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하나님의 사랑의 방식
2006.5.14(주일예배)
하나님의 사랑의 방식
로마서 5:5-11
I. 들어가는 말
하나님의 인류에 대한 사랑은 언제나 변함이 없으십니다. 다만 인류가 그 사랑을 알지 못할 뿐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을 불행하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사랑하지 않아서 인류를 불행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인류 스스로 죄를 지어서 불행을 자초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후 인간을 만드시고 그를 에덴동산에 두셨습니다. 에덴동산은 하나님의 동산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나라입니다. 인류는 하나님의 동산의 동산지기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서 동산을 지키며 다스리는 일을 하면서 행복하게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조상이며 최초의 인간인 아담은 하나님의 동산에서 살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것을 들어야했습니다. 그것은 에덴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을 듣고서 아담은 그 실과를 따먹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돕는 배필로 주신 아담의 아내가 뱀의 유혹으로 그 실과를 따먹고 아담에도 주어서 먹게 하였습니다. 그 결과 죄가 인류에게 들어왔고 인류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저주가운데 살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인류의 불행의 시초입니다. 그리고 죄의 결과는 사망이기 때문에 죽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서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를 지은 인간을 심판만 하시면 되셨음에도 인류를 사랑하시어서 인류를 구원하실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그것은 죄를 범한 인류를 대신하여 죄 없는 인간이 죽고 모든 인류가 죄로부터 해방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인류를 대신하여 죽을 사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범죄한 아담의 후손은 아담의 혈통을 따라서 태어났으므로 태어나면부터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비상수단을 강구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모양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인류를 대신하여 죽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자신이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이 인류를 사랑하신 것은 단순하게 말로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대신 죽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3일만에 부활하게 하시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기만 하면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방식입니다.
II. 하나님의 사랑의 방식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릴 것을 말씀하면서 믿음으로 이 세상에서 살 때에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며 즐거워할 것을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을 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1.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으신 사랑(5-8절)
(1)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된 하나님의 사랑(5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바울은 성도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여야 할 것을 말씀합니다. 환난 중에도 즐거워해야할 이유는 환난을 통하여 인내가 생기고 인내를 통하여 소망을 이룬다고 합니다. 그리고 연단을 통해 이루어진 소망이 부끄럽게 하지 않는 근거를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먼저 성도 가운데 계시며 역사하시는 성령 때문입니다. 성령은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할 때 성도의 심령 속에 들어와 계십니다. 그 성령께서는 성도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보증해 주시는(인 쳐주시는) 분이시기에 성도의 모든 신앙(信仰)의 과정에 함께 계시고 보증하신 그 약속이 이루어지게 하십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라는 말은 성령이 원인이나 결과가 아니라 하나의 수단 내지 방법이 됨을 암시합니다. 성령은 구원에 이르는 방법이요 수단이므로 중요한 것은 성령 그 자체보다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가까이 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가 아니면 하나님께로 갈 수 없는 것입니다(요 14:6).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그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부은바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잘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알려주신 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성도와 함께 계시는 결정적인 근거는 바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계심은 하나님의 사랑이 성도를 향해 물 붓듯이 부어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바울은 8:39에서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고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부은바 됨이니’라는 말은 ‘쏟아 부은바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충분히 넘치게 부어졌을 뿐만 아니라 모이는 물처럼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성도들에게 베풀어졌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언급하면서 그 사랑의 표현이 가장 절정에 이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사건을 염두에 두었을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6-8절)
