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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태국 카렌족 이야기

kaporet 2010. 4. 20. 17:36

태국 카렌족
우리나라 화전민처럼

태국 북부와 북서부 미얀마 국경의 산악지대에 고산족이라고 부르는 카렌족같은 소수부족들이 흩어져 살고 있다. 아열대 기후임에도 불구하고 일교차가 심한 산지에서 겨울에는 추위로 죽는 고산족이 많이 발생한다. 이들은 모두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살며, 태국 정부로부터 전혀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다. 이들 소수민족들이 태국 국적을 취득하기는 매우 어렵다. 1년에 2번 심사를 하지만 요건이 까다로워 대부분 아직 미취득 상태이다. 그래서 태국에 살면서도 태국 사람이 아닌 것이다.

태국 북부에 살고 있는 소수민족 중에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민족이 카렌족이다. 현재 카렌족은 이웃 미얀마에 훨씬 많은 5백만 명 이상이 살고 있으며, 태국에는 약 45만 명 정도가 살고 있다. 원래 미얀마에 살던 일부 카렌족들이 18세기 이후 험난한 살윈강을 넘어 타이로 와 정착한 것이다. 현재 미얀마 지역의 카렌족은 정부에 대항하여 반군을 형성하고 있은지 50년의 세월이 흘렀다.

카렌족 중에는 그들의 풍습에 따라 귀에 커다란 귀거리를 하고 있는 종족도 있고 무거운 링을 평생 목에 감아 목을 길게 늘인 기린족으로 유명한 빠다웅 종족과 귀를 크게 늘어뜨린 종족도 있다. 귀에서 동그리한 금속 귀거리를 빼면 귀에 거의 주먹이 들어갈 정도의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다. 처음에는 작은 구멍이었겠지만 계속해서 큰 귀걸이로 바꾸어 귀가 늘어난 때문이다.


잊혀진 민족 카렌

카렌족은 미얀마와 태국 국경지역에 흩어져 거주하는 고산족의 한 부족으로 인구는 600만 명으로 추정된다. 이 민족의 기원은 두 갈래가 있는데 하나는 티벳에서 유래하여 중국을 거쳐 미얀마로 남하했다는 설이고 다른 하나는 중동지역에서 시작되었다는 설이다. 그러나 대부분 전자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 즉 티벳에서 부터 2600년 전에 점차로 남하하여 중국을 거쳐 오늘날 미얀마와 태국 지역에 자리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동남아시아의 수많은 민족 중에 희귀하게 우리와 혈통이 유사한 몽골계라는 것이다. 이들은 주로 해발 약 500m 정도의 낮은 계곡과 강가에서 대나무로 집을 짓고 마을을 이루어 생활한다. 다른 고산족들과는 달리 정착 생활을 하며 카렌어로 불리는 고유의 말과 글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주 경제활동은 농업으로 쌀농사와 채소 재배를 하며 돼지, 닭, 물소 등의 가축과 코끼리도 기른다.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의해 빼앗긴 민족의 독립

이러한 사회 문화적인 배경과 더불어 정치적인 배경을 살펴보면, 2차 대전이 발발하자 이 지역을 통치하고 있던 영국은 카렌족과 함께 일본군과의 치열한 전투를 벌이게 되는데 영국은 승전의 대가로 카렌족의 독립을 약속한다. 하지만 일본군이 퇴각한 뒤에 국제 정치적인 상황 때문에 영국은 이 약속을 어기고 버마(현재 미얀마) 단일 정부의 독립만을 허용하게 되므로 카렌족은 강대국에 의해 버림받은 족속으로 남게 된다. 그 이후 카렌족은 수 천년간 거주해 오던 지역에서 독립국가를 열망하며 50년이 넘게 미얀마와의 기나긴 독립투쟁을 벌이고 있다.

나라 없는 민족이기에 이들의 삶은 비참하다. 미얀마 지역에 거주하는 대다수의 카렌족은 민족차별 정책과 각종 억압에 시달리고 있으며 최근 미얀마 해저에서 발견된 천연가스를 태국으로 수송하기 위한 가스관 매립과 도로공사에 투입되어 강제 노역을 하고 있는 실상이 여러 차례 영국 BBC와 TIME WATCH와 같은 국제 인권기관에 의해 보도된 바 있다. 생존권이 보장되지 않은 상태이므로 이들에게 우선 필요한 것은 정착하여 살 수 있는 거주지와 식량, 의약품, 의료시설과 학교 등이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통해 어린아이들에게 최소한의 교육은 시행되고 있으나 중학교를 졸업한 아이들이 진급할 고등학교, 전문학교, 대학교, 직업학교 등의 설립이 절실히 요청되고 있다. 또한 자주 내리는 비와 비위생적인 식수로 인한 감기 환자와 말라리아나 각종 풍토병 환자가 많으므로 이에 대한 의료시설도 요구된다.

