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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kaporet 2006. 9. 17. 19:50
 

2006.9.3(주일예배)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마태복음 6:9-15


I. 들어가는 말


    성도들의 신앙생활 중에 가장 많이 하는 것은 성경말씀을 읽는 일과 기도하는 일입니다. 성경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우리의 소원을 아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처럼 기도하는 일에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좀 더 알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온전히 살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때때로 어떻게 기도해야하는지 몰라서 우리 나름대로 기도를 하지만 그 기도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도인지 잘 모른채 기도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기도를 잘한다고 하는 바리새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매일 세 번 기도하고 매주일 2번 금식기도를 하면서 기도에 자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기도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자신이 있었지만, 그들의 기도에 대해서 예수님의 평가는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잘못된 기도를 하고 있다고 보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의 눈에 잘 보이는 곳에서 기도하고 유창한 기도를 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하여 많은 말을 하여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외식하는 기도라고 예수님이 평가했습니다. 하나님은 은밀한 중에 계시므로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하고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 마음을 쏟아서 기도할 것을 말씀하시면서 기도의 모범으로 본문의 기도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주기도라고 부르면서 기도회나 수요예배 등의 모든 순서를 마칠 때 함께 기도합니다. 그러나 주기도는 단순히 외우는 기도문이 아니고 우리가 따라야할 기도의 모범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우리가 날마다 기도할 때 모범으로 삼고 이 기도의 형식과 내용을 좇아서 기도해야할 것을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II.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여기서부터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우리 기도의 영원한 모범이 된 주기도문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누가도 주기도문을 기록하고 있는데(눅 11:2-4), 양식(form)적인 면에서 몇가지 상이(difference)점들이 있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를 두고 복잡한 견해들을 내놓고 있으나 우리는 예수께서 이 기도문을 수차례 반복해서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과정에서 마태는 그 중의 한 경우를 기록했고, 누가는 또 다른 경우를 기록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무난합니다. 본문의 '너희'는 이방인들과 대조된 주의 제자를 가리킵니다.

    “이렇게 기도하라”의 '이렇게'('후토스')는 단지 자구적(字句的)인 답습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정신과 내용 및 그 순서상의 방법에 대한 모범적 제안을 의미합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이미 앞에서 경고하신 바, 그릇되고 아무 효과도 기대할 수 없는 이방인들의 기도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올바른 기도의 모범을 제시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한편 여기서 '기도하라'(프로슈케스데)는 2인칭 복수 현재 명령형으로서 단회적인 행동이 아닌 지속적(continual) 행동을 염두에 둔 명령입니다. 즉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기도할 때마다’ 이러한 모범을 따를 것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1.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9절)


    먼저 기도를 할 때 “하늘의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부릅니다. ‘하늘에 계신’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하늘이라는 제한된 공간에 계시는 분임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들을 당신의 권능과 지혜로 친히 통치하시며 심판하시는 초월적인 분이심을 강조한 표현입니다. 특히 원문서는 복수로 표기된 ‘하늘들’이라는 말은 하늘이 3충천(天)으로 조성되어 있다고 믿었던 히브리인들의 사상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즉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의 무한성(왕상 8:27)과 편재성(시 139:8; 사 66:1)을 언급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지극히 높은 3충천의 하늘이 분명 하나님의 거처일 것으로 소박하게 믿고 있었습니다(시 33:14; 사 57:15; 63:15). 따라서 ‘하늘에 계신’이란 기도의 문두(文頭)는 당신의 사람들로 하여금 전지전능하시며 초연하여 계신 하나님께 대한 무한한 소망과 깊은 신뢰를 안고, 또한 하늘나라가 진정 자신들의 본향(本鄕)임을 인식하고 기도할 것을 바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의 신분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믿음안에서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즉 기도는 자녀가 아버지에게 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구약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을 이렇게 호칭한 적이 별로 없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같은 경우 이스라엘의 반역은 '자녀들'의 반역으로(사 1:2). 하나님을 버림받은 '고아'와 같은 피조물들이 궁극적으로 의지할 분으로 묘사하여(사 63:16) 간접적이나마 하나님의 '부성'(父性)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되심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은 예수님에게서였습니다. 따라서 '우리 아버지'란 호칭은 그리스도로 인한 새 언약의 표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하튼 기도의 서두에 '우리 아버지'로 묘사된 것은 기도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이 과연 어떤 분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그는 단순히 '존재의 근거'(grounds of being)가 아니라 인격적인 분이시며, 폭군이나 압제자가 아니라 친밀히 자녀를 돌보는 참된 부성을 지닌 유일한 아버지이십니다(엡 3:14, 15).

