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요한복음 3:1-15 2009.7.12(주일예배) 몇 년전에 디즈니랜드에 간적이 있습니다. 필리핀에서 조카들이 왔기 때문에 그들을 그곳에 데려가기로 했습니다. 조카들을 데려가기 며칠 전에 사전 답사하는 의미로 가서 주변을 보았습니다. 우리도 한번도 들어간 적이 없기에 어떻게 가이드를 해야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미리 가본 것입니다. 디즈니랜드를 한바뀌 도는 전차가 있어서 탔습니다. 그러나 겉에서는 아무리 보아도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습니다. 팜프렛을 얻어서 돌아왔지만, 팜프렛으로는 전혀 방향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당일 조카들을 데리고 가서 팜프렛을 보면서 가이드를 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입장권을 사서 들어가서 하루종일 이곳저곳을 돌아보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경험보다 중요한 지식은 없다는 사실이 실감났습니다. 아무리 디즈니랜드에 대해서 잘 설명한 책을 읽어도 한 번 들어가 본 것보다는 못한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되어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 예수님을 찾은 니고데모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시면서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느니라”고 선포하시면서 그 증거로 여러 가지 표적을 일으키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메시야가 오시면 하나님 나라가 임할 것이라는 구약의 예언서를 기억하고 예수님 곁으로 모여 하나님 나라의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소식을 들은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니고데모라는 사람입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었고 유대인의 관원이었습니다(1절). 바리새인은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믿고 있는 유대교 중의 일파로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엄격하게 살아가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살아간다고 하면서 엄격한 생활을 했습니다. 니고데모는 그런 바리새인으로서 하나님 말씀을 엄격하게 지키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유대인의 관원으로서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관원은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을 가리키는데, 산헤드린은 그 당시 유대인의 최고 종교 회의 기관으로 그 구성원의 수는 71인으로 알려졌으며 고위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조상들의 율법에 정통하여 모든 백성들로부터 존경받는 율법 교사들 중의 한 명이었습니다. 율법 학자가 된 사람은 종교법과 의식(儀式)의 문제들에 대해 독자적임 판결을 내릴 수 있었으며(Sanh), 형사 소송 때에는 재판관으로서 참여할 수 있었으며, 민사 소송 때에는 여러 재판관들과 함께 판결을 내리거나 아니면 단독 재판으로서 판결을 내릴 수 있었고 또한 랍비라는 칭호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 니고데모가 한밤중에 예수님 계신 곳으로 왔습니다(2절). 왜 니고데모가 한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을까요? 아마도 니고데모는 타인의 이목이 두려워했고, 분주한 낮시간을 피해 예수님과 친밀한 대화를 오래도록 나누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 온 것은 그로서도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어서 답답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정체를 잘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기적들은 분명히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것을 말하는데, 예수님의 출신을 보면 그런 일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나사렛 목수의 아들입니다. 나사렛은 갈릴리 지역에서도 아주 작은 촌구석이었습니다. 갈릴리 지역은 유대지역의 북쪽에 있는 갈릴리 호수를 중심으로 있는 곳인데 그중에서도 나사렛은 작은 마을 이었습니다. 그런 작은 마을의 목수 요셉의 아들이 예수님의 신분의 전체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이 땅에 오실 그리스도라면 다윗의 후손으로서 베들레헴 출신이어야 하고 적어도 그는 율법학교정도는 졸업한 사람이어야 하는데, 학교도 안다닌 무식한 목수의 아들인 예수님이 표적을 일으키고 하나님나라에 대하여 메시지를 전파한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니고데모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밤중에 몰래 온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나온 이유 니고데모는 예수님께 오자마자 예수님의 소문에 대해서 말합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은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2절) 니고데모의 이러한 고백은 그 당시의 바리새인의 입에서는 나올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로 인정하지도 아니하였고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가르치는 것조차 못마땅하게 여기던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랍비여’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선생님’이라는 말입니다. 니고데모는 적어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는 선생이심을 인정한 것입니다. 랍비가 되려면 서품(敍品)을 받아 율법학자단에 가입하고자 하는 사람은 수 년 동안의 정규적인 연구 과정을 마쳐야 했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그들은 모든 전승 자료와 할라카의 해석 방법을 통달하게 되고, 비로소 종교법과 형법(刑法)의 문제들에 대해 독자적인 판결을 내릴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같이 '랍비'가 되기위한 공부를 전혀 하지 않은 사람은 서품을 받은 율법학자들이 누리는 특권을 행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미 그의 제자들이나 일반 대중들로부터 '랍비'라고 불리고 있었습니다. 