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말씀 - 설교

[스크랩] 구원받은 성도의 자세

kaporet 2008. 10. 5. 16:17

구원받은 성도의 자세

로마서 5:1-8

2008.10.5(주일예배)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1-8)


들어가는 말


    사람들은 선물을 받기를 즐겨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새해가 되거나 년말이 되면 그동안 자신이 신세를 진 사람들이나 특별히 은혜를 받은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선물을 보냅니다. 이 선물의 의미는 물건의 값어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선물을 보내는 사람의 마음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물을 받은 사람은 자신에게 선물을 보낸 사람의 마음을 선물을 통하여 알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답례를 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사회생활을 하는 동안 최선의 예의를 나타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최근에는 이 선물이 잘못 오용되어서 뇌물로 변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감사의 마음을 담아서 즐거운 마음으로 선물을 하기도 하고 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선물을 받은 사람이 선물을 준 사람은 기억하지 못하고 단지 선물만을 즐거워한다면 그 선물은 이미 그 사람에게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을 전하는 도구로서 준 선물이 오히려 그 사람의 마음을 빼앗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아이가 아빠가 사다준 선물을 받고 아빠에 대한 고마움보다는 오히려 받은 선물만 기뻐한다면 선물을 준 아빠는 자신이 아이에게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아이가 정말 아빠를 좋아하는지 의심하게 될지도 모를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말씀 중에 하나님이 성도에게 주신 선물에 대해서 말씀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엡 2:8).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아름다운 선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치른 대가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그 대가는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자신이 받은 구원에 대하여 좀 더 깊이 묵상해야합니다. 자신이 받은 구원이 얼마나 귀중한지를 깨닫고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다시 한번 기억하면서 우리는 구원받은 성도로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에 대하여 좀 더 깊이 묵상해야할 것입니다.


