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사람
누가복음 7:36-50
2007.9.30(주일예배)
들어가는 말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아무리 악한 사람도 자신을 낳아준 부모에 대해서는 악하게 행동을 하지 못하는 것은 그가 적어도 자신을 낳고 키워준 부모의 사랑을 알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부모의 사랑을 알고 있는 한 그 사람은 언젠가 부모의 사랑을 그리워하며 그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입니다.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보다 더 귀한 사랑은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닫는 사람은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고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 앞에 감사하며 하나님을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하여 자신의 소중한 것을 아낌없이 쏟아내는 한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1. 예수님의 발을 씻는 여인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36-38절)
예수님을 초청한 바리새인
어느날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초청하여 함께 식사하기를 권하므로 예수님은 그 집에 들어가서 앉으셨습니다. 아마도 이 바리새인은 예수님이 선지자이신줄 알고 초청하여 말씀을 듣고자 한 것 같습니다. 당시 많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적대시하던 터에 그 중의 한 사람이 식사를 초대하였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異例的)인 것입니다.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초대한 일은 한편 용기있는 태도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바리새인들을 위시한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안식일 규례와 같은 율법을 준수하지 않고 세리나 창기같은 죄인들과 어울리는 죄인으로 정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초대는 하였으나 냉랭한 자세로 손님을 맞이하였습니다(44-46절). 이로 보아 아마 이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초청한 이유가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나 존경에서 나온 것은 아닌듯합니다. 이 바리새인은 병자를 고치기도하며 또 많은 군중들이 예수님께 몰리는 것을 보고 그에게 호기심이 생겼을 수도 있고 또 그에게 '큰 선지자'적인(17절) 능력이 있는가 알아보고도 싶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로 나아와 눈물로 회개하는 여인
그때 그 동네에서 죄인으로 알려진 여인이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신 것을 알고서 향유를 담은 옥합을 들고 그 집에 들어왔습니다. 아마도 이 여인은 한 때 나쁜 길에 빠졌었고 그녀의 타락이 공공연히 알려지게 되어 그 이후로 그녀는 죄인 취급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녀는 비록 죄인으로 취급받고 있었지만 이전부터 들어온 예수님의 소문에 희망을 갖고 그를 찾게 되었습니다. 그녀가 들었던 소문은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과 함께 하시며 죄를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그녀는 매우 귀중한 향유를 담은 옥합을 가지고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옥합은 향유를 담기 위해 만들어진 둥근 그릇으로 손잡이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릇 속에 든 기름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목부분을 깨뜨려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옥합은 매우 값진 품목이었다고 하며 그 속에 든 향유도 값진 것이었습니다. 이런 류의 고급 향류나 값비싼 화장수는 보통 로마의 부유한 여인들이 주로 사용했으며 구하기도 어렵고 매우 귀했기 때문에 매우 가치있는 재산으로 여겨졌습니다. 따라서 이 향유는 그 여인이 특별한 목적으로 구입하였을 것입니다.
여인은 집에 들어오자마자 예수님의 뒤로 가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발 곁에 서자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이는 그녀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자 과거에 지은 죄에 대한 억제할 수 없는 슬픔을 느꼈고 아울러 예수님의 인격 자체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이 그의 마음을 움직임으로써 그녀는 울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여인은 자신으로 하여금 영적인 눈을 뜨게 하고 삶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다주신 예수님께 대한 사랑과 감사의 마음이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녀는 예수님께 표현할 수 있는 최대의 경의를 나타내기 위해 머리를 풀어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머리를 풀어 발을 닦았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의 관습에 의하면 여자가 사람들 앞에서 자기 머리를 풀어 내리는 것은 수치스러운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수치를 무릅쓰고 감격과 경의를 표했던 것입니다. 여인의 왕관이라고 할 머리털로써 예수님의 먼지 묻은 발을 닦는 모습에서 그녀의 철저한 겸손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초대해 놓고서 발 씻을 물조차 제대로 준비해 주지 않은 바리새인의 뻔뻔함과 대조됩니다.
그리고 여인은 예수님의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었습니다. ‘발에 입을 맞추는 것’은 가장 헌신적인 복종과 존경을 표하는 행동으로서, 여인은 예수님께 들어 온 후 계속해서 예수님의 발에 입을 맞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대체로 존경의 표시로 향유를 부을 때는 머리에 붓는 것이 관례였으나 이 여인은 이례적으로 발에 부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발에 접근하는 것조차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녀가 보여준 것은 바로 눈물의 회개와 벅찬 감격의 봉헌(奉獻)이었습니다.
