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야말로 주님을 찾을 때 마태복음 8:23-27 2009.6.7(주일 예배) 들어가는 말 여러분은 어릴 때 미아가 된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까? 어떤 아이가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시장에 갔습니다. 어머니는 장을 보기에 분주해서 아이에게 절대로 엄마곁을 떠나지 말라고 당부하고 자신의 치맛자락을 붙잡으라고 말했습니다. 아이는 엄마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시장의 이곳저곳의 풍경을 구경했습니다. 어린아이의 눈에는 시장의 물건들이 신기하게 비쳐졌습니다. 생선을 파는 점포, 야채를 파는 점포, 과일을 파는 점포, 고기를 파는 점포 등에 마음이 빼앗긴 아이는 점점 엄마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가는 것을 잊어버리고 사람들의 물결에 따라서 흘러갔습니다. 얼마 지나서 아이는 자신이 붙잡고 있는 사람이 엄마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놀라서 울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아이의 엄마가 누구인지 찾아주기 위해서 아이를 그곳에 세우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아이의 엄마도 장을 다 보고 아이가 옆에 있는 줄 알고 돌아보니 아이가 보이질 않아 시장을 찾아 다녔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붙들고 있던 사람들의 도움으로 겨우 아이를 찾게 됩니다. 아이는 엄마를 다시 만난 기쁨에 방금 전까지의 두려움이 사라지고 얼굴에 웃음을 찾게 됩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와 비슷한 사건을 보게 됩니다. 1. 풍랑을 만난 제자들 본문 배경 본문의 내용은 예수님이 산에서 제자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신 후 산에서 내려오실 때 문둥병자를 만나 고치시고, 가버나움에 들어가셔서 백부장이 자신의 종이 중풍병으로 고통을 당한다고 하며 고쳐주시기를 원할 때 말씀으로 고치시고,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서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신 이야기 뒤에 나옵니다. 예수님께 나와서 병 고치심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가 믿음을 가진 자이거나 믿음을 가진 자와 관계된 사람으로서, 그들이 모두 예수님을 의뢰하고 믿음을 가진 때 예수님은 그들을 치료하신 것을 봅니다. 예수님이 치유사역을 하실 때 옆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제자들은 아마도 자신들도 함께 그 일을 한 것인양 마음이 우쭐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도 무엇인가 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주무시는 예수님 그 일이 있은 후 예수님이 배에 오르시고 제자들도 함께 배에 오릅니다(23절). 어느 정도 배가 항해를 했을 때 큰 풍랑이 일어나고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는데, 그때 예수님은 배에서 주무시고 계셨습니다(24절). 우리는 여기서 왜 예수님이 주무시고 계셨는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치유사역을 하시거나 말씀을 가르치신 후 대체로 제자들과 말씀을 나누시며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더 자세히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주무시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왜 주무시고 계신지에 대해서 성경에서는 침묵하고 있지만 한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배에 오르기 전에 예수님이 행하신 사역을 말하면서 자신들끼리 신이 나서 떠들며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그 대화속에 예수님이 함께 할 수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계신 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자신들의 이야기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도 무엇인가 대단한 일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며 이야기꽃을 피운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 예수님은 사역의 피곤함 때문에 팔베개를 하고 잠이 드셨습니다. 자신들의 힘으로 해결하려는 제자들 그런데 배를 저어간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며 물결이 덮였습니다. 당시 제자들이 탄 배는 돛을 달지 않은 약 12-13명 정도의 어부와 잡은 고기를 실을 수 있는 조그마한 고기잡이 배였던 것 같습니다. 제자들의 대부분이 어부 출신이고 갈릴리 바다에서 뼈가 굵은 사람들이라 처음에는 자신들의 힘으로 배를 움직여나가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배에 바다물결이 덮이게 될 때 제자들의 마음에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큰 놀'은 지진이나 바다의 폭풍우를 가리킬 때 쓰이는 것으로서 어부 출신 제자들조차도 심한 두려움을 느낄만큼 강력한 힘의 풍랑을 뜻합니다. 갈릴리 바다에는 이 같은 현상이 자주 일어나곤 하였습니다. 갈릴리 바다는 해수면보다 약 240m 아래 위치해 있는 반면 주변의 산들은 고원을 이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갈릴리 바다의 표면온도가 갑자기 상승하면 기압이 형성되어 남동쪽의 고원으로부터 거센 바람을 일으키게 됩니다. 여기서 불어오는 거센 바람이 이같은 거센 파도를 일으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당시 구약성경에 약간의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거센 풍랑이 이는 바다를 잠잠케 하시는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과 더불어 계신다는 사실을 알고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욥 38:8-11; 시 29:3,4; 65:5-7; 89:9). 적어도 제자들에 배를 타기 전에 예수님께서 행하신 사역을 기억하였다면 결코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는 그들의 배에 오신 예수님이 자신들에게 말씀하신대로 깊은 곳에 그물을 내렸을 때 물고기를 두 배에 가득 잡은 기적을 기억하고 예수님을 바라고 두려워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시면 풍랑이 일어도 자신들을 보호하실 것을 믿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는 배에서 주무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라 바다 물결이 배에 덮이는 것만을 보았기 때문에 두려워한 것입니다. 아직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존재가 눈에 들어오자 않는 것은 자신들이 무엇인가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노력으로 배가 앞으로 나아가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노력해보았지만, 헛수고였습니다. 