특히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랍비'라고 부른 것은 유대의 상층 계급에 속한 사람으로는 처음 있었던 일이요 따라서 예수님이 이미 그러한 계층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음을 추측케 합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이라고 말한 것은, 예수님을 선생 이상의 존재 즉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모세, 예레미야, 세례 요한 등과 같은 선지자 중의 한 사람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 당시 유대인 중에서 “하나님의 보내신 의로운 선생이 오시면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새로운 것을 가르시고 그가 이스라엘을 구원하리라는 것”이 전파되었는데, 바로 예수님이 그 의로운 선생이라는 말씀입니다. 니고데모가 이렇게 고백한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지 않으면 아무라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많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니고데모가 보기에는 예수님은 분명히 ‘의로운 선생’이었습니다. 아직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지만, 적어도 하나님이 보내신다는 의로운 선생임을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확인하고 싶어서 한밤중에 몰래 온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바로 표적을 통해서입니다(2:23). 이 '표적'('세메이온')이라는 말은 신적 권위와 위엄의 증거를 보여주는 이적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이 표적들을 통해 당신의 교훈들을 확증하셨습니다. 본문에서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표적들을 통해 예수의 탁월하신 교훈 능력을 인정하였던 것은 중요한 통찰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예수님의 교훈보다는 표적 자체에 더 큰 관심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2.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비록 니고데모가 바리새인이요 유대인의 관원이요 이스라엘의 선생이지만 그가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밀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말씀을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잘 몰랐습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서 확인하고 싶은 것은 ‘정말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인가’ 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가 묻고 싶은 것이 하나님나라에 대한 것임을 아시고 그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절) 니고데모는 거듭난다는 말을 처음 들었습니다.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통 알 수도 없었습니다. ‘거듭나지 아니하면’이라는 말은 ‘위에서부터 나지 아니하면’ 곧 ‘하나님께로부터 나지 아니하면’의 뜻이 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이 기도, 제사, 세례로써 유대교에 개종하면 그를 거듭난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선택받은 백성인 유대인들조차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에 의해서, 거듭나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즉 어느 한 부분만이 개선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 본성이 새롭게 되는 사건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중생이란 죄와 허물로 죽었던 영적 생명을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살리는(고후 5:17) 성령의 역사로서(엡 2:5), 성령 혹은 말씀으로 거듭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중생은 육에 속한 자연인의 지(知), 의(意), 정(情)을 향상, 계발(啓發)하는 것이라기보다 근본적이며 전인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불 수 없다’는 말은 ‘하나님 나라에 참예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거듭난다는 말에 대해서 니고데모는 엉뚱한 소리를 합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4절) 니고데모는 이스라엘의 선생이었지만, 영적으로 눈이 열리지 않으니까 바보같은 소리를 합니다. 그는 거듭난다는 말을 사람이 모태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으로 이해로 하고, 늙어서 모태에 들어갔다가 다시 난다는 것이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까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늙어서 어머니 태에 다시 들어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어쨌든 니고데모는 '사람이 다시 모친(母親)의 배 속에 들어갔다 나올 수 없는 것처럼 인간 본질의 재창조가 어찌 가능 하겠는가'라고 생각하며, 중생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깊은 의문에 휩싸였던 것이다. 3, 거듭나려면 어떻게 해야하나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한다 니고데모의 어리석은 질문에 예수님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은 '거듭난다'고 하는 것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입니다. 그러면 ‘물과 성령으로 난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먼저 물로 난다는 말은 물로 씻음을 말합니다. 물로 씻는 것은 죄를 씻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거룩한 곳이기에 죄를 가지고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모든 죄를 깨끗이 씻지 않고는 결코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자는 죄를 씻어야 들어감을 말씀합니다. 물은 깨끗하게 하는 상징으로 유대인들에게는 희생 제사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요소입니다. 