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2006.6.4(주일예배)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요한복음 15:7
I. 들어가는 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응답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기도는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 구하는 것입니다. 만일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아직도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구원받은 것이기 때문에 구원의 완성을 이루기까지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경에서는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명령하고 있기 때문에 기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다 채워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II.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7절)
1.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이 예수님 안에 거하고 예수님이 제자들안에 거하면, 제자들은 무엇이든지 자신이 원하는 것을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하면 이루어진다고 약속하십니다.
여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누구입니까? 그것은, 그 아래 말씀이 알려주는 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말씀을 그 속에 가진 자입니다.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란 말씀은, 주님의 말씀이 그들의 마음의 왕좌를 점령하였다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말씀을 그의 대리(代理)로 생각하고 사랑하며, 그 권위를 높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에게 살아 계신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이와 같이 주님 안에 거한 생활의 유래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구원 계약에 참여한 자로서 믿고 따르므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과 연합한 신자의 신분으로서는 그리스도의 이름 권세를 쓸 수 있고, 또한 성령께서 그런 신자의 의지를 성화(聖化)시켜 주님의 뜻대로만 기도할 수 있게 하십니다. 곧,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만 위하여 간구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그의 기도는 응답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1)기도의 응답받는 자의 경건
이 말씀은,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해야 할 진리를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반절에서 벌써 주님과 연합한 신자의 생활이, 기도 응답의 조건으로 되어 있습니다. 신자가 주님과 연합한 것은, 위에 말한 바와 같이 주님의 계약 행위, 곧, 선택이 그 기본이고, 그 결과로 나오는 순종이 그 실현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외부적 생활에서만 근근히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얕은 경건이 아니고, 하나님의 깊은 계약과 생명에서 움직이는 내면적인 경건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구해야 무엇이든지 응답 받는다는 진리는, 요한이 그의 서신에서도 말씀한 바 있습니다.
곧,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고 한 말씀이 그것입니다(요일 5:14). 여기서 '향하여'('프로스')는 '생동적인 교제 안에서 실현되는 관계'를 암시하는 전치사입니다. 이는 믿는 자들이 하나님과 더불어 생동적이고 영적인 교제를 나누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담대함’은 하나님께 기도할 때 갖는 담대함을 의미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3:21,22). 본절에서 믿는 자들이 기도할 때 갖는 담대함은 기도 응답의 확신에서 비롯됩니다. ‘구하면’('아이토메다')이란 말은 간구하는 행위 자체가 주어인 간구자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기도자의 간구가 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응답자이신 하나님의 계명 즉 그의 뜻에 부합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요15:7). 이러한 기도는 단순한 요구사항이 아니며 기도자의 생활과 뜻을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부합되게 하여 복종하겠다는 고백입니다. 그럴 때에 그 기도는 반드시 응답을 받게 됩니다.
기도 응답을 받는 자들은 저렇게 내면적인 경건의 소유자들입니다. 기도 응답을 많이 받은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였습니다(신 34:10). 히스기야는 기도하여 자기의 병을 고침 받았습니다(사 38:2-5; 왕하 20:5-6).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여 여호와의 사자가 앗수르 군대 18만 5천 명을 파멸시켰는데(왕하 19:14-19, 35), 하나님 앞에서 자백한대로,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의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라고 할 만큼, 경건하였습니다.
(2)기도응답을 받는 이유
1) 큰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심
기도 응답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이렇게 사도들을 위시하여 일반 신자들 전체에게 허락되었습니다. 그것이 그렇게 된 원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짐을 져 주시는 대제사장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4:14-16에 말하기를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를 '큰 대제사장'(아르키에레아 메간)으로 지칭하고 있는데, ‘큰 대제사장’은 '대제사장'에 '큰'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으로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들보다 그리스도가 더 우월함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우월성은 ‘승천하신 자’라는 초월적인 표현을 통해 더욱 강조됩니다. ‘승천하신 자’는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올라가셨다는 뜻보다는 하늘을 통과하여 하나님이 계시는 지고(至高)한곳으로 가셨음을 뜻합니다. 아론 계통의 제사장들은 이 땅의 성막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으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존재에서 제사장의 사역을 감당하시므로 그들과는 비교되지 않는 사역의 탁월성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한편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는 예수께서 인간이시며 동시에 신성을 소유하셨음을 나타냅니다. 이는 예수께서 인간으로서 인간의 모든 연약함과 유한성을 이해하실 뿐만 아니라 신성을 지닌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가 행하신 모든 행위와 약속이 신뢰할 수 있는 확고한 것임을 시사합니다.
