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말씀 - 설교

[스크랩]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는 생활

kaporet 2011. 7. 7. 20:34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는 생활

로마서 8:31-39

(2011.6.26 주일예배)


들어가는 말


    삼총사라는 영화가 십여 년 전에 인기를 모은 적이 있습니다. 이 영화는 원래 삼총사(三銃士)라는 제목으로 알렉상드르 뒤마가 1844년에 쓴 소설을 근거로 만든 것입니다. 프랑스 루이 13세를 배경으로 17세기의 프랑스와 영국 등 유럽 지역을 배경으로 네명의 머스켓 총병의 모험을 그린 역사 소설입니다. 영화로 여러 차례 각색되고 뮤지컬로도 만들어지는 등 대중문화에 끼친 영향이 큽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달타냥이라는 청년으로 그가 기사단의 삼총사를 만나서 기사가 되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옛날 유럽의 왕정시대에는 기사들이 왕족을 보호했습니다. 왕의 자녀가 어릴 때 그를 보호하며 훈련을 시킵니다. 그리고 적국의 사람이 도전을 청해오면 왕자를 대신하여 기사가 싸워서 이기면 왕자는 승리하는 것입니다. 비록 나이 어린 왕자이지만, 그가 지명하는 기사가 대신하여 싸워서 승리하면 어린 왕자의 승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영적인 싸움도 이와 비슷합니다. 성도들이 연약해서 넘어져도 우리를 구원해주신 예수 그리스도는 강하십니다. 그리스도는 단지 강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적인 싸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싸워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연약하여 싸울 수 없을 때 주님은 우리의 기도를 통하여 응답하심으로 우리를 위해서 대신 싸우시고 우리에게 승리를 가져다주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1. 하나님은 성도의 편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창세전에 구원의 계획을 세우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여인의 후손으로 이 땅에 인간의 모습으로 보내실 것을 작정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가 이르매 예수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의 왕 다윗의 후손으로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시어 하나님의 말씀을 다 지켜 행하시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건은 바로 사단과 죄와 사망에 대하여 승리한 것입니다. 이것을 십자가의 구속이라고 합니다. 십자가의 구속을 인하여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은 하나님께서 이루신 십자가의 구속을 믿고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영접하여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은 구원받은 성도들을 보호하시고 승리를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계획에 따라서 우리들이 구원을 받도록 우리 각사람을 미리 아시고, 미리 아신 자들을 미리 정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은 우리를 아시고 구원하시기로 정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미리 정하신 우리들을 부르시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신 후 우리들을 의롭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우리는 아무 공로가 없으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단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의롭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 하신 후에 우리들을 영화롭게 하실 것입니다. 이와같이 성도 각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통해서 하나님의 영화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비록 때로는 육체의 연약함 때문에 실수하여 넘어질 때가 있어도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므로 우리는 죄의 법에 따라가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게 됨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의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성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사단과 죄와 사망에 대하여 승리하신 것이 우리의 승리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라고 고백합니다. ‘이 일’은 3:21부터 지금까지 언급한 바와 같은 하나님의 구속 사역 전체를 지칭합니다. 다만 28-30절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행하신 전체 구속 사역을 요약적으로 진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대하여 우리는 누구도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의해서 세워지고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미리 구원의 계획을 세우시고 하나님의 뜻가운데 그것을 하나씩 이루어 가신다면 이에 대해서 항변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31절) 하나님이 우리들을 구원하시려고 구원의 계획에 의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니 누가 감히 이에 대해서 대적하여 항변할 수 있는가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역설적인 표현으로 감히 하나님이 이루신 구원을 누가 감히 이렇다 저렇다 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선악간의 모든 일을 심판하시는 이는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성도를 위하시면 그 무엇도 성도를 대적할 수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우리를 대적할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셨기 때문입니다.”(32절) 이 내용은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칠 때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 말했던 내용과 유사합니다. 즉,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아끼지 아니하였으니”(창 22:12),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창 22:16)을 연상시킵니다. 사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의롭다함을 받음에 있어서 이삭을 제물로 바친 기사는 아브라함의 절대 순종하는 믿음을 보여주므로 매우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 사건은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침으로서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믿음과 사랑을 나타내 보인 것보다 더 깊은 사랑을 우리에게 보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죄인들에게 내어 주신 사실은 이삭을 번제물로 바친 내용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먼저 아브라함이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귀중한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고 했던 것처럼 성부 하나님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죄인들을 위해 대속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또한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바칠 때 많은 고통과 고초가 따랐으나 하나님의 명령대로 어김없이 준행했듯이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독생자로 하여금 온갖 수난과 고초가 따르는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처절한 집행과정을 겪도록 그대로 허용하셨습니다. 