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주의와 부흥운동
마르틴 브레히트 교수 (Universit t M nster)
번역: 김문기교수(평택대)
오늘 우리에게 함께 모일 수 있는 이 기회를 만들어 준 것은 90년 전에 여러분의 나라에 교회의 설립과 확장과 관련된 기독교 교육기관의 설립이다. 선교를 통한 개신교의 확대는 19세기의 교회사의 위대한 사건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고 이것은 관찰자를 놀라게 한다. 이 과정은 기독교가 온전히 전세계적인 종교가 되게 하는데 기여했다. 이러한 확장에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그리고 문화적인 요소들이 의심의 여지없이 상이하게 혼합하여 역할을 했다. 그러나 교회사 연구에서는 이 과정이 근본적으로 또한 여러 나라들과 교파들 안에서 부흥운동 혹은 부흥운동들의 종교적인 능력을 통해 이루어졌는가를 씨름하게 된다. 이 밑바탕에서 이제 교회들의 에큐메니칼 공동체의 이념이 자랄 뿐만 아니라 에큐메니칼의 적지 않는 회원교회들이 전적으로 이 밑바탕에 그들의 기원을 삼을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의심 없이 교회사의 현저한 발전들과 시대들에 관한 문제이다.
전통들에 대한 인식과 평가는 신학의 한 과목으로서 교회사 연구의 과제이다. 이 전통들 위에 교회와 교회들이 기초하고 있으며 이곳으로부터 유래하며 이해된다. 전통들은 원래 -고대의, 갱신-개혁적인, 계몽적인(합리적인) 혹은 현대적으로- 풀어놓을 수 있다. 전체적으로 모든 것이 그때그때 함께 구체적인 역사를 이루고 있다. 나는 역사에서 오늘 하나의 복합체에 주목하려고 한다. 이것은 초기 프로테스탄트 교회들과 또한 이 교회들로부터 나온 지교회들의 많은 부분과 물론 관련을 갖고 있다. 이것과 관계된 것으로 19세기에 기독교의 위대한 확장(Aufbr che) 가운데 하나로서 부흥운동이 있다. 이 부흥운동의 근원이 어디인가, 시간적으로 얼마나 지속되었는가, 이것과 나란히 일어난 일들은 어떤 것들인가 그리고 이것이 어떻게 규정되어야 하는가에 관하여 놀랍게도 어떠한 일치된 의견이 없다는 것이다. 이 부흥운동이 한 나라에 퍼진 것을 넘어서 세계적인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문제의 복잡성이 있다. 그러므로 이 운동을 하나의 단순한 인과관계(Ursachenzusammenhang)로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어려움으로 인하여 부흥운동의 후예들은 그들의 근원에 대한 조건들과 그들의 정체성에 관하여 무엇이 가장 불충분한 상태였음을 확실히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부흥운동들을 이해하고 종합적으로 보거나 혹은 경우에 따라서는 차별화하고 정리하기 위해 이 현상들을 연구하고 반영하는 것이 필요하다.
최근까지 계속되고 있는 선두적인 논쟁은 부흥운동이 이 보다 먼저 일어난 경건주의와 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경건주의라는 명칭은 보편적으로 붙여지지 않으며, 특히 앵글로 색슨의 복음주의(Evangelikalismus)에 대해서 그렇다. 많은 지역에서 이 경건주의라는 명칭은 예로 들면 독일에서는 대립적이었으며 더욱이 매우 논쟁거리가 되었거나 부정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왜냐하면 구원 그리고 이 개념에 대한 구체적인 이의가 그곳에서는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젤의 교회사가 울리히 개블러(Ulrich G bler)의 책임 아래 편집된 '경건주의 역사' 제3권(G ttingen 2000)은 부흥운동을 경건주의의 역사에 편입시켰다. 확실히 편집인 자신도 그것에 대해서는 상당히 유보를 하면서도 동시에 부흥운동을 계몽주의, 복고주의 혹은 낭만주의에 종속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관계들의 순위는 이해와 설명을 위해 도움이 될 것 같다. 현재 일반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은 19세기에도 재래의 경건주의의 연속성과 생명력이 있었는가 이다. 그리고 나서 19세기에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운동들 가운데 하나였던 부흥운동의 원동력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는 지역적으로, 객관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 관계된 것들을 찾아보는데 다시 노력을 해야만 할 것이다.
