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스크랩] 요셉의 신앙

kaporet 2006. 5. 16. 12:11
 

믿음의 사람 요  셉

김희보(총신대 신대원 교수)


I. 요셉의 유년 시절


    창세기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다면 1장-11장까지는 하나님께서 우주와 만물과 인류를 창조한신 것을 그 인류들이 어떻게 타락하게 된 것을 기록했다. 그리고 둘째 부분인 12장-50장까지는 그 타락한 세대에서 한 사람 아브라함을 택했고 그의 자손들인 이삭과 야곱과 요셉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한 민족을 이 루게 하시고 그 이스라엘을 통해서 온 인류의 구속이 어떻게 이루어지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기록한 것이다. 흔히 이스라엘 4대 족장이라고 하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을 말한다. 이 사대에 걸친, 네 사람의 시대를 가리켜서 족장시대라고 한다. 창세기 12장-50장까지는 이 4대 족장들의 생애를 기록한 역사이다. 여기에서 는 이 4대족장 중 맨 마지막 족장인 요셉의 역사 중에서 특별히 어린 시절의 환난과 슬픔에 대해서 말하려고 한다.

 

    그런데 그 아들 요셉은 어릴 때부터 그 아버지에 못지않은 많은 환난과 곤고를 겪어야 했던 족장이었다. 그러나 요셉의 환난을 그 아버지의 화난과 비교해 볼 때 근본적으로 그 다른 점을 발견하게 된다. 즉 야곱의 환난은 그의 죄 값으로 온 환난이었다. 그는 본래 모태에서부터 형의 발뒤꿈치를 잡은 사람이요,그 형을 속이고 아보지를 속여서 그 형의 기업을 빼앗은 사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자기의 외삼촌을 속이고 그 재산을 탐내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많은 환난의 징계를 주었던 것이다. 그러한 징계와 환난을 겪어야 했던 것이다. 오히려 그는 거룩히 살고자 하면 할수록 더 많은 고생을 참아야 했던 것이다. 참으로 옛날부터 오늘날까지 이 세상이란 묘하다. 사람들은 자기가 범한 죄 값으로 환난을 겪어야 하는가하면 다른 한 편에서는 아무런 죄 없이 오히려 더 진실하고 더 순결하기 때문에 환난과 곤고를 겪어야 하는 수도 있다. 우리는 요셉의 생애에서 특별히 그것을 발견하게 된다. 흔히 성경에서는 그러한 고난을 십자가의 고난이라 혹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다고 말하고 있다.

 

    요셉은 벌써 일찌기 십자가의 고난을 짊어지고 환난을 겪은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고난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마침내 요셉은 큰 영광의 면류관을 얻은 사람이 되었다. 그렇지만 그러한 영광을 얻기까지 그는 많은 슬픔을 당한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의 그는 자기의 형들의 시기와 질투를 받아 큰 우울에 빠졌다. 꼭 죽을 자리에서 구원을 받았으나 다시 그 형들은 그를 먼 나라 애굽의 종으로 팔아 버렸다. 종살이를 하던 그는 다시 애매하게 큰 죄의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러면 그는 무엇 때문에 그런 고생을 겪어야 했을까? 결론부터 말한다면 그는 자기의 죄 때문이 아니라 자기의 가정의 죄 또는 전혀 관계 없는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당한 환난이요, 희생이었다. 이제 몇 가지로 그것을 살펴 보자.

 

    첫째, 그는 그 가정의 죄를 짊어진 희생제물이었다. 그의 아버지 야곱의 가정에는 죄가 많았다. 우선 그 아버지 야곱은 첩이 많았다. 그들 중에는 말할 수 없는 시기와 질투가 있었다. 그 가정은 늘 평안치 않았다. 그들은 자녀들을 낳는 걱도 서로 경쟁했다. 창29:35에 보면, 그 아내 레아는 계속해서 네 아들을 낳았다. 르우벤,시므온,레위, 유다 이렇게 경쟁적으로 네 아들을 낳았다.

