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서의 목적
-『새창조과 새언약』(CLC 근간) 중에서 발췌-
윌리엄 덤브렐(William J. Dumbrell)
호주 무어신학교 부학장 역임
캐나다 리전트 칼리지 성경신학 교수 역임
현재 은퇴하여 호주 시드니에서 저술과 강연에 전념하고 있음
이사야서는 예루살렘 이미지에 의해 압도된다. 이후에 입증되겠지만, 이 책의 구조는 예루살렘 중심의 신학으로 구성된다. 도시를 물들인 총체적인 타락(주전 740년-690년)에 대한 묘사(1장)로 시작하는 이사야의 예언은 하나님의 성산 곧 새 예루살렘의 출현으로 결론 짓는다(66:20-24). 더욱이, 온 세상이 경배하기 위해 이 산을 향해 순례여행을 떠날 것이다. 새 예루살렘과 새 창조가 이 위대한 예언의 마지막 장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음은 자명하다. 이와 같은 연관성은 65:17-18에 선명히 드러난다. 여기서 새 예루살렘은 새 창조를 수반한다. 그러므로 새 예루살렘은 새 창조의 상징이며, 처음 소개된 도성과 명백한 병치를 이루는 궁극적 표현이 된다. 그러므로 이사야서를 “두 도성에 관한 이야기”(옛 예루살렘과 새 예루살렘-역자주; 계시록은 이 모티브에 크게 기초한다)로서 살펴보는 것은 그럴듯해 보인다. 우리는 이사야서를 구성하는 특별한 단락들에 집중하면서 이러한 예비적 전제를 확증할 것이다.
곧바로 하나의 질문이 제기된다: 1장에 선포된 타락과 이사야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새 예루살렘에로의 변화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살피기에 앞서, 우리는 단지 이사야서의 서두와 말미에 등장하는 예루살렘의 출현이 이 발전적 주제에 관한 우리의 관심을 고무시키지만 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이사야서의 전반부는 히스기야와 그의 도성 예루살렘을 향해 선포된 바벨론 유수의 위협으로 끝맺는다(39장). 40장으로 시작하는 이 책의 후반부는 일반적 표현(“너희는 위로하라, 너희는 위로하라!”)으로 진술된, 예상되는 포로 귀환에 관한 선언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선지자는 즉시 “내 백성”에게 베풀어진 위로를 2절의 예루살렘(예루살렘은 정다운 위로의 말씀을 듣는다)으로 옮겨놓는다. 선지자는 양적인 관점에서 볼 때, 예루살렘의 복역의 때가 끝났고 바벨론의 권세가 이제 막을 내릴 것이기 때문에, 예루살렘이 고난을 충분히 받았다고 선포해야 한다.
확실치는 않지만, 아마도 40:1-11은 바벨론―지질학적으로 볼 때, 그 포로들이 바라보는 예루살렘은 이 곳으로부터 수천 마일 떨어져 있다―의 포로들에게 전달된 것 같다. 제2 출애굽이 하나님의 백성 앞에 놓여져 있다. 제2 출애굽 사상은 이후의 구절들에 나타난 가장 격양된 표현을 통해 약술되고 있다. 추후에 드러나겠지만, 1-11절의 모든 관심은 예루살렘에 집중한다. 40-55장 전체의 발전과정 속에서 볼 때, 귀환의 일반적인 취지가 40-48장에 논의되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시온은 49-55장에서 직접적인 관심의 대상이 된다. 예루살렘은 이사야의 초기 전반부에서 발견되지 않는 공동체 개념과 연관된다. 칼빈은 이상적인 회복의 계기 점으로서 이 도성이 교회를 위한 상징이 되었다고 제안한다. 비록 이러한 해석이 너무 빠른 결론에 도달한 감도 있지만, 백성과 장소의 결합이 49-55장에 나타나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실제로 40:1-2의 병행구조는 이러한 점을 명백히 해준다. 그러므로 이사야서 전․후반부(1-30장, 40-66장)의 시작과 끝에서 예루살렘이 주도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이사야서의 주 관심이 예루살렘의 역사적 운명임을 나타내 준다. 이사야는 심판과 구속에 집중되어 있으며, 이것은 공동체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 책의 결론부에 나타난 예루살렘의 표현속에서 최절정을 이룬다. 그리하여 그녀(예루살렘)는 새 창조를 통해 여호와의 신부이자 하나님의 도성이 된다.
전체 이사야서 속에서 배교한 예루살렘에서 새 예루살렘으로의 발전과정이 나타나기 때문에, 우리는 이사야서를 분석할 때 이사야서 1장에 그려진 상황들과, 우리들을 66장으로 이끌어 주는 변화에 대한 이유를 설명해야만 한다. 이제 우리는 예루살렘의 주제에 집중하도록 이끌어 주는 일련의 개별 단락들과 그 상호 연관성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그렇지만 책 전체의 광범위한 발전과정도 염두에 둘 것이다.
a. 이사야 1-12장
이사야 1-39장은 심판 아래 있는 예루살렘에서 임박한 포로의 위협―39장에서 이 위협은 이 도성을 향해 전달된다―으로 이동해 간다. 이제 우리는 이사야가 제시한 남유다의 멸망 원인을 살펴보기 위해 1-12장을 보다 구체적으로 재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아이크로드(P. R. Ackroyd)가 지적하다시피,1) 이사야 1-12장의 내용은 위협과 약속의 모티브 사이를 번걸아가면서 이동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이 서론의 장들(1-12장)은 1-39장(위협)과 40-66장(약속)의 개요를 예시해 준다.
이사야 1장은 분명 예루살렘을 향한 위협을 보여준다. 2:1-4은 60-62장에서 확대발전되는 시온의 예언적 희망을 그려주는 반면, 2:5-22는 교만과 반역과 우상숭배로 말미암아 한 사회집단에게 전달된 위협을 보여준다. 이 위협은 3장에서 계속되며 사회적 역할의 반전으로 야기된 사회적 격동과 예루살렘의 지도부를 향한다. 이러한 모티브의 전환은 시온으로 귀환하는 남은 자들에 대한 약속(4장)과, 곧 거절당할 유다와 예루살렘의 탄식(5:1-7)과 함께 계속 진행된다. 5:8-10:4은 (6:1-9:7에 의해 단절되지만) 만연된 사회적 상태들을 염두에 둔 일곱 가지 화들로 구성되며, 10장의 남은 부분들은 하나님의 심판 신탁―첫째는 유다와 예루살렘에 닥칠 앗수르의 침략이며 둘째는 앗수르에 대한 심판이다―과 결합된다.
이사야 11:1-9은 상보적인 희망의 메시지로서, 메시아의 지도아래 이루어질 이상적인 공동체의 모습을 제시한다. 그 후 새 출애굽을 통해 이루어질, 변형된 새 시대의 그림이 뒤따라온다(10-16절). 구원의 찬가(12장)가 이 단락을 완결짓고 있으며, 여호와께서 거하실 시온의 거민들의 찬양에 주목하면서 마무리한다. 이와 같은 이사야의 전반적인 개요는 더 구체적인 발전과정을 필요로 한다.