1.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삶


    성도의 구원


    성도가 받은 구원은 무엇입니까? 성도가 구원받은 사건에 대하여 사도바울은 로마서 4장 25절에서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게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고 선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으시도록 내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부활케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을 믿는 성도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바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단절되어 생명을 잃어버리고 죽었던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하나님과 다시 한 번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5장에 들어오면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라고 말씀합니다. 성도가 구원받은 일을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설명합니다. 믿음은 순종과 동일시되는데 '믿음'이라는 심적(心的) 요소가 외부적으로 하나님 앞에 '순종'이라는 것으로 구체화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하나님의 은사(恩賜)가 아니고는 믿음을 지니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다시 말해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에 응답할 수 있게끔 인간의 마음으로 하여금 '믿음'을 향하도록 하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이 없이는 인간은 '믿음'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믿음'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며,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믿음은 구체적으로 '순종'으로서 나타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백성들이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은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은 모두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고 원수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며 살아야하는 신세였습니다. 언제 어느 때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까 두려워 떨며 살던 존재였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화평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인간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하나님과의 화평의 길이 열렸습니다. 두려워 떨며 감히 가까이 할 수 없었던 하나님을 이제는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된 인간과 의로우신 하나님 간에 평화의 관계를 맺게 해주는 주체이십니다. 여기서 '화평'(에이레네)이란 말은 죄인된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으나(1:18;2:5),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진노의 문제가 해결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화평' 앞에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가 ‘하나님과 더불어’라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 이것은 성도가 하나님과 원수된 관계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사랑하는 호의적 관계로 진전되어 화평이 이루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성도의 하나님과의 화평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피로 이루셨고’(골 1:20), ‘예수 그리스도는 믿는 자의 화평이 되십니다.’(엡 2:14) '화평'이란 말은 진노 아래 있던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평케 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화평'은 인간 내부의 인격적 변화를 말하기보다는 하나님과 원수된 인간이 회복의 관계로 진전된 점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은 성도는 하나님과의 우호적 관계라는 사실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샘물처럼 끊임없이 흐르는 하나님의 평화를 내적으로 누리게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공로가 아닙니다.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인하여 그 은혜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인하여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구해야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무슨 선을 행해서 갈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큰 오산입니다. 죄인들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가까이 하면 그것은 곧 죽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것은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화평은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입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된 성도들은 날마다 그분 앞에 나아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어느 날은 가까이 나아갔다가 어느 날은 좀 멀리 서 있다가 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더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서 애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예 여기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며 나아갈 수 있어야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듣는 훈련에 익숙해져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듣는 훈련은 매일의 성경읽기와 기도생활로서 가능합니다. 그러한 영적 훈련이 반복되어지면 우리는 보다 더 하나님의 말씀을 잘들을 수 있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화평이 이루어지면 우리에게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는 복을 주실 것입니다. 창세기 2장에 천지창조 사역을 마치신 하나님께서 제7일을 복주시고 안식하신 그 안식이 우리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진정한 평안과 기쁨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자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게 될 때에,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는 은혜를 얻은 것을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합니다. 성도가 ‘믿음으로 서 있게’ 되는 것은 오직 성령의 사역에 의한 것이며 '은혜에 들어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후사가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시고 약속하신 그 은혜 속으로 우리가 스스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들어감을 얻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를 구주로 믿고 그의 자녀가 되었으며 그분에 의해 존귀하심과 영광중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인도함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께서 온 우주의 통치자이심을 인정하고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사역과 섭리를 바라보며 그분의 모든 사역을 통하여 나타내시는 그분의 영광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분의 영광을 바라볼 때 그 영광을 인하여 즐거워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하나님께서 지으신 자연을 보고 감탄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아름다운 산과 강과, 하늘과 바다를 보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솜씨를 감탄하면서 그 영광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그 영광을 즐거워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것은 그러한 자연을 보면서도 가능하지만, 우리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와 같이 미천한 존재를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것을 느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합니다. 때로는 우리의 삶 속에 어려움이 있어도 하나님을 인하여 즐거워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혜를 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은혜를 얻었으니 우리의 환경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즐거워합니다. 여기서 '즐거워하다'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소망 가운데 있는 성도의 내적인 변화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하며 즐거워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은 곧 성도들의 영광이 된다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며(요 14:3; 17:24), 둘째로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며 성도들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구원 계획이 완성될 것이기 때문입니다(히 2:10;벧전 5:4).


2.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는 삶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자


    따라서 사도바울은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 들어간 것을 인하여, 비록 우리의 삶이 환난으로 인하여 어려움이 있어도 즐거워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환난'은 포도즙 틀에서 포도즙을 짜내듯이 피와 땀과 눈물과 고통을 '짜낸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즐거워하다'는 말은 '기뻐 날뛰다',  '자랑하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가게 된 즐거움이 복음으로 인해 받게 되는 핍박과 환난보다 훨씬 큼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괴로움과 슬픔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환난을 극복하며 오히려 즐거움 가운데 힘차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세상의 즐거움과 고통은 잠깐 피었다 사라지는 안개처럼 가변적이요 일시적인 반면,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는 즐거움과 기쁨은 불변하며 영원하기 때문입니다(고후 4:18). 더더욱 성도는 주님께서 약속하신 바, 영원한 세계에 대한 소망이 지대하고 극명하기 때문에(요 14:1-3) 현재의 모든 고난을 즐거움 가운데 상쇄시킬 수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고백한 것처럼 극심한 환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인하여 즐거워하며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 3:17-18) 성경에 나타나는 믿음의 사람들을 보면 그들은 자신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을 봅니다. 특별히 다윗은 많은 환난 속에서도 주를 찬양하며 하나님을 즐거워하였습니다. “나는 오직 주의 인자하심을 의뢰하였사오니 내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시 13:5); 내가 주를 찬양할 때에 내 입술이 기뻐 외치며 주께서 구속하신 내 영혼이 즐거워하리이다(시 71:23)”