경건주의의 제공들
경건주의는 부흥운동에 대해 받아들일 수 있고 확장시킬 수 있는 모범적인 것을 이미 제공하였다. 독일 그리고 더 나아가서 경건주의의 몇 가지 활동들은 특히 할레(Halle)에서 눈에 띠게 되었다. 한편 이것은 고아원(Waisenhaus)으로 이루어진 구원의 집의 모델이었다. 할레에 있는 이 집은 학교와 결합되었으며 그 외에 신학자와 교사들의 양성을 목적으로 한 교육의 가능성을 제공하였다. 사람들은 그 당시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적지 않은 하나의 증거를 보고자 했다. 고아원은 그 이상의 성공을 거두었으며 출판에도 손을 대어 하나의 출판사와 서점을 운영하였다. 이와 더불어 비싸지 않은 성경 보급을 위한 최초의 사업이 칸슈타인(Canstein) 성서공회에서 시작되었다. 더 나아가 할레에서 처음으로 경건주의가 선교에 참여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것은 할레로부터 선교에 관한 소식들(Nachrichten)이 퍼져나가게 된 것이다. 영국에서 초기 기독교 협회들은 할레의 활동들의 네트워크에 대한 짝을 형성하였다. 할레는 영국의 이 협회(Societies)들과 특별하게 협력하였다. 영국과 할레의 협회들 안에 있는 경건한 사람들의 터는 교회적으로 주어진 것들 때문에 다르게 구성되고 조직되었지만 발전된 조직형태들은 나중의 사역들에 중요한 발단들을 제공하였다.
사람들은 협회들의 존재를 부흥운동이 계몽주의로부터 받았던 지참금으로 계산하고자 하였다. 17세기부터 이러한 종류의 새로운 공동체들이 생겨났던 것은 의심할 수 없다. 이와 같이 19세기에도 조직화된 단체들이 다시 생겨나게 되었으며 기독교적인 활동들이 이 단체들 안에서 조직화되었다. 물론 협회와 단체가 얼마나 알찬 내용들을 가지고 있었는가는 질문으로 남는다. 이제 더 이상 교단적 혹은 교회적인 기관이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지도적인 인물이 기관들에 대부분 매우 밀착 되었다. 내가 알고 있는 한에서는 계몽주의에 의한 협회나 단체의 조건적인 독자적 생활은 대부분 고정시킬 수 없다.
이미 경건주의에 의해서 발전된 활동의 모범들 외에 부흥운동에서 경건주의의 신학과 경건의 존속에 대한 질문이 또한 있게 된다. 오랫동안 경건주의에서 우세한 성경주의(Biblizismus)가 지탱되고 주장되었다. 구원론에서는 죄에 대한 인식과 그리스도에 의한 속죄가 가장 중요한 영역을 차지하였다. 이미 경건주의는 거룩한 생활과 완전의 실현을 염두에 두었다. 상식 철학(common sense philosophy)이 완전주의의 실현에 대한 조건들을 경멸하고 그와 더불어 가볍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상식 철학의 계몽낙관주의(Aufkl rungsoptimismus)의 산물에서 최초로 나온 것이 아니다. 천년왕국적인 종말론은 대부분 요한 알브레히트 벵엘(Johann Albrecht Bengel)에 의해 생긴 골 안에서 이미 19세기에 미치게 되었고 이것으로부터 연속성을 형성하였다. 유사하면서도 끝까지 변하지 않는 신학적이고 교회적인 끈들이 헤른후트파와 감리교회에 주어졌었다. 마지막으로 경건의 모임들(collegia pietatis)또한 경건주의적 특색을 지닌 공동체 형태를 기억하게 한다. 경건의 모임들은 또한 부흥운동에 있어서 언제나 다시 사회적인 결정체로서 증명되었다.
