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말씀 - 설교

[스크랩] 그리스도와 함께 지어져가는 교회

kaporet 2011. 7. 8. 12:03

그리스도와 함께 지어져가는 교회

엡2:11-22

2011.7.3(주일예배)


들어가는 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이 자신의 죄를 대신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과 예수님이 자신의 구주이심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 모든 사실을 믿음으로 구원얻은 자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십자가에서 자신을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감사하며 살게 됩니다. 성도 한사람 한사람이 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 살게 될 때 교회공동체는 하나가 되어갈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도가 구원을 받은 것은 자신의 노력이나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과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동일하게 선물로 받은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갈 것입니다.


1. 그리스도 안에서 가까워진 우리


    우리는 가끔 우리를 돌아보고 생각해야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구원받기 이전과 지금의 자신을 비교하면서 하나님이 자신을 구원해주신 은혜가 얼마나 큰지 깨닫고 감사해야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하면 마치 그것이 자신이 뭔가 잘나서 된 줄 알고 교만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밖에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의 우리는 “그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었습니다. 여기서 ‘육체’는 신체적 혈통이나 출생을 가리키는 것으로 에베소 교인들이 과거에 유대인이 아니었음을 말합니다. 에베소 교인들이 육체적으로 ‘이방인’이었다는 말에서 경멸과 무시조의 어투로 그들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특권을 소유하지 못한 자임을 나타냅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멸망받기에 준비된 짐승같은 존재로 여기고 항상 멸시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표현을 인용하여 이방인 출신의 에베소 교인들이 얼마나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멸시당한 존재였는지를 다시 한번 일깨워줍니다.


    그리고 에베소 교인들은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었습니다. ‘할례’는 하나님께 속한 백성임을 나타내는 표식입니다(창 17:8-14). 유대인들은 이방인이 하나님에게 소속되지 못하고 버림을 받은 백성이라는 의미에서 그들을 '무할례당'이라고 불렀으며 반면에 그들 스스로는 하나님의 백성임을 자처하면서 '할례당'이라고 불렀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할례 받은 사실을 자랑하면서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지 못한 사실을 지적하며 그들을 멸시한 것입니다. 여기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은 ‘소위 할례당이라 불리는 자’입니다. 이러한 표현은 바울이 이방인을 무할례당이라고 무시한 유대인들의 태도에 찬성하지 않음을 암시합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할례를 자랑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태도를 지적하고 그들이 진정으로 할례의 의미를 알지 못한 점을 지적한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할례는 외적 표식이 아니라 마음의 할례입니다(빌 3:2; 골 2:11).