2. 예수님을 더 사랑한 사람은 누군가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이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저가 가로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가라사대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가라사대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39-47절)
예수님을 판단하는 바리새인 시몬
여인이 예수님의 발을 씻는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을 청한 바리새인은 마음속으로 생각합니다.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바리새인은 예수님이 선지자인줄 알고 초청했는데 자신의 눈앞에 벌어진 광경, 즉 죄인인 여인의 행동을 그대로 수수방관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아무래도 예수님이 선지자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이 못마땅한 투로 혼자 중얼거린 것은 죄인인 한 여인이 식탁으로 접근한 사실에 대한 불쾌감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생각에 의하면 예수님이 선지자라면 당연히 발 앞에 무릎 꿇은 여인이 죄인임을 알았을 것이고 또한 그녀를 물리쳤을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죄인의 신분에 있는 사람이 몸에 손대는 것을 허용하신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눈에 똑같이 천박한 사람으로 비쳤던 것입니다. 그 바리새인은 과연 예수님이 사람들의 칭송을 받을 만한 선지자인가 하는 문제에 골몰하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죄인을 불러 의롭게 하기 위해 오신 메시야시라는 점에 대해서는 도무지 무지하였습니다(5:32).
죄사함 받은 자의 사랑에 대한 비유
예수님은 그의 모습을 보시면서 바리새인의 마음을 읽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바리새인은 겉으로 표현하지 않고 심중에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예수님께서는 이미 그 생각을 알고 계셨습니다. 바리새인은 마음속에 예수님께서는 선지자도 아니며 그 여인이 어떠한 여인인지도 모르는 형편없는 사람이라 생각하였으나 예수님은 이미 그 여인의 영적 상태를 간파하여 그녀에게 구원을 베푸시고(50절) 바리새인이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는 것조차 알아차리시고 그에게 논박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교만하고 사악함을 실책하시는 투로 말씀하시지만 그를 적대시하거나 미워하기보다는 그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면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의 잘못됨을 바로 잡아주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시몬이라 하는 바리새인은 “선생님 말씀하소서.”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들어서 말씀하십니다.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 빚의 예화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진 인간의 빚은 너무 많기 때문에 아무리 많은 선행을 한다할지라도 그 빚을 상쇄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에 의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탕감(蕩減)은 하나님께서 우리게 베푸시는 은총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죄를 용서함 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일방적으로 용서하시고 탕감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많이 탕감받은 사람이 예수님을 더 많이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사랑의 비교
시몬은 예수님의 질문에 대하여 대답합니다.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예수님의 질문은 평범한 식견을 가진 사람이라면 쉽게 답할 수 있는 상식적이고도 자명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시몬은 매우 주의 깊게 대답합니다. 아마 그는 예수님의 놀라운 지혜에 관한 소문을 듣고 있었던 터라 자신이 내뱉은 말 한마디 한마디에 긴장을 늦추지 않았을 것이며 더구나 목전에 일어난 상황으로 말미암은 불쾌감과 흉한 속마음을 표출시키지 않기 위해 조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은 시몬의 대답을 들으시고 “네 판단이 옳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시몬의 악한 마음을 정면으로 꾸짖지 않으시고 그의 판단을 '옳다'고 하십니다. 이는 시몬으로 하여금 자신이 범한 무지를 스스로 깨닫고 부끄러운 상황을 직시하게끔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여인을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유대인의 관습에 따라 손님이 방문하면 주인은 먼저 그를 상석에 앉게 하고 손님의 손과 발을 씻기 위해 물을 준비하는 것이 통례였습니다(창 18:4; 19:2; 24:32). 그러나 시몬은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청해 놓고 그러한 통례적인 예의조차 갖추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으로부터 아무런 대접도 받지 못하셨으나 여인으로부터는 전폭적인 헌신의 예를 받으셨습니다. 여인은 눈물을 흘려 머리털로 발을 씻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인의 눈물을 흘려 머리털로 발을 씻고 엎드려 발에 입을 맞추는 행위의 헌신과 향유를 붓는 재물의 헌신은 성도가 지녀야 할 신앙 자세입니다.