    환난 중에도 즐거워해야할 이유


    1)환난은 인내를 이룸

    사도바울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해야할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라.” 사도는 환난을 통하여 인내를 배웠습니다. 사도바울처럼 환난을 당한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그는 수없는 환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기 위해 얼마나 인내해야하는지를 배웠습니다. 복음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필연적으로 환난이 닥쳐오며 인내가 요구됩니다(마 13:20-22). '인내'는 최후까지 남는다', '참는다', '기다린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성도들이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 때 극심한 핍박과 고난이 임하나 이 모든 환난에서 성령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참고 견디며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게 됩니다. 여기서 성도의 인내는 성령의 사역의 결과로 주어지는 수동적 의미뿐만 아니라 성도의 성품과 인격에서 우러나오는 자발적인 의미까지 함축합니다. 많은 크리스찬은 예수님을 믿으면 곧 행복한 삶, 편안한 삶이 기다리는 줄 아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그러한 말씀은 없습니다. 물론 영적으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었으므로 행복한 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아직 변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환난을 통하여 인내를 배우고 영적으로 성숙되어 갔을 때 비로소 자신의 삶이 행복하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2)인내는 연단을 이룸

    인내를 배우고 나면 그 인내를 통하여 연단을 이룹니다. 왠만한 환난은 별로 신경조차 쓰지 않고 견딥니다. '연단'은 일반적으로 '엄격한 시험 또는 혹독한 시련을 통과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치 용광로에서 금이 여러번 단련됨으로써 정금과 순금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성도는 여러 가지 시험과 환난을 참고 견딤으로써 그 자신이 정화됩니다. 여기에는 성령의 사역이 함께하며 이 믿음의 시련을 통과한 성도는 금보다 더 귀한 신앙인으로 증명됩니다(벧전 1:7).


    3)연단은 소망을 이룸

    성도는 이 땅에서 비록 환난을 당하여 힘들지만 주님이 계시는 그곳에서 주님과 함께 더불어 사는 그날이 기다려집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의 삶도 즐거워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날의 영광은 지금의 고난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기 때문입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그러면서 마음속에 소망이 생깁니다. 신약성경에서 성도의 소망은 일반적으로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을 의미하지만 보다 구체적으로는 '부활의 소망'을 의미합니다(행 28:20). 성도는 불 시험과 같은 연단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을 받으며 이러한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부활에 대한 소망이 구체화되고, 그 소망만을 붙잡게 됩니다. ‘앎이로다’는 영적 체험을 통해 얻어지는 지식을 의미하며, 체험을 통해 획득한 영적 지식이 부단히 계속됨을 의미합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는 소망이 물리적 지식이 아니라 부단한 영적 지식을 통해 성도의 삶 속에 확고하게 자리잡게 됨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3. 소망을 품는 삶


    소망의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


    우리가 이 땅에서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을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성령을 부어주시는데, 그때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 또한 부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성도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보증해 주시는 분이시기에 신앙의  모든 과정에 함께 계시고 보증하신 그 약속이 이루어지게 하십니다. 그런데 성령은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시지만,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가까이 할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하나님께로 갈 수 없는 것입니다(요 14:6).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확증되기 때문에 우리가 실망치 않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실 상을 기대하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환난가운데서도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반드시 우리에게 상 주신다는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성령께서 성도와 함께 계시는 결정적인 근거는 바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계심은 하나님의 사랑이 성도를 향해 물 붓듯이 부어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부은바 됨’은 ‘쏟아 부은바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이 액체처럼 쏟아 부어졌다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충분히 넘치게 부어졌을 뿐만 아니라 모이는 물처럼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성도들에게 베풀어졌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언급하면서 그 사랑의 표현이 가장 절정에 이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