1. 카렌 민족의 기원

카렌은 오래 전부터 미얀마에 살고 있었다.
전설에 의하면 그들은 2600년 전에 티벳과 고비사막에 살고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소수 부족들 가운데 최대의 인구인 약 450,803명 정도가 살고 있는데 이는 산족 전체의49.13%이다. 이들은 다시 Karen-skaw, Pwo, Pa-o, Bwe, Donsu 다섯 부족으로 구분되며 미얀마 내에는 480만명 정도가 거주하면서 독립전쟁을 계속하고 있다. 미얀마 내의 카렌은 상당수가 개화되어 약 25%가 기독교인인데 비해 북태에 거주하는 카렌은 오랫동안 분리된 관계로 미얀마 내에 거주하는 카렌과는 민족 의식에 있어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미얀마 에서 넘어온 난민은 방콕에서 서북부 지역을 중심 하여 북태지역으로 분산되어 난민촌을 형성하고 있으며 북부 태국의 카렌은 치앙마이 서부지역에서 집단 적으로 거주하고 있는데,
치앙마이에는 소수가 살고 있다.

북부태국에는 '챠오카오'로 불리우는 고산족 80만명(1996년통계)이 살고있다. 이들은 태국 전체 인구의 약 1.2%를 차지하며 모두 9부족으로 3,600여 부락을 형성하고 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부족은 6부족 (카렌, 몽, 라후, 아카, 리수, 미엔족)으로 이들은 서로 각기 다른 교유의 전통과 문화를 지니고 있고 카렌족은 고유한 언어와 문자 그리고 역사적인 배경을 지니고 있다

카렌은 2차 대전후 미얀마가 영국에서 독립하여 사회주의 노선을 걸으면서 미얀마내에 속해 있던 자신들의 영토를 잃고 사회의 불안정 속에서 조국을 떠나 가까운 국경을 넘어 주변국으로 이주해 오고 있다. 이들 중에는 더 많은 기독교신자들이 섞여 태국으로 들어 왔다.
그러나 태국정부의 이주민에 대한 통제와 제 3국간의 미묘한 외교정책으로 대부분 이들 난민들은 국경 지역 밀림이나 난민촌에 머물러 살고 있다.

2. 카렌의 신화

카렌족의 신화에 의하면 옛날 이와(Y'wa)께서 한 동산을 만드시고 다나이(Tha-nai)와 에유(Ee-u)를 만들어 그곳에 살게 두시며 "동산에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일곱 가지 열매를 맺는 일곱 가지 나무를 두었노라. 그 중에 한가지 열매는 먹어서는 안된다" 하셨다.
그후 무코리(Mu-kaw-lee)가 찾아와 두 사람을 속이자 둘은 나무의 실과를 먹었다. 그리고 죽음과 슬픔, 질병과 고통이 시작되었다. 이와는 그들의 자녀인 형제들에게 한 권의 책들을 나누어주었다.
카렌의 동생인 백인 형제들은 열심히 책을 읽고 비법을 터득하여 하얀 날개(배)를 타고 서쪽으로 건너가 신천 신지를 만들었다. 그러나 카렌은 그만 실수하여 그 책을 잃어 버렸다. 그들은 백인 형제를 생각하며 언젠가 그들이 책을 가져 와서 구원의 길을 가르쳐 주리라고 믿고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날 한 회교도가 와서 한 권의 책을 카렌의 현자에게 주고 떠났다.
그러나 현자는 그 책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다시금 그들의 아우인 백인 형제가 책을 가지고 와서그 책을 읽고 이와 에게 돌아가는 길을 가르쳐 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백인 선교사들이 성경책을 가지고 왔을 때 일부 카렌족들은 그들의 신화적인 예언이 이루어 졌다고 믿고, 서둘러 번역하여 많은 이들이 신자가 되었다.