서론으로서의 1:1 이후에 유다의 언약 파괴를 폭로하는 2-3절이 뒤따라온다. 유다 민족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오랫동안 거절했기 때문에, 부패한 이방 군대들이 하나님 백성의 영토를 황폐화시킬 것이다. 그렇지만, 그곳에 역사적인 남은 자들이 나타날 것이다(4-9절). 왜곡된 제의를 비난하는 예언과 두 부분으로 전달된 연설(10-17절, 18-20절)은 1장의 중심(10-20절)을 이룬다. 희생, 절기 그리고 심지어 기도조차도 거절당한다(10-17절). 죄는 이제 용서받기에 너무 뿌리가 깊어졌다.
아마도 이사야 1:18-20은 의도성이 짙은 풍자적 표현이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의 운명은 이미 결정되었기 때문이다.2) 예루살렘을 향한 고소는 21-23절에 계속되며, 심판의 결과는 24-31절에 구체적으로 소개된다. 두 그룹이 등장한다: 구원 받게 될 회개한 의인들(27절)과 멸망당할 죄인들(28절). 우숭 숭배자들이 맛보게 될 멸망의 마지막 영상이 등장한다(29-31절). 우리는 분명 언약의 협소한 민족적 단계에서 어떤 선택된 상황―여기서 구속받은 도성은 구속받은 공동체와 동일하게 될 것이다―으로 이동할 것이다.
이러한 공격성 예언의 잔인함을 설명하려면, 우리는 사 6:1-9:7로 방향을 돌려야 한다. 왜냐하면 이 단락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야기시킨 정치적 사회적 상황의 근본 요인들을 분석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단락이 위협과 약속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연속 과정에 삽입된 것은 강조를 하기 위함인 것 같다. 왜냐하면 이사야 6장이 선지자의 소명을 포함하며, 우리로 하여금 그의 소명을 바라보도록 이끌기 때문이다. 전후 본문들에 의해 제시된 위협과 약속의 관점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6:1-9:7에서도 동일한 연속적 과정을 발견할 것이라 기대할 것이다. 그리고 실로 우리는 그렇게 기대한다. 왜냐하면 6:1-8:22은 통치하고 있는 다윗 왕조를 향한 심판과 그로 말미암는 예루살렘의 황폐함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9:1-7은 미래의 어떤 시기에 신적 개입에 의해 이루어질, 이상적인 다윗과 같은 왕의 지도력을 묘사하고 있다.
이사야 6장은 웃시야 왕의 52년간의 성공적인 통치를 언급하면서 시작한다. 웃시야는 남 유다 왕국의 번영을 회복하고 재건시켰으며, 위대한 다윗 제국의 이전 상태로 돌려놓았다. 이사야의 소명이 웃시야 왕 사전에 발생했는가 혹은 사후에 발생했는가 에 상관없이, 1절은 시기를 알려주는 형식이라기보다는, 통치의 종말을 알려주는 암시라고 볼 수 있다. 웃시야의 강력한 지도력은 남 유다의 놀라운 국가 형성에 원천이 되었다. 그렇지만 6장의 말미에 이르러 남 유다의 번영은 사라져 버리며, 분주하고 번창하던 영토는 황폐화되고 전폐하게 된다(11-13절). 웃시야 시대의 영광으로부터 남겨진 것은 한때 중요했던 민족이라는 나무의 (잘려진) 그루터기로부터 올라운 어린 가지가 전부이다.
분명 이사야 6장은 절망적인 상태와 대조되는 상황을 전달하는데 관심을 둔다. 1절은 미래의 유다 왕국과 예루살렘 도성이 발견하게 될 구원의 방법을 은연중에 제시한다. 무엇이 왕국의 선한 질서를 가져다 줄 것인가? 그것은 과거의 방식을 답습하는 것인가? 그것은 웃시야의 통치를 특징지웠던 영향력 있는 정치적 사상과 행정력을 더 많이 강화하는 것인가? 이사야의 비전은 또 다른 질서의 왕권을 소개한다(“나는 주님을 보았다”). 그러므로 이사야의 비전은 이러한 질문들에 부정적으로 응답한다. 웃시야의 왕권은 여호와의 지도력과 전적으로 대조된다! 오직 여호와의 왕권을 올바로 인정하는 것만이 미래의 성공을 보장해 줄 것이다. 일련의 빛나는 형상들은 여호와의 왕권의 천상적 배경을 보여준다. 천상의 수종자들로부터 둘러싸인 여호와는 보좌에 좌정해 계신다. 이러한 분위기는 시작부터 심판의 불길한 징조를 미리 보여준다.3)
이 천상의 장면 가운데 우리의 관심은 천사들(the seraphim)에 집중된다. 그들은 13절 가운데 5회 언급된다(사 6:3-5, 6-7). 비록 그들의 지위를 결정하는 것은 힘들지만, 그들의 역할은 분명 중요하다. 이집트에서 날개가 달린 휘장과 코브라는 왕권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고대 근동에서 이러한 특징들로 혼합된 생물들은 신들의 수행원들로 잘 알려져 있다.4) 그러므로 천사들은 천상 궁정/성전의 성전 봉사자들 혹은 성전 관리자들인 듯 하다. 그들은 최상의 표현으로 여호와의 왕권을 찬양한다(“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3절). 예를 들면, 그의 능력, 그의 영광 및 초월성(unapproachability)은 그의 임재로 가득한 우주만큼 광범위하다. 아마도 천사들의 외침은 지상 성전(히, 바이트 4절)에서 동시적으로 발생하는 신현(theophany)의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지상 성전의 토대는 피조물에 기초해 있으며(비교. 시 78:69), 그 전체의 안정성은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크니어림(R. Knierim)은 천사들의 외침이 천상 회의 절차―이 절차에서 선지자는 방청자가 되었고 심판이 예루살렘 위에 선언되었다―를 마무리하는 심판의 송영을 암시해 준다는 그렇듯한 제안을 제시했다.5)
이어지는 이사야의 죄 고백(사 6:5)은 6장의 열쇠가 된다. 왜냐하면 이 고백 역시 심판의 비전으로서 보여졌던 것들을 밝혀주기 때문이다. 이사야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라고 외친다. 만약 그의 외침이 여기서 끝나버렸다면, 그의 고백은 신적 소명에 대한 선지자의 유보적 태도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계속해서 선지자는 곧바로 그 자신을 백성들과 동일시하며 그들의 실수와 죄악을 자신과 연결시킨다. 의심할 나위없이, 이 비전은 이사야로 하여금 왕권에 대한 올바른 초점을 갖도록 이끌어 주었다. 왜냐하면 이사야는 그의 눈이 그 왕을 보았다고 진술하기 때문이다(5절).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왜 이사야의 입술과 백성들의 입술의 부정에 대한 강조가 필요한가? 무엇이 이러한 반응을 유발시켰는가? 