    1)기약대로 오신 예수님

    그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로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은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입니다. ‘연약할 때에’는 믿음이 약한 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시점을 가리킵니다(엡2:3). ‘연약할 때에’는 '도움을 받을 수 없다', '소망이 없다'는 의미로서, 이것은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의 자연인은 그 자신이 스스로 구원의 길을 찾을 수 있는 힘이나 소망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특히 바울이 ‘우리가 아직 연약하다’는 사실을 말한 것은 우리가 전혀 구원의 소망이나 그 길을 찾을 하등의 힘이 없었음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구체화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代贖)의 은혜를 받을만한 자격과 가치가 전혀 없었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연약한 때에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기약대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일찍이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언된 바이거니와(사 7:14; 53:2), 하나님께서 일을 행하실 때에는 막연한 시기에 하는 것이 아니라 만세전에 예정하신 계획에 따라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약대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때가 가장 ‘적절한 시기’ 즉 ‘인류에게 가장 소망이 없던 때’였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예언된 그리스도께서 기약대로 이 땅에 오셨듯이, 재림도 기약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마 24:42-44). 실로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로서 당신의 영원하신 계획대로 인류와 유주의 역사를 다스리시며 성도들에게 약속하신 바를 반드시 성취하시는 분이십니다(민 23:19). 예수님이 오신 것은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경건치 않은 자는 8절의 죄인과 같은 의미로서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불경건한 자들의 입장에서 이루어진 대속적인 사건이었음을 나타냅니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죽는 자는 혹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의롭고 선한 사람을 위해 극히 드물기는 하지만 가끔 죽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 세상에서 위대한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사람이 가끔 출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롭거나 선한 사람을 위해 죽는 희생적 행위자체도 죄인을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에는 결코 견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절대적이며,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에는 너무나도 무가치하고 자격이 없는 인간의 본질적 모습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2)예수님의 죽으심은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

    사도바울은 그 사랑을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죄인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죄인'은 도덕적으로 의롭거나 선하지 않은 사람일 뿐만 아니라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시작된 인간의 전적 타락성과 부패성으로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든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시고'(갈 1:4),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시고'(엡 5:2),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셨습니다.'(딛 2:14)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그리스도의 희생이 주는 대속의 의미와 그리스도 안에 내재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따라 우리를 위하여 행하심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 죄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의 확증인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것만큼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낼 수 있는 방법이 있겠습니까? 그 누가 죄인을 위해서 자신의 아들을 대신 죽게 하는 자리에 내어 놓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 그 사랑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사랑의 크기는 독생자를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게 할 정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하나님 자신의 사랑’이라고 지적합니다. 여기서 '자기 자신의 사랑'이라고 말함은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적이고 영원하며 참됨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사랑은 자기 자신의 사랑이 아니라 모범을 따르는 사랑이요 배운 사랑입니다. 궁극적으로 인간의 사랑은 그 근원이 인간에게 있지 않고 그 사랑을 주신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요일 4:10, 19).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랑을 확고하고 구체적으로 인간에게 드러내셨으니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확증하셨다'는 말은 '나타내 보여주고 계시다'는 의미로, 이 말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은 과거의 단 일회적 사건으로 끝이 났으나 하나님의 사랑은 바울이 본 서신을 쓰는 당시뿐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에도 끊임없이 부어지고 있음을 나타내 줍니다. 따라서 이 사랑을 체험한 사람들은 사도들을 비롯하여 믿음의 선진들이 모두다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고 주님을 따른 것을 우리는 기독교 역사에서 보게 됩니다.


나가는 말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우리는 우리가 받은 구원이 얼마나 큰지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서도 그 사랑이 얼마나 큰지 잘 모르는 때가 많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신 것을 당연시하는 사람조차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분명히 깨달아야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과 화평케 하시려고 그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지 다시 한 번 깨닫고 구원의 즐거움을 기뻐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와 하나님께 찬양을 돌려야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과 시간을 감사하며 주님을 위하여 살아야할 것입니다.

출처 : 센다바중앙교회
글쓴이 : kaporet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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