴이 : kaporet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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