이사야의 탄식은 천상의 경배 행위로서 신적 왕권을 인정하던 천사들의 입술의 고백에 대한 반응이었기 때문에(3절), 우리는 하나의 뚜렷한 대조적 현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대조되는 것은 이사야가 방금 들었던 것과, 피상적으로 여호와의 왕권을 인정하던 예루살렘과 자신의 태도라고 할 수 있다. 6:1-9:7이 다윗과 같은 왕권으로 회복되어질 심판 아래 놓인 왕권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고백되는 죄악은 여호와의 왕권을 신뢰하기보다는, 대신에 정치적 왕권이나 외교적 잡술로 성취될 수 있는 것들을 신뢰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경배하는 천사에 대한 선지자의 환상이 그의 주요 관심사를 보여주기 때문에, 이사야 1장에서 공식적인 예루살렘의 제사에 대한 공개적인 비난은 명확해진다. 더욱이, 어떻게 이런 비난이 성전 환상과 연결되는지, 그리고 왜 이사야서가 비난으로 시작하는지가 설명된다. 이스라엘와 유다의 공식 예배가 거룩한 왕권을 인정하는 것이었음을 고려해 볼 때, 이러한 연결점을 만들어 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예루살렘 제의의 중심이었던 성전은 또한 거룩한 “궁정”(the divine palace)이었으며, 이스라엘의 최후 정치적 권위의 중심지였다. 이스라엘의 예배는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기위해 고안되었다. 아마도 이사야는 6장에서 웃시야 시대의 번영을, 신의 은택의 표지로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음을 인정하고 있다. 여호와를 향한 이스라엘의 중심적인 반응에 영향을 미쳤던 무질서들은 여호와의 통치에 대한 궁극적인 거절과 그로 인한 언약의 폐기를 보여준다. 선지자의 소명(6장)이 그로 하여금 민족의 엄청난 악습에 관심을 기울이게 하는 반면, 1장은 언약폐기의 잘못된 길을 걷는 민족이 반드시 받아야 할 비난을 보여준다.
이사야를 정화시킨 후(6:8) 주님의 음성은 유다와 예루살렘을 향한 이 끔찍한 심판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명을 이사야에게 위임한다. 사면은 있을 수 없다. 정치적으로 볼 때, 나라와 민족은 운명을 다한 상태이다. 그렇지만 그 재앙을 통해 신앙 공동체가 출현할 것이라는 희미한 희망이 생겨날 것이다(13절). 거룩한 씨가 돋아날 것이며, 이 잠재적 생명을 통해 더 많은 생명이 싹틀 것이다. 여호와께서 심으셨기 때문에, 그 씨는 거룩한 씨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1-12장 전체에 걸쳐서 볼 때, 예루살렘의 취약성이 분명히 드러나지만(1:21; 10:27b-32; cf. 18:7; 24:10; 29:1-7; 32:13-14), 동시에 시온이 살아남을 것이라는 강조점도 분명히 나타난다(7:1-9; cf. 14:28-32; 17: 12-14; 29:1-8; 30:27-33; 31:1-9).
그러므로 1장의 비난 이후 이사야 1-12장의 종말론이 하나님의 도성과 세계 중심지인 시온의 재건설을 지향하고 있음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1장의 위협에 대한 반응의 약속으로서의 2:1-4의 예언은 중요하며, 그 구체적인 내용들은 이사야서가 나아갈 그 종말의 방향을 보여준다. 새 예루살렘의 씨들이 이 단락에 나타나며, 그로 인해 약속의 모티브는 시작되었다. 이것은 이 책의 새로운 시작을 설명하고 있는 것 같다(cf. 1:1과 2:1). 우리는 그 밖의 다른 곳에서 2:2-4의 시온 이미지가 삼하 6장에 나오는 여호와의 예루살렘 선택 사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것과, 종말론이 취하는 특별한 형식, 즉 하나님 도성으로 향하는 세계 순례 여행의 특별한 형식이 솔로몬의 법정을 찾은 스바 여왕의 방문에 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논증해왔다.6) 그녀의 방문은 그녀가 속한 세상을 이끌고 왔으며, 세상이 솔로몬 법정의 위대함을 인식했음을 암시해 준다. 아브라함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물질적 약속들(the physical promises)이 이 솔로몬의 법정을 통해 성취되었다(cf. 3:8). 비록 구약의 종말론이 과거 구원사의 내용을, 미래의 기대 형식으로 일정하게 투사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수는 있겠지만, 이러한 주장은 여기서 자세히 취급될 수 없다.
그 의미와 관련하여, 이사야 2:2-4의 사상은 분명한 것 같다. 선택 받은 예루살렘의 도성은 도성의 마지막 갱신과 (1장에서 경고된) 심판의 반전에 의해 구원의 세계 중심지가 될 것이다. 작은 산이 높이 치솟은 세계의 산이 될 것이다. 예루살렘을 공격했던 민족들은 탄원자들로서 이 곳으로 몰려 올 것이다. 이 같은 점을 고려해 볼 때, “흐르다”(flow)라는 뜻의 히브리어 나하르의 용법(2절)은 그 외 구약본문의 시온 신학(cf. 시 46편)에 나타나는, 혼돈의 전투신화의 반전을 시사해 준다.7) 민족들은 토라(“율법”)의 심판자(예를 들면, 세계의 왕)이신 여호와께 올 것이다(사 2:3). 토라가 “여호와의 말씀”(3절)과 병렬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규범적인 법전이 아닌, 가장 넓은 의미로 이해되는 거룩한 가르침, 즉 세 시대의 세상 일들에 대한 거룩한 법규(divine regulation)와 관계할 것이다. 이 단락에서 확증되고 있는 것은 거룩한 왕권이다. 다윗 전통에 대한 어떤 언급도 암시도 없다. 2장의 이 종말론은 40-66장의 기초가 된다.
b. 이사야 13-23장
이 장들은 대부분 이방 민족들을 향한 신탁들을 포함한다. 이 장들을 서로 연결시켜주는 중요한 요인은 이 민족들이 앗수르의 손아귀에서 고통 당했거나 혹은 고통 당할 자들, 그리고 이방 동맹을 통해 안보를 확보하기 위해 여호와의 방법에 반(反)하는 방어 벽을 추구할 자들―예루살렘은 이러한 행위에 대해 경고받아왔다―과 관련돼 있다는 점이다. 이 장들에 순환되는 예상 주제는 “하나님 홀로 시온올 구하실 것이다”는 것이다.8)
이 장들에서 바벨론 (사 13-14장); 블레셋(14:29-32, 여기서 우리는 여호와께서 시온을 세우셨고 그 시온을 보호하실 것이기 때문에 동맹 정책은 거절된다는 점을 주목한다); 그리고 구스(18:1-6)와 외교 동맹을 맺으려는 유다의 시도를 비난하는 예언적 고발이 등장한다. 이 후반부의 구스 관련 단락은 여호와께서 마지막 추수 전, 예를 들면 앗수르에 의한 완전한 파멸 이전에 간섭하실 것임을 주지시킨다(6절은 아마도 앗수르의 운명을 가리키는 것 같으며, 시온을 주목시키는 표현이 7절에 소개되고 있는 듯 하다). 19장에는 애굽의 비신뢰성(undependability)이 강조되어 있다.