독일에서 연속성들과 불규칙한 발전들
부흥운동의 각 분파들의 유래에 대한 질문은 언제나 상당한 흥미를 갖게 한다. 헤른후트파의 디아스포라 사역자들의 실제를 조건으로 삼는다면, 물론 이 사역자들은 단지 하나의 새로운 경작할 밭을 얻기 위하여 힘들더라도 어디에서 어떤 상황에 있을 수 있게 되었다. 여러 가지 관점에서 중요한 한 발안은 1780년 바젤에서 독일 기독교협회를 창립한 것이다. 경건주의적 공동체의 기초 위에서 개혁교회 신자들과 루터교 신자들이 이 협회 안에서 협력하게 되었다. 지역적인 협회들은 암스텔담에 있는 루터교인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독일 도시들 안에서 생겨났다. 자주 이것들은 각 지역적인 부흥운동들의 출발이 되었다. 정기 간행물과 중앙과 지역 협회들 사이에 있었던 편지 왕래는 결집에 도움을 주었다. 기독교 협회는 계몽주의를 반박하는 변증을 위한 기구로서 의도되었다. 물론 이 협회의 사람들은 경건주의자들의 공동체의 후원에 한정되었다. 기독교협회의 총무들은 초기에는 뷰르템베르크 출신의 신학생들이었다. 이들 가운데 칼 프리드리히 아돌프 슈타인코프(Karl Friedrich Adolf Steinkopf, 1773-1859)는 런던에 있는 독일 사보이-교회로 자리를 바꾼 다음 거기에서부터 부흥운동의 수많은 국제적인 활동의 중개자가 되었다. 바젤에서는 1801년부터 크리스티안 프리드리히 슈피틀러(Christian Friedrich Spittler, 1782-1867)가 협회 총무로 활동하였다. 슈피틀러 아래서 의미 심장한 선교와 성서협회, 설교자 교육기관들과 많은 구호소들이 설립되었다. 이런 것들은 바젤로 하여금 특별하고 국제적으로 빛을 발산하는 중심이 되게 하였다.
뷰르템베르크제후국에서 경건주의는 결코 같은 집단들이 아닌 다른 집단들로 이루어졌다. 일어날 복고와 더불어 경건주의의 조용한 대변자들은 다른 지역의 경건주의 대변자들이 제도적인 교회를 멀리하는 동안 교회를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 경건주의의 활동들이 해외 선교, 여러 가지의 협회 그리고 디아코니 시설들의 계열을 위한 효과적인 자체 협회들의 영역에서 생겼다. 기능적인 조직과 지도적인 인물들의 모습은 고유 지역적인 영역을 넘어서서 빛을 발산하였다. 경건주의의 저널리즘은 고유의 매체들과 출판물들을 이용할 수 있었다. 경건주의의 아버지들에 대한 관계는 성경주의, 천년왕국적인 종말론 혹은 변신론적인 개념들을 인식하며 견지하고 전승하는가에 있었다. 이것 외에 종교개혁적인 유산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루드비히 호프아커(Ludwig Hofacker, 1798-1828)는 그의 널리 퍼진 설교집과 더불어 죄의 비참함과 죄 용서에 대한 강력한 영향을 지닌 설교자가 되었다. 19세기의 진행에 있어서 상황들은 아주 매우 변하고 있었지만 이것이 교회에서 경건한 모임들의 정체성인식을 깨뜨리지 못했다. 요약하면 뷰르템베르크에서 경건주의의 역사는 18세기의 대단원과 더불어 결코 사라지지 않고 수많은 실마리와 함께 19세기에 그리고 그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한 단원이 결론에 도달하는 동안 새로운 단원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압도적 연속성을 통하여 더 깊이 내려가는 중간휴지 없는 확고한 과정이 있었다.
이제 경건주의의 부흥운동에 대한 시종일관한 연속성들이 독일의 다른 지역교회들에서 있었는지 없었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일반적으로 학문 연구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부흥운동에서 각각 작업하는 것은 독일과 그 밖에 스위스에서 이 각각의 특색들을 고려해야만 한다.
