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사랑안에 세워지는 교회 에베소서 4:7-16 2008.4.13(주일예배) 들어가는 말 우리는 어릴 적에 바닷가에서 모래성을 쌓은 경험이 있습니다. 모래에 적당한 물을 섞어 쌓는 성은 금방 완성됩니다. 자기의 마음먹은 대로 그 성을 쌓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망가지는 것도 한순간이라는 것입니다. 파도가 한번 치면 모래성은 힘없이 무너져서 흔적도 보이지 않습니다. 왜 그렇게 무너집니까? 결집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높은 벼랑 위에 세운 별장은 좀처럼 무너지지 않습니다. 바위위에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세웠기 때문입니다. 즉 콘크리트의 시멘트의 결집력으로 세워졌기 때문이고 단단한 암반을 기초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이 세상의 모든 조직들은 모두 모래성과 같습니다. 겉보기에는 멋있어 보여도 그것이 언제 무너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정치도 경제도 사회도 국가도 언제든지 무너지기 쉬운 모래성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은 무너지지 않는 견고한 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시편에서 다윗은 그 견고한 성을 우리 주님께 비유하였습니다(시 18:2, 31:21, 60:9, 91:12, 108:10, 144:2). 신약성경에서는 그 견고한 성을 그리스도 안에 지어지는 교회로 비유합니다. 즉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지어지는 교회를 말씀합니다. 1. 그리스도의 이 땅에 오신 목적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엡 4:7-10) 각 사람에게 은혜를 주심 사도바울은 지금까지 에베소교회에게 복음을 전하였고 에베소교회가 복음의 진리 안에, 즉 그리스도 안에 굳건히 서 있을 것을 권면해 왔습니다. 이제 사도바울은 에베소교회가 실천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가르칩니다. 바울은 지금까지의 교회 전체의 하나됨이라는 주제에서 방향을 바꿔 이제는 교회 전체를 이루고 있는 각 지체 곧 개인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본절의 '은혜'는 '은사'와 동일시할 수 있습니다(롬 12:1; 고전 12:4). 이런 은사의 다양성은 하나된 몸을 이루는 각 지체인 성도들의 조화를 강화시키며 촉진시켜 줄 뿐만 아니라 교회의 하나됨을 충만한 상태로 계속 유지하게 합니다. 한편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는 '은사'와 동일시되는 '은혜'가 그리스도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시사합니다. 반면에 다른 신약성서에서 '선물'이나 '은사'는 성령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나타납니다(고전 12장). 그러나 이 두 가지는 모순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은혜의 수여자이며 성령을 통해서 은사를 수여하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앞에서 논의한 것을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확증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논증을 확신시켜주기 위해서 구약성경의 내용을 인용하는 것입니다.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8절)는 말씀은 승리의 찬송인 시편 68:18의 인용입니다. 본절은 시편을 그리스도에게 적용한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자신에게 대적한 자를 정복하신 후 하나님 보좌에 오르셔서 자기 백성에게 은사를 주심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고 질문하며 예수님의 성육신을 말씀합니다. ‘땅 아랫 곳’은 문자적으로 ‘땅의 낮은 곳’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땅 아랫곳으로 내리셨던 것’은 ‘성육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당신의 택한 백성들에게 은혜를 주시려고 오셨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만물을 충만케 하려하심
예수님은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이십니다. '모든 하늘'이라는 것은 유대인들 이 하늘을 일곱층으로 생각했던 것을 암시하는데 그리스도는 그 모든 하늘보다 더 높은 곳에 계십니다. 예수님이 모든 하늘에 오르신 것은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입니다. '만물을 충만케'하는 것은 온 우주에 임재해 있을 뿐만 아니라 만물을 그의 주권 아래 두심을 뜻합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온 우주를 통치하는 통치자가 되셔서 모든 존재들의 생명을 주관하시며 영향력을 행사하심을 의미합니다. 2.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 주신 직분자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 4:11-12) 교회에 직분자를 주신 그리스도 모든 하늘 위에서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서 직분자를 두셨습니다. 여기에 언급된 직분중 세 직분 즉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는 전체 교회를 대상으로 사역했던 것인 반면 나머지 두 직분 곧 ‘목사’와 ‘교사’는 지역 교회에 국한된 직분들입니다. 이러한 직분들에서 다음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직분의 다양성입니다(고전 12:5). 교회는 한가지 직무나 은사만으로 운영될 수 없으며 각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개성이나 은사로 서로 협력하는 가운데 진정한 하나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둘째, 직분의 통일성입니다. 이러한 다양한 직분들은 서로 협력하여 한 몸을 이루게 하는 영적인 유기체입니다. “사도”는 하나님에 의해서 보냄을 받은 자로 교회를 설립하고 교회를 섬긴 자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 외에 바울 자신과 바나바(행 14:14), 실라(살전 2:6) 등을 의미하는데 이들은 예수님을 목격하고 부활하신 주를 증거하였습니다(행 14:4, 14; 고전 15:5; 갈 1:19). “선지자”는 하나님의 계시를 중재하며, 죄를 깨닫게 하고(고전 14:24) 교회를 훈계하기도 하였습니다(행 15:32). 