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야곱의 생애
야곱의 생애
김희보(총신대 신대원 교수)
I. 야곱과 에서
<창세기 27장>
위의 본문은 이삭이 아내 리브가가 잉태하였을 때의 일이다. 복중에 있는 쌍둥이 두 아들이 싸우므로 그것을 감당할 수 없었던 리브가는 여호와께 어떻게 해야 할 것을 물었다. 위의 본문은 그때 여호와께로 부터 받은 계시의 말씀이었다. 드디어 두 아들을 낳으매 형을 에서라 했고 동생을 야곱이라 했다 저들이 점점 자라매 그 성격과 행동은 판이하게 달라졌다.
창세기 25:27에 보면 "에서는 익숙한 사냥군인고로 들사람이 되었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니 장막에 거하였더라"했다. 여기에서 보는대로 에서는 남성적이요, 야곱은 여성적인 인물이었다. 이러한 두 성격의 차이에 있어서 우리는 그 어느편이 좋고 나쁜 것을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겠다. 그러나 이러한 성격의 차이 때문에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인생의 길을 걷게 되었다. 에서는 그 성격상 늘 밖에 나가 놀기를 좋아하였다. 성경은 그를 가리켜[익숙한 사냥꾼]이 되었고 [들사람]이 되었다고 했다. 그는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 되어서야 집에 찾아 들어오는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이것이 에서에게 있어서는 치명적인 결점이 되었다. 즉 그는 그것때문에 부모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놓쳤다. 그렇게 휼륭했던 아버지 이삭과 그리고 경건한 어머니 리브가의 감화를 많이 받지 못하고 자라난 사람이 되었다.
그는 결혼 사건만 보아도 그렇다. 창세기 26:34-35에 보면 "에서가 사십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취하였더니 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근심이 되었더라"고 함을 본다. 에서는 단번에 이방인의 딸 둘을 아내로 얻었고, 그를 인하여 그 부모에게 큰 근심을 끼친 아들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야곱은 달랐다. 그의 아버지의 부탁 즉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 중에서 아내를 취하지 말라"는 그 말씀을 명심하였고 그는 꼭 그대로 순종했다(28:6,7). 세상에서 부모를 슬프게하고 근심케 한 아들이 잘 될 수는 없다. 잘 되기를 원하는 아들은 먼저 부모에게 순종해야 할 것이다. 에서와 야곱은 우선 이 점에 있어서 크게 달랐다.
야곱이 밖에 나가기 싫어하는 성격은 반드시 좋은 것이라 할 수는 없지만은 그러나 그는 그렇게 했기 때문에 무보와 같이 지내는 시간을 자연히 많이 가지게 되었다. 부모에게 좋은 감화를 받을 수 있었고 그들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많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이 얼마나 존귀한 것인지도 알게 되었다고 본다.
II. 야곱의 피난
야곱은 고향을 떠났다. 하란의 외숙부의 집을 찾아 가는 길이었다. 그의 고향 브엘세바에서 밧단아람 땅 하란까지는 장장 1,500리의 먼 길이었다. 그가 집을 떠나 한 곳에 이르니 해가 졌다. 그곳은 곧 벧엘이란 곳이었다 거기는 야곱의 고향 땅 브엘세바에서 250리 가량 떨어진 곳이었다. 그는 해가 지기까지 250리를 걸었던 것이다. 야곱이 하루에 그렇게 먼 길을 걸어 갔다기 보다 오히려 뛰었을 것이라고 본다. 이것으로 형을 피하여 가는 그의 마음이 얼마나 조급했던가를 여실히 보여 준다. 창세기28:11 에 보면 "한 곳에 이르러 해가 진지라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자더니" 했음을 보는데, 250리를 달려 온 그는 피곤에 지쳐 잠이 들었다. 그가 뚜이 온 길은 황막한 광야 길이요, 산 길이었을 것이다. 몸을 감출 만한, 덮을 것 하나 없이 산길 들길에 쓰러져 잠든다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일이었던가. 맹수가 덮칠지도 모르고, 에서가 추격할지도 모르는 위험한 길이었다. 그러나 그는 정신없이 잠들었다. 사람이란 본래가 잠든 때가 하루 중에 가장 위험한 때가 아니가. 그것은 자기가 자기를 스스로 보호할 수 없는 때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잠자는 시간은 문을 닫고 빗장을 잠그는 것이 아니가. 그러나 야곱은 위험한 산길에 쓰러져 홀로 깊이 잠들었다. 바로 그대 그는 꿈 속에서 하나님께서 그를 보호하시며 어떻게 축복하시는지를 환상으로 보았다.
창세기 28:12이하에 "야곱이 꿈에 보니 사닥다리가 땅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 하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 너희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 계시를 본 후 그는 잠깨어 비로소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하시고 계심을 알고 감격한 마음과 두려운 마음으로 베고 자던 돌을 가려 기둥을 세우고 제단을 쌓아 기름을 부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가 잠 깨어 처음 한 말이 무엇이었던가.
창세기 28:16 에 보면 "야곱이 잠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기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하는 말이었다. 이것은 야곱이 잠들기 까지는 하나님께서 자기와 같이 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는 말이 된다. 사실 그때까지의 그의 마음은 공포와 불안과 고독과 눈물로 싸여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한 야곱을 하나님께서는 자기 사자들을 보내셔서 밤새도록 지키셨다. 하늘과 땅에 사다리가 놓여지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 내리락 했고 [그 위에 여호와께서 서서] 계셨다는 것을 암시하여 주시는 말씀이다 (행7:55 참고).
우리가 여기에서 배우는 진리는 무엇인가? 사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깊어졌을 그 때 하나님의 보호와 은혜를 입는 것이라기 보다 오히려 그와 반대인 경우가 더 많다. 우리가 사실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있을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우리를 찾아 주시고 지켜주심을 우리는 야곱에게서 새삼 배우게 된다. 야곱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알지 못하고 피곤에 지쳐 쓰러졌으나 하나님은 밤새도록 그를 [서서] 지키셨다.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야곱은 일어나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돌기둥을 세워 기름을 붓고 그 곳의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다. [하나님의 집] 이란 뜻이다. 그가 다시 그곳을 떠날 때 그 마음은 기뻤고 그의 발걸음은 얼마나 가벼웠는지 모른다. 창세기 29:1에 보면 "야곱이 발행하여 동방 사람의 땅에 이르려..." 한 말씀이 있는데 여기 [발행하여]란 원문 [이ㅆㅑ ]는 공중에 들이어 간다는 뜻이 담긴 말이다. 말하자면 날아간다는 뜻이다. 이것은 그의 발걸음이 얼마나 가벼워졌음을 보여 주는 말이다. 공포와 불안에 떨며 가던 그의 무거운 발걸음 은 가볍고 주님을 모신 그 마음은 즐거운 법이다.