바이에른에서 부흥운동은 몇 가지 특별한 것들을 제시하고 있다. 18세기말에 가톨릭 지역의 알고이(Allg u)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이것은 강한 신비주의적인 지참금을 갖고 있었지만 동시에 루터교회의 칭의신앙을 발견하였다. 뷰르템베르크 경건주의와 바젤의 기독교협회와의 횡적 결합들이 생기게 되었다. 가톨릭 교회 내부에서 알고이 부흥운동은 억압을 받았다. 루터교가 압도적인 에어랑엔 대학교에서 부흥을 일으킨 인물은 놀랍게도 개혁교회 소속의 교수인 크리스티안 크라프트(Christian Krafft, 1784-1845)였다. 그의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사실 바이에른에서 부흥운동에 재루터교화된 성격을 불어넣었던 빌헬름 뢰헤(Wilhelm L he) 이었다. 바이에른의 실례에서 보여주는 것은 종파주의의 되찾음은 부흥운동이 전통과 관련을 맺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종파주의의 되찾음은 부흥운동의 독자성을 더 나아가 요구하였다. 전체적으로 부흥운동은 수많은 뿌리들로부터 이 영역에 흘러들어 왔다.
바덴 지역에서는 부흥운동이 그렇게 강하진 않았지만 바젤의 기독교 협회와 뷰르템베르크의 경건주의와 관련된 사람들이 있었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전통적인 신앙과 결코 결별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경건주의에서 부흥운동에 이르기까지 뷰르템베르크와 스위스를 모두 연결하는 인적인 연속성은 루터교 신자들과 동시에 부퍼탈/엘버펠트와 그곳을 넘어 라인주 영역에 있는 개혁교회 신자들에도 존속하였다. 이 관계들은 브레멘까지 계속되었다. 엘버펠트에 있는 경건한 개혁교회 신자들에 의하여 또한 네덜란드와 접촉하게 되었다. 남 베스트팔렌지역인 지거란트(Siegerland)에서 개혁교회의 부흥운동은 초기의 경건주의적인 모임으로 소급되는데 그 다음에는 부퍼탈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동 베스트팔렌 지역에서는 대략 1820년부터 몇 명의 목사들의 지도 아래 더욱 살아 있는 부흥운동이 눈을 끌었다. 이미 할레에서 교육을 받았고 자신의 모임도 있었으며 나중에는 바젤의 기독교협회와 관련을 맺었던 선구자인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봐이헤(Friedrich August Weihe, 1771 사망)가 여기에 있었음이 처음으로 새롭게 입증되었다. 어쨌든 동 베스트팔렌 지역에서는 신앙운동들의 연속성이 이제 동시에 증명되었다. 따라서 라인-베스트팔렌 지역에서 경건주의가 부흥운동의 선구자였음이 명백해진다.
부흥운동의 경건주의적인 토대에 관한 입증들이 넓혀졌다 하더라도 부흥운동이 어디에서나 경건주의에 기초를 두지 않았음을 인정하여야 한다. 프로이센의 종교정책은 교회 밖에서 열리는 집회의 인습적인 금지와 더불어 경건주의적 구조들의 형성에 호의적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베를린에서는 원래 단지 소수의 사람들과 전적으로 이들에게 속한 사람들만 일어나고 있는 부흥운동에 관련되어 있었다. 설교가인 요한네스 애니케(Johannes J nicke)와 사회 봉사사업에 활동적인 한스 에른스트 폰 코트비츠(Hans Ernst von Kottwitz) 남작의 업적은 언제나 이 점에서는 한이 없다. 이 두 사람은 헤른후트의 배경을 가졌다. 아우구스트 네안더(August Neander, 1789-1850)는 교회사에 대한 폭 넓은 이해를 지녔으며 베를린의 신학자들로부터 경건한 신학 교육가로 일컬음을 받고 있다. 한편 유명한 슐라이에르마허(Friedrich Daniel Ernst Schleiermacher)는 자신이 전통적 경건주의를 지닌 헤른후트파 출신이라는 것에 대하여 물론 거의 공론화하지 않았다. 베를린 부흥의 고유한 힘은 폼메른(Pommern) 지역에 빛을 발산하였고 그곳에 있는 귀족에게 알려졌다. 그 귀족은 나중에 부흥운동의 지도적인 인물이 되었다.