앞에서 언급된 그리스도의 탁월성과 초월성, 더 나아가 그의 하나님의 아들되신 신성은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 근거가 됩니다. 여기서 ‘믿는 도리’('호몰로기아스')는 ‘고백’을 뜻하는 말인데 이 고백의 내용은 당시 유대인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익히 알고 있는 공식화된 고백으로 본절 상반절에서 언급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가리킵니다. ‘굳게 잡을지어다’('크라토멘')는 ‘단단히 쥐다’ 혹은 ‘들러붙다’의 뜻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을 끝까지 지키라는 권고입니다.
‘연약함’은 죄의 유혹에 대한 인간의 연약성뿐만 아니라 인간이 지닌 모든 한계성을 함축하고 있는 표현입니다.
‘체휼하지’('쉼파데사이')는 ‘함께 수난당하다’라는 의미의 ‘쉼파스코’에서 파생된 말로서 ‘동정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쉼파데사이’는 단순히 감정을 공유한다는 의미로서의 ‘동정’(同情)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도움의 행위를 내포합니다(10:34; 13:23). ‘체휼하시는 예수’에 대한 강조는 예수께서 인간과 동일하게 공감하시는 분으로서 능히 인간을 도우실 수 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이해하시고 도우실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완전히 인간성에 참여하셨기 때문입니다(2:17,18).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이것은 예수께서도 인간과 똑같이 유혹을 받아 범죄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예수께서 인간과 같이 되셔서 인간들이 겪는 모든 어려움을 경험하셨음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으로서 인간들을 돕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조건이었습니다.
‘죄가 없으시니라’는 본문의 표현 그대로 예수께서 인간으로서 죄의 유혹을 받아 범죄할 가능성이 있었으나 범죄하시지 않았음을 말씀합니다. 예수께서는 인간이셨으나 인간과는 달리 흠이 없으시며(9:14) 지상의 성막에서 제사드리는 대제사장과 같이 자신의 죄를 위해 제사드릴 필요가 없는 분이었습니다(7:27). 따라서 본절은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는 대로 그리스도께서 인간과 똑같은 시험을 받으셨으나 인간들처럼 시험에 넘어진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온전히 극복하심으로 범죄하지 않으셨으며 시험을 인간과 동일하게 받으심으로 인간들이 당하는 모든 시험의 어려움을 낱낱이 아심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그리스도인들이라 할지라도 불완전하여 수시로 죄의 유혹에 넘어지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본절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자비와 도움을 필요로 하는 바로 그 때를 아실뿐만 아니라 시기적절하게 베풀어 주심을 나타냅니다.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보좌’('드로노')는 ‘왕의 보좌’를 뜻하는 말로서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보좌’나 ‘그리스도의 보좌’(1:3,8)를 나타냅니다. 본절에서는 ‘하나님의 보좌’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은혜의 보좌’는 하나님이 현존해 계시는 장소로서 구약시대의 하나님이 거하시는 상징적 장소인 성막 안의 속죄소와 연관됩니다(9:5;출25:21). 대제사장들은 일 년에 한 번 지성소안에 있는 속죄소에 나아갈 수 있었으며 속죄의 행위가 받아들여졌을 때 지성소 안에있는 그 속죄소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시은소(施恩所)가 되었습니다(9:5;레16:2-34). 그러나 본절에서 저자가 말하는 ‘은혜의 보좌’는 더이상 모세가 전해준 율법적인 속죄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며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 우편에는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들의 대제사장으로 좌정해 계십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2)엘리야의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
야고보서 5:17에 말하기를,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개월 동안 비가 아니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성정이 같은’('호모이오파데스')이란 말은 ‘유사한’('호모이오스')와 ‘고난’을 뜻하는 ‘파도스’의 합성어로 엘리야도 다른 일반 사람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괴로움을 가지고 있는 존재임을 나타냅니다(왕상 17:11;19:3;행 10:26). 이는 엘리야가 위대한 선지자로서 초능력적인 자질을 소유하여 비를 그치고 내리게 하는 역사를 행한 것이 아님을 시사함과 동시에 평범한 사람과 동일하게 괴로움과 고통을 느끼는 인간적 존재인 것을 부각시켜 죄를 회개하여 용서함을 받은 의인은 엘리야와 같이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본문은 엘리야 선지자가 기도 응답을 받은 역사를 나타냅니다. ‘간절히 기도한즉’('프로슈케 프로세윅사토')이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기도로 기도했다’는 전형적 히브리식 표현법으로 강조 구문입니다(창 2:17;눅 22:15;요 3:29;행 4:17). 실제로 구약성경에는 엘리야가 기도할때 땅에 엎드려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었다고 묘사되어 있습니다(왕상 17:1;18:42). 이러한 엘리야의 간절한 기도는 응답을 받아 비를 그치게도 하고 내리게도 하였습니다.
3)죄인의 기도에 응답하심
그러므로 큰 죄인들도 회개하며 기도하면 응답을 받는데, 구약 시대에도 그러하였고(대하 33:10-13), 신약 시대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누가복음 18:13-14에 말하기를,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라고 하였습니다.