    한편 '우리 아버지'(Our father)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우리'라는 복수형태가 주기도문 전체에 걸쳐서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1)예수의 제자와 하나님 사이의 독특한 관계성을 정립(定立)시켜 주는 말로서,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무분별하게 모든 사람의 아버지는 아니십니다(5:45). (2)주기도문이 혼자서 드리는 기도의 모범이 아니라, 제자들끼리 서로 교제를 나누며 드리는 기도의 모범(18:19)이 됨을 시사해 줍니다. 


2. 하나님께 향하는 기도(9-10절)


    (1)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9절)


    주기도문의 본론에 해당하는 7개항의 기도 내용 중(앞선 3개항-찬양과 천국 도래 및 하나님의 주권 ; 뒤이은 4개항-개인의 현실문제) 첫 번째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십계명의 제1, 3계명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출 20:3, 7). 여기서 먼저 하나님의 이름은 그가 누구인지를 보여줍니다. 즉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대로 스스로 존재하는 자이시며 그가 자신을 계시하시는 대로의 그 자신이십니다(출 3:14). 따라서 그의 이름에는 거룩하신 인격과 능력과 권위도 함께 합니다. 그리고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하는 것은 그분의 이름이 거룩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의 거룩한 이름의 가치만큼 거룩하게 대접받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레 19:2; 겔 36:23; 벧전 1:15). 즉 이 세상에는 그분의 이름만큼이나 거룩한 것은 없으므로 그 거룩한 이름이 주의 형상대로 창조함 받았으나 순수성을 상실해 버린 인간들의 천한 생각과 행동에 의해 경멸받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말 1:6). 실로 간혹 '분리', '성별'이라는 의미로 생각되는 '거룩'은 하나의 속성이기보다 '하나님 자신'(What he is)이다. 즉 '거룩'은 하나님의 신성 자체와 관계가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모든 세속과 사악에서 구별되며, 절대 무흠하신 지존자(至尊者)요, 유일한 예배와 경외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사 29:23).


    (2)나라이 임하옵시며(10절)


    ‘나라’는 하나님께서 영원히 거룩하시듯이 또한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시고 영원히 통치하심을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란 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reign)가 미치는 영역을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사역과 더불어 나타났지만 세상 끝날에 비로소 완성되는 이중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막 1:15, 마28:10; 눅 21:27, 28; 계 21:1-8).

    나라이 ‘임하옵시며’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머리 숙여 복종하고 또 구원의 종말론적 축복을 미리 누림에 따라 하나님의 구속적 통치가 계속 확장되게 해달라는 기도이며, 그 나라가 완성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고전 16:22; 계 11:17; 22:20). 한편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위로'(눅 2:25)를 기다렸으며, 메시야가 통치할 다윗 왕국을 대망하였습니다.  특히 그들은 회당 예배가 끝날 때마다 고대 아람어 기도인 '콰디쉬'(Qaddish, 성화를 뜻함. 여기에는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소망이 간절히 깃들어 있다)를 암송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이에 유대인들이 대망하던 나라가 시작되어 그 나라의 완전한 실현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3)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10절)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말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롬 12:2) 하늘에서 온전히 성취된 것같이 땅에서도  이뤄지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여기서 ‘뜻’('델레마')은 하나님의 의로운 요구들(7:21; 12:50)과 구속사에서 어떤 사건을 전개시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18:14; 26:42)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십자가와 같은 대속적(代贖的) 죽음이 실현되어야 하고, 동시에 절대적 순종과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한편 본문의 ‘하늘에서’란 하나님과 천사들만이 존재하는 세계라고 이해할 수도 있지만, 그 보다는 두번째의 간구('나라이 임하시옵시며')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통치와 의(義)가 지금 현재 온전히 성취된 상태, 또는 그러한 세계를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적절합니다. 그렇다면 이와 상용되는 '땅에서'란 말은 앞으로 하나님의 통치가 구체적으로 실현되어야 할 대상(타락한 이 지상과 역사와 인격들 등)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어찌 되었든 하나님의 뜻은 현재 '하늘'에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다스림이 거기에는 완성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은 아직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구현되지 않고 있으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메시야 왕국의 왕성을 뜻하는 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3. 우리를 위한 기도(11-13절)


