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를 입은 노아
김희보(총신대 신대원 교수)
I. 은혜를 입은 노아
<창세기 6장>
성경에 가르치기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창6:9)"고 했다.
그는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은 자였다. 이러한 노아에 대하여 다음 몇 가지를 생각해 보자.
1. 노아의 가문
우리가 이제 노아의 가문과 아브라함의 가문을 비교할 때 조금 다른 것이 하나 있다. 아브라함은 우상을 섬기는 불신앙의 가정에서 태어났고 그런 가운데서 부름을 받았다. 그러나 노아는 다르다. 경건한 조상들 밑에 태어난 믿음의 정의 아들이다. 노아의 증조부는 유명한 믿음의 사람 에녹이었다. 에녹은 65세 때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또 그의 나이 252세 때에 (창5:21과25절을 비교해 보라) 손자 라멕을 보았다. 에녹이 승천할 때 손자 라멕의 연령은 113세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므두셀라와 라멕은 에녹이 어떻게 경건한 생활을 하며 하나님과 동행했던 가를 친히 자라난 아들과 손자였음이 분명하다. 바로 그러한 므두셀라는 노아의 할아버지였고 또 그러한 라멕은 근의 아버지 음을 생각해 본다면 노아는 얼마나 경건한 가정의 아들이었는가를 상상할 수 있겠다.
우리가 창세기 5:29을 깊이 생각해 볼 때 노아의 아버지 라멕의 믿음을 넉넉히 알 수 있다."라멕은 182세에 아들을 낳고 이름을 노아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창5:29) 이 본문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첫째로는 그의 탄식이다. 우리가 이렇게 수고로이 일하며 고생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로 부터 저주를 받은 때문이라고 그는 탄식했다. 우리는 이러한 그의 탄식에서 그의 슬픔이 무엇이었던 가를 상상케 된다. 우리 인생들은 다 범죄한 때문에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들이 되었다고 그는 탄식하며 슬퍼했던 것임을 본다. 이러한 탄식, 그러한 슬픔이야말로 곧 그의 믿음의 시발점이 되었다고 본다. 우리는 다 우리의 허물과 죄로 인하여 멸망할 수 밖에 없다고 슬퍼하며 탄식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구원의 길에 가까운 사람이 아닐 수 업다. 지금 내가 이렇게 고생해야 하는 것은 나의 죄값이라고 생각하는 그 양심이야말로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다.그러나 라멕이 그러한 슬픔과 탄식만으로 끝났다면 그것을 가리켜 참 믿 음이라고 할 수 없겠다.라멕은 그저 슬픔과 탄식만으로 끝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저주 받은 인간들이라도 장차 하나님의 위로와 안식을 받을 길이 있다고 믿었던 사람이었다. 이러한 그의 믿음은 그가 지은 그의 아들 노아의 이름에 잘 나타나 있다.
구약시대에는 그 아들의 이름을 작명함에 있어서 그 아버지의 믿음과 소망이 그 아들의 이름에 표현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다. 그러므로 노아의 이름에서 그 아버지 라멕의 믿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결코 무리한 일이 아니다. 창세기 5:29을 읽어 보라. "라멕은 아들을 낳고....이름을 노아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 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는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노아라는 히브리 말의 원 뜻은 안식과 위로란 말이다.
라멕은 참 안식과 위로는 하나님께로 부터 오는 것을 믿었다. 그는 하나님께 서 주시는 아들을 하나님의 선물로 받으면서 그 아들을 통하여 참 안식과 위로를 바라보고 기뻐하며 감사했다. 그런 의미에서 노아는 장차 나타날 그리스도 의 예표로 보아 좋다. 이러한 그 아버지의 믿음은 노아에게도 깊은 감화를 주었을 것이 분명하다 (말라기 2:15 참고)
2. 노아시대의 환경
노아시대는 심히 부패한 시대였다. 창6:2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했음을 본다. 여기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천사를 가리킨 것이 아니다. 하늘의 천사들을 결혼하지 않는다. 그것은 셋의 후손들을 의미한다. 아벨의 거룩한 계대를 이어줘야 할 셋의 후손들도 가인의 무리와 연합하여 어떻게 부패해진 것을 위의 성경은 보여준다. 이렇게 가인의 후손도 셋의 후손도 다 같이 타락하게 됐다. 창6:56을 보면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하셨는데 이처럼 노아시대는 죄악이 관영한 시대요, 사람의 마음이 악하여 하나님을 탄식케 하여 근심케한 시대였다. 사람의 마음 악함과 세상의 죄악은 하나님을 그처럼 슬프게 했고 탄식케 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천지와 만물과 사람을 처음 창조하신 때는 "보시고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는데 그렇게 좋아하셨다는 말씀이 창세기 1장에서 7번이나 나온다 (1:4,10,18,25,31).