1)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신 그리스도(6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말씀합니다. 바울은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말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의 우리의 모습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엡 2:3에서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라고 진술하고 있듯이, ‘연약할 때에’는 믿음이 약한 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시점을 가리킵니다. 이는 ‘연약할 때에’가 ‘도움을 받을 수 없다’, ‘소망이 없다’는 의미를 갖는 것을 볼 때 분명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의 자연인은 그 자신이 스스로 구원의 길을 찾을 수 있는 힘이나 소망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특히 바울이 ‘우리가 아직 연약하다’는 사실을 말한 것은 우리가 전혀 구원의 소망이나 그 길을 찾을 하등의 힘이 없었음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구체화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代贖)의 은혜를 받을만한 자격과 가치가 전혀 없었음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기약대로” 는 ‘정해진 시기에’ 또한 ‘적절한 때에’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이 표현은 하나님의 경륜(經綸)이 세상 가운데에서 시행될 정확한 시점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요 2;4;4:23).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일찍이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언된 바이거니와(사 7:14;53:2) 하나님께서 일을 행하실 때에는 막연한 시기에 하는 것이 아니라 만세전에 예정하신 계획에 따라 행하십니다. ‘기약대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때가 ‘적절한 시기’ 즉 ‘인류에게 가장 소망이 없던 때’였음을 의미하는 바, 사건이 이루어진 때의 중요성을 강조함과 더불어 배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계획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구약성경에 예언된 그리스도께서 기약대로 이 땅에 오셨듯이, 재림도 기약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마 24:42-44). 실로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로서 당신의 영원하신 계획대로 인류와 유주의 역사를 다스리시며 성도들에게 약속하신 바를 반드시 성취하시는 분이십니다(민 23:19).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경건치 않은 자는 8절의 ‘죄인’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곧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이 죄인이며 또한 경건치 않은 자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불경건한 자들의 입장에서 이루어진 대속적인 사건이었음을 나타냅니다.
2)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음(7절)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혹 있거니와” 본절에서는 의인(a righteous man)과 선인(a good man)이 대조되어 있습니다. 혹자는 이 둘을 구분하여 '선한 사람은 의로운 사람보다 더 위대하다는 특징을 지닌다'고 진술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히브리인들이 시문학에서 즐겨 사용하는 평행 대구법(parallelism)을 이용하고 있으므로 본절은 평행된 두 구절이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나아가 서로의 의미를 보충해 주는 문장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본절은 의롭고 선한 사람을 위해 극히 드물기는 하지만 가끔 죽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이와 같은 본절의 핵심은 인간 세상에서 위대한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사람이 가끔 출현할 수 있다는데 있지 '의인'과 '선인'을 구별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본절은 의롭거나 선한 사람을 위해 죽는 희생적 행위자체도 죄인을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에는 결코 견줄 수 없음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절대적 사랑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인간 세상의 보편적이고 통속적인 사랑을 소개하는 형식의 비교법을 사용하고 있는 본절은 8절의 내용의 서론격으로, 의인이나 선인을 위해 죽는 자는 혹시 있을 수 있으나, 죄인을 위해 죽는 자는 결코 있을 수 없다는 점에 있습니다. 결국 그리스도의 사랑의 절대적 우위성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에는 너무나도 무가치하고 자격이 없는 인간의 본질적 양상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3)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본절에 이르러 바울은 요점에 봉착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죄인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죄인’은 도덕적으로 의롭거나 선하지 않은 사람일 뿐만 아니라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시작된 인간의 전적 타락성과 부패성으로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든 사람을 의미합니다(Calvin). 이러한 의미는 9절에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이라는 대조적 표현이 나옴을 볼 때 분명합니다. 사도 바울의 이러한 대조적 표현은 희생된 생명의 무한한 가치와 그분으로 말미암아 은혜를 입은 사람의 무가치성의 대조를 극명하게 해줍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이에 대한 바울의 표현은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렸으니’(갈 1:4),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고후 8:9),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엡 5:2), 그리고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딛 2:14) 등으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으심에 대하여 풍부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라는 표현은 바울이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함과 더불어 그밖의 다른 것도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희생이 주는 대속적 특징 이외에 그리스도 안에 내재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따라 남을 위하여 행동한다는 의미를 강조하고자 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바울은 하나님과 그의 아들 그리스도와의 밀접한 관계,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과 세상과의 화목(고후 5:19) 그리고 영적으로 죽은 자를 사랑으로 이끄시는 그리스도(고전 15:12, 13) 등에 관하여 많은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바울이 두드러지게 나타낸 것은 특히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입니다. 그는 이것을 강조하여 ‘하나님 자신의 사랑’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여기서 ‘자기 자신의 사랑’이라고 말함은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적이고 영원하며 참됨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사랑은 자기 자신의 사랑이 아니라 모범을 따르는 사랑이요 배운 사랑입니다. 궁극적으로 인간의 사랑은 그 근원이 인간에게 있지 않고 그 사랑을 주신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요일 4:10, 19).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랑을 확고하고 구체적으로 인간에게 드러내셨으니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확증하셨느니라’라는 말은 ‘추천하다’, ‘드러내다’란 의미입니다. 무엇보다 본절에서 주목되는 것은 바울이 동사의 시제로 현재성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은 과거의 단 일회적 사건으로 끝이 났으나 하나님의 사랑은 바울이 본 서신을 쓰는 당시뿐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에도 끊임없이 부어지고 있음을 나타내 줍니다.