어느덧 그는 목적지인 밧단아람 땅 하란에 이르러 어떤 우물가에 서게 되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거기에 라반의 딸 라헬이 양떼를 몰고 나타났다. 그는 그의 외삼촌의 딸이요, 후일에 그의 아내가 될 사람이었다. 창28:2에 이삭이 야곱을 보내면서 "라반의 딸 중에서 아내를 취하라" 했는데 바로 그가 야곱의 아내가 될 라반의 딸이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인도하심이 이처럼 신비스러웠다. 어찌 그 뿐인가. 창세기 29:13에 보면 "라반이 그 생질 야곱의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 그를 영접하여 안고 입 맞추고 자기의 집으로 안도하여 하는 말이 너는 참으로 나의 골육이라" 했다. 이 얼마나 반가운 영접인가. 하나님께서 야곱의 앞길을 형통케 함이 이러했다. 야곱은 너무 감격하여 소리내어 울었다.(29:11) 그러나 야곱의 가는 길이 늘 평안할 수만은 없었다. 그는 고난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눈먼 아버지를 속였고, 형을 속이고 도망친 사람이 아니었던가. 하나님의 거룩한 약속을 인간의 속임수로 이루려 했던 간교한 사람이 아니었던가. 이제 많은 곤고한 날을 통하여 그의 그러한 성품은 반드시 변화를 받아야 할 사람이었다. 그의 간사한 성품은 어떻게 해서든지 성결해져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었다. 이제부터 그의 앞길에는 고난이 닥쳤다. 먼저 그가 라반의 집에서 겪은 고생을 생각해 보자.
그는 20년 동안 들에서 양치는 사환이 되어야 했는데 그렇게 친절했던 외삼촌 조차도 점점 그 마음이 변했다. 그도 야곱을 이용하려 했지 도우려 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그의 곤고는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졌다. 창세기 31:40 에 보면 "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를 무릅스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여 눈 붙일 겨룰도 없이 지내었나이다" 했는데 이것은 라반의 집에서의 그의 20년 동안의 생활을 한 마디로 표현한 말이다. 그는 진실고 낮의 되위와 밤의 추위를 참으며 밤낮을 양떼들 곁에서 지새워야 했다. 그 뿐만 아니라 라반의 집에서의 부당한 대우를 그는 계속 받아야 했다. 창세기 31:41에 보면 "내가 외삼촌 집에 거한 이 20년 동안에... 외삼촌께서 내 품삯을 열 번이나 변역하였나이다" 이렇게 기록 되었음을 보는데 참으로 처량한 일이었다. 삼촌에게 열번이나 속아야 했다.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였던 그는 이제 심은대로 그 값을 치루어야 했던 것이다. "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는 심은대로 거두어야 했다. 먼 후일의 일이었지만 그는 자기 아들들에게 까지도 속아야 했고 그로 인하여 슬픈 날을 보내야 했던 것이다.(창37:31-34).
또 잠언 13:15에 "궤사한 자의 길은 험하니라" 하신 말씀 그대로 야곱의 인생길은 참으로 험악했던 것이다. (창47:9 참고). 그가 그렇게 일평생을 험악한 날들로 보내야 했던 것은 그의 성품을 변화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훈련 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사실 마침내 그는 그 모든 고난을 겪은 후에 거룩한 족장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밧단아람에서의 곤고한 20년 생활에 드디어 고향생각이 간절해 졌다. 창세기 30:25에 보면 그는 라반에게 드디어 "나를 보내어 내 고향 내 본토에가게 하소서" 이렇게 애원했으나 그는 여러 말로 그를 머물게 했다. 야곱은 사실 마음대로 떠날 수 있는 자유스러운 몸은 아니었다. 그도 매어있는 사환이었다. 하나 마침내 때는 왔다. 창세기 31:2에 "야곱이 라반의 안색을 본즉 자기에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않더라" 했고 그 아들들도 그에게 대하여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았다"는 말로 험하게 수근거렸다(31:1). 그의 신변에는 어떠한 해가 닥칠지도 모를만큼 환경은 험악해 왔다. 바로 그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셨다. 그는 역시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을 받는 하나님의 택한 바 사랑하는 아들이었다. 그는 가만히 도망하여 라반의 집을 벗어났다. 그리운 고향 땅 가나안을 향하여 그러나 그의 앞길에는 여전히 곤고한 날들이 복병하고 있었다.
III. 가나안에 돌아온 야곱
야곱은 밧단아람 땅에서 20년을 지나면서 양 떼와 소 떼를 몰고 들판에서 헤메는 곤고한 목자의 생활을 했다. 본래 그는 성격이 조용한 내성적인 사람으로 장막에 거하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성격에도 맞지 않는 20년의 [들 사람]의 생활을 했던 것이다. 마침내 그는 고향이 그리워졌고, 고향에 돌아갈 마음이 생겼다. 벌써 그 때는 야곱의 슬하에는 네 아내와 열 두 형제의 아들들이 있었고 많은 종들과 우양의 떼를 가지고 있었다. 혹시 어떤 사람은 야곱이 네 아내를 얻은 구약의 다처주의에 대해서 의심을 갖는 사람이 있을줄 안다. 족장중 이삭과 요셉은 첩을 얻지 않았따. 그러나 아브라함과 야곱은 첩을 얻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살았던 시대의 동방 여러나라 사람들의 풍속이었다. 사람이 그 시대의 풍속과 습관을 벗어버리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던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실례가 된다.
사실 아브라함과 야곱은 그의 가정이 불순했기 때문에 받은 가정적 고통이 참으로 많았다. 야곱의 아들들은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고 마침내는 자기들의 동생인 요셉을 죽여버리려 했던 것도 그들은 서로 어머니를 달리하는 때문이었고, 그 어머니들이 서로 시기 질투하는 것을 어릴 때부터 보아왔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처럼 복잡한 가정에서 자라난 그 자녀들이 서로 화평할 수 없었던 것도 결국은 야곱의 죄 때문이었다. 야곱의 가정의 그러한 불화는 하나님께서 그 가정에 내린 하나의 심판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야곱은 지금 네 아내와 그들에 따르는 여러 자녀들과 많은 우양의 떼와 종들을 거느리고 자기의 외삼촌 라반도 알지 못하게 밤중에 길을 떠났다. 그러나 그때 한 가지 사건이 있었다. 떠날 때의 야곱의 아내 라헬이 자기 아버지의 집 우상인 드라빔을 훔쳤다. 드라빔은 순금으로 된 인간형태의 우상이라 한다. 그것은 소위 가정을 지키는 수호신이라고 해서 그 우상을 섬겼다. 그런데 야곱의 아내 라헬은 어찌하여 그 우상을 도둑질 했을까 하는 문제에 대해서 당시의 풍속을 알려주는 좋은 고고학적 자료가 발견되었는데, 그 자료에 의하면 한 가정의 우상을 소유한 자녀가 결국 그 가정의 모든 재산을 상속 받을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다.
아마도 라헬은 아버지의 집의 금 우상이 탐이 나서가 아니라 결국은 아버지의 집의 재산이 탐나서 그러한 일을 저지른 줄 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야곱의 집 의 신앙이란 것은 보잘것 없었던 것 같고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의 야곱의 신앙적 감화란 것도 볼 것이 없었던 줄 안다. 그러기에 야곱은 앞으로도 더 많은 환난을 겪어야 했다.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야 했던 것이다. 야곱이 떠난지 제 3일만에 라반은 그 소식을 들었고 우상을 도둑 맞은 것도 알았다. 라반은 많은 사람을 거느리고 뒤따라 가서 제 7일만에 야곱의 일행을 찾게 되었다. 라반은 심히 분노해서 야곱을 크게 해치려 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창 31:29에 보면 라반의 말에 "너를 해칠만한 능력이 내 손에 있으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어젯 밤에 내게 꿈에 나타나서 말하기를 너는 삼가 야곱을 해하지 말라"고 했기에 너를 용서한다고 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어떻게 보호해 주셨는지 보여 주시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야곱을 크게 해치려는 라반의 마음을 감화시킴으로써 야곱을 보호하셨던 것이다. 야곱은 사실 하나님의 보호와 사랑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택한 백성을 그처럼 끝까지 지키시며 보호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창세기 32:1를 보아도 이런 말씀이 있다.