    (1)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11절)


    하나님과 그 나라를 위한 기도가 끝나고 이제부터는 개인의 신앙과 생활에 실제 필요한 내용들이 기도되고 있습니다. 그중 첫째가 '양식'(bread)에 관한 것입니다. 여기서 ‘오늘날’(세메론)이란 '오늘' 또는 '지금'이란 뜻으로서, '매일 매일' 또는 '날마다'라는 의미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이로 보건대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서 구하는 것은 '그날' 하루의 양식임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기도문은 우리의 필요에 대한 요구이지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기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같은 겸손한 기도는 하루에 한 번씩 급료를 지급받아 생활했기 때문에 만일 며칠을 앓아눕기라도 하면 그만 굶을 수밖에 없는 1세기의 수많은 노동자들의 불안정한 생활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물질적으로 여유있는 자들에게는 이 기도가 큰 의미를 지니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날 벌어 그날 먹어야 하는 자에게는 이 기도야말로 귀중하고 절박한 간구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한편 마태와는 달리 누가는 이를 '날마다'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아마 본문의 오늘날이란 개념 속에는 '지금'이라는 뜻 외에 ‘바로 뒤 따르는’이라는 뜻이 담겨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종합적으로 이해하면 ‘앞으로 올 날을 위하여 우리의 양식을 오늘날 우리에게 주옵소서’란 뜻이 됩니다.

    ‘일용할’(에피우시온)이라는 단어 역시 그 의미가 좀 애매하며 또한 어원에 대한 해석도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이 단어는 흔히 '내일을 위한', '생존을 위한', '오늘 필요한', '매일 필요한' 등의 뜻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제롬과 같이 그 양식의 영적 측면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정당화시킬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뒤이어지는 '앙식'은 실제의 음식물이며, 더 나아가서는 우리 인간이 물질세계에서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의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의 생존에 필요한' 또는 '매일의 생존에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등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양식을 주옵시고’에서 '양식'이란 모든 음식물을 나타내는 데 사용된 용어입니다(잠 30:8;막 3:20;살후 3:12;약 2:15). 그런데 초대 교부들은 이를 물질적인 의미의 음식이 아니라 성찬이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단어를 이 같이 비물질적 의미로 해석하는데 언어학적인 관점에서 그 근거가 확보되지 못했으므로 적절한 견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실로 예수께서는 비록 사소하게 보이는 것이지만 인간 생존(生存)에 가장 필요한 것들인 육(flesh)의 '양식'을 기도하게 하심으로써 그 생존의 기본 원리와 생존의 근본 동인(動因)의 문제를 밝히 드러내셨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양식을 '주신다'는 생각 때문에 우리가 일해야 할 책임을 회피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교훈은 예수의 제자들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자들이라는 것(6:34)을 전제할 뿐 아니라, 노동으로 우리의 양식을 벌수 있는 능력은 물론 모든 선한 것들이 하나님의 손길로부터 온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신 8:18; 고전 4:7; 약 1:17).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실은 부(富)가 증가하고 인간이 자기 스스로의 능력에 만족하게 될 때에는 쉽게 망각합니다.     


    (2)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12절)


    신약성경에서 흔히 죄로 번역되는 원어는 '하마르티아'로서 어떤 목표에 미달(未達)된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누가도 이 부분을 '하마르티아'로 기록하고 있습니다(눅 11:4).  그러나 마태는 이곳을 흔히 빚(debt) 또는 부채(loans)로 번역되는 '오페이레마타'로 기록하였습니다. 아마 마태의 기록이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담은 것이고, 누가의 것은 2차적으로 해석된 것으로 보입니다. 즉 누가는 온유적 의미가 담긴 빚이란 말보다는 그 뜻을 보다 분명히 전달하기 위해 '하마르티아'를 사용하였을 것입니다. 한편 죄는 ‘하나님께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도덕적인 빚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사하여 준 것 같이’는 하나님의 사죄의 양(量)과 우리의 사죄의 양을 비교하는 정도의 차이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사죄의 사실에 대한 비교입니다. 누가는 이곳을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눅 11:4)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사죄와 우리의 사죄 중에 어떤 것이 선행되어야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마태의 기록은 분명히 우리의 용서가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근거로써 제시되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남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우리를 용서하시지 않는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반면에 누가는 하나님이 우리 죄를 사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의 죄를 사하여 준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모울(C.F.D. Moule)은 말하기를 “자신이 하나님께 대하여 지은 죄가 엄청나게 많다는 것을 일단 깨달은 사람의 눈에는 남들이 자신에게 끼친 해가 상대적으로 극소화되어 나타난다. 반면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끼친 해를 과장해서 보는 사람은 또한 자신의 잘못은 극소화하여 보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진정한 회개와 자각은 단순한 후회와는 달리 철저한 자기 부정과 겸손이 뒤따르게 마련입니다.      