3. 카렌족의 주거형태와 의복

카렌족은 주로 30가구에서 50가구가 한마을을 형성하여 살고 있다. 카렌족의 주택은 주로 나무나 대나무를 이용하여 기둥을 세우고 땅으로부터 1 m 이상의 높이에 대나무로 벽을 만들고 지붕은 우리 나라의 초가지붕처럼 들풀을 말린 것을 엮어서 덮는다. 창문은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없는 형태이고 대나무벽으로 되어있어서 통풍이나 환기가 매우 잘 된다. 종래의 부엌은 가로 1m. 세로 60㎝ 가량의 부엌을 만들어 그 안에 흙을 넣고 3개의 적당한 돌을 흙위에 배치한 후 그 위에 냄비를 올려놓고 나무로 불을 피운다. 요즈음은 가스곤로가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화로등을 사용한다. 대나무를 베어서 막힌 한쪽을 남겨두고 반대쪽을 벤 후에 찹쌀이나 콩을 넣고 약간의 물을 채운 후 나뭇잎으로 입구를 막고 불에 넣고 익히면 대나무 밥이 되는데 이것을 "카우람" 이라 부른다.
모든 남자들은 태어나서 죽기까지 붉은 색 바탕에 여러 가지 실을 군데군데 매달은 붉은 옷 과 붉은 가방을 멘다. 이 가방 속에서 그들의 일생이 이뤄진다. 이 붉은 옷은 주로 할머니, 어머니, 누나가 베틀에 앉아서 몇 개월에 걸쳐 손수 지어 만든 옷들이다.
전통적으로 여자들은 결혼전 까지는 하얀 옷을 입는다. 이 하얀 옷은 여자들이 손수 만들어 입거나 또는 자녀들에게 입혀준다.


4. Daniel. Ju와의 인터뷰를 통한 카렌난민촌 관찰

다니엘은 카렌족출신으로 현재 Refuge Camp의 보완요원으로 있다.
전직 Mission School 교사였고 현재는 난민camp 전체 협의회 V.P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난민촌에서 일어나고 있는 카렌민족의 힘겨운 상황과
카렌 독립에 대하여 들어본다.