13-23장의 일관된 자료와 관련하여, 15-16장은 모압을 향해 전달되며, 주전 734년 앗수르 인 티글랏 블레셋을 대항한 모압의 실패한 상태를 언급하는 것 같다. 이 신탁은 모압이 앗수르의 위협을 통해 성취될 여호와의 역사적 계획들을 깨닫지 못한 그 값을 치를 것임을 시사 하고 있다. 17:1-11의 다메섹을 향한 위협은 같은 범주에 속한다. 21:1-10은 엘람과 메데의 이름을 바벨론과 서로 연결시키며, 이 세 민족이 운명을 함께 했던 때 그리고 이 세 민족이 앗수르―2절의 침략자를 가리키는 듯 하다―에 의해 다루어졌던 때인 주전 700년경을 가르킬 수 있다. 1-10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절망적인 바벨론의 민족들에게는 희망이 없다. 11-17절은 아랍인들에 대항하던 시대의 앗수르의 전쟁과 관련있는 듯 하다.
엘란드손(Erlandsson)―13-23장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의 논의는 그에게서 빚진 것이다―은, 22장은 히스기야 통치 시절 예루살렘이 위협받았던 그 때에 취해진 정치적 대처 방안들을 가리키며 그 구체적인 내용들은 절박한 때에 여호와를 신뢰하기보다는 자신의 방어력을 믿는 예루살렘 사회에 대한 공격을 암시하고 있다고 제안한 바 있다.9) 끝으로, 두로와 시온(23장)은 앗수르를 대항한 서구 동맹에 개입하였으며(주전 734년), 유다와 강력한 상업적 관계를 맺었다.
이사야 13-23장에 반복되는 주제는 신앙, 즉 외교 정책이 아닌, 여호와의 계획이 예루살렘을 보호할 것이라는 신뢰이다. 여호와는 앗수르를 파하실 것이며, 시온의 안전의 보증하시는 분이다(14:27-32). 아마도 17:12-14은 “큰 물”이라는 전형적인 혼돈 이미지로 묘사된 침략자들과, 시온을 향한 공격을 가리키는 것 같다. 이러한 공격은 마지막 순간에 여호와의 의해 분쇄된다. 그러므로 13-23장은 1-12장에 제시된 유력한 예루살렘 주제를 지향하고 있다.
c. 이사야 24-27장
로버츠(J. J. M. Roberts)는 비록 소개되는 두 도성의 정체를 규명하는 것이 여전히 힘들기는 하지만, 23-27장이 서로 시온에 대한 큰 강조로 엮어져있다고 주장했다.10) 이 두 도성은 바벨론과 시온인 것 같다. 혹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 장들에서 나타난 사악한 도성은 하나님이 통치하실(24:23) 시온과 대조를 이루는 예루살렘을 의미하는 것 같다(cf. 사 24:10; 25:2). 사 24:23에서 장로들과 함께 나타나실 여호와의 출현은 출 24장을 연상시킨다. 해와 달을 대체시키실 여호와(사 24:23)는 대부분 도성(아마도 예루살렘 같다, 5절의 표현과 13절의 이미지를 보라)을 삼키는 우주적 재앙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한 장(24장)의 끝 부분에서 새 시대의 서막을 알려준다. 이제 24-27장에 대한 요약이 제시된다.
심판이 어떤 도성을 향해 지진과 함께 땅위에 선포되었다(사 24:1-13; 17-23). 기다리는 의 인들은 14-16절에서 찬양의 막간을 통해 그들의 목소리를 드높인다. 여호와의 승리(21-23절) 는 25:1-5의 찬양으로 인도한다. 그 후 산에서 벌어지는 축제(6-8절)와 신실한 자들의 합당 한 찬양의 반응이 뒤따라온다. 25장의 마지막 구절들에 나타나는 모압에 대한 언급은 난해하 지만 밀라(W. Millar)의 제안처럼 약속의 땅에로의 새로운 출입의 관점에서 볼 때 승리를 묘 사하고 있는 것 같다.11) 시온(26:1-6)은 신실한 신앙에 대한 찬양을 올리며, 7-19절은 여호 와께서 이룩하신 마지막 시대의 생명을 폭넓게 다루고 있다. 죽음을 지배하시는 여호와의 통 치(19절)가 이제 드러난다. 24-27장에 나타난 모티브들의 전환에 따라 짧은 탄식(20-21절)이 뒤따르며, 여호와께서 용을 무찌르실 것이며(27:1) 그로 인해 새 시대에 어떤 위협도 없을 것 이라는 확신으로 마무리된다. 27:2-6은 5:1-7에 나오는 포도원 노래를 반전시킨다. 27:7-11에 서 우리는 예루살렘의 심판이라는 주제로 되돌아가는 듯하다. 반면에 12-13절은 흩어진 백 성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산 시온에서 예배하기 위해 약속의 땅으로 돌아올 그 종말의 귀환 의 그림과 함께 27장을 마무리한다.
24-27장의 전체 내용의 모호성에도 불구하고 24-27장의 예루살렘에 대한 강조는 명백하다.
d. 이사야 28-33장
이 장들도 역시 때때로 구체적인 내용설명이 없기 때문에 연대를 정확하게 결정하기가 어렵다. 이 장들의 정확한 연대설정의 불확실성은 해석가들이 취하는 매우 어려운 입장들에 의해 반영되고 있다. 그렇지만, 28-33장이 28:1-4의 사마리아에 관한 언급을 제외하고는 후기 히스기야 통치 시대의 유다와 예루살렘을 향한 앗수르의 활동을 다루는 자료를 제시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것은 분명 주전 722년 도성의 멸망 이전의 시대를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편집적 관점에서 볼 때, 이 장들은 히브리어 יוה(hoy; 한글개역성경에는 주로 “화 있을진저”라는 표현으로 소개되지만 이 표현은 정확한 번역이라고 볼 수 없다. 실제로 이 히브리어는 죽은 자를 위한 탄식 때 사용되는 표현이다-역자주)로 시작하는 서론 공식(cf. 28:1; 29:1, 15; 30:1; 31:1; 33:1)에 의해 결합되어 있다. 이 장들의 구체적인 내용들은 시온의 중요성을 확증해주며, 그 도성과 백성들을 향해 모퉁이 돌(the cornerstone), 즉 예루살렘의 성전인 시온을 의지하라고 외친다. 이방 동맹을 피하라는 메시지와 여호와께서 친히 예루살렘을 지키실 것이라는 확신이 이 장들의 특징을 이룬다.