    (3)시험에 들게 마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13절)


    1)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야고보는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사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약 1:13)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시험(temptation)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신약성경 여러 곳에는 성도들이 시련이나 역경을 만나더라도 그것을 기쁘게 여기라고 가르치는 말씀들이 나옵니다(고전 10:13;약 1:2). 하지만 이러한 시련(testing)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신앙을 연단하여 더 큰 믿음을 낳게 하려는 것으로 본문의 시험(temptation)과는 엄격히 구분됩니다. 한편 본문을 허용적 뉘앙스를 지닌 문장으로 이해하여 '(악마에) 의하여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해주옵소서'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이는 '시험'(temptation)이라는 말이 '타락의 결과를 가져오는 유혹'을 뜻하는 것으로 가장 많은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막 14:38; 갈 6:1). 여하튼 이 간구는 분명 시험에 날마다 노출될 수밖에 없으며, 또한 사악한 악마의 미혹에 쉽게 넘어질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를 깊이 자각한 자만이 드릴 수 있는 기도입니다. 실로 우리는 감당할 수 없는 시련에  빠져들지 않도록 기도해야 할뿐 아니라(고전 10:13) 그러한 시험에 직면했을 경우라 할지라도 능히 극복케 해달라는 기도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2)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다만’(알라)은 '그러나', '도리어'라는 뜻의 반의적(反意的)인 접속사로서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는 앞의 간구와 분명히 대조되는 또 하나의 간구(일곱 번째 기도)임을 보여 줍니다. 즉 이 '알라'라는 접속사는 바로 전의 간구가 소극적이고 피동성이 강한 기도였다는 전제를 깔면서 바로 이어지는 간구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면이 강할 것이라는 암시를 줍니다. 사실 이어지는 간구는 악에 대한  능동적 승리를 기도한 것입니다.

    ‘악’(루 포네루)이라는 말은 남성 또는 중성 소유격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를 중성으로 해석할 경우는 추상명사로서의 악을 가리키고 남성으로 이해할 경우는 악한 자로서의 사단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여러 곳을 종합적으로 검토할 때 이는 분명히 남성인 것으로 보입니다(요 17:15; 살후  3:3; 요일  2:13, 14).  

    ‘구하옵소서’는 사단의 공격에서 보호하고 지켜달라는 간구입니다(엡 6:16; 요일 3:12). 우리는 사단 앞에서는 전혀 대항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로서 그를 이길 수 있는(4:1-11) 주님만이 우리의 보호자가 될 수 있습니다.


    (4)송영: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있사옵나이다 아멘’


    고대의 유력한 사본 및 본문과  평행을 이루는 누가 복음에는 나와 있지 않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이 부분은 기도의 끝에  반드시 송영(Doxology)이 뒤따랐던 유대인들의 관습에 따라 후대 기독교회가 주기도문을 완전한 기도문의 형태로 만들기 위해 첨가 내지는 삽입한 것 같습니다. 한편 본문의 송영 자체는 신학적으로 심원하고 문맥상으로 적절합니다. 특히 마지막 세 간구들 안에 삼위일체에 대한 암시가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송영이 문맥상 더욱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송영 안에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각각의 사역에 대한 내밀한 암시가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은 성부의 창조와 섭리는 우리에게 양식을 공급해 주고, 성자의 속죄는 우리의 용서를 확보해 주며, 성령의 내주(內住)하는 능력은 우리의 안전과 승리를 보장한다고 말합니다.

    '나라'는 하나님이 왕으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가리킵니다(10절). 따라서 그 나라를 유지(維持)하시고 당신의 백성에게 선한 약속들을 성취시킬(12절) 권세와 거기에 수반되는 모든 '영광'이(9절) 다 하나님께 속해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앞의 주기도문과 깊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는 본문의 송영은 전통 깊은 교회의 신앙 고백적 찬양으로서 오늘날 우리들에 의해 계속 낭송되어져야 마땅할 것입니다.   