"야곱이 그 길을 진행하더니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하나님의 군대라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여기에서 보는 대로 야곱은 다시 길을 진행할 때에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났다고 했다. 아마 이것은 그의 환상 중에 되어진 것인 줄 안다. 그 하나님의 사자들이 얼마나 많았던지 야곱은 그들을 군대라고 하면서 그 장소의 이름을 [마하나임]이라고 했다. [마하나임]이란 말은 두겹으로 둘러 싼 큰 부대란 뜻이다. 영어로"double camps"란 말로 이중부대란 뜻이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이러한 환상을 보여준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이렇게 보호해 주는 것을 믿고 아무 일도 두려워 하지 말라는 뜻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 그러나 아직도 야곱은 하나님의 그러한 보호를 온전히 믿을 수 있는 데까지 그 신앙이 이르지 못했다. 그는 그 형 에서는 만날 생각을 하니 크게 두려움이 생겼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를 먼저 그 형 에서에게 사자들을 앞서 보냈다. 형의 동태를 우선 알아보고자 한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사자들이 돌아와서 보고하는 그 말은 야곱을 크게 놀라게 했다. 창세기 32:6에 보면 그 사자들의 말이 "우리가 주인의 형 에서에게 이른즉 그가 4백인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 했다.
동생을 만나려고 오는 형 에서가 4백인 씩이나 사람을 거느리고 올 필여가 어디 있었겠는가. 야곱은 이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에서가 4백명이나 되는 하나의 부대를 거느리고 온다는 것은 야고블 영접하려는 것이 아니라 야곱에게 복수하여 멸하려 오는 것으로 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실, 창32:6을 원문에서 보면 야곱의 사자들이 에서에게 이른즉 "그가 또한 4백인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 여기에서 [또한] 이라는 히브리말(메모드,)은 벌써란 뜻으로서 야곱의 사자들이 에서에게 이르니 "그는 벌써 4백인을 거느리고 오더라"라는 말이다.
에서가 어떻게 벌써 야곱이 오는 줄을 알고 4백인을 거느리고 떠났겠는가? 야곱은 밧단아람을 떠날 때도 밤에 남이 모르게 도망쳐 나온 사람이 아닌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에서가 야곱의 출발을 벌써 알고 4백인을 거느리고 떠났다는 것은 심상한 일이 아닌 것임이 분명하다. 생각컨대 에서는 오랫 동안 야곱에 대해서 큰 원한을 픔고 그의 동정을 예리하게 살피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야곱의 종들 중에 혹 에서의 정탐군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떠한 방법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야곱의 출발을 가까운 라반은 몰랐어도 멀리 있는 에서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얼마나 야곱에 대해서 원한이 컸던가를 보여주는 것으로 안다.
여기에서 야곱은 자기의 일행을 세 떼로 나누어서 각각 예물을 가지고 앞서가게 했다. 먼저 간 일행이 에서는 만나서 예물을 드리며 그의 원한을 풀게하고, 제 3진까지 그렇게하게 하고 그의 처자를 맨 뒤에 따라 가게 하고 자기 만은 홀로 남아서 에서의 모든 태도를 살피게 했던 것이다. 이것은 야곱이 얼마 난 형 에서를 무서워 했던 가를 보여 준다. 그런데 창33:24에 보면, 떨고 있는 야곱에게 [어떤 사람]이 다가왔다. 성경에 보면 야곱은 그와 더불어 밤새도록 씨름했다고 했다. 여기에서 씨름이란 무슨 운동이나 유희 같은 오늘날의 씨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아마도 야곱이 낯선 어떤 사람이 찾아올 때에 그는 에서가 보낸 한 자객이 아니었던가 생각했는지모른다. 그와 생사를 결하는 싸움을 한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그와 생사를 결하는 싸움을 한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마침내 야곱에게는 신령한 눈이 열려서 그가 하나님의 사자인 것을 알게 됐다. 물론 그것은 그의 환도뼈가 부러진 후 의 일이다. 그가 천사와 더불어 씨름한 것은 하나님을 크게 대적한 일로서 크게 징계를 받았다. 호세아12,2,3을 보면 여호와께서 "야곱의 소행대로 벌을 주 시며 그 소위대로 보응하시리니 그는 태에서 그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장년에는 하나님과 힘을 겨루었다" 한 말씀이 있다. 야곱이 그처럼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한 것은 그가 모태에서 형과 싸운 것 같이 그의 악한 소행이라고 선지자 호세아는 말씀했다. 하나님을 대적한 일이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그의 환도뼈를 꺽으신 것은 그에게 큰 징계임이 분명하다. 그는 징계를 통해서야 하나님을 알게 됐던 것이다. 그는 그때 비로서 울며 회개했다도 호세아는 기록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회개를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회개를 얼마나 기뻐했는지모른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회개를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하나님께서는 그때 이후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했다. 그 뜻은 하나님과 힘을 겨루어 이겼다는 말이다. 그 반대로 말한다면 이 [이스라엘]이란 말은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졌다는 말이 되겠는데 그러나 그것은 문자적으로 그러한 뜻이 아니라 사람이 아무리 사특하고 악하다할찌라도 그 죄를 뉘우치며 회개하며 사죄를 간구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진노를 거두시고 축복하신다는 뜻이다.
야곱은 자기의 혈육의 힘과 간교한 지혜로서 승리한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울며 회개할 때 마침내 하나님의 은혜로 크게 성공한 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 일이 있을 후 드디어 야곱은 에서를 만나게 됐다. 뜻밖에도 형 에서는 야곱은 에서를 만나게 됐다. 뜻밖에도 형 에서는 야곱을 만나 그의 목을 안고 울었다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원한에 가득찬 에서의 마음도 녹여 주고 마침내 한 혈육의 정을 나누게 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라반의 마음을 녹여서 야곱을 해하지 못하게 하신 것 같이 이번에는 에서의 마음을 녹여서 야곱을 해하지 않도록 하셨다.
IV. 벧엘을 다시 찾은 야곱
야곱은 지난 20 년 동안 그리워 하던 고향을 찾아 길을 떠나기는 했으나 앞으로 형 에서를 만날 생각을 하니 두려운 마음이 앞섰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형의 동정을 살피기 위하여 먼저 사람을 보냈다. 그때 형 에서는 벌써 야곱이 오는 것을 어떻게 알았던지 400명의 사람을 거느리고 떠났다. 이 보고를 들은 야곱은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자기의 모든 종들과 양과 소와 약대를 두 떼로 나누어서... 한 떼를 치면 남은 한 떼는 피하리라" 하면서 하 나님 앞에 간곡히 기도한 것도 그때의 일이다. 성경에는 그의 기도문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 나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의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 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리를 조금이라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로었나이다.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 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 하옴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겁냄이니이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정녕 네게 은혜를 베풀며 네 씨로 셀 수 없는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다니다." 이것이 창세기 32장에 기록되어 있는 그의 기도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크게 응답해 주셨다. 과거에 그의 외삼촌 라반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야곱을 해하지 않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에서의 마음을 또한 감동시켜서 그를 해하지 않게 할 뿐만 아니라 에서는 야곱의 목을 안고 울게 했던 거시다. 이것이 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택한 백성, 야곱에게 베푸신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창33:12에 보면, 기적적으로 마음이 녹아진 에서는 야곱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떠나 가자, 내가 너희 앞잡이가 되리라" 했다. 그러나 야곱은 굳이 그것을 사 양했다. 창33:13에 보면 "야곱이 그에게 이르되 내 주도 아시거니와 자식들은 유약하며 내게 있는 양떼와 소가 새끼를 데렸은즉 하루만 과히 몰면 모든 떼가 죽으리니 청컨대 내 주는 종보다 앞서 인도하여 세일로 가서 내 주께 나아가 리이다" 했다.