특별히 제사장은 몸을 씻지 않고서는 언약의 피를 갖고 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구약시대에 사람이 죄를 범하고 난 후 그 죄가 깨달아진 때 회개하고 자신의 죄를 고백할 때 그 사람을 위하여 희생제물을 잡아 그 피로 붓고 그 육체는 번제단에서 다 태운 후 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가 하나님으로부터 죄사함의 선포를 듣고서 제사를 드린 사람에게 죄사함을 선포할 때 그 사람은 죄사함을 받고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때 드려진 희생제물은 장차오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물로 씻는 다는 것은 자신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으로 난다는 말씀은 성령으로 새로 태어난 것을 말씀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영이신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영으로 거듭나는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로 태어난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으로 나는 것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신 구주이심을 믿을 때 그 사람의 심령 속에 성령께서 들어가심으로 그 삶의 영이 새로워짐을 말합니다.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은 거듭남이 그리스도와의 연합 곧 성령 세례를 통해 이루어지며, 물세례는 이 사실에 대한 공적 선포(宣布)이자 상징적 의식으로서의 의의를 지님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세례는 자신의 죄를 고백한 사람들이 물에 잠기었다가 다시 일어나는 예식입니다. 물에 잠길 때 호흡이 있는 자가 죽는 것처럼 자신의 죄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과 함께 자신도 죽었다고 믿는 믿음으로 물에 잠기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물에서 다시 일어날 때 다시 호흡을 할 수 있어 살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3일만에 다시 사심과 같이 우리도 부활한다는 믿음으로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 예수님은 거듭남에 대해서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6절) 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육체로는 거듭날 수 가 없습니다. 사람이 한번 육체로 태어나서 다시 어머니 태에 들어가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영으로 거듭나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으로 난다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니고데모가 놀란 것은 중생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민족적. 신분적 구분도 없이 모든 사람이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3절). 따라서 이 원칙은 율법의 준수자요 바리새인인 니고데모에게도 물론 적용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해 당혹하였을 것이며, 또 이 중생의 방법이 과연 가능한가 하는 의혹(疑惑)에 잠겼을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은 마치 바람이 불 때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함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8절). 바람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소리를 통해 그리고 그 결과에 의해 그 실재성(reality)을 보여줍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으로 나는 것은 사람이 알지 못합니다. 언제 성령으로 났는지 우리로서는 알 수 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로서 거듭난 자인지 아닌지는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의 존재 또한 거듭난 사람의 구체적 행실에서 드러나는 여러 가지 변화들을 통해 인식되어질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의 행위에 대해서 평범한 이성으로써 이해할 수 없고 다만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결과만을 알 수 있을 뿐인 것입니다. 실제로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속사람이 변화된 사람은 이전의 죄악된 습성들을 자연히 버리게 되며 갈 5:22, 23에 기록된 바와 같은 소위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현대의 과학을 총동원해도 바람이 어디서 생겨나 어디로 향하는지를 정확히 규정하지 못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의 역사 또한 인간의 능력으로는 그 기원을 헤아릴 수 없으며 다만 우리는 믿음으로 성령께서 곧 하나님과 동등된 분이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역사하시는 분임을 알 따름입니다. 니고데모는 성령의 역사에 대한 설명을 듣고서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고 말합니다. 니고데모는 그러한 사건이 어떻지 경험될 수 있는지 알고 싶었을 것입니다. 유대교에서 이러한 영적 거듭남을 강조하지는 않았지만 겔 36:25-28 등에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거듭남과 중생의 원리가 나타나고 있는데 이에 대한 유대교의 간과(看過)와 무시 때문에 니고데모는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사실 니고데모와 같은 바리새인들은 하나의 고정 관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즉 그들은 혈통상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하나님의 언약에 따라(창 17:1-8) 자연히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생각하였으므로, 거듭남에 대한 예수님의 교훈을 지극히 생소하다고 여긴 것입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반문에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고 책망합니다. 우선 예수님은 니고데모 개인의 영적 무지를 지적하시고 이어 바리새인들을 위시한 유대인들을 책망하십니다(11절).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 자신이 성령의 의미와 위로부터 태어난다고 하는 말의 의미를 구약성경의 연구를 통해 좀더 잘 알고 있어야만 했다고 하는 점을 ‘이스라엘의 선생’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상기시켜 주십니다. 