그러나 이제는 반대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기뻐하시던 것을 보시고 슬퍼하셨다 죄악이란 이처럼 흉악한 것이다. 노아 시대는 그러한 죄악이 세상에 차고 넘쳤다고 했다. 그러나 그렇게 암흑한 때이기에 노아는 하늘의 별같이 더욱 빛나게 되었다. 모든 백성들이 다 하나님을 탄식케 하는 그러한 시대에 오직 노아만은 하나님을 기쁘게 한 사람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악한 시대를 슬퍼하시며 탄식하심이 사실이었으나 의인 노아, 그 한 사람으로 인하여 그는 지극히 기쁘셨다. 그로 말미암아 세상을 새롭게 할 수 있으셨다. 억만인이 죄악을 범한다 할찌라도 오직 죄악을 이기며 의를 행하는 한 사람의 존재가 얼마나 존귀함을 우리는 노아에게서 배워야 한다 (참고, 예레미야5:1). 그러면 노아는 어떻게 그처럼 의로운 자가 될 수 있었을 까? 그 대답은 오직 창세기 6:8에 기록되어 있다. "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그처럼 의롭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때문이었다. 그가 큰 믿음 을 지킨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그가 구원을 얻은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다. 죄악이 관영한 시대에 홀로 의롭게 산다는 것은 큰 고통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불의의 물결이 홍수 같이 밀려드는 그런 때에 홀로 그것을 경건히 살아 간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노아는 그것을 감당했다. 그것이 결코 노아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때문이었다. 노아가 마침내 심판을 이기고 구원을 얻은 것도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가 아니었더라면 그렇게 큰 믿음을 지킬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 창세기의 저자인 모세는 노아의 그 승리의 생애를 기록하려 할 때에 먼저 기록한 말씀은 창세기 6:8 "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하신 그 말씀이었다(엡2:8참고).
성경은 노아의 생애를 기록하기에 앞서 그가 어떻게 "은혜를 입은" 사람이었던가를 먼저 기록한 것을 우리는 주의 깊이 읽어야 할 것이다. 노아의 경건한 신앙과 생애는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때문이었다. 혹 우리에게 좋은 믿음 이 있다고 생각하는 자가 있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먼저 하나님의 은혜임을 감사할 것이다.
II. 믿음의 조상으로서의 노아
노아가 어떻게 그처럼 의인이 되었고 당세에 완전한 자가 되었으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가 되었겠는가. 그 비결은 오직 하나, 히브리 기자는 그것을 가리켜 '노아의 믿음'이라 했다. 믿음의 힘은 위대하다. 믿음은 죄인을 의인으로 보게도 하고 허물 많은 자를 불러 완전한 자가 되게도 하며 하나님과 멀리 떠난 자를 불러 저와 동행하는 자가 되게도 한다. 믿음의 최후 완성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인데 노아의 증조부 에녹은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께서 승천케 하셨고 노아는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그 가족과 더불어 방주에 들어가 생명을 구원했다.
그러면 노아의 믿음은 어떠한 믿음이었겠는가. 히브리11:7절은 그의 믿음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노아는 믿음으로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 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이제 이 말씀에서 노아의 믿음의 성격을 살펴볼 수 있다.
1.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믿음
그의 믿음의 기초는 하나님의 말씀에 있었다. "그가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이렇게 히브리의 기자는 말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경고]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 경고하심을 [받아]라는 말은 그 말씀을 듣고 믿었다는 말이다. 물론 그 당시의 모든 사람들도 하나님의 경고 말씀을 들었으나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믿지는 않았다. 그러나 노아는 그 말씀을 믿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자에게 믿음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 " (롬10:17)고 사도 바울은 알려주었다. 그러나 믿음의 기초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었다고 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는가. 그렇다면 감사하자. 하나님의 은혜이다.
