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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고구려의 혼이 살아있는 고마(高麗)신사

kaporet 2006. 5. 19. 08:47

 

 

              고구려의 혼이 살아있는 고마(高麗)신사

 

 

 

일본에 지역전체가 고구려와 관련된 지명을 달고 있고 고구려 관련 유적이 산재한 곳이 있다.

도쿄에서 북서쪽으로 40여㎞ 떨어진 사이타마현(埼玉縣) 히타카시(日高市)다.

이곳 사람들은 고려향(高麗鄕)이라 부른다.


고려촌은 고려신사(일본식 발음은 고마진자)를 중심으로 지역 곳곳에 고구려의 유적이 산재하고 있다.

고려신사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고려촌은 역사문화답사와 생태기행이 어우러진 답사 코스로도 손색이 없다.

주말이면 도쿄 시내를 비롯하여 인근 사이타마의 여러 도시에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고려촌과 고려신사를 즐겨 찾는다.

특히 이곳의 답사는 철저하게 도보로 이루어진다.

사이타마현 히타카시에 조성하고 관리하는 답사코스는 약 10.6km에 이른다.

반나절 안팎의 시간이면 충분하다.

 

 

히다카 시내에 있는 8세기 전반이후의 주거지 터 와 오나가게 절터, 오-테라절터, 그리고 성천원의 전신으로 보여지는 다카오카 절터 등의 옛날 절터와 스에자기 가마터 등등은 고마군 시작이래의 다수의 유적지로서 당시 고대 고마군의 영화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고려천 역이다. 한적하고 조용한 시골 간이역과 같은 느낌이다. 고려라는 글자가 정겹다)

 

이 동네에 있는 기차역 두 곳의 이름도 고려역(高麗驛)과 고려가와역(高麗川驛) 등 ‘고려’를 포함하고 있다.

역 주위에도 온통 고구려 천지다.

고려촌, 고마본향, 고려전, 고려치, 고려소학교, 고려중학교, 고려우체국, 고려향, 고려산, 고려원.

마치 한국의 어느 소도시를 옮겨 온 느낌이 들 정도다.

 

(고려천역 앞 광장에 세워진 장승의 조형물이다. 장승을 현대적인 아름다움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이국땅에 뿌리내린 고구려의 후예는 고려(高麗)란 국호를 성씨로 삼았다.

일본에선 고구려를 고려로 표기하고 '고마'라고 읽는 경우가 많다.

현재 일본 고려씨의 총본산 고려신사(高麗神社)에는 고구려 왕족의 60대 후손 고마 후미야스(高麗文康)가 노환을 앓고 있는 아버지 시즈오(澄雄.77)가 맡고 있는 신사의 대표직인 궁사(宮司-우리나라 주지와 같은 직책)의 후계자이다.


고구려에서 건너온 왕족 약광(若光.일본명 잣코)이 간토(關東)지방 여기저기 흩어져 살던 고구려 출신 1799명을 이끌고 이곳에 고려군장으로 부임해 왔다.

속일본기에 따르면 지금부터 약 1,300년전 고구려의 멸망으로 인하여 망명한 고구려인들 중 스루가(지금의 시즈오카), 가이(지금의 야마나시), 사가미(지금의 가나가와), 가즈사(지금의 치바), 시모후사(지금의 이바라기), 히다찌(지금의 이바라기), 시모쓰케(지금의 도찌키) 등의 7개 지방에 살던 고구려인 1,799명을 716년에 무사시 지방으로 이주시켜 고마군을 설치하였다.

현재의 히다카시(日高市)는 이 고마군을 중심으로 한 지역이라고 추정되며 1899년 까지는 고마군이었다.

고구려인들은 당시 미개척지이던 이 지방을 개간하고 평화롭게 살았다.

이후 이곳은 고려군이 되었다.

고려군은 고려촌과 고려천촌으로 이뤄졌다.

고려군이 설치된 지 42년이 지난 후 인근지역에는 신라군도 생겨났다. 


26대까지는 고구려인끼리만 결혼해 혈통을 보존했다.

가마쿠라에 막부를 연 미나모토 요리토모와 혼맥을 맺고 가신이 되기도 했다.

고려씨계도(高麗氏系圖)를 보면 약광으로부터 60대 후손에 이르기까지 빼곡히 집안의 내력을 기록하고 있다.


약광이 죽자 군민들은 그의 위덕을 기리기 위해 어전의 뒷산에 사당을 세우고 신령에 대해 제사를 지내면서 고마명신이라 칭하였다.