19세기가 경과하면서부터 부흥운동의 더 넓은 확장은 지역적으로 큰 차이를 나타냈다. 독일에서 부흥운동의 가장 중요한 신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은 브레슬라우(Breslau) 출신이며 베를린에서 교육을 받았던 할레대학교의 신학교수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톨룩(Friedrich August Tholuck, 1799-1877)이었다. 그는 경건주의적인 배경을 지닌 출신을 아니었지만 베를린에서 처음 부흥운동에 관련을 맺고 지속적인 접촉을 하였으며 나중에는 자신을 명확하게 경건주의자로 불렀고 국제적인 경건한 사람들의 공동체에 속해있음을 자각하였다. 신학자로서 톨룩은 생존과 관련하여 활기차고 강력하게 죄에 대한 인식과 구원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독일에서 부흥운동에 관한 개관을 정리해보면 다른 구별된 그림이 나타나게 된다. 부흥운동은 19세기에 많은 지역교회들의 역사에서 중요한 장을 확실히 형성하고 있다. 여기에서 물론 부흥운동은 보편적인 현상이 없으며 멈추지 않고 있다. 부흥운동은 과거에 있었던 경건주의가 가지고 있었던 것을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다. 경건주의와 부흥운동의 내적 관련은 이론(異論)을 제기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많은 지역에서 내적 관련은 명백한 연속성으로서 표명된다. 그 외에도 부흥운동은 물론 대부분 합리주의 또는 종파주의와 같은 다른 경향들과 경쟁하고 있었다. 바이에른에서부터 브레멘까지 많은 지역교회들에서 부흥운동이 있었으며 경건주의와의 연속성이 대부분 나타나고 있다. 부흥운동이 얼마나 강하게 신앙, 신학, 선교, 봉사 그리고 더 넓은 영역에 활기를 주었는지 인식한다면, 어떤 분기된 발전들이 이와 더불어 시작될 수 있었는지 확실하게 된다. 독일에서는 과거의 이상과 관계된 의도들이 같은 방향으로 갔다고 할지라도 사람들이 부흥운동의 역량들과 복고의 역량들 사이의 구분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선행하는 경건주의로부터 부흥운동의 분리가 당연한지 어떤지는 정서의 연속성에서 정말로 미결로 나타난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이제 독일 이외 지역에서 일어난 부흥운동들과 비교를 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다.
독일 이외의 지역에서 경건주의와 부흥운동
부흥운동이 독일 이외의 지역에서도 있었다는 것은 명백하며 이미 유사한 전문어휘집에 의하여 증명되었다. 이와는 달리 다른 지역의 부흥 운동들에 있어서 또한 경건주의에 대한 전통 관계가 동시에 주어졌는지 아닌지는 열려있다. 경건주의 개념의 상황적인 확대에 대하여 지금까지도 상당한 조건들이 존재하고 있다. 어떤 잣대로 여기에서 부흥운동들이 같은 개념으로 나타나게 되는지를 그래도 사람들이 알기를 원한다면 비교에 의한 교회사의 도전이 불가피하다.