신약의 사도 베드로는 큰 은헤를 입은 믿음의 사람이었다. 눅5:45절에 보면, "선생이여,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말씀에 의지하여)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했다. 사도 베드로가 특별 한 믿음의 소유자였다는 것은 곧 말씀에 의지하여 움직인 사람었음을 보아 알 수 있다. 사도 바울도 같다.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행27:25) 이 말씀은 흉용한 바다에서 바야흐로 파선지경에 이르렀을 때 두려워 떨고 있는 선원들에게 외친 그의 말씀이다. 사도바울께서는 "너를 버리지 않고 환난 중에 건지리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믿고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그는 확신했다. 하나님의 말씀위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않는 믿음, 그것이 참 믿음이요 큰 믿음이요 큰 믿음인 것이다. 노아는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꼭 그대로 믿고 그대로 움직였다. 참으로 큰"은혜를 입은" 사람이었다.
2. 보이지 않는 것을 꼭 보는 것 같이 믿는 믿음
히브리 기자는 노아를 가리켜 그가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방주를 예비했다고 했다.노아는 보지 못한 일을 꼭 보는 것인양 믿었던 것이 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본질 중의 하나이다. 고후5:7에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라" 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노아가 방주를 지을 때 세상은 그를 비웃었다. 어리석은 자라라고 했을 것이다. 물론 그들은 홍수의 징조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경에 보면 홍수가 나기 까지는 비라는 말도 또한 홍수란 말도 없었다. 매일 매일 해가 뜨고 해가지는 평화로운 날들이 매일 계속됐을 것이다.홍수에 대한 위험을 느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물론 홍수의 경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노아는 홍수의 경고를 꼭 그대로 믿었다. 보이지 않는 그것을,한번도 체험해 보지 못한 그것을, 꼭 그대로 믿었다. 사람들은 다 보이는 현실,매일 경험하는 세상 일은 믿어도 보이지 않는 내세의 일은 믿으려 하지 않는다. 보이는 사람은 믿어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못 믿는다. 보이는 육신은 믿어도 보이지 않는 영혼은 믿지 않는다.그러나 참 믿음이란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한 것임을 믿는 믿음이다 (고후4:18). 노아는 이처럼 보이지 않는 것을 꼭 보는 것 같이 믿을 뿐 아니라 오히려 보이지 않는 그것을 위해서 보이는 것을 희생한 사람이었다.
3. 노아의 믿음은 실행이 따른 믿음이었다.
그는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했다"고 했다. 그의 믿음은 매일 매일 방주를 짓는 순종으로 나타났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는데 참 택함을 받은 성도들의 믿음은 반드시 그 행위로 나타난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거기에 여러 신앙위인들의 믿음이 잘 나타나 있다. 거기에 아벨은 믿음의 사람이라고 했는데 그 믿음은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순종]으로 나타났다고 했다. 기생 라합의 믿음은 위험을 무릅쓰고 정탐군들을 숨겨주는 행동으로 나타 났음을 볼 수 있다. 그처럼 노아의 믿음은 방주를 예비하는 일로 그 믿음이 나타났다. 우리는 이제 고요히 머리 숙여 우리의 믿음이 지금 무엇으로 나타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4. 희생이 있는 믿음
노아가 방주를 짓는 동안 그의 희생이 얼마나 컸을까 생각해 보자. 물질의 희생,시간의 희생, 노력의 희생만이 아니라 많은 수욕도 참았다. 이 얼마나 큰 희생었겠는가. 참 믿음이란 언제나 희생이 따름을 볼 수 있다. 아벨에게는 순교의 피가 따랐고, 아브라함에게는 모든 친척과 본토와 재산을 버리는 희생이 따랐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한 사람이었다. 이 역시 우리도 고요히 묵상해 보아야 할 일일 것이다. 내 믿음은 무엇을 희생 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지?