이렇게 고려신사가 만들어졌고, 사람이 살지 않던 변방의 무사시노벌판은 우리 유민에 의해 메이지 시대에 일본 쌀의 절반을 공급할 정도의 곡창지대가 됐다.


하지만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에 국수주의적 풍조가 강화되면서 1896년 일제는 한국과 관련된 지명을 없애버리기로 한다.

고려군을 이루마군(八問郡)으로 바꾸고 이를 다시 히타카시(日高市), 쓰루가시마시(鶴鳥市), 한노시(飯能市)등 3개의 시로 분할해 버렸다.

고마군이라는 이름은 그렇게 해서 없어져 버렸지만 다행히도 히다카시에는 아직도 곳곳에 고구려와 관련된 지명과 고구려 유적이 산재한다.

고려향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는 산을 고려산(高麗山)이라고 하며, 고려향을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맑은 시내를 가리켜 고려천(高麗川)이라고 한다.

특히 고려천은 시냇물을 그냥 마셔도 될 만큼 일년 내내 1급수를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은 고려촌이 히타카시에 속한 조그만 동네이름으로 바뀐 것이다.

 


     (고려천은 너무맑아서 '명경'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고려교아래를 찍었다)

 

하지만 지금 고마씨는 제2의 융성기를 맞고 있다.

고마 신사가 영험하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다.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郞), 시데하라 기주로(弊原喜重郞) 등 이 신사를 참배한 정치인들이 차례로 총리대신이 되자 약광이 '출세의 신'으로 떠받들어지게 된 것이다.

신사 입구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의 조부인 마타지로(又次郞) 전 체신장관의 기념식수도 눈에 띄었다.

최근엔 연간 40만명이 이곳을 찾을 정도로 번창하고 있다.

 

(우리가 간 날에도 자동차를 새로 산 사람들이 고려신사에 와서 복을 비는 모습을 보았다.)

 

그에 대한 반증으로 고려천을 가로질러 세워진 고려교(高麗橋)는 일명 「출세교(出世橋)」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고려교를 지나 바로 맞닥 뜨리게 되는 고려신사(高麗神社)가 출세운을 열어준다는 「출세개운(出世開運)」의 신사로 지칭되고 있기 때문이다.


고마(高麗)신사

 

              (고려신사 본전이다. 일본식으로 지어진 신사로 화려한 금박이 아름답다. )

 

 

          (고구려신사라는 글씨가 선명하다. 고구려의 혼을 느낄 수 있는 명패이다)

 

 

고려신사는 고구려 유민들의 망국의 한이 절절이 배어 있는 곳이다.

이역만리 일본 땅에서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고구려의 후손임을 당당히 밝히면서 고구려 조상을 섬기는 한민족의 저력이 드러나는 곳이기 때문이다.


고마신사는 고마군의 수장이었으며 고마신사의 제신으로서 고구려에 도래한 고마왕 약광(若光)을 기리기 위한 신사이다.

후손들이 대대로 고마신사의 궁사로 봉직하고 있다.


고마신사에는 12세기(가마쿠라시대)의 「대반야경나밀다경(국가지정 중요문화재)」을 비롯 고마신사 본존(현 지정문화재), 도쿠가와 장군이 영지를 기부한다는 서장의 유형문화재 외에 10월19일의 축제에는 우지꼬(같은 씨족 신을 모시는 일족)에 의해 봉납되는 사자춤도 전해져 오고 있다.


고려신사에 대한 왜곡은 일제를 거치면서 더욱 깊어졌다.

일제의 조선침략이 이루어지면서 고려신사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부각된다.

일제하에 고려신사는 졸지에 외래 민족이 일본에 동화된 전형으로 비쳤다.

이에 일제는 고려신사를 내선일체 사상주입의 상징으로 내세웠고 이를 의식적으로 선전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참배를 강요했다.

이후 고려신사는 새로 부임하는 조선 총독이나 고위 관리들이 조선으로 떠나기 전 참배하는 곳으로 변질됐다.

                                (왕 이은 전하가 심은 나무임을 표기하고 있다)

 

                          (왕비 이방자여사 전하가 심은 나무임을 표기한 것)

 

신사 입구에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 부부가 기념식수한 나무가 있다.

한 왕조의 몰락, 마지막 왕손과 정략결혼, 매국노로 이어지는 역사의 질곡을 한곳에서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입구에 고려신사를 방문한 유명인사의 명패를 볼 수있다)

 

신사입구에는 이 곳을 찾은 유명인사의 명패가 걸려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낯익은 이름들은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

딱히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반가움과 서러움을 동시에 느끼는 순간이었다.