Q: Refugee Camp에 언제 왔는가?
A: 1997년 에 왔다.
Q: 교육 지원 현황은?
A: 현재 고등학교 과정까지.
Q: 자기 소개 좀 부탁합니다.
A: Daniel Ju. 1997년부터 태국에 있었고, 미얀마를 떠나기 전에는 Mission School교사였 다. 국경을 넘고 난 후, Bui라는 캠프에 도착했다. 그 곳에서 두 달 동안 거주했고, 지금 Camp내 전체 협의회 V.P로서 대외적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그 곳의 문제점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첫째로, 공간 부족을 들 수 있다. 지금 캠프에는 1600가족이 수용되어 있고, 총인구는 8천여명에 달한다. 공간은 가로 600m, 세로 400m의 규격이고, 닭장에 갇힌 새처럼 좁은 공간이다. 두 번째로 들 수 있는 어려움은 사람들이 Camp밖 300m이상 나갈 수 없다는 것이다. 음식이나 돈을 위해 출입하는 사람들의 통제를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매우 힘든 일이다.
수용소안 사람들의 생활 보조를 위해 NGO들이 보조하고 있다. 그렇지만 공식적으로 인정받고 지원하는 기관은 별로 없다. 크게 네 가지 기관이 있는데, 첫째로 BBC(Burma Border Consortium)가 있다. 그들의 주 활동은 기본음식을 조달하는 일을 한다. 두 번째로 국경없는 의료봉사단이 있는데, 이들은 의료봉사와 water supply system을 맡고 있다. 그리고 세번째로는 COERR이라는 가톨릭계 비정부기관이 있다. 이들은 학교 교재나 기본적 학용품 제공, 그리고 교육과 관련된 활동을 하고 있다. 그리고 네 번째로는 ZOA라는 네덜란드 계 단체인데, 이들은 카렌 교과서 인쇄에 도움을 주고 있고, 교사들에게 지원금을 주는 활동을 하고 있다.
거주 생활 조건에 대해 설명을 하자면 각 가정이 집을 지을 수 있는 범위는 가로,세로 각 각5m에 해당된다. 지붕은 플라스틱 비닐로 되어 있기 때문에, 낮에는 너무 더워서 집안에 있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이다.
카렌의 고난, 역경은 정치적 문제와 관련된 것이다. 지금 태국과 미얀마 정부는 경제 부흥을 위해 협력작업 중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천연가스 송유관 건설이나, 터브와이고속도로와 항구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두 가지 문제가 카렌족과 관련된 지역에 걸리는 것이다. 경제적 이권 취득을 위해 그 지역 카렌인들이 남는 걸 원치 않기 때문에 강제추방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미얀마가 카렌 민족 말살 정책을 시작한 것이고, 본격적인 전쟁을 시작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국경을 넘게 되었고, 태국에서 난민으로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Q: 2차 대전 중 영국과 카렌이 협조해서 싸웠던 역사적 배경이 현재적 상황과 연계된다고 생각한다. 97년 2월에 문제가 발생되었고, 여론화시켜서 문제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나 미비해 보인다.
A: 동감한다. 세계는 우리에 대해 너무나 모른다. 우리 민족이 강한 대국이 아니라는 것에 기인할 수도 있다. 민족 자체가 평화를 사랑하고, 우리의 문제와 고난에 대해 대화하는 일에 처음부터 적극적이지 못했기 때문에 한계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정치적 압력, 대외협력을 통해 우리들 문제를 표면화 시키는 것에 주력하고 있다.
Q: 미얀마로의 추방시 어떤 일을 겪게 되나?
A: 우리는 지금 다른 매체를 통해 강제노역, 강제이주등 기본적 인권 침해에 대한 여러 만행에 대해 듣고 있다. 만약에 미얀마로 넘겨지게 된다면 고문을 당하고, 강제 노동 수용소 로 보내지고, 죽임을 당하게 된다. 미얀마로 가는일은 어렵고 힘든일을 겪게 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카렌에 대해 알기를 바란다. 진정한 이해와 협력이 필요하다. 진정한 공감대 가 형성되야 필요한 힘이 될 수 있다. 동조가 아닌 동감 말이다.
(여기에서 다니엘 수는 동감이라는 말에 강조를 하였다.)
Q: 영국, 방콕 등에 망명정부를 추진할 계획은 없는가?
A: 임시정부는 다양한 정부의 통일 후에 가능할 것이다.
Q: 임시정부를 통한 법령 제정 따위는 어떠한가?
A: Karen National Union이 독립운동의 대표격으로 활동하고 있다. 하지만, 너무 오래되고 다양한 노선이 출현했다. 합치려고 노력은 하지만 어려움을 겪고 있다. 다양한 노선을 하나로 묶어 대내외적으로 함께 할 수 있는 활동을 하고 있다.
Q: 수용소 외곽의 경비 시스템은? 어떻게 나오고, 알려졌을 때의 두려움은 없는가?
A: 보안 시스템은 10개의 군부대를 수용소 근처에 배치해 놓은 상태이고, 24시간 감시한다.
200m지역은 공수부대가 막을 치고 있다. 그리고 그 외곽에 계속 부대들이 있다. Camp내에서는 자체적으로 안전을 도모하는데, 3개의 Security Committee가 있고, 15개 구역으로 나누어 각 구역에 안전보안 요원을 둔다.
Q: KNU의 조직과 활동에 대해
A: 아는 것은 많지 않다. 아는 한도 내에서 말씀드리자면 영국 식민지 시대부터 활동했다는 것이다. 첫 번째 카렌 기구는 1881년, 영국치하에서 만들어진 KNA(Karen National Association)이다. 그 이후로도 여러 단체들이 액을 이어가려 하고 있다. 4개가 유명하고, 모두 영국 통치하에서 만들어 진 것들이다. 그러다가 2차 대전후에 다양한 단체의 통일성을 깨닫게 된다. 이 모든 단체들이 함께 할 수 있는 협의회 조성을 위해 노력하게 되고, 1947년에 KNU가 탄생하게 된다. 미얀마 독립 1년여전에 형성된 것이다. 1948년 미얀마 독립정부가 수립되게 되고, KNU는 미얀마로부터 독립을 요구한다. 하지만, 미얀마는 거부를 하고, 강압적 조치로 요구를 묵살한다. 1949년 1월 31일부터 무장 독립운동을 시작하게 되고, 1949년부터 1999년 까지 50년째 무장 투쟁을 계속 하고 있는 것이다. 그 투쟁의 결과는 지금 태국안에서 난민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다시 뭉쳐야 하고, 재조직 할 수 있는 역할이 필요하다. 2차 대전 전, 영국 통치 하 5개 단체 였으나, 지금은 약 50개의 단체가 다른 노선하에 활동하고 있다.
Q: 난민들의 생활은?
A: 너무 더워서 대나무 이용해서 2층건물을 짓고, 더울 때는 대나무 밑으로 피한다. 불법이지만 200m 넘어서 숲속, 냇가에서 야생과일, 풀, 장작등을 구하며 소일하고 있다.
Q: 20개 이상의 단체가 뭉치지 않는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A: 위치상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추구하는 노선이 다르다. 다양한 노선 중에서 공통점, 합의점을 얻어야 한다.