이사야 28:1-4은 사마리아에 임할 심판을, 5-6절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위한 구원을, 7-13절은 유다의 방종에 대한 비난을, 그리고 14-22절은 정치적 협정을 신뢰하는 유다 지도 층에 대한 거절을 제시한다. 신앙은 세워진 모퉁이 돌, 즉 예루살렘 성전인 시온을 의지해야 만 했다. 어윈(W. H. Irwin)은, 여기서 가리키는 모퉁이 돌은 시온 그 자체이다(cf. 16절)고 해석한다.12) 그러므로 신앙의 공동체는 예루살렘과 관련된 하나님의 계획에 굳건히 서 있을 것을 요청받는다. 반면에 여호와는 선별하시고 심판하시는 당신의 이상한 사역을 수행하신 다. 23-29절은 신실한 자들에게 사건의 전개 속에서 드러날 하나님의 완벽한 때를 제시해 준 다.
아리엘에 대한 선포(이사야 29:1-8)에서, 여호와는 먼저 예루살렘이 포위공격을 당하게 하 시며, 그 다음 그 예루살렘을 구하신다. 9-12절은 예루살렘 백성들의 영적 무감각 상태를 추적한다. 이러한 영적 무감각은 근본적인 종교적 불확실성의 결과이며(13-14절), 심판을 야기시킨다. 15-24절은 사악한 자들을 위협하지만(15-16절), 온유한 자들에게는 구원을 약속한다(17-24절). 그리하여 황금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
사 30:1-5은 애굽에 대한 신뢰를 정죄한다. 6-7절은 동일한 시대에 관한 것을 다루는 것 같으며, 동일한 관심사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내용들은 의심쩍어 보인다. 아마도 사신들은 애굽으로 여행하던 자들이다(6절). 애굽의 도움은 가치 없는 일이 될 것이다(7절). 8-18절은 선지자에게 그의 메시지를 요약하도록 요청하며(8절), 그 다음 이스라엘 배역(9-11절), 그 결과 그리고 일축되어버린 구원(12-18절)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그렇지만, 예루살렘에 거하는 구원의 공동체에게 있어서 축복은 압제자의 멸망과 우주질서의 완전한 변형(26절)을 고대한다. 역사의 압제자들, 특히 앗수르의 말로가 회화적으로 간략하게 그려진다 (27-33절).
(애굽으로부터의) 후원요청과 시온을 보호할 수 있는 진정한 원천간의 대조는 이사야 31:1-9에서도 계속된다. 32장의 노래는 시온에게 보장된 구원의 새 시대의 중요성을 묘사하고 있는 것 같다. 틀림없이 여호와의 통치가 주도적으로 이루어 질 것이며(1-2절), 민감성과 지각이 새 시대 모든 이들의 자산이 될 것이며(3-5절), 이전의 지도력과 이후의 지도력간의 대조가 제시된다(6-8절). 이 장들에 집중적으로 다루어진 주전 701년의 예루살렘 포위에 대한 언급은 벌거벗어진 여성으로서의 예루살렘에 대한 표현을 통해 계속 이어지는 듯하다 (32:9-14). 사회적 기능을 뒤엎어버린 예루살렘의 행위는 예루살렘을 무너뜨린 사회적 행동 의 특징이 되었다I(cf. 3:16-26). 그 다음에 이어지는 단락(32:15-20)은 모든 생명을 다스릴 거룩한 영이 부어질 구원의 시대를 예고한다.
지적했다시피, 시온의 대한 강조는 종결 찬양시, 이사야 33장에 분명히 드러나는 것 같다. 예루살렘을 대항해 일어난 강력한 대적의 파멸과 종국적인 시온의 영광이 주제가 된다. 비록 33장의 연대를 정하는 것이 어렵다 할지라도, 33장은 크게 시온에 집중해 있으며 주전 701년 여호와의 예루살렘 구원 시대로 소급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장들의 논의는 때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이 장들은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의 궁극적인 방어자가 되신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도성은 심판의 불길을 먼저 통과해야만 한다.
e. 이사야 34-55장
이 장들은 시온 모티브에 관한 뚜렷한 대조를 보여준다. 에돔을 위에 임한 증오가 시온을 향한다(사 34장 cf. 겔 35장). 그러나 이 증오는 구속받은 주의 백성들이 변형된 광야를 거쳐 시온으로 귀환할 때 사라질 것이다(35장). 많은 해석 가들은 종말론적인 이 두 장들을 40-55장의 본문들과 연결시킨다. 그렇지만 이 장들이 반영해주는 일반적인 특징을 고려해 볼 때, 이 장들이 예언의 전반부에 위치하는 것은 적절한 것이다. 하나님 백성의 미래에 대한 포괄적인 관점을 전달하는 이 장들 속에서, 시온은 다시 한번 세계 중심으로서의 기능을 하게 된다.
f. 이사야 36-39장
이 장들은 주전 701년의 역사적 시대와, 앗수르 왕 산헤립의 공격에 맞서는 예루살렘의 방어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놀랍게도, 이사야 39장은 포로 예언으로 종결되지만 주로 예루살렘 지도자들의 포로이송을 언급한다(cf. 5-8절).