    둘째, 아내 라헬은 그것을 시기하여 자기의 몸종인 빌하를 남편에게 주어 두 아들을 낳게 했다. 단과 납달리, 두아들이다. 여기에서 네 아들을 낳은 첫 아내 레아는 다시 그것을 시기하여 자기의 몸종 실바를 남편에게 주어 첩을 삼게 하고 두 아들을 또 낳게 했다. 갓과 아셀이 그들이다. 그후 레아 자신도 또 두 아들, 잇사갈과 스블론을 낳았다 그후 끝으로 라헬 자신이 또 두 아들 요셉과 베냐민을 낳았다. 그러한 가정이 평안할 수는 없다. 물론 신앙적으로도 볼 것이 없었다. 청 35:2에 보면, 야곱의 아내들과 자녀들은 이방과 각종 우상을 다 섬기고 있었다. 야곱은 그것을 알면서도 가정을 신앙적으로 다스리지 않았다. 그 아들도 또 자기 어머니들 같이 서로 시기하엿다. 마침내 그 형들은 어린 요셉을 죽이려했다. 이 얼마나 살벌한 가정이었는가. 이처럼 도덕적으로,신앙적으로 타락한 야곱의 가정의 죄를, 어린 요셉이 그것을 담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죄 없는 요셉은 자기의 가정을 죄를 짊어지고 소위 아사셀의 어린 양과 같이 제물이 되어 멀리 멀리 버림을 받게 된 것이다.

    세째로, 요셉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은 아들이요, 또 그 자신을 죽임을 당하는 자리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그는 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을 받은 아들이었다. 창 37:3에 보면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야곱(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보다 그를 깊이 사랑하여...." 했다. 야곱이 그를 그처럼 사랑한 이유는 성경에 보면 노년에 얻은 아들인 때문이라고 했다. 물론 그 말에는 좀 분명치 않은 데가 있다. 요셉보다 더 늦게 얻은 아들, 베냐민이 있었다. 그러나 약보은 베냐민보다 요셉을 더 사랑했다.  히브리 원문에는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하는 이 말이 어떤 사본에는 "요셉은 지혜가 있는 아들이므로"이렇게도 되어 있다. 야곱이 요셉을 특별히 사랑한 이유는 그가 노년에 얻은 아들일뿐더러 그는 특별히 지혜가 있고 총명했기 때문인 줄 안다. 물론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자연히 느껴지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그것은 가장 사랑하는 아내 라헬의 첫 아들인 때문이다. 사실 야곱은 그 어느 아내 보다도 라헬을 더 사랑했다. 라헬보다 레아는 물론 먼저 얻은 아내였지마는 마음으로 라헬을 레아보다 앞서 먼저 사랑했고 또한 후에도 그를 더욱 사랑했다 마음으로는 라헬을 정처로 생각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그는 오랫동안 생산을 하지 못하다가 드디어 첫 아들을 낳았다. 그러므로 그가 낳은 요셉을 그 어느 아들보다도 귀히 생각했고 사랑했던 것으로 안다. 그는 요셉을 마음의 장자로 생각한 것 같다. 그 증거로서 창37:3에 보면 "야곱은 요셉에게 특별히 채식옷을 지어 입혔다"고 했다. 여기 이 채색옷이란 말은 그저 어여쁜 옷이란 뜻만이 아니다. 삼하 13:18에 보면 "다말이 채색옷을 입었으니 출가하지 아니한 공주는 이런 옷으로 단장하는 법이니라" 한 말이 있다. 채색옷이란 어린 공주들이 입는 긴 옷이었다. 특별회 공주가 아니라도 다른 사람과 구별하기 위해서 귀한 자녀에게 그의 단장으로 입히는 옷이 채식옷이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요셉이 입은 채식옷은 장자의 예복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야곱은 요셉을 마음에 장자로 구별하여 키운 모양이다.

 

    또 이런 일이 있다. 창37:11에 보면, 요셉이 꿈을 꾸고 하는 말이 "형들이 묶은 곡식단이 요셉이 자기가 묶은 곡식단에 와서 절하더라" 하는 말을 했을때 그 형들은 그 말을 듣고 분히 여기며 시기하되 그 아비 야곱은 " 그 말을, 마음에 두더라" 했다. 이것은 분명히 야곱의 마음에 장차 요셉은 장자의 권위를 갖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증거가 되는 줄 안다. 이 모든 일들이 있으면 있을 수록 그 아버지는 요셉을 더욱 사랑하게 됐고 그 형제들은 더욱 그를 시기하게 됐던 것이다.