즉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관계 이상의 지극한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독생자를 대속물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십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은사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주실 뿐만 아니라 은사를 주시어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도록 하셨습니다. 여기서의 ‘우리 모든 사람’은 26절에 기록된 ‘성령의 간구하심을 힘입은 자들’이요, 28절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며 29, 30절의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바에 의해 ‘선택된 자’들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모든 것’은 구원을 포함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마 28:18) 및 모든 피조물도 포함합니다. 심지어 천사도 성도를 위하여 ‘부리는 영’으로서 활동하고 있습니다(히 1:14).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신 하나님께서(요 3:16) 성도를 위해 다른 무엇을 아끼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성도는 얼마나 존귀합니까?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존귀히 여겨주시는데 누가 감히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성도를 이처럼 귀하게 여기시고 은사를 주시는데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겠습니까?”(33절) 여기서 ‘송사하다’라는 말은 31절의 ‘대적하다’는 말과 비슷한 의미를 지닙니다. 다만 ‘송사하리요’란 단어는 법정적(法定的)인 말로서 곧이어 언급되는 ‘칭의’와 직접적으로 연관 지어집니다. 사단이 여호와 앞에서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송사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사단을 거듭 책망하시면서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죄를 사하시고 아름다운 옷과 깨끗한 관을 씌우셨습니다(슥 3:1-5). 여호수아 자신이 깨끗했기에 송사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재판장되신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고 선포하시고 그를 깨끗케 하셨기에 여호수아는 사단의 송사에도 불구하고 의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편에 서시면 사단이 우리를 감히 송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이미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사단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우리의 죄를 지적하면서 송사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미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주셨기 때문에 우리의 죄에 대하여 그 누구도 송사할 수 없습니다. 다만 사단이 우리를 속이어 아직 죄에서 용서받지 못한 것처럼 말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성도를 정죄할 수 없습니다(34절).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때부터 율법에서 해방되었기에 율법의 정죄에서도 해방되었습니다(1절). 비록 죄의 법에서 사로잡혀 마음이 원하는 바 선을 행하지 못했을지라도 성도는 어느 누구에게도 정죄를 당하지 않는 신분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하늘에 오르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성도가 비록 실수해서 넘어져도 우리의 실수한 모습을 보지 말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의 죽음을 보시고 용서해달라고 말씀하시며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성령은 성도의 연약한 삶을 위해 간구하시지만 성자 그리스도는 정죄받을 성도를 위해 변호하시고 탄원하십니다. 비록 ‘간구하다’가 기도의 형식을 나타내지만, 여기서 이 단어가 지닌 진정한 의미는 성도를 위한 그리스도의 변호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시면서 자신이 성취한 구속 사역을 근거로 자기 백성된 우리를 위해 지금도 하나님께 변호해 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성도들을 위해서 이처럼 하나님께 기도하고 계신다면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겠습니까?”(35절) 어느 누구도 성도를 대적할 수 없으며, 송사할 수 없고 정죄할 수 없는 것은 근본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성도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에 근거합니다. 세상에는 성도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부터 끊으려는 것들이 많습니다. 때로는 환난으로, 때로는 곤고로, 때로는 핍박으로, 때로는 기근으로, 때로는 위험으로, 때로는 칼로 성도들을 위협합니다. 이것들은 성도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려고 성도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요소들입니다. “환난”은 ‘고난’(17, 18절)과 같은 표현으로 뒤에 나오는 것들의 대표적인 것입니다. 성도는 믿음으로 살아갈 때 고난을 당합니다. 이런 고난은 때로는  “곤고”로 나타납니다. 곤고는 ‘행동이 제한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 표현은 바울 자신이 옥에 갇힌 경험을 나타내고 있는 듯합니다. 고난은 기근을 통하여 나타납니다. “기근”은 바울 자신의 경험이라는 사실을 고려할 때 굶주리며 마시지 못한(고후 11:27) 경험을 나타내는 것 같습니다. 고난은 적신으로 나타납니다. “적신”은 고린도후서 11:27의 ‘헐벗었음’과 같은 의미입니다. 바울은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자기의 겉옷을 가져 오라고 부탁할 만큼(딤후 4:13) 항상 입을 것조차 변변치 않았습니다. 또한 고난은 ‘위험’과 ‘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결코 성도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음을 사도는 확신합니다. 바울은 여러 가지 위험을 통하여 고난을 당하였고 때로는 죽음의 위협을 받은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한번도 의심한 적이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런 고난을 통하여 고난을 극복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을 더 깊이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시편 44:22의 인용하여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고린도후서 4:11에서도 본절과 유사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바울 자신뿐 아니라 당시 성도들이 당하던 박해와 고난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당한 고난이 시편의 기자가 말한 고난과 유사함을 말하며 그런 극심한 환난 속에서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한번 확신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여러가지 고난을 당합니다. 때로는 견딜 수 없을 만큼 힘든 고난을 겪습니다. 그러나 고난 가운데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절대로 성도의 고난을 그냥 보고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역경을 통과한 후 느끼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런 어려움 속에서 자신을 보호하신 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합니다.