4. 용서와 기도의 원리(14-15절)


    (1)용서해야 용서받음(14절)


    주님은 기도를 가르치신 후 기도의 원리의 핵심을 말씀하십니다. 즉 기도란 하나님의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인데 그 원리는 다른 사람에 대하여 용서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다른 사람에 대한 용서함이 없는 자는 하나님께 용서를 구할 수 없고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음을 말씀합니다.

    ‘과실’(파라프토마타)이라는 말의 문자적 의미는 '한 편에 치우침'이란 뜻으로서 진리나 의(義)로부터의 이탈을 가리킬 때 사용됩니다. 이는 분명 치명적인 결과를 안겨주는 근본적인 범죄(곧 '하마르티아')와 구별됩니다.

    ‘용서하면’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죄 용서함을 받는데 반드시 갖추어야 할 조건부적인(conditional) 공적(merit)을 말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됩니다. 단지 하나님의 용서를 받기 원하는 자가 타인을 용서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실로 타인의 잘못을 용서로서 받아들이는 것은 자신의 죄악에 대하여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행위이며 참된 회개의 자세입니다.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는 주기도문의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6:12절)라는 다섯 번째 간구를 더욱 심화시키고 강조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상이 이곳뿐만 아니라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반복되고 있습니다(18:23-35; 막 11:25). 이는 예수를 주로 모신 공동체의 성격이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임을 지적한 것입니다.     


    (2)용서하지 아니하면(15절)

  

    15절은 내용적 측면에서 14절의 반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실로 형제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는 자는 우리에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시는 아버지라 하더라도 그로부터 용서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기 원하는 바를 우리는 형제에게 베풀어야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황금율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자비를 얻고자 하면 형제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하고, 하나님과의 화해를 원하면 형제와 화해해야 합니다. 


III. 적용: 응답받는 기도


    지금까지 우리는 주님이 기도에 대하여 가르치신 것을 배웠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 어떠한 기도를 해야 할지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을 구하고 우리의 필요를 구할 것을 배웠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께 어떻게 기도하여 응답을 받을까 묵상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에 대하여 가르치시기를 마치시면서, 마태복음 6:25-32에서 이방인들이 자신들의 목숨을 위하여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구하는 모습을 설명하면서 공중의 새들과 들의 백합화를 비유하십니다. 공중의 새를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를 입히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의 필요를 따라서 먹이시고 입히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구하여야하며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따라 다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마 6:33). 즉 성도들이 기도해야 할 것은 먼저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이를 위해서 먼저 구하고 또 그러한 삶을 살게 될 때 우리의 일용할 것을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우리의 필요를 구하되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고 나서 우리의 필요를 구할 것을 말씀합니다.

    두 번째, 우리는 응답될 때까지 기도해야합니다. 예수님께서 성도들이 기도를 계속하여야할 것에 대해서 성경 여러 곳에서 가르치시지만, 먼저 마태복음 7:7-11은 우리가 구하는 것을 반드시 얻을 줄 알고 기도를 계속할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좋은 것으로 주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필요를 인하여 한두 번 기도하고 중도에 그만두는 경우가 있는데 성경은 우리가 얻을 때까지 믿음을 가지고 구할 것을 말씀합니다. 또 예수님은 누가복음 18:1-8에서 항상 기도하고 낙망하지 말 것을 가르치시며 한 과부가 불의한 재판관에게 자신의 원한을 갚아주시기를 밤낮 부르짖을 때 그 불의한 재판관이 들어준 사실을 말씀하시면서 불의한 재판관도 그처럼 강청하는 것을 들어주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자녀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시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기도의 응답을 받느냐 못 받느냐하는 문제는 하나님편의 문제가 아니라 기도하는 성도의 문제임을 지적한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응답받을 때까지 기도하면 반드시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주실 것입니다.

    세 번째, 우리가 기도하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1:24에서 예수님은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도하고 난 뒤 성도들은 자신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것을 믿지 못하고 불안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정말 신뢰하고 기도했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주실 것으로 믿고 있을 때 그대로 된다고 약속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고, 계속하여 기도하면서, 기도한 것은 반드시 주실 것으로 믿음으로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풍성한 축복을 누리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