 

    본문 창 37:4에 보면 "그 형들이...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언사가 불평하였더라" 했는데 이것은 우리의 번역이고 히브리 원문에는 "그에게 평안하냐고 인사도 않도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불평 정도가 아니라 그 형들은 요셉과 한 집에 살아도 인사말고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날이 갈 수록 그 형들은 그 형들은 요셉을 미워했다는 것을 성경은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반대로 요셉은 그렇지 않았다. 형들을 사랑했다.창37장 이하의 요셉의 역사를 보면 그가 그 형들을 어떻게 사랑했는가 하는 말로 가득차 있다. 물론 후일의 일이었지만 그는 초라한 형들의 모습을 보고 골방에 뛰어들어 가서 슬피 목놓아 울었다는 기록이 있다. 사실 요셉은 형들을 사랑했다 본문 37:13에 보면 "야곱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 형들이 세겜에서 양을 치고 있으니 너를 그들에게 보내리라" 그 때 요셉이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아버지요, 내가 가겠나이다" 했다. 그는 압지의 명령이 떨어지자 지체하지 않고 멀리 형들의 소식을 알기 위하여 세겜으로 찾아갔다. 그러나 형들을 찾지 못하고 세겜 광야에서 그가 방황하며 있을 때 어떤 사람이 그의 헤매는 모습을 불쌍히 여겨서 그 내용을 물었다. 그 사람 말이 "그들이 여기를 떠나 더 멀리 도단으로 갔느니라" 했을 때 그는 다시 멀리 그것으로 찾아갔다. 형들은 그를 그렇게 미워했건만 요셉은 형들을 그렇게 염려했고, 생각했다.


II. 요셉의 환난


    세겜에서 양을 치고 있는 형들의 안부를 염려하는 아버지의 명령을 받아서 형들을 찾아간 요셉은 세겜에서 형들을 만나지 못하고 더 멀리 북쪽 도단이란 곳 까지 찾아갔다. 그처럼 수고로이 찾아 오는 요셉을 그 형들을 어떻게 대했을까 창37:18 이하에 보면 "요셉이 형들을 찾아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 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 서로 말하기를 꿈 꾸는 자가 오는도다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 먹 었다 하자. 그 꿈이 어떻게 되는 것을 우리가 볼 것이니라" 이렇게 기록된 말이 있다. 그들은 사실 그 말 그대로 실천했다. 그들은 요셉을 잡아서 그의 입은 채색옷을 벗기고 구덩이에 던졌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장남 르으벤과 유다라는 형은 좀 나은 편이었다. 다른 형제들은 요셉을 당장 죽이려 했으나 르우벤은 요셉의 피를 흘리지 않기 위하여 구덩이에 빠치기로 제안한 것이요, 또 그 후 유다는 그를 다시 건져서 애굽으로 가는 사람들에게 종으로 팔자고 했던 것이다.  창 37:28에 보면, 그들은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 올리고 은 20개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았다고 했다. 창42:21에 보면 그 때에 요셉은 형들에게 살려 달라고 애걸하면서 괴로워 했다고 했다. 그러나 그 형들은 그의 최후의 애걸도 들어주지 않았다. 얼마나 잔인한 형제들이었는가? 그렇게 되어서 요셉의 고난은 시작됐다.

 

    애굽에 팔려간 요셉은 17세의 소년으로서 그곳 관리인 보디발의 집의 종이 되었다. 그가 그 주인에게 얼마나 총성했는지 성경에 잘 나타나 있다. 창39:4에 보면 "요셉이 그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으로 가정총무를 삼고 자기 소유를 다 그 손에 위임하니...." 한 말씀이 있다. 이 말은 요셉이 어떻 게 그 주인에게 충성했는가를 보여 주는 말이다. 특별히 여기 "요셉이 그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하는 말 중에서 [섬기매]라는 원어(솰라하)는 최대의 봉사와 충성으로 섬기는데 사용된 말이다. 열왕기서에 보면 "엘리사가 엘리야를 수종들더라" 했는데 여기에 수종든다는 말이 똑같은 말이다. 엘리사가 엘리야를 어떻게 충성스럽게 섬기며 봉사했는가. 겉으로만 섬긴 것이 아니다. 진심으로 섬겼다.