이 말을 들은 에서는 다시 그러면 자기의 종 몇 사람을 그들의 인도자로 남겨둘 것을 말했으나 야곱은 그것까지도 사양했다. 야곱이 그처럼 다 사양한 이 유는 그가 말한 그대로 하나의 겸손한 사양으로 받아 들이기는 조금 어려운 점이 있다. 왜냐하면 그는 형을 떠나 보낸 후 전혀 길을 달리했다. 창 33:17 에 보면, 야곱은 길을 돌려 숙곳이란 곳에 이르렀다. 에서가 사는 세일은 먼 남쪽에 있는 땅이요, 숙곳은 북쪽에 있다. 얍복강 북쪽이다.얍복강 을 건너 온 야곱은 발을 돌이켜 북쪽을 향하여 건너 온 강을 다시 건너 뒤로 물러갔다. 천천히 세일로 가겠다고 했으나 그의 발길은 반대 방향으로 돌리게 된 것이다.
그러면 어찌하여 야곱은 고향 땅과 아버지 이삭이 사는 곳으로 가지 않고 다시 북으로 발길을 돌렸을까? 아무래도 그는 자기의 형 에서가 사는 곳 가까이 가기를 상당히 꺼린것 같다. 그는 차마 아직도 살아계신 자기의 아버지 이삭을 만나러 가지도 못했다. 아마도 옛날의 자기의 죄를 생각할 때에 그의 마음의 불안했고 그의 발걸음은 그렇게 무서워진 것이 아닌가 생각되다. 또 현실적으로는 그가 얍복강 나루에서 하나님의 사자와 싸우다가 그의 환도뼈가 부러졌다 고 했으니 먼 길을 걸을 수도 없었던 줄 안다.
창 33:17에 보면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짐승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은고로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 했다고 했다. 숙곳이란 말은 히브리말로 [집을 지었다]는 뜻이다. 거기에서 그는 자기의 부러진 육신의 상처도 치료한 줄 안다. 집을 지었다고 했으니 수년 간은 거기에서 병을 치료하며 지냈을 것이다.
본문 창33:18에 보면, 그후 그는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성에 이르렀다고 했다. 여기 [평안히]란 말은 [건강한 몸으로]라는 뜻이 있는데 그가 가나안 땅 세겜성에 이르렀을 때는 그의 몸도 온전히 회복되었다는 뜻을 가진 말인 줄 안다. 세겜 성이라고 하는 곳은 숙곳 서쪽에 있는 가나안 땅으로서 거기에서 그는 땅을 사고 자리를 잡았다. 성경을 읽은대로 거기에서 그는 어린 자녀들을 키우면서 10여넌 동안 산 것으로 안다. 10세 전후의 어린 자녀들은 벌써 20대를 넘어섰다. 이제 혈기에 넘치는 그의 자녀들은 그곳에서 그만 무서운 살인사건을 일으키게 됐다. 살인사건의 내용은 성경에 기록된대로 야곱의 딸 디나가 그곳 이방 여자들과 섞이었가가 그만 그곳 하몰 왕의 아들 추장 세겜의 연애를 받아 몸이 더럽혀졌다는 말과 또 뒤이 어 청혼이 있었다는 말을 야곱의 아들들이 듣고 심히 분히 여겼다.
드디어 야곱의 아들들은 세겜 사람들이 전부 할례를 받아 누워있는 기회를 타서 그들은 죽였던 것이다. 이 사실을 들은 야곱은 심히 두려워 했다. 본문에 보념 야곱이 그 아들들에게 한 말이 있다.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이 땅 사람 곧 가나안 족속에게 미움을 받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리하면 나와 내집이 멸망하리라"고 하면서 심히 당황해 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 기록을 읽으면서 자연히 느끼게 되는 것이 있다. 야곱에게 왜 이러한 큰 환난과 근심이 또 있게 되었던가 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먼저 야곱의 모든 환난은 하나님의 징계였다고 하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아는대로 야곱과 요셉을 비교해 볼 때 그 아들 요셉도 많은 환난을 겪은 사람이다. 그러나 야곱의 환난과 요셉의 환난은 근본적으로 그 성격이 다른다. 셩경에 나타난대로 본다면 요셉의 허물과 죄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는 반대로 죄를 짓지 않고 깨끗이 살고자 했기 때문에 많은 환난을 겪기도 하고 감옥에도 갇혀야 했던 것이다. 그는 또 자기의 형들을 위해서 찾아갔지만 형들은 그를 죽이려고 했다.
이처럼 요셉의 환난은 자기의 죄로 온 쟁계가 아니라, 남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고생하는 그리스도의 고난의 성격을 띠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의 고난은 마침내 큰 영광에 이르게 한 것이다. 그러나 야곱의 환난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의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당하는 하나님의 징계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점에서도 요셉을 그리스도의 그림자로 본다면 야곱은 어디까지나 허물 많은 우리 성도들의 그림자로 보아서 좋을 줄 안다. 이러한 원칙 밑에서 우리는 이제 야곱이 다시금 크게 근심하여 두려워 할 수 밖에 없는 그러한 환난을 당하게 된 이유를 성경에서 쉽게 읽을 수 있다. 그러면 이제 그가 세겜에서 10여년 세월을 살고 있을 때 그의 생활이 어떠했는가를 생각해 보자. 창35:2에 보면 그가 큰 환난을 당했을 때 자기의 가정 식구들을 불러 하는 말이 있다.
"야곱이 이에 자기 집 사람과 자기와 함께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의 우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 가자" 했다. 여기에 보면 야곱은 그때까지도 자기의 집의 우상을 청산하지 못했던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자기의 아내들과 자녀들이 우상을 섬기고 있었던 것이다. 가장으로서의 야곱의 감화가 그 가족들에게 미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가 이미 30여년전 형 에서를 피하여 도망갈 때에 환상중에 하나님의 크신 보호를 체험하고나서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서약한 말이 있다. 창28:20에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했다. 여기에서 우리가 그의 후일 역사를 보면 그의 소원대로 하나님께서는 다 이루어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30여년 동안 그와 같이 했다. 그 소원대로 먹을 양식을 주되 풍성히 주셨고 입을 옷을 주셨고 또 평안히 가나안까지 돌아오게도 했다.
그러나, 야곱은 어떠했는가? 자기의 서원대로 한가지도 실천한 것이 없다.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될 것이라"고 했지마는 아직도 그의 가정에서는 우상을 청산한 흔적이 없었고,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약속했으나 그것을 실천한 흔적도 없고, 벧엘에서 돌기둥을 세운 그 자리에 하나님의 전을 세우겠다고 했으나 가나안 땅에 돌아온 후 10여년의 세월이 흘러간 그때까지도 벧엘을 찾아간 일도 없었다. 이러한 야곱에게 하나님의 두려운 징계가 있게 된것은 당연하 일일 것이다. 야곱은 하나님의 은혜를 막중하게 받고도 그것을 보답할 줄 몰랐다. 자기가 위급할 때는 하나님의 찾으며 서약도 했으나 평안해질 때는 하나님을 찾으며 서약도 했으나 평안해 질때는 그 은혜를 모두 잊어버린 사람이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그는 또 얍복강에서 에서가 400명을 거느리고 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하나님께 간곡히 기도했고 천사에게 맞아 환도뼈가 부러졌을 때는 울며 간구하던 그런 사람이었지만 그 모든 것이 지나간 후에는 다시 잊어버렸다. 하나님께서도 그러한 야곱의 영혼을 깨우치기 위하여 [디나 사건]을 겪게 한 줄 안다. 사실 그 때에 야곱의 영혼은 깨어 났다. 깨끗이 잊어버렸던 옛날의 벧엘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 자기 식구들을 불러 자기 집에서 "우상을 제하고 몸을 정하게 하고 옷을 갈아 입고 이제 벧엘로 가자. 거기에서 나의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자"고 한 것이다. 이러한 일이 있은 후 그는 진정 회개하고 그의 생활은 변하게 됐다.