해방 전 이 고마신사에는 조선의 독립운동가와 정치가들이 많이 찾아서 늘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아야 했으며 당시에는 길이 험하여 이곳에 오면 하룻밤을 묵어가야 했다고 한다.

1941년 6월 26일 일본경찰의 감시를 피해가며 이곳 고마신사에 들린 몽양 여운형의 필체를 얼마전까지도 발견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궁사께 여쭤보니 오래 된 것을 새것으로 갈아넣기도 한다고 한다.

우리는 여운형선생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다시 넣어달라는 부탁을 잊지 않았다.

           (사자무상인데 일본의 전통에 따라 빨간 앞치마를 두르고 있다. 정말 낯설다)

 

한편 고려신사의 입구 참도(參道)에는 히다카시(日高市) 지정 민속문화재로 보존되고 있는 사자무상(獅子舞像)이 세워져 있다.

어느 시대에 세워졌는지 확실치 않지만 사자상은 고구려 씨족들의 기원을 이루어주는 것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매년 10월19일 대제일(大祭日)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암수 사자상 앞에서 무엇인가를 기원하는 모습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신사 안내책자에는 『애조 띤 울부짖음, 소박한 사자의 춤은 고대의 로망스를 불러일으킨다』고 하고 또 『산속에서 울부짖는 사자의 소리는 고려의 소리를 생각나게 울려퍼 진다』라는 노랫가락도 전해 내려온다고 기록돼 있다.

이처럼 사자를 구슬프게 노래한 것은 고구려인들의 망국의 한을 달래기 위한 것이었음에 틀림없으리라.


고려신사 입구에는 이 신사의 내력을 소개하는 안내판이 씌어 있는데 그대로 옮겨본다.


『고려신사는 고구려국의 왕족인 고려왕 약광을 모시고 있는 곳이다. 고구려 사람들은 중국대륙의 송화강 유역에 살았던 기마민족으로 조선반도에 진출하여 중국대륙 동북부로부터 조선반도의 북부를 영유하고 약 3백년간 군림했다. 그 후 당과 신라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서기 668년에 멸망했다. 이때의 난을 피해 고구려의 귀족과 승려들이 다 수 일본으로 건너와 주로 동국(東國)에 살았으나, 레이키(靈龜) 2년(716년)에 그중의 1천7백99명이 무사시국(武藏國)에 옮겨져 새롭게 고려군이 설치되었다.

고려 약광왕은 고려군의 군사(郡司)로 임명되어 무사시노(武藏野) 개발에 힘썼으며, 다시 고국의 땅을 밟지 못하고 여기에 묻혔다. 군민(郡民)은 그의 유덕을 기리고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고려명신(高麗明神)이라고 하며 숭배해 왔다. 현재에 이르기까지 고려왕 약광의 직계자손에 의해 신사가 지켜져 왔으며 지금도 많은 참배객들이 방문하고 있다』


고구려의 지속 연수를 3백년으로 잘못 설명한 것을 빼고는 고려 약광의 존재가 당시 일본 사회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미쳤음을 짐작케 하는 내용이다.


더욱이 이 신사의 제신 인 약광왕이 출세개운(出世開運)의 신이라는 점도 남다른 대목이다.

역시 기록을 대단히 소중히 여기는 일본인답게 신사 안에는 「출세명신의 신」에 대한 안내판이 또 세워 져 있었다.


『이 신사는 멀리 나라시대 겐쇼오(元正)천황 때 고려군을 통치했던 고려왕 약광을 기리는 신사다. 따라서 그 창건은 1천2백여년 전의 옛 관동지방에 속한 유서깊은 신사다. 이 신사는 기원(祈願)을 잘 들어주는 영험한 신사로 알려져 고려군의 총진수(總鎭守)로서 군민에게 존경과 숭배를 받았다. 특히 오늘날에 와서는 미즈노(水野), 하마구치(浜口) 등 5명이 이곳에 참배한 후 계속해서 총리대신(總理大臣) 또는 국무대신에 취임하는 등 출세를 함으로써 출세 관련 신으로 신봉(信奉)됐다. 이 신사는 정계, 재계를 시작으로 해 각계각층의 숭배와 공경을 받아 전국적으로 숭경자(崇敬者)들이 널리 퍼져 있다』


현재도 일본의 정·재계를 주름잡는 거물들이 그들의 출세를 빌기 위해 고구려 신을 찾는다는 점은 참으로 흥미롭다.

 

   (고구려의 전통가옥이 잘 보존되어있다. 들여다 볼 수 있도록 반개방, 반폐쇄된 형태이다)

 

고려신사 경내 이곳저곳을 둘러본 다음 그 뒤편에 자리잡고 있는 고려가 주택(高麗家住宅)을 찾았다.