g. 이사야 구조의 윤곽
우리는 1-39장에서 임박한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위협과, 시온과 그 곳에 거할 남은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보여주는 일관된 종말론적 관점을 다함께 살펴보았고, 이제 이사야 40-66장을 논의할 즈음에 이르렀다. 40-66장에서 이것들은 어떻게 진행되는가? 40-55장은 대부분 전적인 종말론을 보여주는 반면, 56-66장은 역사와 종말론이 섞여있다. 이사야서의 전체 구조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배열을 볼 수 있다:
이사야 1-12장 역사와 종말론
이사야 13-23장 역사
이사야 24-27장 종말론
이사야 28-33장 역사
이사야 34-35장 종말론
이사야 36-39장 역사
이사야 40-55장 종말론
이사야 56-66장 역사와 종말론
h. 이사야 40-55장
이사야 40-66장은 새롭게 된 하나님 도성의 신학을 본격적으로 드러낸다. 포로생활에 대한 미래와 예루살렘에 대한 위협으로 끝맺는 1-39장 이후에 40:1-11은 예루살렘을 향한 강한 위로의 메시지로 시작한다. 1-11절의 구조는 중요하며 주의 깊게 다루어져야만 한다.13)
예루살렘과 관련된 내용이 40:1-2과 9-11절에 나타나며, 이 두 단락은 주제적 중요성에 의 해 내적으로 묶여져 있다. 그러므로 2절은 (히브리어 키, “that”에 의해 소개되는) 인과 절 (causal clauses)을 포함하며, 이 인과 절은 1절의 진술에 대한 근거를 마련해 준다. 1절에는 두 개의 명령형이 있고, 2절에도 두 개의 명령형이 더 나타나며, 이러한 명령형들은 1-2절을 연결시켜주는 것 같다. 왜냐하면 이중 명령형은 40-55장에 등장하며(40:1에서와 같이), 더 많은 명령형과 함께 연속되며, 동일 문맥에 의해 연결된다(cf. 51:9; 17; 57:14; 62:10). 40:9-11은 1-2의 예루살렘 주제와 연결될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는 9-10절의 세 번의 “보라”(behold; 히, 힌네)를 포함하는 절들이 2절의 원인 절과 균형을 이루고 있음을 주목해 볼 수 있다. 1-2절과 같이, 9-11절은 명령형으로 시작하며 이중 명령형으로 계속진행 된다(9절 중반부). 이 두 단락들(1-2절과 9-11절)은 서로 새 출애굽과 관련된 본문을 감싸고 있다. 3-5절은 광야를 통과해 나타날 거룩한 도로의 예비를 가리키며, 6-8절은 이러한 사건들이 거룩한 말씀의 선포의 결과로서 일어날 것임을 분명히 한다. 이와 같은 1-11절의 세 주제들, 즉 예루살렘을 향한 위로, 바벨론으로부터의 새 출애굽, 모든 변화들의 근원이 되는 거룩한 말씀의 권세는 또한 40:12-55:13의 맥락을 설명해 준다. 40:1-2, 9-11의 메시지는 49:1-52:12; 40:12-48:20에 발전된다. 끝으로 최후의 변화를 야기시킬 거룩한 말씀의 권세를 다루는 40:6-8은 그 중요성을 52:13-55:13 본문에서 발견하게 된다.14)
40:1의 화자와 청중은 누구인가? 복수 명령형은 선지자 혹은 예루살렘을 화자나 혹은 수신자로 이해하는 것을 배제시킨다. 아마도 우리는 천상회의에서 전달된 거룩한 선언(the divine address)에 관한 잘 알려진 예언의 세계를 접한다. 그리고 선지자가 반드시 자발적으로 취해야 할 행동이 소개된다. 때때로 “내 백성”(1절)이란 표현은 분명 언약적이며 언약의 갱신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에(cf. 같은 구절의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소명적 선포가 의도되어 있음을 암시해 준다. 그러므로 1절의 위로 받는 백성들은 2절의 예루살렘의 위로 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이사야 52:7의 경우는 이와 같지 않다. 예루살렘 귀환 약속의 성취를 다루는 52:7은, 전령(messenger)으로서의 왕 같은 사자는 예루살렘 성벽 위의 파수꾼인 그 백성과 구분됨을 암시해 준다. 그러므로 이 문맥에서는 백성이 아닌, 거룩한 위임을 받은 사자가 40:1에 예고된 그 위로의 메시지를 가져다준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대로, 언약적 갱신은 구 언약의 상호 연과된 표현(“내 백성”/“너희 하나님,” 1절)에 의해 분명히 드러난다. 그러므로 후속 장들은 모든 이스라엘의 언약적 기대의 성취를 향해 나아가는 듯 하다. 이것은 다름 아닌 예루살렘과 그 거민들의 회복을 의미한다. 모든 도로들이 회복된 중심지로 이어질 것이며, 이 중심지는 이사야서의 예언의 발전과정에 분명히 드러나듯이 완전한 언약적 기대의 성취로서의 새 창조 속에 위치하게 될 것이다. 40:1-2, 9-11에 나타난 예루살렘의 목적지는 새 출애굽에 의해 진행될 것이다(3-5절). 그리고 예루살렘은 이제 시내산 언약으로부터 생겨난 모든 것들을 대신할 예언적 대리자로 나타난다. 이후에 우리는 새 이스라엘을 다루는 장에서 시내산 언약이 이스라엘이 경험한 아브라함 언약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논의할 예정인데, 이처럼 예루살렘은 40-55장에서 아브라함 약속의 성취로 나타난다(cf. 54장). 예루살렘에서 백성과 거룩한 처소라는 두 가지 아브라함 언약 사상이 성취된다.
우리는 또한 “위로”라는 말을 주목해야 하다. 40:1에서 이 단어는 슬픔가운데의 위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슬픔이 제거되었다는 메시지를 뜻한다(cf. 삼하 12:24).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정다이 말하며”(사 40:2)라는 표현은 상황의 주목할만한 변화가 일어남을 암시해 주며(cf. 창 34:3; 삿 19:3; 삼하 19:7; 호 2:14), 임박한 발전을 예시한다. “그 모든 죄를 인하여 배나 받았느니라”(사 40:2)은 특별한 속죄 이론을 강조하기보다는, 단순히 예루살렘의 고난이 인내의 한계선 너머로 사라졌음을 시사해 준다.
사 40:9-11에서 비록 모호하지만, 전반적인 맥락은 예루살렘이 복음 전도자가 아니라 복음을 듣는 대상임을 강조한다. 여기서 우리는 복된 소식을 전하는 전령으로서의 왕 같은 사자와 52:7의 도성과의 차이에 주목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키소우(Kiesow)가 주지하다시피,15) 우리는 40:9-11에서 높은 산 위에 있는 기괴한 예루살렘의 그림을 연상해야만 한다. 40:9-11의 메시지는 단순하다: 하나님은 왕으로 오신다! 이 메시지는 52:7에 분명히 제시되어 있다. 반면에 고대 근동에서 종종 왕권을 위해 사용된 40:9-11의 목자 이미지는 여호와의 왕권을 암시하기도 한다. 출애굽의 구원의 수단이었던 여호와의 팔(40:10; 52:10)은 이 모든 것을 성취시킬 것이다. 간략하게 말하자면, 새 출애굽을 일으키실 하나님은 거룩한 중심처소인 예루살렘에 모여들 그의 백성들을 위해 그의 언약을 재수립하신다.
1-11절에 제시된 매우 간략한 개요 이후에 이사야 40:12-31은 펼쳐진 이스라엘의 미래와 함께 시작한다. 역사의 과정이 이스라엘과 반(反)하여 진행되고 있다는 이스라엘의 불평에 대한 응답으로서, 역사적 과정의 반전이 임박해 있다.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출현을 통한 심판은 바벨론에게 선언될 것이다. 40:12-42:4까지의 분위기는 팽팽한 논리적 논증으로 일관된다.16). “길”이 “여호와로부터 숨겨져 있다”는 이스라엘의 불평은 40:12-31의 이슈가 된다(27절은 히, 데렉 “길”과 미스팟 “정의”[RSV “right”]을 연결시켜준다; 또한 14절의 미스팟 용법을 주목하라).