5. 자기의 가정을 구원한 믿음
"그는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라고 히브리 기자는 말했다. 흔히 우리가 아는 것은 믿음이란 개별적이란 점이다. 믿는 그 사람이 구원을 얻는다. 부모가 믿는다고 자식도 따라서 구원 얻는 것은 아니다. 자식들도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에서 깊이 배워야 하는 진리의 하나는 곧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 원을 얻으리라"(행16:31)는 약속이다. 날 아브라함이 잘 믿으니 그 가정이 구원을 얻었다. 가버나움의 가나안 여자의 간절한 믿음은 그 딸의 병을 고쳤고 백부장의 믿음은 그 종을 고쳤다. 노아의 믿음은 그 가족을 구원할 수 있었다 이것은 우리 부모들에게 큰 용기를 주는 말씀이다. 보모가 잘 믿으면 불신앙의 자녀들도 돌아온다. 어머니의 기도 못잊어 돌아오는 탕자들은 얼마든지 있다. 우리의 믿음은 반드시 우리의 가정을 구원하는 믿음이 되어야 하겠다. 언제까지나 나 홀로 믿는 짝 믿음은 크게 반성해야 될 것이다 (고전7:14).
6. 세상 사람들에게 증거한 믿음
히브리 11:7에 보면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했다. 여기서 "이로 말미암아"하는 말은 그가 방주를 예비하는 일을 말한다. 그는 방주를 예비함으로 세상을 정죄했다. 그가 방주를 지을 때 그것을 짓는 이유를 사람들에게 말했을 것이 분명하다. "누구든지 이 방주에 들어오면 살고 그렇지 않으면 죽으리라. 누구든지 다 들 어올 수 있도록 이처럼 큰 방주를 짓노라"고 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듣지 않는 자는 죽으리라"고도 했을 것이다. 말로만 아니라 실제 방주를 짓는 생활로써 증거했다. 이 얼마나 귀한 믿음인가. 이로 써 그는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던 것이다.
III. 노아의 방주와 홍수
위의 말씀은 노아가 방주를 예비할 동안 얼마나 큰 핍박과 욕을 당했던가 하는 것을 암시해 주는 사도 베드로의 말씀이다. 신약의 성도들이 선한 양심을 가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행식을 보일 때에 받는 비방과 당하는 욕은 마치 구약의 노아가 하나님을 순종함으로 방주를 예비하는 동안에 당했던 핍박이나 비방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노아가 방주를 예비하던 그 일 자체가 벌써 하나님 앞에 귀한 일이었다. 그것은 신약의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선한 행실과 같은 것이라고 신약의 사도는 말씀하셨다. 이제 그러면 그러한 방주가 지니고 있는 영적 의미는 무엇일까?
1. 노아의 방주의 영적 의미
성경을 공부한 사람은 누구나 말하듯이 노아의 방주는 장차 나타날 그리스도의 그림자(모형)이었다. 우리는 그 방주의 구조를 통해서까지라도 거기에서 그 리스도의 모형을 찾아 볼 수 있다. 먼저 창6:16에 보면 "거기에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규빗에 내고 그 문을 옆으로 내라"했음을 본다. 여기서[창]과[문]은 같은 것이다. 출입을 위하여 사용될 때는 문이요, 공기와 빛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창이 된다.
그런데 그 문은 하나 뿐이었다. 노아의 여덟 식구와 모든 생물들이 구원을 얻기 위하여 출입한 그 문은 오직 하나 뿐이었다는 그 사실은 복음서의 그리스도의 "나는 양의 문이라"고 하신 말씀을 연상케 한다. 아무리 홍수가 넘치는 무서운 심판의 날에도 그 방주 안에는 참 평안과 안식이 있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 평안과 안식의 예표였다고 본다. 다음 또 방주의 그 창문은 하나일 뿐만 아니라 오직 위만 바라보게끔 지어졌다는 것도 특수하다.
창6:16에 "거기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했음을 본다. 그 방주 의 높이는 30규빗이라고 했는데(창6:15) 그러한 높이에 위에서 부터 한 규빗 이라고 한다면 그 문은 높은 지붕 꼭대기 가까이에 달려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노아의 식구들은 밖을 내려다 볼 수 없었다. 그러기에 "땅에 물이 잦았는지를 알기 위하여 까마귀와 비둘기를 내어 보냈다"는 기록을 본다. 홍수 의 물이 아무리 넘쳐도 그것을 보지 않도록 방주는 지어져 있었다. 그것은 생각컨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은 위의 것만을 바라볼 것이요, 땅의 것을 생각하며 근심하며 슬펴할 것이 없음을 상징으로 보여 주는 것이 아 닐까?