 

    요셉이 보디발의 가정에서 그와 같이 진심으로 충성을 다하여 섬겼다는 말이다. 시편 103:21에 보면 "여호와를 봉사하며 그 뜻을 행하는 너희 모든 천군이여... .." 하는 말이 있다. 여기 천사들이 "여호와의 뜻을 행하며 봉사한다"는 이 말이 또한 같은 말이다. 천군천사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섬기듯이 요셉도 자기 주인에게 그렇게 섬겼다는 말이다. 히브리어[Oxford 사전]에 의하면 요셉이 그 주인 보디발에게 "섬겼다"는 그 말은 본래 인간이 하나님을 섬긴다는 종교적 봉사에 사용되는 말이라고 했다.

  이처럼 요셉은 보디발의 가정에 종이 된 후에 그 가정을 섬기기를 꼭 하나님을 섬기듯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충성을 다하여 섬겼던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요셉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본분 창39:2에 보면,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여호와께서 범사에 형통케 하셨음을 보았더 라" 했다. 이처럼 그 주인까지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을 알고 그에게 모든 소유를 맡겼고 그로 그 가정의 총무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요셉에게 또 다른 어려운 환난이 닥쳤다. 창39:7 이하에 보면, 요셉은 그 모양이 준수함으로 그 주인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받게 되었다. 처음에는 눈짓으로 유혹을 받았으나 다음에는 날마다 말로 청했다고 했다. 창39:12에 보면 마침내는 옷을 잡고 강요하게 되었다. 그 때 요셉은 그에게 거절하는 말이 "나의 주인께서 주인의 가정의 모든 것을 다 내 손에 맡기고... 나를 그처럼 신임했는데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얻겠나 이까" 하면서 옷을 벗기운 채 도망을 쳤다. 성경은 요셉의 받은 이 유혹을 아무런 숨김 없이 구체적으로 기록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당시 사회의 도덕적인 부패상을 여실히 나타내 보였고 또 그러한 환경 중에서 어떻게 요셉이 타락하지 않고 순결을 지켰던가 하는 것을 잘 보여주려 했던 것이다.

 

    말이 좀 달라지지만 창38장에 보면 요셉의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그 형 유다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가 자기의 며느리를 기생으로 잘못 알고 범한 죄를 구체적으로 기록했다. 이런 말들은 성경에 있을 수 없는 음탕한 이야기들이지만 성경은 사양치 않고 그런 것을 기록했다. 이것은 다 요셉의 살던 시대의 부패상을 보여주는 말이다. 유다는 그 형제들 중에 그래도 어진편이요, 순진한 편이다. 그러나 그러한 성적 범죄를 저릴렀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에게 돌아오는 장자의 명분을 잃게 되었다 (대항5:1). 창세기 38장은 유다가 성적 시험에 넘어진 것을 기록한 것이라면 창세기 39장 요셉이 어떻게 그러한 성적 시험을 이기고 순결을 지켰는가를 기록해 준 것이다. 그처럼 해서 그는 하나님 앞에서는 범죄하지 않았으나 세상편으로는 그만 죄인이 되어서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그가 왜 감옥에 갇히게 되었던가는 이제 더 말할 필요가 없는 줄 안다. 그는 그만 보디발의 아내의 거짓 고발을 당하여 감옥의 죄수가 됐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가 갇히 감옥은 보통 감옥이 아니라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라 했다. 창39:20에 보면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넘으니 그 감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이 감옥은 보통 잡범을 가두는 감옥이 아니라 왕의 직속되는 고급관리들이 범죄할 때에 가두는 감옥이었다. 요셉이 이처럼 특별 대우를 받게 된 것이 이상한 일이다. 본래 옛날 애굽의 법률에서는 강간 미수범은 1,000개의 태장을 맞고 만일에 피해자의 고발이 있는 경우에는 사형에 처했다고 한다. 그런데 요셉은 태장도 맞지 않았고 물론 사형도 당하지 않았다. 감옥에 갇혀도 고급관리들의 미결범들이 갇히는 곳에 같이 갇혔다. 물론 여기에는 여러가지 설명이 있다. 그 설명 중 하나는 애굽의 재판관은 보디발의 아내의 고발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재판관의 조사의 결과로는 요셉에게 큰 혐의와 증거가 없었으나 고급관리의 고발인 때문에 부득이 그 사건을 취급하고 요셉을 동정하여 특별 감옥에 그를 수 용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마치 후에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여야 한다는 무서운 죄명으로 고발을 당했을 때 총독 빌라도는 긍게게서 그럴만한 허물을 발견하지 못했으나 유대인들의 마음을 사기 위하여 허물을 발견하지 못했으나 유대인들의 마음을 사기 위하여 예수를 넘겨 주었던 것과 흡사한 데가 있다. 사실 요셉의 당한 고난은 예수님의 당한 고난과 유사한 데가 많다. 그는 불순한 가정의 죄로 말미암아 형제들의 시기를 받았고 또 형제들의 죄로 말미암아 형제들의 시기를 받았고 또 형제들의 죄로 말미암아 깊은 구덩이에 빠져 죽을 뻔했고 또 다시 팔리워서 이방의 종이 되었으나 그 주인의 아내의 음란한 죄로 말미암아 그는 애매하게 옥중 죄수가 되었다. 그는 순결하게 살고자 하면 할 수록 더욱 큰 시련을 당해야 했던 것이다. 이런 고난을 가리켜 성경은 십자가의 고난이라고 한다.