또한 입맞춤은 손님을 맞이하는 주인의 자연스러운 영접 인사였습니다(창 29:13; 45:15; 삼하 15:5).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몬은 예수님께 대해 이런 예를 갖추지 않았다. 예수님은 주인으로부터 당연히 받게 되어 있던 환영의 입맞춤도 받지 못한 반면 여인으로부터 발에 입맞춤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머리에 기름을 붓는 행위는 존경하는 손님에게만 특별히 행하는 것은 아닙니다. 뜨거운 태양 밑에서 걸어다닌 사람의 머리에 기름을 붓는 것은 당연한 예의였습니다. '감람유'는 다량 생산되고 값도 싸기 때문에 누구나 손님에게는 머리에 이 기름을 부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몬은 이 일조차도 행치 않았습니다. 반면에 그 여인은 가장 값진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많은 죄가 사하여졌다는 것은 그녀의 죄가 아무리 크고 많다고 해도 모두 사해졌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하여졌다'는 말은 모든 죄를 사함받아 지금은 온전한 상태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죄사함을 받게 된 증거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을 통해 알게 됩니다. 그녀의 사랑의 행위는 그녀의 죄가 참으로 용서되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증거'를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랑이 용서의 이유나 원인이 아니라 사랑을 보여줌으로 죄가 사해졌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사함은 오직 은혜로 내려진 것이기 때문입니다(엡 2:8,9).
3. 죄 사함을 받은 여인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 함께 앉은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48-50절)
네 죄사함을 얻었느니라
예수님은 이어서 여인에게 죄 사함을 선포하십니다.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여자에게 직접 말씀하시면서 처음에 말씀(47절)하셨던 것처럼 '저의 많은 죄'라고 하지 않으시고 '네 죄'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시몬이나 그녀가 모두 죄를 용서받아야 할 똑같은 처지에 놓여 있으며 또한 그 여인이 사함받은 죄란 어떤 특별한 범죄 행위에만 국한되지 않고 알게 모르게 지은 모든 죄와 근원적인 죄까지도 포함된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죄사함에 대한 공적인 선언을 하신 이유는 이 여인으로 하여금 죄사함의 확신을 갖게 하시기 위함과 아울러 지금까지 사람들이 그녀에 대해서 가진 선입견을 바꾸어 놓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아직까지 그녀를 소문난 죄인으로 간주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죄사함의 선언을 들은 함께 앉은 사람들은 속으로 말합니다.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사람들은 예수님의 죄사함의 권세에 대하여 부정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이들은 눈물로 회개하며 죄사함을 얻은 여인과는 대조적으로 자신들의 죄악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아들이 죄를 사하는 것을 보면서 '참람'하다는 생각을 나타낸 것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그러나 예수님은 여인에게 죄사함의 확증을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는 구원이 인간의 공로가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구원하였다'(세소켄)는 완료형으로 이미 구원을 받았고 지금도 구원받은 상태로 남은 것을 말합니다. 이 말은 여인이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음으로 이미 구원에 이른 상태였던 것을 보여 줍니다. 다만 예수님께서는 이미 확보된 구원을 공공연하게 선언하신 것입니다.
‘평안히 가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하신 작별의 인사입니다. 이러한 유대인의 작별인사는 '하나님의 평화가 그대의 것이다'라는 의미를 지니는 전통적인 표현이나(삿 18:6;삼상 1:17;삼하 15:9;왕상 22:17) 이 구절에서는 더욱 깊은 뜻을 나타냅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이 여인이 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구원을 확증받은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멸시받던 죄인인 그녀에게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아 새사람이 되었으니 평안한 마음으로 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평안은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가로막힌 죄의 담이 허물어짐으로써 누리게 되는 영속적인 평안을 말합니다. 평강의 왕이신 예수님을(사 9:6) 영접하는 모든 사람은 다 이러한 영속적이고도 참된 하늘의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행 2:28;엡 6:23;몬 1:20 ; 히 9:22).
나가는 말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도 예수님 앞에 나온 여인처럼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에서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씻으며 발에 입맞추는 모습이 보입니까? 우리도 처음 구원받은 그때 이 여인처럼 그렇게 목놓아 울며 구원의 감격에 감사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모습에서 그때의 구원의 감격이 사라진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기도하셨던 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십시다. 머리의 가시관에서 피를 흘리시며 고통중에 기도하시던 예수님의 모습을 다시 한번 회상하기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인이 예수님을 사랑하여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씻고 입맞춘 것처럼 이 시간 예수님 발앞에 엎드려 그 발에 입맞추고 예수님께 구원의 감사와 사랑을 아뢰며 예수님만을 위해 살 것을 다짐하는 충성을 고백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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