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생명이신 예수님
요한복음 1:1-5
2009.2.8(주일예배)
들어가는 말
현대의학이 발달하면서 인체의 생명에 대하여 관심이 높아가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우리의 수명을 하늘이 주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수명을 다하는 것을 복으로 알았습니다만, 최근에는 의약품의 발달로 수명을 연장시키는 생명공학이 발전되어 장수를 꿈꾸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건강할 수 있다면 비싼 돈을 들려서라도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 약을 구입하고 싶어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생명을 귀하게 여깁니다. 왜냐하면 생명은 하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육체의 생명은 언젠가 죽고 맙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는 육체의 생명만 있는게 아니라 영의 생명이 있음을 말합니다. 그 영의 생명을 다른 말로 영원한 생명이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언젠가는 죽게 될 우리의 육체의 생명도 귀하다면 영원한 생명은 얼마나 더 귀하겠습니까? 영원한 생명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단순한 인간인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런 사람들은 예수님의 존재를 잘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처럼 결혼도 하시고 아이도 낳으신 것처럼 생각합니다. 몇 년 전 세계적으로 문제를 일으켰던 ‘다빈치 코드’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원래 이 영화는 같은 제목의 소설책을 영화화한 것으로 그 내용은 대충 이렇습니다. 예수님의 생애중에서 만난 여제자중에 막달라 마리아라는 여인이 있는데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를 다른 어느 제자보다도 사랑하셨고 실제로 그 여인과 결혼을 하시고 아이를 낳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비밀을 맡은 단체는 1099년 설립된 ‘시온 수도회’이고 ‘시온 수도회’ 멤버중의 한 사람이 예수님과 12제자의 최후의 만찬을 그린 ‘레오나르드 다빈치’라는 것입니다. 다빈치는 예수님의 후손의 비밀을 전달하기 위하여 ‘최후의 만찬’을 그릴 때 그 내용을 암호로 그려 넣었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옆에 앉은 사도 요한의 자리에 실제는 막달라 마리아가 앉았고 그 자세를 브이(V)자 모양으로 된 것은 성배를 암시하는 것인데 성배는 아이를 낳는 자궁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것은 막달라 마리아와 예수님과의 사이에 태어나는 후손에 대한 비밀을 암시한다는 것입니다. 성배를 보호하기 위해서 ‘템플 기사단’이 조직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소설은 처음부터 실존하는 ‘시온 수도회’라는 단체의 이름을 사용하면서 소설의 내용이 사실인 것처럼 전개하고 있으나, 이 단체는 1956년도 설립된 자선과 구제를 위한 단체이며 예수님의 후손의 비밀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오른편에 앉은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라고 주장하는데 실제로 이 그림은 한번 복원된 그림으로서 복원될 때 원래의 사도 요한의 그림이 두 번째 그림에서 여성처럼 그려진 것뿐입니다. 소설에 등장하는 ‘템플 기사단’은 성배를 지키기 위한 단체가 아니라, 수도사의 맹세를 한 기사들로서 예루살렘 순례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1118년 만들어진 단체일 뿐입니다. 이 소설은 흥미진진한 소설이지만 처음부터 진실을 왜곡한 상상에 바탕을 둔 거짓된 소설입니다. 예수님은 결혼하신적도 없고 막달라 마리아는 단순한 여제자중 한사람일 뿐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배우기를 원합니다.