V. 야곱의 말년
우리가 야곱의 일생을 더듬어 볼 때 장년기에 이르기까지 그의 반생은 심히 세속적이요, 계략적인 사람이었다. 얍복강에서 그는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한 일이 있는데 설교자들은 흔히 해석하기를 그것은 야곱의 간절한 기도라고 하지마는 그가 하나님 앞에 간곡히 기도한 것은 환도뼈가 부러진 후의 일이요. 그 전까지의 일은 하나님께 대적한 악한 행위라고 선지자 호세아는 말했다. 호세아 12:23에 보면 "여호와께서.... 야곱의 소행대로 벌 주시며 그 소원대로 보응하시리라. 야곱은 태에서 그 형의 발 꿈치를 잡았고, 또 장년에 하나님과 힘을 겨루었다"고 했다. 그가 모태에서 그 형의 발 꿈치를 잡을 것이 악했던 것 같이 천사와 씨름한 것은 하나님과 대적한 악한 소행리라고 했다. 가시채를 차는 자의 발이 상할 수 밖에 없는 것 같이 하나님의 뜻에 대적하는 자가 평안할 수 없다.
그는 환도뼈가 부러지고야 말았다. 이처럼 그는 모태에서부터 장년에 이르기까지 그의 인격이나 신앙은 몹시 혈육적이요, 세속적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성도의 당하는 모든 징계가 환난은 오히려 그 인격과 신앙을 정금같이 빛나게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야곱의 역사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이제 그의 말기의 인격이 얼마나 경건하여진 것을 다음 몇가지로 창 43 장 이하의 본문 중에서 찾아보려 한다.
첫째로, 창세기 43:1-2을 보면 " 그 땅 기근이 심하고 그들이 애굽에서 가져온 곡식을 다 먹으매 그 아비가 그들에게 이르되 다시 가서 우리를 위하여 양식을 조금 사라"한 말씀이 있다.여기에 " 양식을 조금 사라"하는 조금이란 말이 있다. 조금이란 말은 필요한대로 조금만 사라는 뜻이다. 많이 사오지 말라는 뜻이다. 여기 이 말은 그의 말년에 큰 흉년이 들어서 먹을 양식을 사려고 그 아들들이 애굽으로 갈때에 한 말이다.애굽에는 그 때 양식이 무진장 있어서 창고 문을 모두 열고 얼마든지 팔고 있을 때이다. 그런데 야곱의 그 가정은 지금 기근으로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야곱의 가정은 지금 기근으로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야곱의 가정은 창46:6에 보면 그때 그렇게 가난한 것은 아니다. 오직 양식만이 없을 뿐이지 소와 양과 모든 재물이 넉넉했다. 얼마든지 양식을 살 수 있는 재물이 넉넉했다.
또 창46:27에 보면, 그 때 야곱의 자녀손들이 도합 70인이라고 했다. 그밖에도 많은 종들이 있었다. 그러한 큰 가정이니 양식도 많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야곱은 조금의 양식으로 만족하려 했던 것이다. 이것은 적은일 같지마는 이 한 마디 말 속에서도 우리는 그의 인생관이 얼마나 변화된 것을 찾아 볼수 있다. 본래 그는 얼마나 탐욕이 많은 사람이었는가, 형의 기업을 탐내고, 외삼촌의 재산을 탐내서 저들을 속이고 그것을 빼앗던 사람이다. 그러나 이제 그의 노경의 형편을 볼 때 그에게는 그러한 모든 탐욕이 없어진 것을 알 수 있다. 본래 창43:1-2의 본문 말씀 중 " 그 땅에 기근이 심하고" 하는 말과 또 "가서 우리를 위하여 양식을 조금 사라"하는 말의 히브리 원문은 대구적으로 되어 있다.그것을 그대로 직역한다면, 즉 [큰 기근]이 있는데 [적은 식량]을 사라고 되었다. [큰 기근]에는 반드시 [많은 식량]이 필요한데[적은 식량]이란 말을 강조한 것은 읽는 자로 하여금 자연히 야곱의 그 변화된 마음을 느끼게 하기 위함인줄 안다. 그처럼 말년의 야곱에게는 그 모든 탐심이 가셔졌음을 느낄 수 있다. 이것도 그가 많은 환난을 통해서 얻어진 하나의 인격적 변화로 안다.
둘째로, 창43:14에 보면 "전능하신 하나님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하는 말씀이 있다. 야곱이 이 말을 하게 된 동기는 그의 아들들이 애굽에 양식을 사러갔다가 그곳에 인질로 남게 하고 다시 또 마지막 아들 베냐민을 데리고 오라는 엄한 명령을 받았을 때에 야곱이 아들들에게 한 말이다. 그가 처음 그 엄한 명령을 받았을 때는 심히 슬퍼했다. 성경에 보면 "너희가 나로 나의 자식을 잃게 하도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고 탄식했다. 그러나 그 후 그는 곧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맡기게 됐다.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이것은 온전히 그의 모든 것을 하나님게 맡기는 그의 신앙적 태도를 보여주는 말이다. 옛날 그의 조부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할 때에 그의 생명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겼던 것이다. 야곱도 드디어는 아브라함의 위대한 신앙을 따르게 됐던 것인 줄 안다. 이렇게 그가 전부를 하나님 앞에 내어 맡길 때마다 그 는 하나님의 놀라운 응답을 보게 됐던 것이다. "내가 잃으면 잃으리로다" 하던 그는 그 아들을 잃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미 잃었던 아들도 도로 찾았다. 시므온도 돌아왔고 요셉도 다시 찾았던 것이다. 요셉의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들을 뿐만 아니라 그가 어떻게 애굽에서 존귀하게 돈 것을 듣게 됐다. 그가 그렇게 큰 기쁜 소식을 듣게 된 것은 그저 슬퍼하면서 근심할 때가 아니다. 믿음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섭리에 맡기고 그 근심과 슬픔을 참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크게 위로 하셨다.그를 크게 기쁘게 했다. 이 한가지 사실 에서도 말년의 그의 신앙이 얼마나 경건해졌는가를 볼 수 있다.
세째로, 노년기의 야곱은 먼저 경건히 제단을 쌓는 하나님 중심의 족장이 된것을 볼 수 있다. 창45:28 이하에 보면 야곱은 자기의 아들 요셉이 죽은줄만 알고 있다가 그가 살아있고 또한 애굽의 위대한 재상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그저 기뻐한 것만 아니다. 그의 아들 요셉의 부름을 받고 그저 기뻐서 애굽으로 달려간 것이 아니다. 그는 먼저 하나님 앞에 감사의 제단을 쌓았다. 창 45:28-46:1에 보면 "이스라엘(야곱)이 가로되 족하도다. 내 아들 요셉이 지금 까지 살았으니 내가 죽기전에 가서 보리라. 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발생하여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 아비의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되..."했다. 이런 일은 과거의 젊은 야곱에게서는 보지 못했던 일이다. 그는 오랜 동 안의 신앙의 슬픈 훈련을 통해서 모든 일에 먼저 하나님을 섬겨야 하고, 하나 님 앞에 예배해야 할 것을 깨닫게 됐다. 그 뿐만 아니다.