이들은 극심한 박해(迫害)와 직권 오용 그리고 정경의 등장으로 인해 후에 교회에서 사라졌습니다(행 13:1; 고전 12:28). “복음 전하는 자”는 선교의 차원에서 복음을 선포하는 자로 빌립(행 8:4-7), 디모데 (딤후 4:5), 에바브라 등이 이에 해당됩니다. “목사와 교사”에 대하여 혹자는 두 직분 사이에 관사가 하나밖에 없다는 이유로 같은 직분이 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직분상 그 기능이 어느 정도는 중복된다 할지라도 동일한 사람으로 볼 수 없으며, 관사가 하나밖에 없는 것은 두 직분이 지역 교회에서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따라서 '목사'는 교회를 양육하고 돌보며 인도하는 자이며 '교사'는 사도적 교훈을 보존하고 전달하는 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현대의 목사에게는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전도자의 기능이 조금씩 남아 있습니다. 즉 교회를 개척하는 것과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것과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직분자를 주신 이유 바울은 교회 안에 다양한 직분을 세우신 목적에 대해서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 “성도를 온전케 하는” 것입니다. ‘온전케 하다’라는 말은 외과 의학에서 부러진 뼈를 맞추거나 찢어진 그 물을 수리할 때(마 4:21), 또는 범죄한 자를 바로잡는다고 할 때(갈 6:1) 사용되었습니다. 즉 복음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목적을 실현하며 성도들이 온전케 되도록 회복시키고 훈련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고전 1:10; 살전 3:10). 둘째, “봉사의 일을 하게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구성원들이 각자의 직분이나 기능을 감당 할 수 있도록 '틀'을 제공하는 것으로 회복(回復)과 훈련을 통해 온전케 된 성도들이 하나됨의 사역을 감당하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벧전 2:4, 5). 셋째,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입니다. 본절은 그리스도께서 은사를 주신 궁극적인 목적으로서 성도 각자의 특별한 직분을 사용하여 교회를 성장시키고 온 성도들을 영적으로 성장시킴을 말씀합니다. 비록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워 가는 것이 모든 지체의 과제이지만(16절) 특히 사역자들은 사도적 복음과 전승을 전달하고 해석하는 독특하고 중요한 과제로 나머지 지체들을 세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3.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교회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엡 4:13 -14)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름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직분자를 세우시고 교회를 세우시는 것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까지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아는 것에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더할 나위 없이 완전히 성장한 인간이 되다'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전체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한 새사람'을 이루어 '성숙'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고전 2:6;14:20; 히 5:14). 이것은 다음 절에서 언급되는 어린 아이와 대조적인 것으로 '성숙한 성인'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본문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사람이 된 교회가 원리상 교회 내에 이미 성숙함과 온전함을 획득하였음을 암시합니다(2:15). 여기서 '믿는 것'은 믿음의 행위라기보다 믿음의 내용을 의미하는 것이며 '믿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는 일은 그리스도가 중심이 된 구원에 포함된 모든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과 '지식'의 대상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바울의 전통적인 기독론적 칭호입니다(롬 1:3, 4, 9;5:10;8:3; 고전 1:9; 고후 1:19; 갈 1:16;2:20;4:4; 골 1:13; 살전 1:10). 성도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되게 하는 것은 목사와 교사들에게 부여된 과제로서, 목사와 교사는 그리스도에 대한 한 믿음과 한 지식을 향한 점진적 진보가 있어야 함을 인식해야 합니다. 둘째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교회가 지향해야 할 완전한 영적 성숙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장성한'이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됩니다. 첫째, '나이'를 의미합니다(요 9:21). 이것은 성인이 된다는 것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유년기를 벗어나 '영적으로 성숙한 분량의 연령에 이름'을 시사합니다. 둘째, '키'를 의미합니다(눅 19:3). 이는 '영적으로 자라난다'라는 뜻입니다(눅 2:52). 이것은 전체 교회가 추구해야 할 목표(1:23)를 위하여 더욱더 그리스도의 속성과 능력을 채워가야 함을 시사합니다. 교회가 장성해야할 이유 교회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성장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기”위함입니다. 교회안에 육체적으로는 성인이면서도 영적인 면에서는 아직 어린아이에 머물러 있는 자가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어린아이'는 영적 미숙을 시사합니다(고전 3:1, 2;13:11; 히 5:13). 첫째는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있는 자들입니다. '궤술'은 문자적으로 '주사위를 던지다'는 의미로 당시의 속임수나 사기를 가리킵니다. 또한 '유혹'은 거짓 교사들이 미성숙의 길로 들어서도록 교활하게 유도함을 의미합니다. 둘째는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는” 자들입니다. 