2. 모든 일에 넉넉히 이기는 삶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는 성도는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압도적인 승리를 얻고 있느니라’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가장 혁혁(赫赫)한 승리를 지속적으로 성취하고 있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정복자들 그 이상이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본절에서 바울은 성도들이 자기들을 ‘사랑하시는 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게 되는 승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떤 피조물도 그리고 어떠한 상황과 여건도 성도의 압도적인 승리를 방해할 수 없습니다. 비록 권세자들이라도 방해할 수 없습니다. “권세자들”은 주로 사단의 세력하에서 활동하는 악한 영들을 지칭합니다(엡 2:2;6:12). 즉 여기서의 ‘권세자들’은 하나님의 부리시는 영인 천사와 대조되는 영, 곧 사단에 의해 조종되는 악한 영들을 의미합니다. 능력이라도 성도의 승리를 방해하지 못합니다. “능력”은 ‘폭풍, 천둥과 번개, 그리고 지진과 같은 자연의 힘’으로 해석하기도 하며, ‘천사들’ 과 같은 의미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본절에서 ‘능력’이 ‘천사’를 지칭하든지 ‘악의 세력’을 지칭하든지 ‘신적(神的)인 세력’을 의미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런 능력이라도 성도의 승리를 방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성도의 승리를 방해하지 못합니다. 앞에 언급된 아홉 가지 모두 ‘피조물’이라는 표현 속에 포함됩니다. 앞에 언급한 것 이외의 다른 어떤 피조물 중에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 구별할 것 없이 하나님의 손으로 창조된 모든 피조물은 성도의 승리를 방해하질 못합니다.


    그런 피조물들은 결코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본 구절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35a절)라는 질문에 대한 결론적인 대답입니다. 그리고 이 대답은 37절의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는 진술에 따라 나오게 되는 필연적인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사랑은 성도의 견인(堅忍)뿐 아니라 불가항력적인 은혜의 근원입니다. 성도는 7:24과 같은 비참한 상황에 처했을 때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신을 해방시켰다는 사실과(2절) 함께 성도를 향하신 하나님의 지속적인 사랑을 깨닫게 될 때 참된 자유와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살면서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할 때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사랑한다는 확신할 때 성도가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의 확신을 하며 승리의 삶을 살기 위하여 먼저 십자가의 사랑을 회복해야합니다. 이것은 죄사함의 확신으로부터 오는 사랑의 확신입니다. 십자가앞에 엎드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흘리신 보혈의 은혜를 의지하며 나의 모든 죄가 사해졌음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확신할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확신하며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확신합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임재를 회복해야합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엎드려 죄사함의 확신을 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확신하게 될 때, 하나님의 임재를 느낍니다. 그러나 단지 은혜받을 때만 느끼는 그런 임재가 아니라 늘 하나님 앞에서 사는 임재의 확신을 하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이 나의 편이 되심을 확신하게 됩니다. 그 때 우리는 승리의 확신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임재의 확신은 그냥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주님 십자가 앞에 엎드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체험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과 기도를 통하여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임재를 느낍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면서 살 때 우리는 승리의 확신을 갖게 됩니다.


나가는 말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고 승리할 것입니다. 비록 현재의 삶은 어려움이 있어도 그리스도께서 이미 사단을 이기셨으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승리를 나의 승리로 삼고 주안에서 승리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의 사랑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회복해서 날마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며,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주신 승리를 우리의 승리로 받고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주님을 더 알기 원하는 사람들
글쓴이 : kaporet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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