더구나 니고데모 자신은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 참 진리와 거짓을 가리고 판별해 내는 일을 맡고 있던 산헤드린의 한 회원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니고데모를 비롯한 영으로 거듭나지 못한 자들이 알지 못하는 성령의 역사와 그 활동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를 위시해서 예수님이 행한 표적에 의해 영향을 받았으나, 예수님을 믿는 참 신앙에까지는 이르지 못한 무지한 유대인들을 예수님의 증거를 받지 아니합니다. 오랜 세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지자와 구약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예수님 당시의 유대 사람들 역시 예수님의 교훈을 결코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영생에 관한 자신의 가르침이 단순한 추상적 지식이나 논쟁의 대상이 아니라 엄연한 진리임을 분명히 하고서 이를 선포적 차원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기실 이러한 신령한 지식은 성령의 조명을 통한 믿음의 눈으로만 감지할 수 있는 비밀에 속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연 현상인 땅의 일을 예로 들어 설명해 주어도 이해하지 못한 다면 '하늘 일' 곧 영적 실재를 직접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 자명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人者) 외에는” 그 누구도 하늘에 있는 자가 없기 때문에 하늘 일을 말할 수 있는 분은 인자 자신뿐이라고 증거하십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와 ‘인자’ 그리고 ‘하늘에 올라간 자’는 모두 동격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자(人者)로 계신 예수님은 원래 하늘에 계셨던 성자(聖子) 하나님으로서 인간 구원과 새창조를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물론 구약의 두 인물 에녹(창 5:24)과 엘리야(왕하 2 : 9-11)가 승천(昇天) 했다는 기사가 나오지만, 그들은 땅에 살던 자로 하늘에 올라갔으나 그리스도는 하늘에 계시던 자로 땅으로 내려와 하늘의 일을 말씀하셨다는 점에서 확연히 구분됩니다.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자는 영생을 얻음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거듭남의 비밀을 풀어주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14-15절) 예수님은 민 21:4-9의 내용을 들어 거듭남의 비밀을 설명하십니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생활 가운데서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다가 불뱀에 물려 죽게 되었으나 모세가 장대 위에 매달아 놓은 놋뱀을 쳐다본 사람은 살아날 수 있게 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오경에서 인용한 이 말씀의 내용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 사건은 그리스도께서 십자자에서 돌아가실 것과 그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고 믿는 자는 구원을 얻게 될 것임을 예표(豫標)하는 것입니다. 불뱀에 물려서 죽게 된 이스라엘백성이 모세가 장대에 높이 단 놋뱀을 쳐다보고 살아났던 것처럼, 예수님이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신 사실을 믿는 자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이 영으로 새로워짐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저를 믿는 자’란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믿고 구원을 받아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입니다. 거듭난 자는 영생을 얻습니다.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가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요? 영생은 '영원의 생명'의 의미로서, ‘영원히 사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영생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단순히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자신의 마음속에 받아들이고 신뢰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때 우리의 심령 속에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주시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영생입니다.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신이십니다(요일 5:20). 그러므로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습니다.”(요일 5:12)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로 거듭날 때 그 사람은 성령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그때 예수님이 자신 안에 계신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영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도의 심령속에 계심으로 성도는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생을 얻은 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4. 적용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신 것을 믿고 그 믿음으로 거듭난 것을 확신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거듭난 자로서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힘써야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체험한 것 조금만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매일 예수님을 알기 위하여 성경공부를 해야 합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 그리고 배운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을 알기위해 더 기도합니다. 우리의 지혜는 성령께서 지혜를 주셔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는 예수님을 알고 난 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살도록 힘써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살기 위해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살전 5: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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