그리고 또 홍수가 그치고 물이 잦은 후 방주가 아라랏 산붕에 닿은 그 날은 신비롭게도 7월17일이었다.(창8:4). 그날은 곧 이스라엘의 성력으로는 니산월 17일이다. 즉, 유월절을 지난 3일만의 날이었다(출12:6). 그렇다면 그날은 곧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표로 보여주는 날임이 분명하다. 즉 그것은 이제부터 옛것은 지나가고 새로운 부활의 세계가 시작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성경의 한 마디 한 마디의 말씀이 이처럼 우리의 깊은 관심을 끄는 것은 그 모든 기록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너무도 오묘하고 신비로운 탓일 것이다.
2. 노아의 방주는 얼마나 큰 것이었을까?
방주는 얼마나 큰 것이었기에 그 많은 짐승들과 새들과 양식들을 실을 수 있었을까? 창6:15에 보면, 길이는 300규빗이요,넓이는 50규빗이라고 했다. 그런데 한 규빗이란 지금까지 발굴된 고고학적 자료에 의하면 18피트가 된다. 그것을 계산한 어떤 학자에 의하면(J.P.Free)그 배의 크기는 약4,300톤 가량일 것이라고 했다. 지금도 2,500톤급의 배라면 어떠한 큰 바다라도 항해할 수가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방주는 오늘날 큰 바다를 항해할 수 있는 배들의 갑절 의 크기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물론 노아는 자기의 마음대로 그렇게 큰 배를 지은 것은 아니었다."하나님이 명하신대로 준행한 것이라"(창6:22)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만큼 큰 배가 되어야만 그 많은 동물들과 그것들이 먹을 양식을 실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이 땅위의 짐승 의 종류는 2,000종이요,새는 약6,500종류라고 한다. 방주의 그러한 크기라면 그러한 동물들과 그것들의 40일간의 양식은 충분히 싣고 남을 것이라고 본다.
3. 홍수의 심판은 역사적 사실인가?
노아의 홍수의 심판의 기록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요, 고대 신화의 하나였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사실상 이 땅위에 큰 홍수의 심판이 있었다는 창세기의 기록과 거의 비슷한 전설들은 고대 국가에서 공통적으로 가진 전설이 었다. 고대 바벨론에도 그런 전설이 있었고, 애굽과 인도와 중국에도 있다. 우리 한국에도 그러한 전설이 있었다고 본다. 왜냐하면 주후1653-1666년간에 한국에 머물렀던 하멜(네덜란드 사람, 기독신자 )이란 사람의 표류기를 읽어보면 겨기에 구약의 바벨탑 이야기와 거의 비슷한 전설이 수록된 것을 본다. 한국에도 바벨탑의 전설이 있었다면 그와 연관되는 홍수의 전설이 없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것은 어떠하든 간에 홍수의 전설이 그처럼 고대 국가에 공통적인 것이었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 일까? 분명히 그것은 노아의 후손들이 흩어지면서 그 홍수의 이야기가 온 세계에 전파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같은 이야기가 그처럼 전파될 수 있을 것인가. 또 그 뿐만 아니다. 창8:5에 보면 방주는 드디어 아랏산 꼭대기에 머물렀다고 했는데 지금 그 산은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에 있는 알메니아에 위치해 있다. 지금도 그 지방 사람들은 조상 때부터 그 산을 가리켜 그 지방 말로 "쿠히 누흐(Kuhi Nuch)"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 뜻은 바로 "노아아의 산"이라는 말이 란다. 이러한 사실들은 성경의 기록이 역사적 사건이었다는 하나의 방증이 된다고 본다.