2.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9-10절)
(1) 구원을 얻음(9절)
6절에서는 ‘우리가 연약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고 하셨고 8절에서는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본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해 주신 내용을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롬 4:25에서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칭의에 대한 설명이 있었으나 본절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대속(代贖)에 대한 설명입니다. 즉 4:25은 부활을 통해 '생명을 주는 영'이 되신 그리스도가 칭의의 근원이라는 진술이며, 본절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으심이 칭의의 근거라는 진술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그 피를 인하여’라는 표현에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이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그의 피 안에서'입니다.
‘그 피를 인하여’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보혈에는 대속적 능력이 있어 죄인들을 의롭게 하는 근원이 될 뿐 만 아니라 한번 의롭다 함을 얻은 자들을 계속 다스리시고 역사하시는 권세와 능력이 있음을 함축합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었으며 이후에도 그리스도의 피의 권세와 능력의 작용을 받아 계속하여 성화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한편 본절의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은 1절의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이라는 표현과 비교가 됩니다. 즉 1절에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음에 있어 인간편의 책임과 의무로서의 믿음이 강조되었고 본절에서는 의(義)의 근거로서의 하나님의 대속적 피흘림이 강조된 것입니다.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인한 진노하심에서의 구원이 칭의를 위한 연결 고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여기서의 ‘칭의’는 재판관에 의해 무죄 선고를 받아 벌을 면하게 되는 법정적인 차원의 ‘의’라고 단정 지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본절에서는 그리스도가 죄인된 인간과 진노하시는 하나님 사이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는 ‘화목 제물’(propitiation)이 되셨다는 의미가 강하게 부각되고 있습니다. ‘더욱’이라는 말은 비교법 강조의 의미를 지닙니다. 이 말은 단순히 '더욱'이란 의미가 아니라 '훨씬 더', '더욱더'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피흘림이 칭의보다 더 확실하고 분명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고 있다는 뜻입니다.