 

    요셉은 자기에게 당한 이러한 고난을 어떻게 감당했는가? 그는 애매히 감옥에 갇히게 되었어도 누구를 원망한 일이 없다. 구태어 자기를 변명하지도 않았다. 또 형들의 모함에 빠져서 구덩이에 빠치우고 종으로 팔리우게 될 때에도 형들에게 울며 애원한 일은 있어도(42:21) 형들을 원망한 일은 없었다. 불평한 일도 없었다. 그는 끝까지 고요히 참았었다. 슬픔도 참고 억울함도 참았었다. 그는 후일 큰 권세를 잡은 후에도 형들에게 원수를 갚으려 한 일이 없었고 , 보디발의 아내에게도 그러한 일이 없었다. 그는 오히려 끝까지 그렇게도 고약했던 형들을 위하여 살았던 사람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요셉과 함께 하셨다. 본문 창39:21 이하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전옥에게 은혜를 입혀서 요셉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모든 죄수를 요셉의 손에 맡기고 모든 사무를 그에게 맡겨 처리케 했다고 했다. 이것도 생각해 보면 얼마나 큰 은혜인가. 요셉은 보디발의 한 가정의 일에 충성했더니 마침내 그 가정의 총무가 되었고 그가 거기에서 쫓겨나서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으나 그 감옥에서 충성했더니 마침내 그 가정의 총무가 되었고 그가 거기에서 쫓겨나서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으나 그 감옥에서 충성하니 이번에는 그 감옥 안의 큰 일들을 맡게 되었다. 마침내 그는 한 나라의 큰 일을 맡게 되었고 큰 영광을 받게 됐던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유익케 하신 것이다.