영국에서 교회 구조들은 현존하는 유추에도 불구하고 18세기부터 독일의 교회 구조들과 결코 비교할 수 없다. 영국 성공회 외에 장로교회, 회중교회, 퀘이커, 침례교 그리고 감리교회가 있었다. 스코트랜드에서는 장로교의 국교회로부터 자유교회들이 분열하였다. 감리교회를 제외하고 복수주의(Pluralismus)가 부분적으로 독일 보다 다른 또 하나의 경건한 사람들의 그룹을 형성하였다. 특히 1845년의 복음동맹의 기초에서처럼 성결, 신자의 만인 사제직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기다림을 포함해서 생각한다면 전파된 복음주의(Evangelicalism)가 성경주의(Biblizismus), 죄에 대한 인식,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한 구원, 회개 그리고 중생과 같은 경건주의적인 주요 주장들과 내용적으로 그렇게 멀지 않다. 그러므로 할레에 있는 경건주의자들 혹은 북아메리카 식민지들에 있는 각성된 자들은 영국의 파트너들과 어떤 큰 차이도 느낄 수 없었다. 부흥운동의 활동들을 위한 중요한 도구들로 영국에서 종교적인 협회들(Religious Societies)이 만들어졌는데, 즉 기독교지식증진협회(Society for Promoting Christian Knowledge, 1695)와 해외복음선교협회(Society for the Propagation of the Gospel in Foreign Parts, 1701)이다. 18세기말에는 런던선교협회(London Missionary Society), 종교소책자협회(Religious Tract Society)와 널리 퍼진 대영성서공회(British and Foreign Society, 1804) 그리고 유대인 선교를 위한 종말론적으로 중요한 협회와 같은 몇 개의 협회들이 설립되었다. 영국의 복음주의는 이 협회들을 통하여 국가들 사이에 번지는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반대로 다른 나라들에 있는 경건한 사람들은 기꺼이 영국의 요청에 협력하였다. 이 영역에서 확장되어 가고 있는 프로테스탄트 교회사의 한 단원과 같은 그렇게 간단히 따로따로 나눌 수 없는 그와 같은 것이 나오게 되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다림 그리고 이에 대한 협력은 강도와 형태에 차이는 있지만 경건한 사람들의 희망을 드러내었다. 이미 18세기에 경건주의와 영국의 복음주의 사이에 있었던 공동성, 본질적 신앙관에 있어서 공동의 존립 그리고 선교 활동의 동일지향 여기에 덧붙여서 영국에서 헤른후트 교인들과 감리교인들의 활동은 영국에서 경건주의로부터 부흥운동의 연속되는 역사 속으로 발전해감을 대변하고 있다. 그 밖에 일치한 것은 생략하기로 하겠다.
스위스에서는 독일어를 통용하는 지역에서 부흥운동이 독일과 많은 접촉을 가졌다. 이와는 달리 제네바에서는 단지 젊은 신학도들의 모임이 있었다. 이 모임은 그곳에 있는 헤른후트 공동체에서 성장하였고 제네바 교회의 지배적인 합리주의와 다름을 인식하였다. 1813년 발트지방 출신의 율리아네 폰 크뤼데너(Juliane von Kr dener, 1764-1824) 남작부인은 갈등을 빚었다. 이 남작부인은 1804년 회심 이후부터 황홀경에 빠지고 영향이 큰 제자도의 신앙, 정적주의, 헤른후트파 그리고 종말에 대한 기다림 등으로 혼합된 이념을 주장하였다. 1816년 특히 스코틀랜드의 복음주의로 분류되는 평신도인 로버트 할대인(Robert Haldane, 1764-1842)과 몇 명의 영국인들의 수개월 동안의 방문을 통해 그녀는 계속적이고 결정적인 자극들을 받았다. 그리하여 지지를 받은 젊은 신학도들은 원래 개혁교회적인 전통들을 증거로 대면서 제네바 목사들 사이에서 지배적인 합리주의를 직접 공격하였고 그리고 더 이상 위와 같은 것을 외면할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은 분열을 낳았고 각자의 특성을 지닌 교회를 형성하게 되었다. 각성한 사람들의 활동은 선교회와 성서공회를 설립하게 되었으며 특히 1831년에는 복음회(Soci t vang lique)를 설립하였다. 복음회는 나중에 베른과 파리에서 계승자들을 발견하였다. 이 협회는 기독교의 근본적인 가르침에 의무를 진 설교자학교를 세우고 운영하였다. 설교자학교의 졸업생들을 통하여 제너바의 각성(R veil)은 그 도시를 초월하여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제너바의 각성에 확실한 영향을 끼친 것은 헤른후트파가 아니라 영국의 복음주의로 여겨진다. 이것은 여러 가지의 협회들의 창설에서 분명해진다. 전통적인 권위, 특히 성경 그 다음에 개혁교회의 근본교리에 권위를 회복시킨 것이 이목을 끈다. 제네바의 각성은 스위스의 봐트(Waadt) 현(Kanton)에 있는 교회에 두드러지게 퍼졌다. 물론 그곳에서 각성은 기존의 국교회의 진로에 더욱 강력하게 남아 있다. 그리고 베른에서는 제네바 각성의 공동체와 활동 형태들이 특히 먼저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의 모임들로부터 받아들여졌다. 1831년에는 복음협회가 창설되었다. 이 협회의 보수적인 노선은 완전히 국가 관청 그리고 국가교회를 실현하는 것을 동의하지 않는다. 자유 교회의 경향을 제외하고 각성은 기존교회 내부에서는 자유주의와 병행하는 하나의 추세였다.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스위스 독일어권의 부흥운동과 함께 스위스의 각성은 어떤 공통성에도 불구하고 경건주의와 또한 영국의 복음주의에 대한 관계가 반영되어야만 하는 특별한 발전을 보여주고 있다.