끝으로 하나만 더 첨가하고 싶은 말은 노아와 그 가족들이 방주에 들어간 후에 곧 홍수가 임한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7일 후에야 홍수가 땅에 덮이니라" (창7:910) 했음을 본다. 성경에 그 7일이 강조된 것을 우리는 주의할 필요가 있는 줄 안다. 이 7일이 강조된 것을 우리는 주의할 필요가 있는 줄 안다. 이 7일이 강조된 것을 우리는 주의할 필요가 있는 줄 안다. 이 7일이란 하나님께서 그때의 사람들에게 주신 최후의 기회였다. 본래 성경에 7수는 완전 수라고 한다. 누구나 방주에 들어올 수 있는 최후의 완전한 기회를 의미한다.노아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방주에 들어 갈때까지만 해도 홍수가 있으리라는 징조는 물론 없었다. 날은 여전히 맑아 있었고 낮의 해는 솟아 올랐을 것이며 밤의 별도 총총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입을 모아 노아를 비웃었을 것이 분명하다. 자기의 사위들도 비웃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그들까지도 안 들어 온 것이 아닌가. 그러나 오직 노아의 여덟 식구만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했다. 노아는 7일 동안이나 문을 열어 놓고 최후의 기회를 저들에게 주고자 했다. 사도 베드로는 그는 가리켜 끝까지 "의를 전파한 노아"(벧후2:5)라고 했다. 우리는 이제 그러한 노아의 역사와 홍수의 심판의 기록을 생각하면서 다음 우리 주님 그리스도의 말씀을 한번 다시 정리하자.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 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 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그와 같으리라"(마24:37038).
IV. 홍수 후의 노아
전장까지는 노아의 훌륭했던 점들만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말씀과 같이 그렇게 의로왔던 노아에게도 실수가 있었다. 그는 그만 포도주에 취하여 벌거벗은 몸이 되었던 대가 있었다. 그의 두 아들 셈과 야벳은 그 하체를 보지 않으려고 옷을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 아버지 의 하체를 가리웠다.(창9:23). 이것은 그에게 큰 실수였다. 구약의 율법이 가르치는 대로 보면 사람이 벌거벗어 하체를 드러내 보인다는 것은 크게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었다.
출애굽기 20:26에 "너는 층계로 내 단에 오르지 말라, 네 하체가 드러날까 함이라" 했음을 본다. 이것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하신 말씀이다. 모세가 번제단 에 올라가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금하셨다. 왜냐하면 그가 번제단의 층계를 오를 때에 사람들이 그 아래서 그의 하체를 볼가 두려워서였다. 당시의 히브리인들의 의복이 그러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례위기 20:17에도 "누구든지 하체를 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했다. 그러기에 모세까지도 번제 단에 올라갈 수 없게 되었던 것은 그들의 의복이 특별했기 때문이었다.
출애굽기 28:42에 보면 "너는 제사장들을 위하여 베로 고의를 만들어 허리에서부터 넓적다리가지 이르게 하여 하체를 가리게 하라"하신 말씀을 본다. 제사장들은 특별한 고의를 입고 있었다. 그것은 순전히 하체를 가리우기 위해서 였다.하체를 드러낸다는 것은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요,욕된 일이었나 하는 것 은 합2:15-16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그만 노아가 하체를 드러내 보였다. 그 원인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였기 때문이었다. 술! 노아의 실수의 근원은 술에 있었다. 성경에 술이란 말이 맨 처음 나온 곳이 바로 오늘의 본문이다. 술이란 말이 처음 나온 거기에 당시의 의인 이라고 했던 노아의 실수의 기록이 같이 했다. 그가 술을 어더한 동기로 마셨던간에 그 결과는 부끄러운 실수였다. 어던 주석가들은 노아를 동정하여 하는 말이 그 가 술취한 것은 그만 술이 어더한 것인지 모르고 처음 마셨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것은 아니다. 그는 벌써 술 만드는 법을 알고 있었음을 보아 술이 어떠한 것임을 알았을 것이 분명하다. 성경에는 술이란 말이 처음 나오지만 술은 벌써 죄악이 관영했던 홍수 전부터 있었을 것으로 안다. 노아가 술을 처음 만든 사람으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또 어떤 사람은 그가 연령이 많아 흔미해져서 그런 실수를 한 것이라 하지만 그것도 아니다. 홍수 후 에 그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 나무를 심었더니"하는 말로 보아 그는 홍수 후곧 농업을 시작한 그 초기에 그런 실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홍수를 겪은 것이 600세 때 (창9:29)였으나 그의 죽음이 950세(창9:29) 였음을 생각할때 그가 늙어 흔미해진 때라고는 생각 되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는 분명 포도주의 그 달콤한 맛에 유혹되어 마시고 또 마셨던 것으로 본다.