4)회개하고 마음을 열라
요한계시록 3:19-20에는 말하기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가 회개하라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주로 '아가파오'('사랑하다')로 표현되는데 본절의 '사랑하는'은 '필로'로 되어있습니다. 이러한 문자적인 차이로 인해서 혹자는 '아가파오'가 하나님께서 은혜로 사랑하시는 모습을 나타내는 반면에 '필로'는 그리스도의 판단으로 사랑하심을 의미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필로는 '아가파오'와 동일한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신약성경에서도 자주 '필로'와 '아가파오'가 같은 뜻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요5:20; 16:27). 한편 ‘책망’('엘렝코')은 원래 ‘낮춤’을 의미하는 말로 ‘말로써 교훈하고 다스리는 것’을 나타내며(눅3:19; 딤전5:20), ‘징계’는 책망이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행위를 의미합니다(히12:5,7). 그리스도께서는 그 사랑하는 자의 잘못을 방관하지 않으시며 사랑어린 책망과 징계로 인도하십니다.
‘열심을 내라’('젤류에')는 현재 명령형이며, ‘회개하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타노에손'은 부정 과거 시상입니다. 이 두 개의 명령문의 시상 변화는 '단번에 결정적으로 회개하고 지속적으로 열심을 내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서서'('헤스테카')는 현재 완료 시상으로 이미 오셔서 준비가 완료된 상태를 의미하며 '두드리노니'('크루오')는 현재 시상으로 지금도 계속해서 두드리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죄인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인내와 사랑을 알리시는 모습으로 불신앙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초청과 약속의 말씀입니다. 한편 '문'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입니다. (1)혹자는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는 새로운 세상으로 해석합니다(마24:33;약5:9). (2)혹자는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마음을 의미한다고 해석합니다.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합니다. 앞절에서 현재 회개하고 열심을 내라고 권면하였기 때문에 본문의 '문'은 현재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교제를 나누어야 하는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마음을 지칭합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본문은 라오디게아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회개 촉구의 권면을 듣고 회개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의 결과를 나타냅니다. ‘먹고’('데이프네소')는 교제를 나누며 즐기는 식사를 가리킵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이 회개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할 경우 그리스도께서는 그들 안에 거하셔서 그들과 더불어 교제를 나누시며 친밀한 관계를 이루십니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은 현재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들과 성령을 통해 교제하십니다(요14:23).
3. 기도 응답에 대한 약속들
(1)주의 이름으로 구하라
요한복음 14: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사도들(신자들)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1)예수님의 권위(權威), 혹은 공로(功勞)에 의지하여 기도함이고, (2) 그의 계명을 지키며, 그의 뜻대로 기도함입니다. “내가 시행하리니”란 말씀은, 아버지께서 기도 응답하심이 아들로 말미암아서 실행됨을 가리킵니다.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은, 기도응답은 언제나 인간의 사욕을 채우려 함이 아니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이루어 그에게 영광이 돌아가게 하려 함입니다. 이런 기도 응답은 그리스도의 중보적 역사로 인하여 실시되는고로, 여기서 “아들을 인하여”란 말이 쓰여 있습니다.
(2)하나님을 믿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마가복음 11:22b-24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은 그의 전능하신 능력과 무한히 선하심을 의심 없이 신뢰하는 것입니다. 엄숙한 선언에 뒤이어 예수님은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 속으로 던지우라고 하면 그렇게 될 것이라"고 과장법을 사용하여 말씀하셨습니다. 한 가지 조건은 부정적으로는 의심없이 그리고 긍정적으로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인데 그러한 기도는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신앙은 이스라엘의 부족한 신앙과 대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게 하는 두드림이 되기 때문에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무엇이든지 기도로 구한 것은 이미 받은 줄로 믿으라고 훈계하셨습니다.
(3)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마태복음 7:7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니”
여기 기도에 두 가지 요점이 있는데, (1)간절히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이 말씀들은 기구함에 있어서 모든 노력을 다 함입니다. 그런데 이 명령사들이 모두 다 현제 시간의 명령사로 되어 있으니 이것은 다 그 행동의 계속성을 표시합니다. (2) 어김 없이 주님을 믿고 기도할 것입니다. “주실 것이요... 찾을 것이요.. 열릴 것이니” 이 말씀들은, 주님의 신실성에 대하여 가르치는 동시에 우리는 그를 믿어야 할 것을 가르친다. 칼빈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기도를 반드시 들으신다는 사실에 대한 확신처럼 우리의 기도를 작흥시키고 격려시키는 것은 없다. 의심을 품고 하는 기도는 무력하고 냉정하고 태만한 죽은 의식에 불과하다"라고 하였습니다.