스칸디나비아에서 부흥운동은 기독교공동체 와 협회 창립들과 더불어 다시 몇 가지 특별한 것들을 나타내고 있다. 덴마크에서는 국민교육이 부흥운동의 프로그램에 매우 강하게 편입되었다. 노르웨이에서는 평신도 설교가 한스 닐센 하우게(Hans Nielsen Hauge, 1771-1824) 가 각성을 불러 일으켰다. 이 각성은 독일 루터교회의 경건한 전통에서 흘러들었으며 확실하게 외적 문제를 지녔다. 하우게는 국가교회로부터 분리를 거절하였다. 19세기 중반부터 협회로 조직된 국내선교회(Innere Mission)가 등장하였고, 이 안에서 자기 인식에 이른 평신도들은 활동분야를 발견하였다. 이것으로부터 다양한 자유 교회들이 발전하였다. 남 스웨덴의 각성에서 헨리크 샤르타우(Herik Schartau, 1757-1825) 목사가 지도자였다. 이곳에서는 사람들이 벵엘(Bengel)과 마그누스 프리드리히 로스(Magnus Friedrich Roos)의 뷰르템베르크 경건주의와 관계를 맺었고, 한편 다른 곳에서는 독일 초기 경건주의 아버지들의 글을 읽었다. 일반적으로 경건 서적은 스웨덴 부흥운동의 한 부분의 특히 중요한 매개물이 되었다. 19세기 중반부터 스코트랜드 회중교회에는 물론 독일 국내선교회의 영향이 두드러졌다. 핀란드에서 부흥운동은 실제 여러 모양을 지녔다. 지도적인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은 경건주의의 기도 문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농부 파보 루오트살라이넨(Paavo Ruotsalainen, 1777-1852)이었다. 나중에는 어떤 부분에 의하여 튀빙엔대학교 교수 토비아스 베크(Tobias Beck, 1804-1878)의 성경주의가 수용되었다. 가브리엘 헤드베르크(Gabriel Hedberg, 1811-1893) 목사에 의하여 루터가 다시 새롭게 파악 되었다. 영향력 있는 회개와 금주 설교자로서 라스 레비 래스타디우스(Lars Levi Laestadius, 1800-1861)가 등장하였다. 그의 집회에서 여러 번 황홀경의 현상들이 일어났다. 전체적으로 스칸디나비아에서 부흥운동은 주로 보수적인 행동을 통해 국가의 규제에 대한 극복을 지향한 교회와 분열된 교회 안에서 널리 퍼지게 되었다.