영적 미숙아의 특징은 '요동하는 것'입니다. '요동치다'라는 말은 조타 장치가 없는 배처럼 바람 부는 대로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들은 조그만 어려움이나 거짓 교리에 대해 쉽게 넘어갑니다. 그러나 성숙한 자는 진리를 분별(分別)하는 능력을 가지며(히 5:14) 어떤 거짓된 풍조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여기서 '모든 교훈의 풍조'는 바울이 앞절에서 말한 '믿는 것과 아는 일이 하나가 되는 것'에 반대되는 모든 교훈을 의미합니다. 즉 바울은 영적 미숙아가 앞서 말한 거짓교사들의 사기와 교활함에 쉽게 빠지지 않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성숙해가야 함을 권면합니다. 4. 사랑 안에서 세워지는 교회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찌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 4:15 -16) 첫째, 교회는 그리스도에까지 자라가야 합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에까지 자라는 비결은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는” 것입니다. ‘참된 것을 하다’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진리를 말하다’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교회가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을 말씀합니다(2:5). 교회의 복음 선포는 ‘사랑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랑'은 진리에 대해 충성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에까지 자라갈 때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라야”합니다. '범사에' 가란다는 것은 ‘모든 방법으로’ 자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성장의 목표와 척도(尺度)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전 생애 과정 속에서 일관된 목표는 그리스도를 닮는 것으로, 질적인면에서 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에까지 자라야합니다. 둘째, 교회는 사랑 안에서 세워져가야 합니다. 교회가 성장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중심하여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는” 것입니다. ‘연락하고’는 ‘함께 연결하고’를 의미하며, '상합하여'는 '함께 연합하여'라는 의미로 동의어로 사용됩니다. 이것은 지체들간의 긴밀한 관계를 강조한 표현입니다. '마디'는 결속을 의미하는 것으로 각 지체와 머리 사이의 연결을 제공하는 결속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성장을 위해서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는 것”입니다. ‘각 지체’는 교회의 다양성을 지시하는 것으로, ‘각 지체’가 몸 전체를 위해서 자신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역할을 수행해야 할 때 교회는 성장하는 것입니다. 특히 '스스로'는 비록 머리이신 그리스도가 성장의 근원이 된다 할지라도 교회의 성장을 위해서 교회의 지체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필요로 함을 말합니다. 각 지체가 유기적으로 잘 연합함으로 몸은 성장할 수 있습니다. 각 지체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비밀의 열쇠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고후 5:14)입니다. 사랑은 교회성장의 척도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강권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분량에까지 자랄 수 있는 것입니다. 나가는 말 우리교회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세워져가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나타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내게 베푸신 십자가 구속의 은혜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할 때 우리는 서로 용납하게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용납하게 될 때 우리는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을 힘서 지키게 됩니다. 우리 각자 안에 계신 성령의 역사로 하나가 될 것입니다.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을 통하여 각자에게 주어진 분령의 은혜대로 주신 봉사의 직분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 때 우리가 주의해야할 것은 각자에게 은사를 주신 분은 성령이심으로 각자의 은사를 귀하게 여겨야합니다. 자신의 은사는 귀하고 다른 사람의 은사는 하찮다는 식의 태도를 버려야합니다. 그것은 성령을 무시하는 태도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은사는 성도를 온전히 세우기 위함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은사는 없습니다. 봉사이면 봉사로 가르치는 일이면 가르친 일로 구제하는 일이면 구제하는 일로 서로를 섬기고 온전하게 세우기에 힘써야할 것입니다. 그 때 가장 귀중한 것은 그 모든 중심에 그리스도기 계셔야 하고 우리의 목표가 그리스도여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조금 낫다고 교만할 것도 없고 다른 사람보다 조금 떨어진다고 낙심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가장 연역한 자를 더욱 도와서 세워 나가야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교회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공동체로서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기 위하여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사랑하며 서로를 세우기에 힘써나가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사랑할 때 우리교회는 사랑 안에서 굳건하게 세워질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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