네째로, 그의 신앙은 드디어 세상의 소망보다도 하늘나라의 소망을 더 소중히 알았고 현재의 일 보다도 미래의 일에 더 생각이 깊었던 것이다. 그는 눈에 보이는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신령한 것을 더 사모하게 됐던 것이다. 창49:1에 보면 "야곱이 그 아들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모이라. 너희의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 했다. 그는 먼 후일의 일을 바라보는 신령한 믿음의 눈이 열렸다. 사랑하는 자녀들에데 현실만 보지 말고 보이지 않는 먼 후일에 오는 세상을 바라 볼 것을 일렀던 것이다. 또 창49:18에 보면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니이다" 했다. 그는 지금 육신적으로 위대한 애곱의 재상의 아버지로서 모든 사람에게 최대의 존경을 받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세상적인 부귀에 도취되는 그러한 사람은 벌써 아니었다. 그는 고요히 자기의 아들들을 불러 놓고 하늘을 우러러 간구하기를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했다. 이 얼마나 경건한 신앙인가! 그가 청년기에는 하나님의 뜻을 그저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으로 자기의 뜻을 이루어 보려 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이제 그는 먼 후일을 바라보며 주의 구원을 기다리는 경건한 믿음의 족장이 되었던 것이다. 또 48:21에 보면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리라"고 요셉에게 유언을 남겼다. 이 얼마나 은혜스러운 유언인가 생각해 보라. 요셉은 지금 애굽의 비로 왕 다음으로 가는 큰 주권자이다. 그러나 요셉의 눈에는 보이는 그 권세를 그렇게 크게 생각했거나 기뻐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너와 함께 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너희 기업의 땅 가나안으로 갈 것을 요셉에게 유언으로 남겼다 익을 볼찌라도 말년의 야곱은 애굽의 군세와 그 보화보다도 하나님의 언약의 나라 가나안을 더 사모한 것을 알 수 있다. 진실로 야곱은 그에게 당했던 모든 환난을 통해서 그의 신앙은 그렇게까지 경건한 자리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그 믿음의 눈이 얼마나 밝아졌는가는 또한 창48:17이하에 잘 나타나 있다. 거기에 보면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에게 축복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그 때에 야곱의 눈은 말년의 자기 아버지 이삭의 눈과 같이 어두어졌다. 그는 맏 손자 므낫세에게 왼손을 얹고 작은 손자 에브라임에게 바른 손을 얹어 축복하려 했다. 그 때에 요셉이 놀라서 하는 말이 "아버지여, 그리마소서" 하면서 그 손을 바꿔 놓으려 했다. 그 때에 "야곱이 허락지 아니하여 이르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하면서 작은 아들에게 오른 손을 얹어 축복했다 그는 아무리 눈이 어두웠어도 옛날 이삭과 같은 실수를 하지 않았다. 그의 믿음의 눈은 그렇게 밝아져서 하나님의 뜻을 알았던 것이다. 히브리 11:21에 보면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 했다 진실로 야곱이란 이 족장은 많은 환난을 통해서 마침내 그처럼 경건 해지고 그처럼 거룩한 자리에 이르게 됐다.
VI. 야곱의 고난과 그의 성화
야곱이 당한 고난과 요셉이 당한 고난을 생각해 볼 때 그 양자는 전혀 판이한 의미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야곱은 자기의 많은 허물과 죄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였으나 요셉은 허물없이 당한 고난이었다. 요셉의 당한 고난은 일종의 대속적 성격을 띠고 있는 십자가의 고난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수난은 자기 가정의 불순한 형제들의 죄를 짊어진 결과로 온 것이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고난이라는 인간적 비극이 지니고 있는 성격적 의미를 생각 할 수 있게 된다. 자기의 죄로 인하여 당하는 고난은 그로 하여금 성화에 이 르게 하고 대속적인 고난은 그로 하여금 영화에 이르게 한다는 사실이다. 요셉은 그의 모든 수난을 통하여 마침내 영화에 이르렀고 야곱은 성화에 이르렀다. 필자의 이 적은 논문에서는 요셉의 고난은 보류하고 야곱의 고난만을 취급하는데 그가 어떻게 그 고난을 통하여 성화에 이르렀는가 함을 살펴보려 한다. 먼저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그의 어린 시절의 교육과 신앙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한다.
1. 야곱의 받은 교육
창 25:27에 "에서는 익속한 사냥군인고로 들사람이 되었고 야곱은 종용한 사람인고로 장막에 거하니." 하신 말씀이 있다. 여기에서 보는 대로 에서는 외향적인 성격이요 남성적이었으나, 야곱 내향적인 성격에 그 무슨 우열을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야곱 은 그 내향적인 성격 때문에 그 신앙에 결정적인 도움을 받은 것을 사실인 것같다. 에서의 남성적인 성격은 그로 하여금 "들사람"을 만들었으나 야곱은 조용한 성격에 장막에 거하기를 좋아하였기 때문에 부모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많아 가졌을 것을 우리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그는 그의 부모를 통하여 아브라함과 이삭과 자기의 가문에 주어진 하나님의 언약이 얼마나 존귀한 것임을 배웠을 것이다. 특별히 그 어머니 리브가는 아직 그 아들이 모태에 있을 때에 받은 계시 즉 "... 큰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창25:23)" 한 그 말에 따라서 어린 아들 야곱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교육했을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야곱이 하나님의 언약의 존귀성을 알고 어떻게 해서든지 그 언약이 자기에게 이루어지기를 사모하게 되었음은 그의 일찍부터 받은 교육의 결과이 었을 것이다.
2. 야곱의 잘못된 방법
창25:23에 "여호와께서 그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자를 섬기리라."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을 야곱은 인내로써 기다렸어야 할 것이었다. 하나님의 언약을 인간적인 사기적 방법으로 성취하려 한 야곱과 리브가의 태도는 근본 적으로 잘못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야곱의 환난은 여기에서 부터 시작된다. 그 어머니 리브가도 슬픔을 당한다. 에서의 분노를 본 리브가의 말이 " 내 아들아 내 말을 쫓아 일어나 하란으로 가서 내 오라버니 라반에게 피하여 네 형의 노가 풀기기까지 몇날 동안 그와 함께 거하라(창27:43절.)" 했으나 야곱은 " 몇날"이 아니라 20년의 피난생활을 해야 했고(창31:41), 그 어머니 리브가는 다시 그 사랑하는 아들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이것은 곧 리브가가 받은 하나님의 징계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또 한편 장막에만 있기를 좋아하던 조용한 성격의 야곱이 20년동안,아니 거의 일평생을 "들사람"으로 살아야했던 것도 육신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큰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의 잘못된 방법은 이러한 곤고를 자초하게 되었다.