III. 요셉의 영광


    요셉이 비록 감옥에 갇힌 몸이 되었지마는 그런 중에도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 그에게 임한 모든 환난이 오히려 그에게 유익하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는 창41장을 중심으로 해서 이제부터 그의 앞 길이 어떻게 형통했으며 그가 어떻게 애굽의 큰 주권자인 재상이 되엇는가를 말하고자 한다. 창40-41장에 보면 거기에 꿈 이야기 두개가 있다. 하나는 옥중에 갇힌 애굽의 두 관원장이 본 꿈이요, 다른 하나는 그후 애굽의 바로 왕이 꾼 꿈이다. 먼저 옥중에서 되어진 일이다. 어떤 아침 감옥에 갇히 두 장관이 근심하며 수심에 잠겨 있었다. "당신들이 어찌하여 근심 빛이 있나이까?" 요셉이 물었다.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 없도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나이까, 청컨대 내게 고하소서" 성경 본문에 자 세히 기록된대로 요셉은 그 꿈을 해석해 주었고 그 꿈 그대로 떡 맡은 관원장은 죽었고 술 맡은 관원장은 해방되어 다시 복직하게 되었다. 창 41장에 보면, 그로부터 만 2년 후 바로 왕이 또 한 꿈을 꾸게 되었다. 본문에 기록된 대로 꿈에 그가 나일강 하수가에 섰는데 "보니 아름답고 살찐 일곱 암소가 하수에서 올라와 갈밭에서 뜯어 먹고, 그 뒤에 또 흉악하고 파리한 일곱 암소가 그 아름답고 살찐 소를 먹은지라..... 바로가 곧 깨었다가 다시 잠이 들어 꿈을 꾸니 한 줄기에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그 후에 또 가늘고 약하고 마른 일곱 이삭이 나오더니 그것들이 오히려 무성하고 충실한 이삭들을 삼킨지라" 이 꿈은 바로에게 큰 충격을 주었던 것이다. 그는 애굽의 지혜있는 자들을 다 불러들였으나 그 꿈을 해석하는 자가 없었다. 그 꿈의 뜻은 온 천하에 7년간의 큰 풍년이 있고 다음 7년에 또 큰 흉년이 있으리라는 하나님의 계시인 것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제서야 술 맡은 장관이 잊어버렸던 옥중의 요셉을 생각했다. 요셉은 그 꿈을 해석했다. 이로서 그는 바로 왕의 사랑을 받아 드디어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 창41:38 이하에 보면 바로의 말이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이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 하나님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있는 자가 없도다" 또 계속하는 말이 "너는 내 집을 치리하라. 내 백성이 다 네 명령을 복종하리니 나는 너보다 놓음이 오직 보좌 뿐이니라 내가 너로 애굽의 온 땅을 총리하게 하노라" 하면서 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금사슬을 그의 목에 걸고 세마포옷을 입혀 바로의 수레에 그를 태우고 온 백성이 엎드리게 했다고 했다. 이 사실은 애굽의 왕이 요셉에게 그의 전권을 이양한 것임을 보여주는 말이다. 이처럼 요셉은 전무후무한 영광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여기에서 이 사건 자체보다도 그 배후에 숨은 성경진리 한 가지를 말하고자 한다. 그것은 곧 본문 배후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상주권과 그의 섭리라고 할 것이다.

 

    본문 창41:78에 보면 "바로가 깬즉 꿈이라. 아침에 그 마음이 번민하여" 하는 말이 있다. 꿈을 꾸고 난 바로의 마음을 그렇게 번민케 한 자는 누구인가? 온 천하에 두려운 것이 없는 그 마음을 그처럼 고민케 한 자는 누구겠는가? 잠언 21:1에 보면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보의 물과 같아서 그가 임으로 인도하시느니라" 했다.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다고 했다. 마치 하나님께서 왕의 마음을 여호와 의 손에 있다고 했다. 마치 하나님께서 왕의 마음을 주장하시기를 보의 물과 같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고 쏟을 수도 있다고 했다. 잠언에는 왜 사람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다고 하지 않고 "왕의 마음" 이라고 했겠는가? 그것은 왕의 주권보다 더 높으신 만왕의 왕이 되신 하나님의 주권을 표현하기 위해서 이다. 이런 말은 성경 다른 곳에도 있다. 에스더 6:1에 보면 "이 밤에 왕이 잠이 오지 아니하므로 명하여 역대일기를 가져다가 자기 앞에 읽게 하더니" 하신 말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유명한 파사왕 아하수에로가 유대인 모르드개와 그의 백성 유대인들을 전부 학살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바야흐로 그것을 실천하려는 찰나에 어떻게 그들을 구원하게 되셨건가 하는 동기를 말해주는 것이다. 만일 이때 아하수에로 왕이 잠이 들었다면 모르드개와 온 유대인들은 벌써 다 전멸됐을 것이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그날 그 밤따라 왕에게는 잠이 오지 않게 했다. 성경은 이것을 가리켜 유대인들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 였다고 가르쳐 주고 있다.