(4)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마태복음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나님의 나라를 구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 및 예수에 의해 이미 시작된 메시야적 왕국에 대한 복음을 듣고 또 순종하며 그 복음을 전파하기에 힘쓰라는 뜻이며 또한 그 나라의 완성을 고대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를 구한다’고 하는 것은 신학적 의미에서의 칭의(稱義)를 구하라는 것이 아니라 산상수훈을 통해 예수께서 줄곧 강조해온 바와 같이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복종하는 가운데 하나님과의 내적인 바른 관계를 지니고 외식을 피하고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를 염두에 두고 선(善)을 행할 것을 가리킵니다. 특별히 본문에서 ‘먼저’(프로톤)는 이방인들이 인생의 목표로 정하고 추구하고 있는 세속적 욕망과 세상적 노력이 모두 이차적이요, 부차적인 것임을 강조한 말입니다. 따라서 정녕 이 말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일이 인생의 가장 중요하고 긴급히 선결해야 할 문제임을 강조해 주고 있습니다. 결국 경건(piety)에도 자아 중심과 하나님 중심의 두 종류가 있듯이 포부(aspiration)에도 두 종류가 있습니다. 곧 자신을 위한 포부와 하나님을 위한 포부가 그것입니다. 제 3의 선택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둘 중 무엇을 먼저 선택하겠습니까가?
“이 모든 것”(타우타 판타)의 강조점은 ‘모든 것’에 놓여져 있으며, 이는 언급한 전체를 가리킨다기 보다는 필요로 하는 모든 종류를 뜻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위한 포부로 가득찬 사람들에게 영혼의 만족과 평안(peace)을 주시며 또 인생의 필요조건을 충분히 채우시겠다는 의미입니다.
“더하시리라”(프로스테쎄세타이) 오리겐(Origen)은 본문에 관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추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조그마한 것들을 덤으로 주겠노라. 하늘의 것을 추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세상의 것도 덤으로 주겠노라’고 말씀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실로 우리들 마음에 중심이 되어야 할 것은 일시적인 지상의 소모품이 아니라 영원한 하늘 양식이어야 하며, 신자들은 이방인의 염려의 대상인 먹을 것, 마실 것에 지배받지 말고 아버지께서 이미 필요한 것을 아시는 만큼 주실 것을 믿고 하늘의 뜻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러할 때 하나님은 우리가 간구하고 추구한 모든 것 위에 '덤으로' 세상에서 필요한 모든 것들을 채워주실 것입니다(딤전 4:8).
4. 응답받지 못하는 기도
야고보서 4: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야고보는 만족을 채우기 위해 그릇된 동기에서 구하는 문제를 지적합니다. 본절의 ‘정욕’은 1절과 마찬가지로 ‘쾌락’을 가리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쾌락을 채우기 위해서 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자의 간구는 외면하시나 의로운 자(시 34:15), 진실하고 참되게 구하는 자(시 145:18), 자신을 낮추고 회개하는 자(눅 18:14)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자(요 5:14)의 간구는 들으십니다.
III. 적용: 응답받는 기도의 생활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의 응답을 받고 주님의 제자로서 인정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주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깨끗하게 되는 것입니다. 매일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말씀을 듣고, 자신의 심령을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자신의 심령안에 있는 나쁜 것이 남아있다면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안에 거하기 위해서는 가지치기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만나는데 방해되는 것을 잘라버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지금까지 좋아하던 것들이라도 그것이 예수님을 만나는데 방해된다면 전부 버리는 것입니다. 텔레비전, 잡지, 컴퓨터게임, 세상친구들 등 예수님을 만나는데 방해되는 것은 전부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붙어있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되어 성령님이 자신의 심령에 말씀하시는 음성을 듣고 그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매일의 생활 속에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성령께서 말씀하시는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는데 집중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얻기 위해서 자신의 이전의 모든 좋다고 여긴 것들을 버렸다고 고백한 것처럼 우리 또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얻기에 힘서야 합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약속을 그대로 믿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들은바와 같이 성경에서 약속하신 기도의 응답을 확신하고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응답이 있을 때 까지 인내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자신의 기도가 정말 하나님 뜻대로 기도하는지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뜻에 합당하다고 확신이 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때까지 기도합니다. 그때 우리의 기도를 주님께서 들어주십니다. 그때의 우리의 기도는 인간의 정욕에 의한 기도가 아니라, 성령에 의해 기도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 들어주십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하나님 자녀로서 살기 위해서 기도하기 때문에 육체의 정욕으로 하는 기도가 아닌 성령에 의한 기도를 하므로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의 기도에 대해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심으로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풍성해집니다. 예수님을 아는 지식을 얻으면 우리의 삶이 바뀝니다. 지금까지는 육신의 일 때문에 살았지만,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 살게 될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갈라디아서 5:22에서 말씀하고 있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열매를 맺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이웃에게 인정받게 됩니다. 그 열매에 의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