고려가(高麗家) 역시 일본정부 지정 중요문화재로 등록돼 있다.

에도시대(江戶時代) 초기의 중요한 민가(民家)로서 역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이 건축물은 16세기 말경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건평 35.7평에 동향(東向)으로 지어진 고려가는 입모옥(入母屋) 방식의 외부구조를 하고 있다.

즉 지붕꼭대기는 한자의 입(入)자처럼 서로 맞붙게 하고 처마 쪽은 사각으로 경사지게 하여 하늘에서 보면 마치 어머니 모(母)자처럼 보이게 띠로 이은 집이다.

다섯 개의 방 중 바깥쪽 방이 제일 넓어 다다미 21개가 깔려 있고, 나머지 방은 이 방을 중심으로 안쪽의 벽으로 배치돼 있다.

손님을 접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큰 방에는 우물 정(井)자로 짠 발이 쳐져 있다.

부엌은 우리의 시골집 아궁이와 꼭 같았는데 전기 장치로 장작에 불이 타고 있는 모습을 재현하고 있었다.

일본의 여느 가옥구조와는 다른 고려가는 아마도 고구려의 전통가옥 구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마 성천원(聖天院)

 

 

(정원과 함께 찍었다. 일본식 정원의 아기자기함과 아름다움이 잘 묻어나왔다)

 

 

                            (고려신사처럼 성천원도 전형적인 일본식 신사이다)

 

고려산 동쪽 자락에 고구려 승려들이 세운 성천원승락사(聖天院勝樂寺)와 경내에 모셔진 약광왕의 묘지인 고려왕묘가 있다.

                    (고구려왕 약광왕 릉이라는 비석이 세워져있고 이곳이 입구이다)

 

(들어서면 고려왕쿄라고 써있고 마치 파사의 사탑같은 모양의 돌이 보인다. 사람들이 인형등을 가져다 놓아 소원을 빌고 극락왕생을 바라기도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약광(若光)과 승려인 승낙(勝樂), 그의 제자 성운(聖雲)에 의해 나라 시대에 세워진 절로서, 이 절의 본존에는 약광이 고국에서 수호불로 가져온 성천존이 모셔져 있어서 절 이름이 성천원(쇼텐인) 으로 불리게 되었다.

    (사진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작은연못이 있는 성천원 정원이다. 아름답고 소박하다)

 

(정문 앞의 장승이다. 주차장을 지나면 이 장승과 만날 수 있다. 인자하게 생긴 모습이 귀엽다)

 

정문을 들어서기 전에 돌로 세워진 장승을 볼 수 있다.

장승의 형태는 전형적인 중부 이북의 장승이다.

재질은 남부지방에서 주로 쓰는 돌로 만들어 독특한 인상을 풍겼다.

타국 땅에서 우리나라 전통 조형물이 하늘을 향해 솟아있다는 것이 무척 반갑게 다가오는 풍경이다.

                          (성천원의 유래에 대한 설명을 적어 놓은 액자이다)


고려역

 

                   (고려역이다. 고려천역과 같이 조용한 시골 간이역과 같이 적막하다)


신기하게도 고려역전에도 고려신사 앞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한국의 장승이 세워져 있었다. 옛날부터 우리 조상들이 마을 어귀에 세워 마을 수호신으로 삼아왔던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의 모습 그대로다.

일본인들은 우리나라의 장승을 그대로 옮겨와 「장군표(將軍標)」라고 부른다.

장승 옆에 세워놓은 장군표의 안내문은 친절하게 한국장승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고려역 앞의 장승은 전형적인 한국의 장승이다. 반갑고 정겨웠다)


『조선에는 마을이 있는 곳이면 어디나 장군표가 있다. 높이 4m 정도의 소나무 자연목에 안광(眼光)이 날카롭고 무서운 형상의 얼굴이 새겨져 있으며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의 문자를 새겨넣어 재난과 위험을 방제(防除)하고 또 악마를 퇴치하며 가내 안전을 기원한다고 전해지고 있다』


우리네 토속신앙의 상징인 장승이 일본에서 그 유래를 적은 안내판과 함께 오늘에까지 전래되고, 또 세계 각국의 관람객이 오가는 고려역사 앞에 세워져 있다는 것은 고려향에 살고 있는 고구려 후예들의 정신과 혼이 이 땅에 살아 있음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장군」이라는 명칭도 일본 것이 아닌, 우리 고유의 장승이라는 의미를 그대로 전승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출처 : 향기의세계
글쓴이 : 불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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