하나의 과제는 북아메리카에서 일어난 부흥에 병행한 유럽에서 일어난 부흥과 비교 관찰을 하는 것이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에 의해 이미 1734년에 일어난 대각성(Great Awakening)은 시간적으로 유럽보다 먼저 일어났으며 엄격한 칼빈주의 경향을 지녔다. 내용적으로는 광범위하게 나중에 나온 개념들과도 일치하면서 죄에서 은혜로 회심과 선교적-종말론적으로 정해진 행동주의(Aktionismus)를 지니면서 동시에 이성 종교에 대해 거부하는 확실한 기독교가 의도되었다. 집회들과 활동들은 대부분 단순한 신학을 지닌 평신도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이 결과로서 민주화가 되었다. 이런 한에서는 복음주의는 예전처럼 교회와 신앙고백에 더 이상 견고한 관계를 갖지 않았다. 계속되는 부흥운동들의 사슬은 제2차 대각성으로 이어졌으며 그리고 나서 19세기에는 감리교인들, 침례교인들 그리고 장로교인들에 의해 그리고 지도계층을 얻을 수 있는 중요한 대학들에서 그리고 서부로 향하는 전방에 있는 주들에서 대천막집회와 같은 것으로 계속 이루어졌다. 19세기의 초기에 미국에서 훌륭한 지도력을 갖춘 모든 협회들이 설립되었다(해외와 국내 선교회, 성경, 종교적인 논문의 보급, 절제 운동 등). 위대한 부흥설교가 가운데 한 사람은 피니(Charles Grandison Finney, 1792-1875)였다. 피니에게 있어서는 의지의 결단을 토대로 그에 의하여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성결의 실현이 문제였다. 그러므로 그는 신학적으로 단순하게 원죄 교리를 삭제해버렸다. 여기에서 우리는 낙관주의를 지닌 계몽주의의 부흥운동에 대한 영향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성결의 가능성에 대한 관심이 이미 이전에 인간론을 변화시켰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그 당시 가장 확장 중에 있는 침례교회는 동일한 동기에서 행동을 억제하는 이중예정설을 점차 약화시켰다. 끝으로 미국을 초월하여 위대한 부흥설교가는 무디(Dwight Lyman Moody, 1837-1899)였다. 그도 역시 평신도였으며 YMCA 출신이었다. 그의 꼼꼼하게 조직된 대복음전도집회에서는 죄에서 상실된 것,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 그리고 거듭남을 주로 다루었다. 무디의 노력으로 성공을 거둔 것은 복음전도를 위한 대학생들을 얻은 것이다. 19세기에 북아메리카 복음주의의 폭은 이 두 대표적인 인물의 활동을 넘어서 미쳤으며 확실한 점에서는 전국에 걸쳐 영향을 주었다고 말할 수 있다. 지방, 지역 그리고 국가에 따른 상이한 종류의 조건 때문에 스펙트럼과 활동의 양상이 유럽에 있는 부흥운동과 상당히 구별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도 유럽의 부흥운동과 동일한 일이 일어났음은 아주 명백하다고 할 수 있다.
경건주의와 부흥운동의 상관성에 관하여
내가 이제까지 나의 배경으로부터 가정했었을 때에, 전체 내용에서 주제 문제에 대한 정밀검사는 다른 모습을 이루고 있었다고 요약된다. 현재에 이르기까지 시종일관한 경건주의적인 인식과 마찬가지로 아무튼 약하지만 특색 있는 각성 그렇지 않으면 각성의 지체 그리고 그 사이에 단계들의 넓은 다양성이 있다. 계몽주의와 합리주의에 대한 거부는 자주 부흥운동을 동반하고 나타난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만 한다. 드물지 않게 이것은 극단의 경우에 있어서 부흥운동에 대하여 양자택일이 될 수 있었던 루터교 또는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적인 유산을 재포착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그렇게 함으로써 근원적인 종교개혁의 유산에 대한 부흥운동의 흔들리지 않은 관계를 맺게 되었다. 우리는 부흥운동과 복음주의를 평행의 운동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의심 없이 기독교의 모임 또는 협회를 연결하는 고리쇠가 이것들의 활동 영역에 있다. 이것들을 따로따로 나눈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특히 여기에는 놀랍게도 성서적인 계시, 인간론 그리고 구원론 끝으로 종말론에 대한 신학적인 진술에 대한 공동의 존립이 지켜지고 있다. 이것은 공동의 기초가 전제될 것이며 또한 존속되어야 한다. 어떤 종류의 교회사의 공동 개념이 하나의 획득이라면 이와 함께 과거에 선교한 교회들이 널리 역사 안으로 들어오게 될 것이다. 부흥운동과 복음주의가 유럽 대륙의 프로테스탄티즘의 넓은 부분들 안에서 경건주의의 연속임을 나타내고자 한다면, 19세기 이후와 또한 이전에 부흥운동과 복음주의로서 경건주의라는 제목을 붙이고 공통분모에 합의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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