선지자는 여호와가 다음과 같은 이스라엘의 세 대적들을 물리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열방들 그 자체(사 40:12-17); 그들의 통치자들과 열왕들(18-24절); 그리고 그들 배후에 있는 별 신들(25-26절). 더욱이, 여호와는 그것을 하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시고자 한다(27-31절). 여호와는 “정의”(히, 미스팟)를 가져다 줄 것이다. 41장은 두 소송 기사들에 의해 소개되고 결론 지워진다. 이 소송 기사에서 열방은 심문받으며(1-4절), 열방의 신들은 법정으로 불리운다(21-29절). 41장은 “보라 그들은 모두 망상에 잡혀있으며, 그들의 행위는 헛됝 것이다”(29절)라는 말로 끝맺는다. 종의 사역을 소개하는 42장은 “내가 붙드는 나의 종을 보라”는 표현으로 시작한다. 달리 말하자면, 42:1-4의 내용은 선행했던 것의 반전을 위해 의도된 것이다.
요약하자면, 40:1-11에 제시된 바대로, 이스라엘의 곤경의 회복과 그 구원의 청사진은 종의 사역에 의해 초래될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자세히 설명할 수 없지만, 그 종이 미치는 전 세계적 영향력이 42:4, 특히 섬들(이스라엘의 범위를 넘어선 세계)이 그의 “율법”(히, 토라)를 앙망할 것이라는 표현을 통해 암시되고 있음을 주목한다. 토라와 이 용어와 연관된 이사야서의 종말론적 기대(cf. 2:2-4)와 관련해 볼 때, 초민족적 순례여행에 관한 표현은 종의 사역의 성공적인 결과를 강조해 준다. 그러므로 42:1-4의 의도는 현재의 역사 과정이 종의 사역을 통해 이스라엘을 위해 반전될 것이며, 이스라엘의 “의”가 올바로 세워질 것임을 제시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위해 정의를 이루실 것이다.
이어지는 두 종의 노래(사 49:1-6; 50:4-9)는 “시온 내러티브” 안에 포함되어 있으며, 49:1에서 시작되는 시온의 미래에 관한 더 많은 논의들과 연관되어 있다.
이 시온의 노래들은 더 상세한 종의 사역의 표현과 연관되어 소개된다. 이 종의 사역으로 인해 열왕들(사 49:1-6)은 출애굽의 행렬을 통해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는 이스라엘의 귀환(49:7-13, cf. 출 15:12-18)을 지켜본다. 여호와는 예루살렘을 잊지 않았다 (사 49:14-26).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손바닥에 새겨져 있다는 것(16절)은 관계가 분명히 깨뜨려질 수 없음을 암시해 준다. 이스라엘을 압제했던 열방들은 이스라엘을 돌려보낼 것이다.
바벨론 유수가 의도했던 바는 결별이 아닌, 징계였음이 암시되어 있다(사 50:1-3). 그러므 로 50:4-9는 그 종에게 인내할 것을 권고하며, 포로민들에게 그 종의 메시지에 반응할 것을 촉구한다(10-11절). 51:1-8은 약속을 이어받을 신실한 이스라엘을 소개하는 반면, 9-11절은 새 창조와 관련된 예루살렘의 귀환을 보여준다. 12-16절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뒤에 서 있기 때문에, 예루살렘을 향한 위로를 제시한다. 그로 인해 언약은 회복될 것이다(16절). 예루살렘은 깨어날 것을 촉구 받는다(17-20절). 진노의 잔은 바벨론으로 옮겨질 것이다(21-23절). 예루살렘은 새 시대에 합당한 의복을 입을 것이다(예를 들면, 여왕의 의복, 52:1-6). 52:7-10은 40:1-2, 9-11의 기대와 그 절정을 마련해 주며, 예루살렘의 귀환(예언적 관점에서 볼 때 52:11-12에서 성취됨)은 출애굽과 유비를 이룬다.
사 52:13-53:12에서 예루살렘의 회복과 왕이신 하나님의 도래를 가져다 줄 종의 사역이 평가된다. 흠을 지닌 거절당한 종,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역은 매우 영향력이 있었던 그 종은 52:13-15에 나타난다. 그 다음 53:1-9에서 우리는 새 출애굽과 회복에 놀라 서 있는 이방 열왕들의 고백(5l2:15)과 만나게 된다. 종의 사역에 대한 예언자의 평가(53:10-11)와 하나님의 평가(12절)가 뒤따른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그의 도성으로 귀환하게 되는 위대한 변화가 종의 사역으로 인해 가능케 된다는 점이다. 이 열왕들의 고백은 2:2-4의 종말론에 대한 장엄한 증거를 보여준다.
새 언약에 관한 논의에서 주목해 볼 예정이지만, 그 종에 의해 성취된 것들을 상세히 설명해 주는 54장에는 당황스런 언약적 표현들이 나열되어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장에서 아브라함(1-3절)에서 시내산(7-10절), 시내산에서 다윗(11-17절)으로 이동하는 주제들로 급히 옮겨간다. 54장은 시온의 재건과 재거주(11-17절)의 놀라운 영상을 통해 그 절정에 이른다. 생수가 새로이 회복된 그 도성으로부터 흘러나오며(55:1-2), 그 도성의 모든 백성들은 이제 다윗 언약의 약속에 함께 참여한 자들이 된다. 그리하여 그들은 왕과 제사장이 된다(3-5절).
이사야 56-66장
거룩한 산, 아마도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초민족적 순례여행은 그 행진을 시작하며(사 56:1-8), 이와 유사한 한 순례여행은 그 행진을 끝맺는다(66:18-24). 예루살렘의 역할을 염두에 둔 2:2-4의 약속은 60-62장에서 다음과 같이 확장된다:
60:1-9은 곧 임박한 시온의 귀환에 대한 기대와 함께 49-55장의 주제들을 다시 시작한다. 열방과 백성들의 재산은 그 통치자들의 인도를 받으면서 갱신된 예루살렘으로 들어올 것이다. 이것은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가 된다(21-22절). 61:1-3에서, 한 종은 승리를 선언한다. 4-11절은 왕 같은 제사장들이 거하게 될 시온의 물리적 재건과 관련 있다(6절). 신부 시온은 자연의 변형(11절)과 함께 온 세상으로부터 경의를 받을 것이다(9절).
특별히 선택 받은 시온의 특권은 62장의 주제가 된다. 시온은 신원함을 받고 회복된다(1-2 절). 시온에게 새 이름이 주어지며(2b-4a), 시온의 미래는 언약의 결혼 은유(4b-5절)를 통해 소개된다. 시온의 안전은 6-9절의 강조점이 된다. 반면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거룩한 백성으로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 그 거룩한 처소를 차지하라는 요청은 이 장을 마무리짓는다 (10-12절).