    또한 사도는 에베소교인들이 구원받기 전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라고 말씀합니다. ‘그 때에’는 에베소 교인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알지 못했던 때를 가리킵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었다'는 말은 에베소 교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전에는 이스라엘로부터 분리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본문에서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의 메시야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에베소교인들은 그때에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었습니다. 이방인은 국가적 출생의 차이로 인해 하나님의 선민으로서의 특권을 갖지 못한 것입니다(롬 9:4, 5). 그리고 그들은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었습니다. ‘약속의 언약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창 15:7-21; 17:1-21), 야곱(창 28:13-15), 이스라엘(출 24:1-8), 다윗(삼하 7장)에게 하신 언약들을 가리킵니다. 이 언약들은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특별한 관계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방인 출신의 에베소 교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은 이스라엘과 전혀 상관없기 때문에 그들이 약속의 언약에 대해서 외인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방인이었던 에베소교인들은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이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도 없는’이라는 말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참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이 세상의 종교를 믿는 자들은 참 하나님을 모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이 없는 자들입니다.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피로 가까워졌습니다.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육체적으로 이스라엘의 밖에 있었고 약속의 언약에 외인이며 하나님도 없던 에베소 교인들이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습니다. 여기서 '멀리 있던'과 '가까와졌느니라'의 원어는 구약에서 이방 국가들이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것을 묘사하는 '라호크'(신 28:49;29:22; 왕상 8:41; 사 5:26; 렘 5:15)와 이스라엘이 하나님에게 가까운 것을 묘사하는 '카로브'(시 148:14)에서 유래합니다. 과거에 이방인들은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는 상태였으나 이제는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에베소교인들이 이방인의 상태에서 하나님과 교제하게 된 것은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 이루어진 것입니다(히 10:19-22). '그리스도의 피'는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는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희생의 피입니다(1:7; 롬 5:10; 골 1:20-22). 그리스도의 피로 이방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상태에서 화해된 상태로 바뀐 것은 구약에서 유대교로의 개종으로 인해 생긴 반전과는 전혀 다릅니다. 이방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새롭게 창조된 공동체의 일원이 됨으로써, 이스라엘이 누리던 것보다 더 큰 특권을 소유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도 이방인들 중에 개종하여 유대인의 그룹에 들어와도 그들은 성전에서 예배를 드릴 때 항상 이방인의 뜰에서 따로 예배를 들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완전히 유대인들과 하나가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진정으로 나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의 피로 유대인들과 하나가 되고 하나님과 온전한 교제를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2. 우리를 화평케 하신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막힌 담을 허신 우리의 화평이십니다. 에베소 교인들의 이와같은 지위의 반전은 에베소교인들의 어떤 수고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화평케 하신 사역의 결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여기서 '화평'('에이레네')이라는 말은 구약의 '샬롬'(평화)에서 유래합니다. '샬롬'은 전쟁이나 적대 감정의 부재뿐만 아니라 인간 삶의 총체적인 행복과 평안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화평'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적대 감정의 중지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화평의 왕으로서 십자가의 구속 사역을 담당하셔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하나로 만드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과 인류와의 화평이 이루어졌고 인간과 인간사이의 화평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와같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은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간에 막힌 담’은 예루살렘 성전의 성소와 이방인의 뜰 사이를 분리하는 성전난간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율법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의 성소와 이방인의 뜰 사이에 막힌 담은 영적으로 율법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사건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물리적인 담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막혀있던 담인 율법의 사상에서 유대인들을 풀어내어서 이방인출신 그리스도인들과의 연합을 가져온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으로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막힌 담을 허신 사건은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여기서 ‘의문(儀文)에 속한 계명의 율법’은 십계명과 같은 커다란 계명과 수많은 세세한 규정들로 구성된 모세 율법을 의미합니다. 율법이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원수된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야할 도리를 가르쳐주시기 위한 것이었지만, 유대인들은 그것을 이방인들과 자신들을 사이를 판단하고 원수되게 하는데 사용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육체 즉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으로 '율법'을 폐하셨으며(롬 7:4; 갈 3:13), 율법에 의해서 지배를 받던 옛 질서를 폐하셨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얻는 길이 열리므로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에 이르게 된다고 생각하던 유대인들의 사상을 완전히 폐한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을 폐지하셨다는 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된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이 율법을 지켜야 하는 의무에서 벗어났다는 의미이지(롬 7:6) 율법을 없애버렸다는 뜻이 아닙니다. 도리어 믿음은 율법을 굳게 세웁니다(롬 3:31-4:25). 왜냐하면 율법을 행함으로 이신 득의의 복음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으로 율법을 폐하게 된 것은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대속적 죽음으로 율법을 폐지하신 목적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있었던 벽을 허물어 화평하게 만드는(14절) 새 창조입니다. '새 창조'로 이루어진 공동체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연합하여 만들어진 전혀 다른 새로운 그리스도인 공동체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받은 성도들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각각의 모습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전의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모습이 아닌 새로운 모습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가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을 통한 새창조는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적 희생이 목적하는 바는 죄로 인해 생긴 원수된 것을 제거(除去)하고 궁극적으로 하나님과의 화목을 이루는 것이라고 진술합니다(롬 5:10; 고후 5:18-20; 골 1:20). 그러나 그것은 유대인이나 이방인 각각이 하나님과 이루는 화목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새 창조로 이룬 한 인류,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몸'은 '교회'를 의미합니다(4:4; 골 1:18).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몸의 각 지체로 이루어진 유기체입니다(고전 10:17;12:13; 골 3:15).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아 교회공동체에 들어온 성도들은 그 출신이 무엇이든지 상관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한 지체로서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으로 이루신 화평의 결과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먼 데'와 '가까운 데'는 13절의 '멀리 있던'과 '가까와졌느니라'와 상관성을 갖는 것으로 본절은 70인역의 이사야서 52:7과 57:19을 인용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그리스도의 평화가 유대인과 이방인 각각의 그룹에 선포(宣布)됨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평안에 대한 선포는 '하나님과 각 그룹간의 화해'를 전제로 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화해'를 나타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이 유대인 그룹의 구원과 이방인 그룹의 구원을 각각 이루시고 그러한 구원을 통해서 그들은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고 평안을 누리게 될뿐만 아니라, 각각 하나님과 평안을 누린 유대인과 이방인 그룹이 서로 평화하며 평안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을 통하여 이루어진 평안을 주신 것은 “저로 말미맘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입니다. 여기서 ‘나아감’은 구약에서 종교적이고 제의적인 표현으로 70인역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 제사드리는 경우에 사용되었습니다(레 1:3; 3:3; 4:14).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문이요 길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요 10:7, 9;14:6) 이방인과 유대인을 구별하였던 옛 범주는 폐지되었으며 그 결과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모두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 성령 안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성령 안에서 아버지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으며 살아감을 나타냅니다(롬 8:15, 16; 갈 4:6).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순간 성령께서 성도들의 심령에 거하시며 성령에 의해 성부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게 되었고 성도와 성도가 교제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3. 그리스도와 함께 성전으로 지어져가는 교회