(2)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됨(10절)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라는 표현은 ‘우리가 연약할 때에’(6절), 또는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8절)란 의미보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있을 때에 형성되는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를 보다 명확하고 적극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심을 이루는 단어 ‘원수’(에크드로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향해 적개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는 능동적 의미를 갖는다는 견해(Lightfoot)와 ‘하나님이 원수로 여기는 사람’이라는 수동적 의미를 갖는다는 견해가 있습니다(Murray). 두 가지 견해는 서로 상충되는 것이 아니며 모두 일면 타당성을 갖는다고 봅니다. 그러나 어느 한쪽만을 주장한다면 다른 일면을 소홀히 하는 자가당착(自家撞着)에 빠지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원수’를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범죄성의 측면에서만 이해한다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놓쳐버리게 되며, 또한 ‘원수’를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와 진노하심에서만 이해한다면 죄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간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양자의 견해를 모두 포괄해야 할 것입니다.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하나님과 죄인된 인간이 화목(和睦)될 수 있었던 근거는 물론 ‘칭의’입니다. ‘칭의’가 없이는 하나님과 인간의 화목은 있을 수 없습니다. 공의로우시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죄의 상태에 머무르는 자에게는 진노의 채찍을 내리시나, 의롭다 칭함을 받은 자에게는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에 들어갈 수 있도록 은혜를 내리십니다. 바울이 이처럼 화목을 강조하는 것은 ‘화목’ 자체가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고후 5:18에서 언급하기를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화목케하는 직책’을 주셨다고 할 때에, 이 직책이란 물론 죄악된 세상과 하나님을 화목케 하는 제사장적 직분(벧전 2:9)이지만 좀 더 포괄적인 의미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선전하는 직책’입니다.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상반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화목에 대하여 진술한 반면, 본 구절에서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화목에 대하여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의 죽음보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죄인된 인간의 구원과 화목에 있어 더욱 확실한 보증이 됨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 그의 부활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를 따르는 무리에게 부활을 확증시켜 주셨으며, 둘째, 그의 부활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조에’)이 그를 믿는 성도들에게 공급되므로 성도는 그 생명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고 하나님의 후사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바울은 고전 15장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보다 부활을 더욱 강조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죄인된 인간과의 화목을 이루는 주체가 하나님이시며 또한 구원을 이루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칭의와 화목 그리고 구원은 인간의 공로나 업적과는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3:25-28).
3.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의 삶(11절)
사도바울은 성도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므로 이제는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며 살 것을 요구합니다.
(1)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함(11절)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목을 얻게 하신’이란 표현은 지금까지 바울 자신이 설명했던 ‘칭의’, ‘진노하심에서의 구원’, 그리고 ‘구원’을 포함하는 의미로 해석해도 별 무리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모든 과정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이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여기서의 ‘즐거워하다’란 말은 ‘자랑하면서 즐거워하다’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본절에서 의미하는 ‘즐거움’은 구체적으로 어떤 즐거움입니까 ? 이에 대해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구속(救贖)의 은혜를 입은 자들의 즐거움입니다.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자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지심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었으며 영생을 소유하게 되었으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둘째로, 영원한 소망을 바라는 즐거움입니다. 바울은 2절에서 이 즐거움을 언급했으며 본서의 다른 구절과 고린도후서에서도 수차례 언급하고 있습니다. 8:18에서는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고 하였고 8:24에서는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라고 하였으며, 고후 5;1에서는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셋째는, 참된 즐거움입니다. 현재 이 세상에서 우리가 누리는 즐거움은 일시적이요 가변적이며 또한 거짓되고 기만적이나 그 근원과 이유를 하나님께 둔 즐거움은 영원한 즐거움이요 보증이 있는 즐거움이기에 참됩니다. 이에 대해 칼빈(Calvin)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만물의 근원이요 축복 그 자체이시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함으로써 아무것도 부족할 것이 없는 행복을 누리게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III. 적용: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는 삶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성도는 성령을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을 그 마음에 부은바 된 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확증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된 자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된 자로서 성도는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는 삶을 살아야할 것을 말씀합니다. 구원의 은혜를 인한 즐거움과 영원한 소망을 바라보는 즐거움과 참된 즐거움의 근본이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삶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삶을 위해서 우리가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야할지 몇 가지 묵상합니다.
첫째,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신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의 죽음에 넘기시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부활시키시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를 의롭다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하시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자녀로 인정해주시었는데, 내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정하지 못한다면 정말 우스운 일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확신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시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구원해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시기까지 하며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의심한다면 어리석은 자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하나님 아버지의 극진하신 사랑을 깨닫게 되고 확신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할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 한분만으로 즐거워하며 그분만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 되심을 확신하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심을 확신할 때 우리는 그 하나님 한분만으로 즐거워며 그분만을 신뢰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그 사랑을 확신할 때 하나님만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하며, 하박국 선지자처럼 노래할 수 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않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 3:1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