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만나려면
누가복음 19:1-10
2009.7.5(주일예배)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꿈이 있습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어릴 때부터 남달리 열심히 노력합니다. 그런데 현실이 자신의 꿈꾸던 것과는 달리 꿈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것을 느낄 때 우리는 자신의 꿈을 대체하여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바꾸려고 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의 현실적인 가치관의 제일 기본이 되는 돈을 벌기 위해서 자신의 꿈을 잊어버리고 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구석에는 늘 어릴 때의 꿈이 머리속에 떠올라 괴로워합니다. 부를 통하여 자신의 꿈을 이루어보려고 하지만 그렇게 되지 못함을 깨달을 때, 자신의 삶이 이것은 아니었는데 왜 이렇게 되었을까 생각하면서 다시 돌아가지 못하는 어린 시절의 꿈을 못 이루는 것을 마음아파하며 살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다시 한 번 기회가 주어진다면 꿈을 이루고 싶은 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1. 예수님 앞으로 달려가야 한다
꿈을 잃어버린 삭개오
여기 어릴 때 꿈 많던 한 사람이 소개됩니다. 그의 이름은 삭개오라는 사람입니다. ‘삭개오’라는 이름은 전통적 유대인의 이름으로서 본래의 뜻은 '청결한 사람' 또는 '의로운 사람'입니다. 이름의 의미를 보아서 그의 부모가 그를 믿음으로 키웠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삭개오의 부모는 그가 청결한 사람, 의로운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소망하며 그의 이름을 지었고 믿음으로 살도록 양육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삭개오는 어릴 때 부모 밑에서 자랐을 때는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법을 배우면서 의로운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 하나님 말씀을 배웠을 것입니다. 삭개오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라나서 자기 민족을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을 위하여 좋은 일을 하고 싶은 꿈을 갖고 자라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의 소개에 따르면 삭개오는 세리장의 직책을 맡은 사람이었습니다. 세리장이란 곧 세관장을 의미하는데 세리들을 총괄하는 위치입니다. 당시의 여리고는 베레아 지방으로부터 요단강을 건너가는 통상인들의 길목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세관이 있었을 것이고 그 세관에서는 주로 길르앗 지방으로부터 유입되는 향유 등 여러 상품에 대해 통관세를 징수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삭개오는 이 세관의 우두머리로서 세금 징수를 지휘했던 인물로 보입니다. 당시 세리장은 로마의 막강한 공권력을 이용하여 의도에 따라 자율적으로 세금을 부과하여 징수할 수 있었고, 자기의 부를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삭개오는 '부자'라고 소개됩니다. 이는 당시 세리에게도 '허가낸 도둑'이라는 별명이 붙여졌는데 하물며 세리장이 받고 있는 원성은 더 높았을 것이고 또 그가 누리는 '부'의 원천이 부당한 착취에 있음을 암시합니다.
삭개오는 그의 부모가 청결한 사람으로, 의로운 사람으로 살라고 이름을 삭개오라고 붙여주었지만, 그의 장성한 후의 삶은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삭개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오직 돈을 버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하였고 세리장까지 올라서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돈을 벌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동안 잃어버린 것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청결한 사람, 의로운 사람으로 살아야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마음에는 항상 그늘이 있었습니다. 부모님이 자신에게 붙여진 이름값도 못하고 사는 것이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려고 나간 삭개오