바다물결은 거세게 배위로 몰아치고 금방이라도 배가 잠길 것 같았습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이제는 죽었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신들의 노력으로는 아무리해도 문제해결이 되지 않음을 깨달았을 때 절망감이 밀려왔습니다. 2.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는 제자들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때 그들의 시야에 들어오는 분이 있었습니다. 배에서 주무시는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구원을 요청합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가능하다고 느낄 때까지 예수님의 존재를 잊고 있었습니다만, 스스로의 힘으로 문제해결이 불가능함을 깨달을 때 비로소 예수님이 계시다는 사실에 눈을 뜬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예수님과 동행한다고 생각은 하지만 예수님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특히 우리가 일을 잘 해나간다고 생각할 때는 예수님의 존재를 잊어버립니다. 자신의 능력을 믿고 일을 해나가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문제에 부딪히면 이때까지의 자신의 힘을 다 동원하면서 어떻게 하든지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문제해결의 가능성이 없어지고 절망의 상태가 되었을 때 간신히 눈을 뜨게 되는 것이 자신이 믿고 있는 예수님입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예수님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주실 것이라는 믿음은 없습니다. 단지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예수님께 자신의 문제를 아룁니다. 주여 구원하소서 제자들은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우면서 구원을 요청합니다.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25절) 지금 제자들은 지금 두려움에 빠져서 예수님께 구원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지금 배를 덮는 물결 때문에 정신이 없습니다. 오직 지금 일어난 문제가 어찌하든 해결되기를 바라지만 상황을 정확하게 읽고 있지 못합니다. 그들은 아직도 풍랑이 일어나고 있는 바다만을 보았지 예수님을 바라보질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때까지 기적을 일으키시고 병자들을 치료하셨기 때문에 희망을 걸고 구원을 요청하고 있지만 예수님의 존재를 아직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죽겠나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었더라면 예수님이 타신 배가 물에 빠진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본문과 병행구절인 마가복음 4:35-41을 보면 주님이 제자들에게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라고 말씀하십니다(막 4:35).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제자들은 틀림없이 건너편으로 건너갈 것을 확신해야만한 것입니다. 도중에 풍랑이 불어도 주님이 함께 하시면 배가 침몰하지 않고 틀림없이 건너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므로 예수님을 깨우며 구원을 요청하면서도 자신들이 죽게 되었다고 아우성을 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믿는다고 말하며, 우리의 신앙고백을 통하여 예배 때마다 고백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생활하면서 문제에 부딪히면 자신이 믿고 있는 예수님께 문제를 가져오기보다는 자신의 힘으로 해보려고 하든지 아니면 하다하다가 자포자기하고 마는 모습들을 얼마나 많이 봅니까? 마치 하나님이 아니 계신 것처럼 생각하고서 낙망하는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3.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신 예수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예수님이 제자들의 요청을 듣고서 일어나셔서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26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고 책망하신 것은, 제자들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가 배에 함께 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생각은 전적으로 바람과 파도의 지배권 아래만 머물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지금 꾸짖으신 것은 단순히 제자들의 감정적인 공포나 위기의식 때문이 아니라 그들 속에 잠재한 불신앙적 성향과 환경 의존적인 미숙한 신앙 상태 때문입니다. 실로 제자들이 무서워하는 것은 단적으로 그들의 믿음이 불완전한 것이었음을 나타내줍니다. 결국 이 불완전한 믿음은 제자들이 예수님과의 관계를 확고히 하지 못한 데서 빚어진 필연적인 결과였습니다. 정녕 제자들이 예수님과 완전히 일치된 관계성을 회복할 때 그들은 위험이나 질병이나 죽음조차도 무서워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 모든 것들을 초월하여 계신 만유의 주인이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왜 제자들이 믿음이 적다고 하셨을까요? 그들이 예수님을 깨운 것은 믿음이 아닌가요? 예수님이 제자들을 향해서 믿음이 적다고 하신 것은 예수님을 깨우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예수님을 깨울 때 무서워했던 것이었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는 말은 믿음의 양이 적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믿음의 질이 좋지 못하다는 뜻으로 쓰입니다. 사실 믿음은 두려움을 몰아내고 두려움은 믿음을 몰아냅니다. 실로 그리스도께 대한 완전한 사랑과 신뢰는 모든 두려움의 뿌리까지도 소멸시킬 수 있습니다(요일 4:18). 제자들이 아직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못하고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이 비록 예수님을 깨울지라도 그들의 마음에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단지 예수님께 문제를 말하면서 어떤 해결책을 바라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문제를 해결해주실지 어떨지 결과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그들이 예수님을 믿고 있다면 결코 두려움이 없이 단지 문제만을 예수님께 아뢰면서 문제해결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우리들도 신앙생활에서 문제가 있을 때 제자들처럼 허둥대며 문제해결을 바라면서 기도합니다. 그러나 정말 그 문제가 해결될지 결과에 대한 확신이 없이 두려움을 가지면서 기도할 때가 많습니다. 