1. 하나님이신 예수님
말씀이시며 하나님이신 예수님
사도요한은 예수님의 12제자 중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고 베드로 야고보와 함께 언제나 예수님 곁에 있었고, 요한복음과 요한서신 그리고 요한계시록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잘 알고 있던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말씀’이시며 ‘하나님’이시라고 소개합니다. 말씀이신 예수님은 “태초에”부터 계셨습니다. “태초에”라는 말은 온 우주 창조의 시작을 선포하는 창세기 1:1을 연상시키는 말씀으로서, 요한은 계시의 시작인 천지 창조의 기사로부터 시작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러 계시가 완성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말씀(로고스)은 원래 철학적인 의미로서 어떤 법칙. 의미. 구조의 내용, 형이상학적 실재나 사물을 이해할 수 있는 법칙, 우주론적인 실재들을 표상하는 개념 등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와는 달리 성경 전반에 걸쳐서 '로고스'는 주로 하나님의 권능(시 147:15; 148:8; 히 4:12)과 계시(사 2:1; 렘 26:1; 딤전 5:17)를 의미합니다. 본절에서 '로고스'의 영원성, 인격성, 신성을 부각시킴으로써, '로고스'가 바로 계시의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임을 보여줍니다. ‘계시니라’는 말은, ‘로고스’가 태초의 어느 시점에서 창조된 것이 아니라 계속하여 존재해 왔다는 사실을 보여줌과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성(先在性)과 영원성을 드러냅니다. 즉 창조이전에 말씀이신 그리스도가 존재하였고 지금도 존재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선포한 것입니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말은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서로 친밀하고도 부단한 인격적 관계를 나타냅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 사이의 영화로우신 ‘친교’를 나타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삼위 일체 교리의 근간’이 되고 있습니다. ‘말씀’이 하나님과 동등한 분으로 표현된 것은 예수님이 성자 하나님이심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 20:28에서 예수님의 제자 도마는 부활하신 주님께 “나의 주 나의 하나님”라고 고백합니다.
만물을 창조하신 예수님
사도 요한은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선언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신 것만이 아니고 천지창조에 적극적인 참여하신 것입니다. ‘만물’이란 과거, 현재, 미래에 존재하는 전 우주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다는 표현은 ‘만물이 주로 말미암고’(롬11:36)라는 말씀과 일맥상통하며, 주로 ‘창조’(히2:10)와 ‘구원’(10:9;롬 5:1,21) 사역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자적 역할을 잘 드러냅니다.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창조시 사역은 성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수단으로서의 사역이 아니라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창 1:26)라는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대등한 인격적 친교를 바탕으로 한 사역이었던 것입니다. 또한 만물이 말씀(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는 말은 무(無)의 상태로부터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예수님이심을 말씀합니다.
2. 생명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음
만물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은바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생명'은 '영원한'이라는 형용사를 수반하여 '영생'이라는 용어로 자주 등장하며(3:15, 16; 요일5:12), 단지 ‘생명’이'라는 단어로써 영원한 생명을 묘사할 때도 많습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생명을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시36:9) 생명의 주인(시104:29, 30)으로 나타나는데, 이러한 구약성경의 생명관이 반영된 것이 본문의 ‘생명’입니다. 따라서 요한은 '생명'이 말씀이신 그리스도안에 존재하고 있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고 있는 생명이 영원한 생명(영생)임을 명시합니다(14:6; 17:3). 따라서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영접하는 성도들에게는 영생이 부여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바로 그리스도 안에 본원적(本源的)으로 존재하고 있는 영생을 매개로 하여 영원한 하늘나라의 시민이 되는 것입니다(엡 2:19).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은 “사람들의 빛”입니다. '빛'이라는 말은 단순히 자연 현상인 빛을 가리키거나 빛과 어두움을 절대적 차원에서 대치시키는 이원론적인 종교 사상을 반영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빛에 대한 개념은 구약성경의 맥락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은 빛을 발하는 구름(욥 37:15)이나 불기둥(시 78:14) 가운데 현현하시는 분, 감추인 것을 드러내시는(욥12:22) 빛나는 분(사42:16), 빛과 어두움의 주(암5:8), 이스라엘의 영원한 빛(사60:1, 2)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요한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참되고 영원한 생명이 곧 인류에게 임할 참 빛이라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습니다(1:9). 예수님이 이 땅에 빛으로 오신 것은 생명을 주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14절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고 설명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가운데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치되 깨닫지 못함
생명이 되신 그리스도께 사람들의 빛으로 나타나시어 어두움 가운데 있는 자들을 비추실 때 어두움이 깨닫지 못합니다. 빛과 대조되어 나타나는 ‘어두움’은 생명을 가로막는 죽음의 세력, 즉 사단의 세력과 그 세력하에서 부단히 죽어가는 이 죄악된 세상을 상징합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치되’라는 말은 이 죄악된 세상인 이세상 안으로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역사적인 성육신을 통하여 임하셨다는 뜻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과 승천 후에 생명의 빛은 소멸한 것이 아닙니다. 즉 요한은 '비추다'말을 사용함으로써 말씀의 빛이 쉼없이 비추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생명의 빛은 지금도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16:13) 성도들에게 비추이며 생명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빛의 군사로서 어둠의 세력과 끝까지 투쟁하는 능력을 공급하고 있습니다(딤전 1:18;6:12).