그런데 예수님이 여리고에 오셨다는 소문이 들렸습니다. 더구나 여리고에 들오시면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서 예수님을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삭개오에게 예수님의 소문은 복음이었습니다. 소문에 의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죄인을 구원하러오신 메시야(구원자)이심이 분명하였습니다. 그래서 삭개오는 자신과 같은 죄인도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 묻고 싶었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이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여 나갔습니다. 삭개오도 이미 예수님께 관한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확인하고, 또 만나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예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많아서 앞을 가려 예수님이 보이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키가 작아서였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는데 있어서 장애가 되는 첫 번째 요인은 사람이 많아서 다른 사람에 의해서 방해되는 점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미 예수님을 만나려고 모여든 무리가 예수님을 가리고 있기 때문에 삭개오는 예수님을 볼래야 볼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오늘날도 교회에서 먼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왜곡된 특권 의식이나 이기심 때문에 새롭게 교회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을 외면하고 도리어 문을 막고 있는 위치에 있음으로써 예수님을 가로막아 다른 사람의 구원을 방해하는 결과를 낳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날 수 없는 두 번째 요인은 키가 작은 점입니다. 키가 작다는 말은 볼 수 있는 위치에 못미친다는 말인데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는 이유가 자신의 영적 결핍에 있다는 말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기적 교만, 세상적 욕심, 진리에 대한 경멸심 등이 다 여기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뽕나무에 오른 삭개오
그러나 삭개오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앞으로 나아가 뽕나무를 향하여 달려갔습니다. 아마도 삭개오는 예수님의 일행이 걸어가는 방향으로 앞질러가 기다리려고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삭개오는 자신의 한계 즉 예수님을 만날 수 없게 하는 요인을 극복하려는 앞으로 달려간 것입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뽕나무 위로 올라가게 됨으로써 자기의 한계성(限界性)을 극복해 내는 놀라운 지혜를 발휘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기에게 관계된 외적. 내적 한계를 극복하고 앞으로 향해 달려가는 삭개오의 용기가 참다운 신앙을 형성하게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삭개오가 올라간 뽕나무는 단순한 뽕나무가 아니라 '애굽 무화과' 또는 '무화과 뽕나무'라고도 불리워지며, 열매는 무화과이고 잎은 뽕잎인 나무로서 요단강 지역에서 많이 자랍니다. 이 나무는 그 가지가 넓게 퍼지고 아래로 늘어져 있어 비교적 쉽게 오를 수 있었을 것입니다.
2. 예수님이 찾아오신다
삭개오를 찾아오신 예수님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려고 뽕나무 위에 올라갔는데, 예수님은 삭개오가 올라간 뽕나무가 있는 곳으로 오시어 우러러 보십니다. 삭개오는 무리 중 한사람으로서 예수님을 보는 것으로 만족했는데 예수님은 삭개오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은혜입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야’라고 부르시며, 뽕나무 위에 올라 앉아있는 삭개오의 이름을 직접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신적 전지성에 의해 삭개오의 이름을 아시고, 삭개오를 지목하여 인격적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하나님의 능력으로 삭개오가 당신을 만나기 위해서 뽕나무에 올라간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의 마음을 성령의 능력으로 알고 계신 것입니다. 당신을 만나서 믿음으로 구원얻고 싶어하는 삭개오의 간절한 마음을 아시고 그에게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부르신 것입니다. 자비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동일하게 우리가 주님을 만나려고 나아갈 때 우리를 인격적으로 아시고 찾아오셔서 부르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을 향하여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인격적 초대는 단순한 부름에 그치지 않고 삭개오의 집에 함께 머무르는 것까지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은 예수님의 주권적인 초대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기 위해 자신이 갖고 있는 여러가지의 한계점을 극복하려고 노력했지만 그것은 사실 호기심이었고 진정한 의미에서 만남은 예수님이 인격적으로 삭개오를 부르고 그의 집에서 머물겠다고 제안한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는 이미 성령께서 오셔서 내주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삭개오