    예수 그리스도께서 막힌 담을 허시고 화평을 이루시어서 성령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신 결과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입니다. 여기서 '외인'이라는 말은 ‘외국인’을 의미하며, ‘손’이라는 말은 '자원해서 나라에 거주하는 외국인이나 권리가 없는 자'를 뜻합니다. 이 말은 이방인의 유대인과의 관계를 전제한 표현입니다(12절).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에베소 교인들이 이스라엘과 상관없는 외인과 손이었지만 그리스도를 믿고 난 지금은 이미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에베소 교인들은 지금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입니다. ‘성도’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 즉 그리스도인을 의미합니다(1:1). 이제 에베소 교인들은 과거의 소외된 이방인의 신분에서 벗어나 나머지 그리스도인들과 연합한 그리스도인들입니다(1:18).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권속 즉 가족입니다(요 1:13; 갈 4:7). 이방인출신인 에베소 교인들이 받은 축복은 그들이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다른 성도들과 함께 동일하게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고 하나님의 권속이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이미 구원받은 다른 성도들과 함께 형제로서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을 믿음으로 구원받은 에베소 교인들이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고 선포합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졌다’고 진술합니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는 ‘사도들과 선지자들로 구성된 터’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교회를 설립함에 있어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가운데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복음을 선포함으로 교회의 기초가 되었음을 말합니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서로 다른 직분으로 교회를 세우는 기초적인 사역인 복음 선포를 통하여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즉 '사도들'은 부활한 그리스도에 의해서 위임(委任)받은 특별한 권위를 가진 사람들을 가리키며, '선지자들'은 특별한 예언의 은사를 받은 남녀들을 가리킵니다(행 11:27; 13:1,2; 15:32; 19:6; 롬 12:6; 고전 14장; 살전 5:20; 계 1:3; 10:11; 16:6; 18:20,24). 이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자이며 선포하는 자로서 교회 설립의 터가 되었습니다.


    에베소 교회가 사도와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졌다하더라도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습니다. 즉 교회를 세우는 일에 사도와 선지자들의 사역이 중요할지라도 보다 중요한 것은 모퉁이 돌이 되신 예수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됨을 말합니다. ‘모퉁이 돌’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첫째, 건물의 기초석을 의미한다는 견해입니다. 이 경우는 70인역의 이사야서 28:16에서 발견됩니다. 둘째, 건물의 꼭대기에 얹는 돌이라는 견해입니다. 이 경우는 시편 118:22에서 발견됩니다. 이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닙니다. 결국 교회는 건물의 꼭대기에 있는 돌로서의 그리스도와 함께 완성된 구조이며, 또한 기초석으로서의 그리스도를 바탕으로 성장해야만 하는 건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건물마다’는 각각의 건물이라기보다는, 전체 건물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편적 혹은 우주적 교회를 의미합니다. 이 교회는 현재 건설되어 가고 있습니다.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라는 말은 교회가 현재에도 계속 연결되어 이루어져 가는 것을 의미하며, 성전이 ‘되어가고’라는 말은 교회가 유기체적으로 성장하여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성전’은 일반적인 성전을 의미하는 외형적인 성전이 아니라 성전 내부를 가리키는 말로서 하나님께서 거주하시고 만나시며 교제하시는 장소를 나타냅니다. 즉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내주하심을 통하여 서로 연결되어 하나님의 임재를 타나내는 성전으로 지어져 가야함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의 교제가 온전히 이루어질 때 교회공동체가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하나님의 성전으로서 온전히 나타내게 됨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에베소 교회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갈 것”입니다. 여기서 '처소'는 '예루살렘 성전'이나 '하늘 처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참여하는 '전체 교회'를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에베소 교회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에베소 교회는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갈 것’입니다.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는 현재 시상으로 처소가 계속 지어져가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계속하여 지어져 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그때 하늘에서 새 예루살렘이 내려 올 때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교회는 하나님의 처소로서 계속하여 지어져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이루어집니다. 즉 하나님이 교회에 거하시는 수단은 '성령'이며(고전 3:16) 교회는 성령의 작용으로 지어지는 것입니다.


나가는 말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교회공동체가 하나님의 처소로 지어져 가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가 모퉁이돌이 되고 그리스도안에서 연결되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교회의 중심되시고 모든 성도가 그리스도께 연결되어가는 것입니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와 온전한 연합이 이루어지면 교회 공동체는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로 연결되어 지어져갑니다. 그 때 성령께서 교회공동체를 하나로 지어가고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으로 지어갑니다. 그러므로 우리교회가 그리스도안에서 하나의 공동체로 지어져가기 위하여서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먼저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체험이 있어야합니다. 이것은 우리 각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에 자신의 옛자아가 죽었다는 확신이 있어야합니다. 그리스도가 내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나의 옛사람, 즉 죄인된 나의 옛 모습이 죽었다는 인식과 확신이 있어야합니다. 아직도 그런 확신이 없다면 먼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자신의 옛자아가 죽었다는 확신이 들도록 기도해야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생명으로 부활한 확신이 있어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성령께서 우리안에 들어와 계시며 성령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새생명을 부어주셨다는 확신을 가질 때 우리는 부활의 생명을 가지고 있음을 확신합니다. 그 때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됨을 확신합니다. 그리고 성도 각자가 그리스도와 연합됨을 확신 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서로가 하나 됨을 확신합니다. 각자안에 계신 성령께서 자신에게 말씀하시는대로 순종해갈 때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우리는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때 교회공동체는 비로소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로서 지어져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임재가 있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출처 : 주님을 더 알기 원하는 사람들
글쓴이 : kaporet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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