5.경제및 교육활동

카렌족은 원래 우리 나라의 화전민처럼 산에 불을 놓아 쌀농사를 짓고 또 다른 곳으로 이동을 하여 사는 방식으로 살아가던 민족이라고 하셨다. 하지만 지금은 태국 정부에서 환경보호 차원에서 그런 방식을 금지시키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삶의 방식은 한 곳에 정착하여 사는 방식으로 변화되었던 것이라고 한다. 그들은 동굴에 커다란 불상을 모셔 놓고 숭상하고 있었고 가부장적인 관습과 남존여비 사상이 이어지고 있었다. 여자들은 긴치마나 바지만을 입는게 전통이다. 카렌족 마을에 가면 80가구 이상이 사는 비교적 큰 마을에는 태국 정부가 세워준 학교도 있는데, 교사의 열의 부족이나 주3일 정도의 교과일정등 열악한 교육환경에다가 부모들의 교육열이나 아이들의 공부에 대한 관심이 지극히 얕은 편이다. 사실 카렌족들이 바깥 세상에서 나가 살기에는 태국 원주민의 무시등 너무나 장애가 많고 산속의 생활만이 그나마 목숨을 부지하며 안정되게 살 수 있기 때문에, 산속의 아이들은 공부를 해서 무엇이 되야겠다거나 무엇을 하고 싶다는 꿈이나 희망이 없어서 공부를 왜 해야되는지를 먼저 가르치고 깨닫게 해 주어야 할 상황이다. 우리가 만났던 도쁠라데 아이들의 꿈은 선생님, 간호사, 전도인, 하나님을 위한 사역자등이었다. 근데 남자아이들은 대부분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도심지에 나가 잔심부름을 하면서 가계를 돕고 있었다.

6. 난민촌의 카렌족

앞에서 다니엘 수와의 인터뷰에서도 언급했지만 태국 북부 국영연안과 미얀마국경근처에는 밀려오는 수많은 카렌족을 수용하기위한 난민 수용소가 있다. 태국정부는 미얀마에서 넘어오는 카렌족을 난민으로 치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국제조약이나 법적인 난민의 대우는 기대할 수 없다.
태국이 미얀마, 그리고 영국정부와 미묘한 국제관계에 놓이게 된 것은 바로 현재 태국 서북부지역에 대다수로 거주하고 있는 카렌족마을이 있는 위치 때문이다. 바로 이 카렌지역의 지하에서 천연 가스를 발견해내었기 때문인데 영국의 합작과 자본으로 가스송유관을 설치하여 지하에 묻힌 천연자원을 끌어내기에 이른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때 카렌은 영국의 편이었고 미얀마는 일본을 돕고 있었다. 당시 미얀마는 영국의 식민지였다. 그러던 와중에 종전이 되자 미얀마는 독립을 하였고 미얀마와 붙어있던 카렌은 자치권을 인정받지 못하였다. 나라와 땅이 없다는 것, 독립된 정부가 없다는 것. 그때부터 미얀마는 카렌을 탄압하기 시작하였고 민족말살 정책을 펴기 시작하였다. 소수민족인데다가 자신들의 영토를 주장하는 카렌이 좋게 보일리는 없다. 그러던중에 바로 천연가스가 발견된 것이다. 미얀마정부는 카렌족을 이용하여 대규모의 가스파이프공사를 시작하였다. 강제노역과 탄압에 시달리던 카렌족은 더 이상 살 수가 없어 몰래 국경을 넘어오기 시작하였다. 그사이 미얀마군인의 총에 죽은 카렌의 숫자가 3,000명이 넘는다고 한다. 태국정부는 이렇게 넘어온 카렌족을 난민으로 치부하였다. 그러나 국제난민의 대우는 너무나 비참하였다. 태국도 더 이상 난민을 수용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르렀고 미얀마의 압력을 계속 받고 있었으므로 카렌
족에게 호의를 베풀 수 없었다. 세계인권기구등지의 연구원들과 기자들은 카렌의 이러한 상황들을 알리기 위해 르포와 다큐등을 취재하고 제작하고 UN 등에 탄원을 제기하였으나 별 소득이 없었다.
커다란 Refuge Camp 는 군인들과 보완요원들이 24시간 삼엄한 감시를 하고 있어서 외부와 철저히 단절된 상태이다. 따라서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알 수 가 없다. 단지 구호물품과 생존에 필요한 식량만이 공급될뿐이다. 큰 Refuge Camp에는 초등학교는 물론 고등학교 교육까지 배울수 있도록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지만 다른 작은 규모의 캠프들은 상황이 좀 열악하다. 그리고 난민촌의 교육과정은 주로 기독교 마인드가 그 기반에 깔려있다. 예를 들면 초등학교 과정은 기도를 하고 수업을 시작하고 중고등학교 과정은 희망자에 한해서 수업시작 30분전에 난민촌 신학교 학생들과 성경공부를 매일 한다. 사람이 죽으면 카렌은 매장하는 풍습이 있는데 크리스챤은 더 엄하다. 그러나 난민촌 내에서는 그럴 수가 없다. 그래서 여기서는 화장을 한다고 한다. 그것이 이들에게 큰 어려움중 하나라고 한다.