삭개오는 예수님의 인격적 초청에 대해 즉각적으로 응답하여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였습니다. 이것은 삭개오가 예수님의 제안을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표현인 것입니다. 이는 매우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예수님의 인격적 부르심과 삭개오의 전격적인 영접은 구원의 눈부신 접촉점이 되고 있습니다. 이같이 누구에게든 향하고 있는 예수님의 초청을(요 6:35;7:37)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고 영접하는 사람에게 구원의 문은 활짝 열리게 됩니다. 삭개오가 이같이 기쁜 마음으로 승낙한 것은 이미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잘 알고 있었고 그 명성에 대한 권위를 인정함을 뜻합니다. 또 삭개오는 평소에 자신의 세리장이라는 직책과 정당하지 못한 세금 징수 때문에 주민들로부터 원성을 샀을 것이 분명하며 따라서 소외된 아픈 심정을 갖고 있었을 것입니다. 또 자신의 정당하지 못한 행위에 대한 자책감으로 고민하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름은 삭개오에게 있어서 어둠 속에 비추어지는 빛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자신을 그 명성 높으신 예수님이 초청했다는 것은 감격스러운 일이었고 또 자신을 초청했다는 사실은 모든 사람이 자신을 죄인이라고 배척하는 지옥같은 상황(7절)으로부터 구원해주는 생생한 용서의 선언으로 이해됐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반응
그러나 사람들은 삭개오를 부르시고 그 집에 유하시겠다는 예수님의 처사를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리며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다”고 말한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당시 세리는 죄인 취급을 당하였으므로 예수님의 행위는 당연히 문제시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죄인의 집에 머물며 함께 식사한다는 사실은 죄인의 죄를 인정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5:29,30). 이들의 수군거리는 모습에서 우리는 인간의 두가지 악한 본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자신의 눈에 박힌 들보를 보지 못하고 타인의 눈에 묻은 티를 흉보는 비판 심리입니다(마 7:3). 특히 당시 유대인들은 왜곡된 선민의식에 근거한 교만과 자기의를 과시하는 형식주의로 인해 타인을 비판하는 일에 열심이었던 것입니다. 둘째는 타인의 잘됨을 시기하는 심리입니다. 본문의 '뭇 사람'은 죄인에 불과한 세리장이 예수님의 관심과 호의를 받게 되자 시기심이 발동하였던 것 같습니다.
3. 예수님을 만난 자의 축복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삭개오
삭개오는 예수님을 영접하여 식사를 제공하면서 식탁 옆에 서서 주께 말씀드립니다. 삭개오가 일어서서 말하는 것은 자신의 말이 진실함을 나타내 보이기 위함입니다. 삭개오는 “주여 보시옵소서.”라고 말하면서 예수님께 진지하게 말을 합니다. 이미 삭개오는 예수님께 대한 호칭을 신앙적인 의미의 ‘주’라는 말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호칭은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소문대로 메시야라고 믿어졌기 때문입니다. 또 삭개오는 ‘보시옵소서’라는 말로서 자신의 의지의 단호함과 실천 가능성에 있어서 자신 만만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모신 그의 기쁨과 결부되어 나오는 즐거운 선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삭개오는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라고 고백합니다. 삭개오는 당시 랍비들에 의해 제시된 구제비 곧 소유 혹은 수입의 20%보다 훨씬 많은 파격적 액수를 제시합니다. 이러한 헌신적인 태도는, 영생을 사모하여 예수님께로 나아왔으면서도 '네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근심하여 집으로 돌아갔던 부자 청년의 모습과 너무도 대조적입니다(18:18-23).
이어서 삭개오는 “만일 뉘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만일'로 시작되는 가정문은 삭개오가 부당하게 다른 사람들로부터 갈취한 사실이 없다는 뜻보다는 '토색한 것은 무엇이나' 갚겠다는 의미이며, 삭개오가 부당하게 취한 모든 것은 본래의 주인에게 확실하게 그리고 무엇이나 돌려준다는 의미가 됩니다. 여기서 삭개오는 부당하게 빼앗긴 사람에게 본래의 것의 4배를 돌려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부정으로 취한 것을 돌려 줄때에는 1/5을 덧붙여 상환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레 6:5;민 5:7). 또 남의 것을 도적질한 것은 4배로 갚아야 한다는 규정도 있습니다(출 22:1;삼하 12:6). 따라서 삭개오의 이같은 선언은 당시 율법이 정하는 도적질에 상당하는 배상을 하겠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삭개오 자신이 그같은 정도의 죄를 범하였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같은 삭개오의 파격적(破格的)인 행위는 자기중심적 삶을 전적으로 부정하고 새로이 방향을 바꾸는 전격적인 회개의 표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회개의 참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회개는 죄에 대한 참회나 죄에 대한 단순한 고백에서 끝날 것이 아니라 전격적으로 삶의 방향을 바꾸는 실천적 행동을 동반해야 하는 것입니다.