3. 은혜를 잊어버린 야곱
창28:16에 "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 말씀은 야곱이 천사들의 현현을 본 후에 잠이 깨어나서 한 말이다. 위험한 지경에서 하나님의 보호를 체험하고 그는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그는 꿈 속에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언약이 자기에게 계승될 것을 계시로 받게 되었다.(창28:1314). 또 그가 어디에 가든지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키시며 인도하실 것을 약속하였다. (창28;15). 그는 거기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돌을 가져다 기둥으 로 세우며 하나님 앞에 서약했다. 그의 서약이 어떻게 간절한 것임을 그가 그위에 기름을 부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 기름은 그 어머니가 피난 길에 나선 아들에게 준 유일한 노자일지도 모른다. 그것을 아낌없이 부었다는 것은 그의 간절한 헌신을 의미한다고 본다. 그러나 슬프게도 그의 감격과 그 헌신과 서약이 오래 지속된 흔적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소원대로 (창28:20) 어디에 가나 그와 함께 계셨고 그의 길을 지키었고 먹을 양식을 주었고 입을 옷을 주셨다. 마침내는 아비의 집으로 편안히 돌아가게도 하셨다. 그러나 그는 그 서약을 오랫동안 지키지 않았다. 그가 서약한 대로(창28:2122) 우선 "여호와는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했지마는 그의 가정에는 20년 내지 30년간이나 우상을 그대로 두고 처자들이 그 것을 섬겨도 방치했던 것이다. 또 야곱은 "벧엘에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라 했지만(창28:22) 그는 그 후 30년 가까이 지나면서도 그곳 벧엘을 찾은 흔적이 없다가 디나 사건 이후 비로소 벧엘을 찾게 되었던 것이다.(창35:1 ff.)
물론 그가 하나님 앞에 약속한 십일조를 (창28:22) 약속대로 실천했다는 기록도 성경에 없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요구를 채우셨고 그에게 은혜를 계속 베푸셨건만 그는 그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살았던 것이다. 디나 사건은 진실로 그러한 야곱의 영혼을 깨우치기 위한 하나의 징계였다고 보아 좋을 것이다. 사실 야곱은 그때에 비로소 영안이 열려 벧엘을 다시 찾게 되었던 것이다 (창35:1). 물론 그 가정의 모든 우상을 청산하고 (창35:2).
4. 하나님과 대항한 야곱
창32:24에 "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치매..," 하신 말씀이 있다. 여기에서 야곱이 씨름했다는 말을 성경 해석자들은 흔히 야곱의 간절한 기도와 상징으로 보는 경향이 있으나 그것은 오해인 것이다. 호 12:23에 보면 그것은 온전히 하나님을 대항한 악한 소행이라고 했다. 가시채를 차는 자의 발이 상할 수 밖에 없는 것같이 하나님을 대항한 그에게 평안이 있을 수 없었다. 그는 환도뼈가 상하고야 그 싸움은 끝이 났다. 여호와의 사자가 밤새도록 져주었다는 사실은 야곱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기 위함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위골이 되기까지는 그의 영안이 열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그 위골로 인하여 장구한 세월 치료를 요했던 것도 짐작이 된다. 그 기간은 그에 게 있어서 깊은 반성의 기간이요, 회개의 기회였을 것이다. 그가 환도뼈가 부러진 후 울며 간구했다.(호12:4)했으니 그때부터 그의 회개는 시작되었음이 분명하고 그 때에 이스라엘이란 복된 이름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그에게 회개의 열매를 볼 수 없었던 것은 그의 세겜에서의 10년간의 생활이(가정의 우상을 청산치 못한) 충분히 증명한다고 생각된다. 그는 세겜에 그처럼 오래 살면서도 옛날에 벌써 하나님의 전을 세우겠다고 그렇게 서약했던 그곳, 벧엘을 찾아가 본 흔적조차도 없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는 그에게 그 무서운 디나의 사건을 당하게 한 것이다.(창34). 그것은 그에게 준 가장 큰 징계의 하나였다고 본다. 그러나 그가 얍복강에서 울며 간구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크게 응답하여 주신 것이 사실이다 (창32:28,호12:4-6).
그런데 그가 그때에 그처럼 울며 간구한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생각컨데 그것은 형 에서의 손에서 구원하여 달라는 애원이었을 것이다. 창 32:6에 보면, 에서는 벌써 야곱이 오는 것을 알고 400명을 거느리고 출발 하였음을 본다. 그 400명이란 야곱을 치기위해 인솔하고 떠난 하나의 부대이었 을 것이다. 그러나 야곱은 그들을 두려워 하지 않고 믿음으로 그를 맞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야곱에게는 그러한 믿음이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에 서의 부대를 두려워하지 말도록 벌써 가르쳐 주신 일이 잇다.
창 32:12에 " 야곱이 그 길을 진행하더니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나지라 약보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이 얼마나 놀라운 계시였던가? 여기 "마하나임"이란 이중부대(double camps)를 의미한다. 에서의 400명 부대를 이기고도 남을 수 있는 여호와의 부대를 의 미한다. 이대를 이기고도 남을 수 있는 여호와의 부대를 의미한다. 이러한 놀라운 계시를 받은 야곱이 그처럼 에서의 부대를 두려워서 처자를 먼저 앞세우고(창32:22) 자기만이 홀로 남아 얍복 나루를 건너지 못하고 하회를 보려함은 참으로 비겁한 행위가 아니었을까? 그러나 그러한 야곱에게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푸셨다. 에서의 부대는 야곱을 치지 않았다. 형 에서는 오히려 울며 그를 만났다(창33:4). 아, 어찌된 일 일까?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인 줄 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위하여 에서의 마음을 감동시킨 것이라고 본다. 창31:29에 " 너를 해할 만한 능력이 내 손 에 있으나 너희 아버지 하나님이 어제 밤에 내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고 라반의 마음을 감동시킨 하나님께서 에서의 마음을 또한 감동시킨 것이 아니겠는가? 크게 분노한 외삼촌의 마음을 감화시킨 하나님게서는 에서의 마음을 또한 감화시켜 저를 해하지 않게 하심이 분 명하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지키시며 보호하셨다. 그러나 야곱에게는 그에 합당한 신앙의 열매가 없었다. 디나사건 뿐만 아니라 요셉을 잃어버리는 비극도 어떤 의미에서는 야곱에게 준 하나님의 징계였다. 그의 130년의 일생이 "험악한 세월을 보낸"(창47:9) 것도 그의 간악한 성품과 불신앙을 깨우치기 위한 하나님의 징계라고 보아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러한 징계들을 통하여 야곱은 점차 성화의 놓은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그는 어느 정도의 성화에 이르렀던가 이제 그것을 살펴보기로 한다.
5. 야곱의 성화
많은 고난을 통하여 노년기에 이르러서의 야곱의 인격은 성화되고 신앙은 크게 심화된 것을 우리는 여러가지 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1) 노년기의 그에게서는 우선 탐심이 없어진 것을 본다.
창43:12에 "그 땅에 기근이 심하고 그들이 애굽에서 가져온 곡식을 다 먹으매 그 아비가 그들에게 이르되 양식을 조금 사라." 했다. 히브리 원문 성경에서는 "양식을 조금" 사라가 아니라 "적은 양식"을 사라로 되어 있다. 이 말은 곧 앞의 " 큰 기근"과 잘 조화되며 대귀되는 말이 냐. 이 말에서 우리는 야곱의 인격의 변화를 찾아본다. 그는 본래 탐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창30:37:43). 그러나 그러한 탐심은 이제 그에게서 온전히 떠났음을 상상할 수 있다. 이제 생각해 보라. 그의 가족은 70인이었다 (창 46:27). 또 그에게는 많은 우양이 있었다(창46:32). 이러한 그의 "큰 기근"을 넘기 위해서는 "많은 양식"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제 그러한 양식을 원한 것이 아니라 "적은 양식" 을 사오라고 했다. 그에게 많은 양식을 살 수 있는 교환물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앞서 말한 대로 그에게는 많은 우양이 남아 있었다. 그밖에도 많은 재물이 있었다 (창46:6). 그리고 요셉의 창고에서는 얼마든지 양식을 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야곱이 적은 양식을 요구한 것은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에게 탐심이 없어졌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제 자기만을 생각하는 이기심에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 남을 생각하는 동정심이 얼마나 깊어졌음을 우리는 이적은 문구 (적은 양식이란) 에서 찾아본다.