핸슨(P. D. Hanson)은 56-66장에 퍼져있는 이원성(dualism)에 주목한다.17) 그 공동체 안의 소 그룹만이 귀환 약속의 수혜자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65:19에서 우리는 “내 백성”을, “내 거룩한 산을 잊어버린”(cf. 11절) 자들과 대립되는 자들로 보는 개념을 다루고 있다. 17-25절에서,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들(1-39장의 남은 자)은 신적 개입으로 이루어 질 새 시대의 축복을 즐거워한다. 여호와는 그의 천상 성전으로부터 큰 소리를 내실 때, 새 에루살렘의 주제를 환기시켜준다(66:5-6). 그의 대적 위에 놓은 심판이 뒤따르며, 많은 자녀를 낳는 시온의 놀라운 출산의 메타포(7-9절)은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 뿐만 아니라, 새 시대에로의 급격한 전환을 가리킨다. 또 다시 “예루살렘과 더불어 기뻐하는” 자들에게만 위로가 주어진다(10절). 전통적인 이미지가 새 시대에 대한 묘사에 다시 나타나며(12-14절), 여호와의 심판이 거룩한 용사 모티브에 묘사된다(15-16절). 이 심판을 넘어 종말은 시온으로 돌아오는 택함 받은 자들의 귀환을 통해 예고된다(18-24절). 이사야서는 베스트만(C. Westermann)이 지적한 바 대로,18) 역사의 성취가 될 중단되지 않는 성전 예배의 영상으로 끝맺는다.
요약
이사야서는 (여호와의 왕권을 무시함으로 말미암은) 심판아래 놓인 물리적 예루살렘의 타락한 “예배”에서부터 새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질 여호와의 예배에로 이동해 나간다. 이 위대한 책의 과정 가운데 예루살렘은 점차 도성과 구원받은 공동체를 묶어주는, 즉 거룩한 공간과 거룩한 백성을 결합시켜주는 성경의 주요 상징이 된다. 이사야는 시온의 선 회복 없이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생각할 수 없음을 분명히 피력한다. 오직 여호와의 현존만이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준다. 다윗과 같은 왕과 성전은 거의 관심을 받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사야는 궁극적인 종말과 관련 있기 때문이다. 시온은 이상적인, 완전한 공동체이자 의로운 하나님의 백성이다.
그렇지만 정치적 개념에서 볼 때, 이사야의 예루살렘 사상은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역사 속에서 나타남을 상기시켜 준다. 하나님은 고대 바벨론과 같이 이 세상의 “바벨론들”로부터 그의 백성을 구원하신다. 그는 그 백성들을 위해 한 도성을 세우실 것이다. 즉 이 한 도성은 연합된 정치적 공동체의 이미지가 된다. 창 11장의 바벨탑 사건과 그 후의 일련의 분열들은 반전되었다. 그러므로 이사야의 예루살렘 사상은 바벨탑 건축자들의 허망한 인류의 꿈을 대체시킨다. 한 중심지를 건설하려는 열망에 고조되었던 바벨의 사람들은 또한 인간들을 완전히 통제하는 정부 연합체를 갈망하면서 한 도성을 건설하였다. 이제 이사야는 하나님에 의해 추구되는 연합에로의 갈망을 발견한다.
이사야서의 역할은 “이 중심지의 신학”을 우리들 앞에 제시하는 것이다. 널리 퍼져있는 도성의 성경적 상징을 통해, 피통치와 통치의 개념들은 결속된다. 그렇지만, 이 상징이 등장하는 역사적 배경은 독자들에게 종말론이 명확한 역사적 성취를 고대하고 있다는 점을 환기시켜준다. 신앙과 역사가 완전히 교차할 것이며, 실체와 상징이 최종적으로 일치될 것이다. 사 40-66장의 표현은 회화적 방식으로 계 21-22장의 메시지-역사의 종말-를 고대한다.
주)
1) P. R. Ackroyd "Isaiah I-XII; Presentation of a Prophet", VTSup 29 (Leiden: Brill, 1978) 16-48.
2) 18-20절은 그 문맥과 조화되지 않는다. A. V. Hunter, Seek the Lord!: A Study of the Meaning and Function of the Exhortation in Amos, Hosea, Isaiah, Micah and Zephaniah (Baltimoe: St. Mary's Seminary and University, 1980) 191-9.
3) 구약에 나타난 보좌와 심판과의 연관성은 R. Knierim, "The Vocation of Isaiah" VT 18 (1968) 53-4에서 집중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Knierim은 또한 이사야 6장과 왕상 22장 19절에 나오는 미가야의 심판 환상간의 두드러진 공통점에 주목한다.
4) K. Joines ("Winged Serpents in Isaiah's Inaugural Vision", JBL 86[1967] 410-15)은 그 증거를 제시한다.
5) Knierim, "Vocation", 54-6.
6) W. J. Dumbrell, "Some Observations on the Political Origins of Israel's Eschatology", RTR 36 (1977) 38-9. 이사야 2장 2-4절의 자료는 미가 4장 1-5절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자료는 이사야 2:2-4과 미 4:1-5보다 선행하는 것 같다.
7) 역사적 기원과 관련하여 시온 전승과 그 승귀에 대한 설명으로는, J. J. M. Roberts, "The Davidic Origin of the Zion Tradition", JBL 92 (1973) 329-44를 참조하라.
8) S. Eerlandsson (The Burden of Babylon [ConBot 4; Lund: CWK Gleerup, 1970] 102-5)는 이 점에 주목한다.
9) ibid., 96-97.
10) Roberts, "Isaiah in Old Testament Theology", Int 36 (1982) 142.
11) W. Millar, Isaiah 24-27 and the Orgin of Apocalyptic (HSM 30; Missoula: Scholars 1976) 30.
12) W. H. Irwin, Isaiah 28-33, Translation with Philological Notes (BibOr 30l; Rome: Pontifical Biblical Institute, 1977) 30.
13) 이사야 40:1-11의 구조에 관하여는, K. Kiesow, Exodustexte im Jesajabuch (Gottingen: Vandenhoeck and Ruprecht 1979) 23-66을 참고하라.
14) ibid., 165.
15) ibid., 57-8.
16) W. A. M. Beuken, "Mispat: The First Servant Song in its Context", VT 22 (1972) 1-30을 보라.
17) P. D. Hanson, The Dawn of Apocalyptic (Philadelphia: Fortress, 1975) 32-208. 나는 그의 이사야 56-66장 연구에 빚졌음을 인정한다.
18) C. Westermann, Isaiah 40-66 (OTL; London: SCM, 1969) 428.
'신학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출애굽기 강해 (0) | 2006.05.16 |
---|---|
[스크랩] 모세율법에 나타난 그리스도 (0) | 2006.05.16 |
[스크랩] 마태복음에 나타나는 비유들의 핵심은 무엇인가? (0) | 2006.05.16 |
[스크랩] 개혁파신앙과 알미니아니즘 (0) | 2006.05.16 |
[스크랩] 경건주의와 부흥운동 (0) | 2006.05.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