그러나 예수님이 생명으로 오셨어도 어두움이 ‘깨닫지’ 못합니다. 죄악된 세상 속으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십자가에 처형했다는 것이 바로 요한복음의 전반적인 맥락입니다. 따라서 저자 요한은 영적으로 무지하여 생명의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깨닫지 못한 이 세상의 정체(正體)를 준열하게 드러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단지 목수 요셉의 아들로만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실 때 그들은 자격이 없는 예수님이 감히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전한다고 생각하였기에 예수님을 반대하였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자 참람하다고 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어두움의 세력에 휘말린 세상이 이제 재림하실 그리스도에 의해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을 요한계시록에 기록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현실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복음을 '깨닫지 못하는' 죄악된 세력의 실상을 깨우쳐 주며, 이 죄악된 세력들이 그리스도에게 속한 빛의 세력을 궁극적으로는 '이길 수 없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3.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
자기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신 예수님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는데, 그것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 그러므로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셔야했습니다. 죄가 있으면 인간을 구원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처럼 아버지와 어머니사이에서 육체의 관계를 통하여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처녀 마리아의 몸을 통하여 잉태되어 태어나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아담과 그 후손인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죄가 없는 인간을 필요로 했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아담과 그 후손은 모두다 자신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거역하고 죄를 범한 인간을 그대로 보아 넘길 수가 없습니다. 범죄한 인류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형벌을 받아야합니다(히 9:27). 그러나 하나님은 인류를 사랑하십니다.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인간을 심판하시되 또한 인간을 구원하실 수 있는 방도를 강구하시었습니다. 그것은 범죄한 인간을 대신하여 또 다른 인간이 대신 죽는 것입니다. 그러면 원래 범죄한 인간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죄가 없는 인간이 한사람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담의 후손인 인류 모두는 아담의 범죄로 다 죄 가운데서 태어났기 때문에 죄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아담을 대신하여 또 다른 인간을 창조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게 창조된 사람은 아담을 대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는 아담의 후손으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되 죄없는 몸으로 와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후손으로 죄없으신 몸으로 이 땅에 오시기 위하여 처녀인 마리아의 몸을 통하여 태어나야만한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생명을 주신 예수님
예수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것은 십자가를 통해서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류를 심판하신 장소입니다. 아담의 범죄로 죄 가운데 태어나는 인류를 위해서 예수님이 대신 심판받으시고 죽으셔야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보시고 우리의 죄를 없다고 인정하시고 용서하십니다. 이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공의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하여 인간의 모든 죄를 심판하시고 인간의 죄를 없다고 인정해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사망에서 3일만에 부활시키심으로 예수님의 의로우심을 보이시고,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자신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하나, 예수님이 우리의 죄 때문에 대신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것을 믿기만 하면 죄 용서함을 받고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믿기만 하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영생을 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시고 그분을 믿기만 하면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요 3:16).
나가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생명의 빛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생명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과 함께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분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에게 참 생명을 주시는 빛으로 오신 분으로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자신의 구주로 자신의 마음에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그때 성령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우리 안에 생명을 주시고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십니다. 우리의 변화된 신분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빛되신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하실 것입니다.
둘째, 어두움을 버리고 빛 가운데로 나와야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의 방식이 바뀌어야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빛되신 그리스도와 살려고 한다고 하면서 어두움에 거한다면 결코 그리스도와 함께 살 수 없습니다. 어두움에 거하는 것은 이세상의 방식대로 살려는 것입니다. 빛에 거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방법대로 살려고 하면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고 한다면 넌센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두움을 버려야 빛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아직도 옛습관에 얶매어 있다면 결코 빛 되신 그리스도와 함께 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철저한 회개를 통하여 자신의 죄를 깨끗이 씻음 받아야하며 거룩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자신을 깨뜨리는 고통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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