(2) 하나님의 섭리를 의지하는 그의 믿음이 깊어졌다.
과거에 요셉을 잃어 버리고 슬퍼하던 그는 (창37:33ff) 이제 온전히 범사에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의지했다. 창43:14에 전능한 하나님이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들려 보내게 하시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 게 되면 잃으리로다. 했음을 본다. 물론 우리를 창42:36의 탄식의 말을 기억한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 시험이었다. 그 후 그는 온전히 하나님의 섭리에 의 지했음을 상기의 창43:14에서 본다. 거기에서 특별히 그는 하나님을 엘쇠다이(우리 한국 역은 전능하신 하나님)로 불렀다. 하나님에 대한 이 호칭은 야곱의 입에서는 지금 처음 나오는 말이었다. 하나님에 대한 이 호칭은 야곱의 입에서는 지금 처음 나오는 말이었다. 엘솨다이의 이 명칭은 이른바 야웨와 대립되는 말로서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깊은 신앙을 표현하는 말이다. 이 호칭은 본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 약을 세우실 때에 계시된 하나님의 명칭이다.(창17:148:328:343:14,출6:3) 물론 이 명칭은 하나님의 능력을 강하게 표현하는 말로서 그의 은혜의 확실성 을 계시하는 호칭이다. 이처럼 엘사다이의 호칭은 하나님께서 언약을 세우시고 그것을 그의 능력으로서 성취하실 것을 믿게 하는 이름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여호와라고 할 때에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것과 같이 엘솨다이라고 할 때 또한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야곱이 처음으로 (창43 :14) 하나님을 엘사다이라고 부르면서 은혜 베푸시기를 원한 것은 자기의 받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확실한 신앙을 고백한 것으로 본다. 그는 하나님의 그 언약을 생각하면서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라" 했다. 이것은 옛날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던 "여호와 이레"의 신앙을 (창22:8-14,히11:1819) 방불케 한다. 그가 이러한 신앙을 가지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시므온과 베냐민을 도로 돌릴뿐만 아니라 요셉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게 했고 그가 어떻게 영화롭게 된 것을 비로소 알게 했다.(창45:25-28)
(3) 노년기의 그는 아브라함같이 먼저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는 족장이 되었다.
창45:28-46:1에 "이스라엘이 가로되 족하도다 내 아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았으니 내가 죽기 전에 가서 보리라. 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발행하여 브엘세바에 이르러 아비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니..." 했음을 본다. 이처럼 그는 요셉의 살아 있음을 알고 그를 만나고자 애굽으로 가려 할 때 먼저 브엘세바로 가서 하나님 앞에 희생 제물로 드리는 제단을 쌓았다. 이것은 그의 많은 환난을 통하여 얻은 신앙의 열매인 줄 안다. 그가 애굽을 향하여 떠나려 한 것은 옛날 아브라함이나 이삭같이 (창12:14ff.26:1,2) 기근 을 피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다만 아들 요셉을 죽기전에 보려고 가려했던 것이다.(창45:28). 그러나 그는 마음에 두려움이 있었다. 약속의 땅을 잠시나마 떠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그는 알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애굽으로 가려 할 때 그것을 두려워한 것은 당연한 일인 줄 안다. 그의 그 마음을 보신 하나님께서 는 "애굽에 내려 가기를 두려워 말라(창46:3)"고 했고 다시 올라올 것을 약속했다. 야곱이 애굽으로 떠나기를 두려워했다는 그 사실만도 (그때의 그의 의도는 잠간 아들 요셉을 만나보려는 것 뿐이었지만) 그의 신앙의 깊이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이러한 신앙의 태도는 일찌기 아브라함이나 이삭에게서 볼 수 없었던 것이다.(창12:10ff.창26:1ff.참고)
(4) 노년기에 있어서 그의 육신의 눈은 어두웠으나 그의 심령은 눈을 밝았음을 본다.
창 48:10에, 이스라엘의 눈이 나이로 인하여 어두워서 보지 못하더라. 하셨는데 말년의 야곱은 옛날 그 아버지 이삭과 같이 눈이 어두워졌다(창27:1참고) 그러나 그는 이삭과는 크게 달랐다. 창48:17에서 보는 대로 야곱은 요셉 의 도 아들에게 축복할 때에 작은 아들 에브라임에게 오른손을 얹고 큰 아들 므낫세에게는 왼손을 얹었다. 요셉은 말하기를 "아버지여 그리 마소서(창48:18 )" 하면서 아버지의 손을 바구려 할 때에 야곱은 허락치 않으며 하는 말이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면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 아 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창 48:1920) 했다. 이처럼 야곱의 영언은 밝아서 두 아들 중 누구에게 축복해야 할 것을 알았다. 이 한가지만 보아도 야곱은 이삭과 다르다 (창27:21-32참고). 창 27:33에 보면 이삭은 야곱에게 축복한 후 에서가 들어왔을 때 "심히 크게 떨었다"고 했다. 그것은 에서가 두려웠던 것은 아니었다. 자칫하면 하나님의 뜻을 크게 어길 뻔했던 자기의 실수를 하나님 앞에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러나 야곱은 이삭같지 않았다. 야곱은 그 권속들의 제사장으로서도 허물없는 제사장이었다. 육신의 눈이 어두웠음에도 그처럼 영안이 밝았던 것은 그의 신 앙의 깊이와 성화의 수준을 넉넉히 보여주고도 남음이 있다 (히11:21 참고).
(5) 노년기의 그는 또 위대한 선지자였다.
창49:1에 "야곱이 아들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모이라 너희의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고 하면서 그 아들들에게 예언적인 축복을 한 것이 있다. 그는 현실의 눈은 어두웠으나 먼 "후일"을 보는 믿음의 눈이 열린 선지자였다. 특별히 창49:18에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했는데 이는 곧 하나님의 구원을 사모한 사람이었던가 함을 보여 준다.
(6) 노년기의 그는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을 심히 사모한 사람이었다.
창48:21에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들어가게 하시려니와." 하신 말씀이 있다. 자, 생각해 보라. 요셉은 지금 애굽의 최고의 권좌에 올라 있다. 그러나 야곱은 요셉의 받은 애굽의 그 영화를 기뻐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그를 인도하여 약속의 땅에 돌아 가게 하실 것을 고대했다. 이것은 애굽의 보화 보다도 하나님의 나라와 그 약속을 더 사모한 모세의 믿음을 (히 11:24-26) 방불케 한다.
말년에 그는 성경에 나타난 어느 족장보다도 어느 지도자 보다도 더욱 경건했고 신앙과 성화의 최고의 수준에 이르렀다고 생각된다. 본래 간교한 성품의 그가(창27:35) 어떻게 그처럼 성화될 수 있었을까? 그것은 곧 그의 당한 환난이었다. 성도의 당하는 환난은 그들로 성화에 이르게 하는 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