술! 이 얼마나 흉악한 괴물인가.술 있는 곳에 사람의 실수와 타락이 있다. 그러므로 잠언의 기자는 술을 보지도 말라고 했고 (잠23:31하), 또 말하기를, "재앙이 뉘게 있느뇨, 근심이 뉘게 있느뇨, 원망이 뉘게 있느뇨, 붉은 눈이 뉘게 있느뇨. 술에 잠긴 자에게 있고 혼합한 술을 구하려 다니는 자에게 있느니라.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찌어다, 이것이 마침내 뱀 같이 물 것이요, 독사 같이 쏠 것이며, 또 네 눈에는 괴이한 것이 보일 것이요,네 마음은 망령된 것을 발할 것이며, 너는 바다 가운데 누운 자 같을 것이요,돛대 위에 누운자 같을 것이며...."했음을 본다. 사실 아랍지방이나 팔레스틴 지방은 물이 귀한 곳이기에 포도주나 독주는 옛날 부터 그들간에 많이 사용되어 왔다고 한다. 일상적인 음료였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성경은 도처에서 술을 경고하고 있다. 그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우리는 노아의 실수의 다음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1. 사람은 누구나 자칫하면 범죄할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잠깐 정신을 차리지 못했을 대 그만 큰 실수를 범할 수 있음을 노아에게서 발견한다. 그는 6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었다. 그는 많 은 욕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을 순종하며 방주를 지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도 그만 하나님께서 금하는 실수를 범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만 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다.(창9:2).그러나 그는 그만 그 자신 조차 다스리지 못했다. 자기를 다스려 일평생을 경견히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우리 성도들에게는 세가지의 원수가 있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즉 마귀와 세상(세속주의)과 자기의 혈육이라고 했다.(악4:1-7).그런데 가장 이기기 어려운 것은 자기의 혈육이다. 세상은 피하여 벗하지 않으면 되고(약4:4), 마귀는 대적해 싸우면 된다(약4:7). 그러나 혈육은 그렇지 않다. 많은 기도와 수양이 필요하다.일평생 싸워야 한다. 인간의 본성은 근본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이 원수를 이길 수 없다. "섰다고 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그것은 신앙생활의 연조에도 관계가 없다. 노아는 6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며 세상을 이기고 심판을 이긴 사람이다. 그럼에도 자기의 혈육을 완전히 이기지는 못했다.
2. 또 하나의 교훈은 승리후에 오는 실패이다
창세기 6장에서 9장까지는 거의 전부가 노아의 신앙의 승리의 기록으로 꽉 차있다. 그러나 9장 끝 무렵부터는 (20절이하) 그의 실패의 기록이다 그가 한번 실패한 그 후에는 성경의 특기할 만한 그의 기록이다. 그가 한번 실패한 그후에는 성경에 특기할 만한 그의 기록이 없다. 창9:28에 보면 그후라"는 기록 밖에는 남지 않았다. 그의 후반의 350년의 생활의 기록을 우리가 읽을 수 없는 것은 크게 섭섭한 일이다. 그의 350년이 공란으로 지나친 것은 그의 후반기의 생애가 크게 볼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다만 노아의 실수를 우리의 거울로 삼고자 하기 위해서이다."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것은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롬15:4) 하신 말씀대로 노아의 실패의 기록도 우리를 교훈하기 위해서이다. 만일에 이 성경이 성령의 지도로 결코 노아의 실수를 기록치는 않았을 것이다. 세상의 어느 문인이 존경하는 위대한 인물의 전기를 기 록함에 있어 그 끝을 실수로 맺을 수 있을 것인가. 창세기 9장은 분명히 홍수의 심판 후 인류의 새 출발을 기록한 장이다. 창9:1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며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축복을 받으며 인류는 새 출발을 했다.
그러나 이 새 출발과 같이 인류의 역사는 실패의 역사로 시작됐다. 아! 슬프나 이것을 사실이다. 인간은 홀로의 힘으로는 절대로 설 수 없다는 큰 교훈이다. 우리 인간은 그렇게 연악한 존재로 알아서 서로의 실수를 용서하며 덮어 주며도와 주어야 한다 보라! 노아의 실수를 비웃고 비방한 함과 그 아들 가나안은 어찌 되었으며, 야벳과 셈은 어찌 되었던가. 함과 가나안은 저주를 받았고 그것을 슬펴하며 덮어준 야벳과 셈은 큰 복을 받지 않았는가. 이제 우리는 엄숙히 다음 성경을 읽어야 한다.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창9:25)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다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하시기를 원하노라" (창9: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