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말씀 - 설교

[스크랩]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kaporet 2007. 3. 25. 20:44
 

2006.3.25(주일예배)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요일4:7-12


들어가는 말


    최근 ‘러브 소나타’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겨울 소나타’에서 따온듯 한 ‘러브소나타’는 온누리 교회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일본에 전하기 위해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사랑’이라는 말은 좋아하지만 ‘진정한 사랑’을 모르는 일본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알리고 그들이 그 사랑을 받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사랑받기를 원합니다. 누군가에게 사랑받는다는 사실은 매우 기분이 좋은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는 매우 인색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진정한 사랑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정말 사람을 사랑한 경험이 있는 사람은 사랑받는 것보다 사랑하는 즐거움이 큰 것을 압니다.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고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자기가 좋아서 사랑하다가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미워하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그 사랑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게 됩니다. 자신이 받은 사랑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1. 사랑해야할 이유(7-8절)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할 이유는 사랑은 하나님께 속해 있고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7절)


    사도요한은 성도들에게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라고 권면합니다. 사도가 이와 같이 성도들에게 서로 사랑하자고 권면한 이유는 사랑이 하나님께 속해있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수신자들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사도로서 그들에게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말하며, 수신자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나타냅니다. 요한은 이 호칭을 사용하여 서로 사랑해야 함을 요구하기 이전에 자신의 사랑을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자’라는 말은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지켜져야 하는 하나님의 요구임을 말씀합니다. 이 명령은 예수님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3:11; 요 13:14-17,35).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성도가 서로 사랑해야할 이유는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말은 사랑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음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본질상 사랑이시며 모든 사랑의 근원으로서 그 사랑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먼저 그리스도인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서로 사랑해야할 또 다른 이유는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자마다’라는 말은 ‘사랑하라’는 명령이 그리스도인 개개인에게 해당되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사랑해야 할 대상은 공동체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 대한 일반적인 사랑으로 보아야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랑은 단순히 사랑하는 태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실천 행위를 내포합니다(3:18). 그리스도인이 서로 사랑하는 것은 사랑하는 마음은 물론 행위를 포함하는 것으로 이러한 사랑의 행위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에게서 난 자녀이며 하나님을 아는 자임을 드러냅니다. 곧 행위를 동반하는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자이며 하나님을 아는 자임을 드러내는 기준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이며 하나님께서 먼저 사람들에게 보여주신 것으로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교제를 통해서만이 행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입니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8절)


    그러므로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사랑하지 않는 자들을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알고 있으나,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전혀 알거나 경험하지 못합니다.

    사랑하지 않는 자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랑의 근원이시며, 사랑 그 자체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하나님의 모든 행위들 중 하나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가 사랑임’을 의미합니다. 

    이 사실은 수신자들 사이에 존재한 영지주의자들의 이단적인 가르침, 즉 신령한 지식을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신령한 지식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나 사실상 그들의 삶에서는 사랑의 행위가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본질상 사랑이시기’에 그 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사랑을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사랑(9-10절)


    하나님의 사랑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심으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9절)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말씀한 사도요한은 이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을 나타내 보이시기 위해서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심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시는 것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이 사랑은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나타난바 되었으니’라는 말은, 명확한 역사적 순간을 나타내는 것으로 다음에 그리스도를 보내신 사건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성육신을 가리킵니다. 즉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시고자 하는 사랑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입니다. ‘독생자’는 ‘사랑하는’이라는 의미와 ‘유일한’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여기서 독생자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유일한 아들임을 암시합니다. ‘보내심’은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신 사건이 지속적으로 그 효력을 발휘함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심으로 자신의 사랑을 드러내셨을 뿐만 아니라 계속적으로 그 사랑을 증거하십니다.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는 말은 인간이 전에 ‘죽은 상태’임을 전제로 합니다. 인간은 범죄함으로 하나님과 단절되었고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나타내시고 이루심으로 영적으로 죽은 인간을 생명으로 인도하셨습니다(3:14).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지상 사역 그리고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의 선물인 영생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인데 그 사랑은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10절)


    사도 요한은 ‘사랑은 여기 있으니’라고 말하며 진정한 사랑의 실체를 밝힙니다. 여기의 ‘사랑’은 9절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킵니다(3:16). 즉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를 살리신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사랑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사이에는 차이가 있음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사랑이 결코 지속적인 것이 될 수 없는 반면에,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나타났습니다(9절). 이 말은 인간이 하나님을 전혀 사랑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고, 단지 인간의 사랑이 지속적이지 않아서 사랑이라고 부를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 인간에게 계시되어 사랑의 궁극적인 기원을 이루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행하는 사랑은 이러한 궁극적인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은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원한 사랑을 나타내심에 있어서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삼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특별한 속죄 사역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음을 의미합니다.