구원을 선언하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삭개오의 고백을 들으시고 삭개오의 구원을 선언하십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삭개오의 고백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 역시 즉각적인 것이었습니다. 즉 구원이 오늘 이 집에서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죄인으로 취급받았던 죄인에게 구원을 선언한 것은 당시 사람들의 눈에는 실로 파격적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이같은 선언은 삭개오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그에 대한 보상으로 4배가 갚겠다고 결단한 것에 따른 응답인 것입니다. 구원은 장차 미래에 이루어질 것으로만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실천적 결단을 통해 경험되는 현재적인 구원입니다. 예수님이 삭개오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공동체로부터 소외되고 배타적인 대접을 받아온 삭개오를 공동체로 복귀시켜 당당하게 한 형제로 살아가야 할 것임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특히 삭개오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삭개오야말로 참된 믿음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당시 종교적 복권은 곧 정치. 사회적 복권을 의미하며 더 나아가서는 전인적 인간 구원을 의미합니다. 삭개오는 지금까지 자신의 이름값도 못하는 삶을 살았지만, 이제는 자신의 부모가 지어준 이름처럼 깨끗한 사람, 의로운 사람으로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에게 구원을 선언하신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즉 예수님은 삭개오처럼 하나님을 떠나서 방황하는 자들을 찾아서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메시야(구원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예수님의 삭개오에 대한 구원 선언에 대한 신적인 권위를 부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잃어버린 자에 대한 구원’이란 소외되고 비뚤어진 인간을 다시 공동체로 복귀시켜 당당하고 품위있게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이 말은 온갖 죄악과 허물로 말미암아 혼돈과 파멸에로 향하는 인간들을 구해내사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로 인도하시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이같은 선언은 사실 예수님의 메시야로서의 전체적 삶을 요약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병에 걸려 정상적인 인간 삶이 불가능한 귀신들린 자(마 17:18), 문둥병자(17:14), 벙어리, 귀머거리(막 9:25), 소경(막 8:23) 등과 같은 사람들을 치유하고 공동체로 복귀시키며, 삭개오와 같은 죄인들을 용서하고 공동체로 복귀시키는 모든 행위는 땅위의 평화(平和)를 위한 사랑의 치유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사람다워질 수 있도록 하는 예수님의 구원 행위는 오늘날의 기독교가 우선적으로 따라야 할 과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4. 적용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도 오늘 예수님을 만나려고 교회에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삭개오처럼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뽕나무를 올라갔던 삭개오처럼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려면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 안의 문제를 돌아보고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만나기를 힘써야합니다. 설교말씀을 듣고 성경말씀을 읽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의 음성을 듣기에 힘써야합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영으로 오신 성령님께 감동된 사람들이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예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을 의지하여 간절하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하여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심령 속에서 예수님을 가르쳐 주실 때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하면 예수님이 뽕나무 위에 있던 삭개오를 찾아오셔서 그를 부르셨듯이, 예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에게 오시어 우리의 이름을 부르실 것입니다. 그리고 삭개오처럼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면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다 용서해주시고 구원해주십니다. 삭개오가 회개한 후 성결한 삶을 산 것처럼 우리도 성결한 삶을 살아야할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든지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고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고 성도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성도’라는 말은 ‘거룩한 무리’라는 의미입니다. 거룩한 무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려고 노력을 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살아가야하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세상사람들의 방식을 따르며 때로는 거짓을 말하고 속임수를 쓰고 남의 것을 빼앗고 심지어는 교회공동체 안의 형제자매에게도 속이는 일을 하면 안됩니다. 또한 우리는 작은 일에도 다른 형제에 대하여 미워하거나 판단하면 안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실 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할까봐 성령을 보내시어 우리를 가르치시고 인도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조명을 받지 않으면서 자신의 생각만 의지하고 살게 되면 우리는 거룩한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자신이 성도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 위하여 끊임없이 성령을 의지하여 기도함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살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할 것입니다. 우리의 삶속에서 매순간마다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서 거룩한 삶을 살기에 힘써야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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