그때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왜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여.” 주님은 우리가 전적으로 주님을 신뢰하며 우리의 문제를 위해서 기도하기를 요청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문제의 해답을 가지시고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우리는 단지 믿음으로 구하기만 하면 주님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너희가 내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신 예수님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이 믿음이 적은 가운데서도 그들에게 당신의 메시야 되심을 나타내 보이시기 위해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십니다. 그 결과 바다가 아주 잔잔해집니다.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는 예수님의 탁월하고도 절대적인 권위를 나타내는 행동입니다. 진정 예수님은 말씀 한 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신 동시에 말씀 한 마디로 우주와 자연의 질서를 다스려 가시는 전능자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때 바람뿐만 아니라 바다에게도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바다의 풍랑은 그 즉시 그쳐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주 잔잔해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로 말미암은 평안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권능을 가지고 자연을 명하여 잔잔해지는 모습은 하나님의 임재가 예수님을 통하여 그대로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위에 찬 명령은 바로 이같은 극단의 변화를 가져오는 참으로 놀라운 능력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서는 그리고 자연의 인격적 지배자가 아니고서는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의 말씀은 곧 폭풍우도 굴복시키고 잠잠케 하는 신적 권위인 동시에 전우주적인 능력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게 되는 제자들 예수님께서 바다를 잔잔하게 하신 뒤에 제자들은 기이히 여기며,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라고 말합니다(27절). 제자들은 자신들이 예수님께 자신들을 구원해달라고 요청을 하고서도 예수님이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신 것을 보고 기이히 여깁니다. 제자들이 기이히 여겼다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하신 일을 아직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문둥병자를 고치신 것과 백부장의 종을 말씀 한마디로 치료하신 것과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신 것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라고 말한 것은 이와 같은 능력을 소유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감탄의 말입니다. 배를 침몰시키려는 파도와 폭풍우를 말씀으로 잔잔케 하신 능력의 예수님 앞에서 그들은 놀라고 놀라 그가 하나님 그 자신이심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은 제자 자신들이 지금껏 지녀온 그분의 인격에 관한 지식이 참으로 보잘 것 없었음을 실토한 것인 동시에 하나님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거센 파도와 폭풍우를 잠재울 수 없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어떻게 하나님의 권능으로만 할 수 있는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는 일을 하셨는가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아직도 제자들은 예수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이 부족한 것입니다. 이들의 모습에 대하여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의 믿음이 어디 있느냐”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봅니다(눅 8:25). 제자들에게는 아직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믿음이 부족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적은 믿음으로 기도를 해도 그에 대하여 응답을 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기도응답에 대해서 우리가 믿음을 보이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의 연약한 믿음을 긍휼히 여기시어 우리의 믿음을 더 성장시키시기 위해서 응답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믿음을 나타내야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자신의 문제를 놓고 간절히 기도하여 문제의 해결을 받고도, 자신이 응답을 받은 것을 다른 사람의 도움이나 우연히 그 문제가 해결된 것으로 생각하는 때가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여 응답을 받고도 믿음을 나타내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큰 축복을 주시려고 준비하시는 것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으로 감사하며 나아갈 때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나가는 말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도 때때로 주님을 잊어버리고 살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문제가 일어날 때 허둥대며 어찌할바 몰라 당황합니다. 그러나 그때야말로 예수님을 찾아야할 때입니다. 주님께 믿음을 가지고 구할 때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예배를 잘 드리고 봉사를 잘 하고 있으니까 믿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배를 드리고 봉사하는 것 것만으로는 온전한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온전한 믿음은 우리가 어려움을 겪을 때 정말 주님만 신뢰하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을 의지하면서 주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살 수 없다고 고백하며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 앞에 우리의 믿음을 보이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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