7. 고산지대의 카렌족

고산지대의 타이 카렌족들은 난민촌에 비해 정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의식주나 교육문제에 있어서는 훨씬 열악한 환경속에 살아가고 있다. 타이카렌족의 70 % 정도는 태국시민권을 취득한 경우라서 외부로 일을 다니기도 하는데 그렇지못한 사람들은 마을을 벗어나는 것도 위험하다. 불신검문에서 신분증이 없으면 바로 체포되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대부분 가사일을 돕거나 집안일을 하기 때문에 밖에 나가지 않는다. 그러나 남성들은 집안팎을 보수하거나 닭이나 오리등을 기른다. 젊은이들은 딱히 생산적인 일들을 찾지 못하는 것같다. 그래서 도심지로 빠져나가는 것 같다.
학교교육은 1학년에서 12학년까지가 태국의 학제인데 거의 고등학교 수준이라고 보면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학교에 가지 못한다. 태국어도 서툴고 돈도 없다. 아주 어린아이들만 태국학교에 보내지고 태국어를 배운다. 하지만 정식학교는 아니다. 카렌족 크리스챤들은 신앙이 복음적이며 주일이면 거의 하루종일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보낸다. 특히 아이들에서 부터 노년에 이르기 까지 모두 성경암송을 즐긴다. 예배나 기도회로 모이면 성경암송은 필수다. 어린아이들은 말을 할 줄알면 카렌어 성경공부를 시작한다. 카렌신학교를 졸업했거나 난민촌 신학교를 나온 젊은 청년이 전도사처럼 아이들에게 성경과 찬송가를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태국어를 배우기도 한다. 왜냐하면 시민권을 습득하고 태국내에서 살기 위하여는 태국어가 필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린이들은 태국어를 어느정도 할 줄 안다.
카렌족의 성품은 남녀노소 모두가 매우 온화하고 평화를 사랑하며 밝다는 것이다. 그리고 수줍음이 많다. 아무도 큰소리로 이야기 하지 않고 크게 웃지도 않는다. 그러나 어둡지도 않다. 풍경화의 사람처럼 평화롭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아픔이 있을 것이다. 난민촌이나 고산지대에 사는 사람들중에는 미얀마에 가족이나 친지를 남겨두고 태국으로 넘어온 이들이 많다. 그중에 난민촌에 사는 카렌족들은 거의 90%이상이 현 버마정권이 바뀌고 자유(자치주)가 주어지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꿈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오랜동안 정착하며 살던 미얀마.
그들은 헤어진 가족과 자신들의 아이들을 만날 그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출처 : 주님을 더 알기 원하는 사람들
글쓴이 : kaporet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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