    ‘화목제’는 본래 ‘달래는 것’을 의미하나 성경에서의 의미는 단순히 성난 자를 달래는 차원이 아니라 ‘속죄’를 전제로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한 속죄함이 없이는 죄로 인해 형성된 하나님과의 소원한 관계는 절대로 회복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화목제’는 ‘속죄’의 의미와 ‘화목’의 의미를 둘 다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죄를 위한 화목제로 보내심으로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속죄함을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여 생명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9절).


3.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11-12절)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11절)


    하나님께서 사랑을 나타내 보이시기 위해서 독생자를 보내시고 우리의 죄를 위해서 화목제물로 삼으셨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그 사랑을 받은 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사랑을 받은 자는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서로 사랑하는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같이 사랑하셨다’는 것은 9,10절을 가리키는 것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난 방법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대속적인 죽음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시고 그 사랑을 확증하신 것입니다(롬 5:8).

    그러므로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께서 주신 계명으로(요13:34,35; 15:12,17)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입니다. 사도요한의 이같이 권면한 것은 당시 예수님의 사랑의 계명을 평가절하 하는 이단적 교리가 수신자들 사이에 팽배해진 것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라고 말하는 것은 사랑의 계명이 그리스도인의 의무임을 의미합니다. 물론 사랑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선택 사항은 아닙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사랑의 계명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하나님 안에 거하는 자들에게 당연히 나타나야 할 실천 행위인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집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12절)


    성도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한 이유를 구체적으로 밝힙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지만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본절에서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은 유대적인 사상으로(출33:20,23; 신4:12)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수신자들 사이에서 영지주의를 전파하는 이단자들을 염두에 둔 진술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보아서 하나님을 안다고 주장합니다. 요한은 이러한 이단자들의 주장을 직접적으로 반대하면서 하나님을 보는 것과 사랑의 계명을 연결시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의 계명을 행함으로 하나님을 영적으로 식별할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으나 그리스도 자신을 본 자는 하나님을 본 것과 같다’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동일한 것으로(14절; 1:1-3; 요1:18; 12:45; 14:9; 17:24),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영적으로 인식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요한은 하나님을 가시적으로 보았다는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을 직접적으로 반격하면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비록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볼 수는 없을지라도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실행함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갈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즉 하나님 품속에 독생하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사랑으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한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공동체 안에서 서로 사랑함으로 자신들 속에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타인에게 보여줄 수 있습니다.

    성도가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거하시다’라는 말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인들 간의 지속적인 친근한 관계를 나타냅니다(요 15:1-10). 하나님의 내주와 깊은 관계를 나타내는 이 말은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사랑이 하나님의 내주와 지속적인 관계로 인해서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의 내주와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모든 사랑의 행위의 근거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자신들 안에 존재하며 하나님께서 내주하심을 드러내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집니다. ‘온전히 이루느니라’는 말은 지속적인 성취를 나타냅니다. 요한은 2:5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케 하는 것이라고 진술하고 있는 반면 본문에서는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성취된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에게 온전히 순종하는 것임을 암시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오직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사랑을 통해서, 즉 인간을 통해서 성취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통하여 점점 세상으로 확장되어 갈 것입니다.


나가는 말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려면 먼저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아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나의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을 삼으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신 것을 확신해야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을 확신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그 사랑으로 내 이웃을 사랑해야 하게 될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그들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할 때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알게 되고 하나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웃을 사랑할 때 성령을 의지하여 사랑해야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우리는 때로는 가족조차도 사랑하지 못합니다. 사랑한다고 말하던 사람을 언제부터인가 미워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사랑하고 싶어도 사랑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 사랑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구하며 성령께서 주시는 힘으로 사랑해야합니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여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실감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며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 : 동경센조쿠중앙교회
글쓴이 : kaporet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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