 

    요컨대 천하를 호령하는 이 왕들로 하여금 잠을 자지 못하게 하고 잠이 들어 꿈을 꾸게도 하고 그들의 마음을 번민케도 하고 괴롭게도 하시는 분이 계시는데 그는 곧 여호와 하나님이시라고 성경은 가르쳐주고 있다.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보의 물과 같아서 그가 임으로 인도 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는 바로 왕으로 하여금 꿈을 꾸고 번민케 하심으로 드디어 그로 하여금 요셉을 찾게 하고, 요셉을 사랑하게 했고, 요셉으로 하여금 드디어 애굽 의 재상의 자리에 오르도록 길을 열어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지상의 권세를 잡은 왕의 마음만 주장한 것이 아니다. 공중의 권세를 잡은 악령(악한 마귀) 들을 주관하시면서 요셉을 어떻게 보호하신 것을 오늘의 본문 또한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제 이 사실을 생각해 보자. 먼저 마귀 사탄은 보디발의 아내를 통하여 요셉 을 유록하려 했고 또 범죄케 해서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되지 못하게 하려 했다. 요셉을 넘어뜨리려했다. 그러나 사탄은 그의 계획이 실패되자 이번에는 그를 감옥에 넣도록 했다. 그것으로 요셉을 망하게 하려 했다. 그러나 창 39:20에 보면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매 ...." 했다. 사탄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을 이기지 못했다. 그러나 사탄의 행동은 중지하지 않았다. 요셉이 감옥 안에서 떡 맡은 장관과 술 맡은 장관의 꿈을 해석하고 그것이 그대로 성취됐을 때 요셉은 더욱 유명해 졌다. 술 맡은 장관은 얼마나 기뻐했을까. 그러나 그 장관이 감옥에서 나온 후에는 사탄은 그로 하여금 요셉을 잊어버리게 했다. 분명히 창40:23에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치 않고 잊었더라" 했다. 그렇게 기뻐하던 장관이 어떻게 요셉을 잊어버릴 수 있었겠는가. 만일 그가 요셉을 잊지 않고 기억했더라면 그는 요셉을 감옥에서 나올 수 있게 했을 것이다. 그러한 권세가 그에게 있었던 것이다. 분명히 요셉은 그렇게 해주기를 그 장관에게 청원했던 것이다. 창40:14에 요셉이 그 술 맡은 관원에게 청하기를 "당신이 나가서 출세하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고하여 이 감옥에서 나를 건져내소서. 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자요 여기서도 옥에 갇핼만한 일은 행치 아니하였나이다." 이것이 바로 요셉이 그 장관에 요고한 청원이었다. 그러나 사탄은 장관의 마음에 역사하여 요셉을 기억치 못하게 했고 잊어버리게 했다. 그렇게 함으로 요셉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 두려했다. 이것은 분명히 요셉에게는 큰 불행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후일의 역사를 보면 이것가지도 얼마나 다행한 일이었는가. 그때에 만일 그 장관이 요셉을 기억하고 곧 그를 감옥에서 나오게 했더라면 요셉은 애굽의 총리는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 그가 만일에 자유의 몸이 되어 세상으로 나오게 되었다면 요셉은 애굽에 머물지 않고 그곳을 떠났을 것이다. 당시의 교통이나 지리적 조건으로 보아서 바로는 다시 요셉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사실 바로가 꿈을 꿀 때까지 요셉이 감옥에 그대로 남아있게 되었다는 것은 얼마나 필요한 일이요, 유익했던 일인지 모른다. 사탄이 요셉의 발에 영원한 쇠사슬을 묶어 감옥에 가두어 두려했던 바로 그 시간 그 때에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악을 다스리는 방법이요, 사탄의 계획을 지배하는 방법이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하여 모든 것이 합하여 유익케 되도록 섭리하신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요셉은 애굽의 위대한 재상이 된 것이다. 영광의 권좌에 오르게 된 것이다.


IV. 요셉과 그 형제들


    요셉이 감옥 중에 있을 때 술 맡은 관원자에게 다시 복직하면 꼭 자기를 기억하여 줄 것을 부탁했으나 그는 2년 동안이나 잊어버렸다가 창41:1에 보면 " 만 2년 수에 바로 왕이 꿈을 꾼 때에 비로서 요셉을 생각하게 됐다"고 했다. 이것도 성경을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기묘한 섭리였다고 믿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2년이란 것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2년이란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있는 년령을 기다린 것이라고 본다. 창41:46에 보면 "요셉이 바로 앞에 설 때에 그 나이 30세라"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이 30세가 되기를 기다리긴 줄 안다. 왜 그런가 하면 30세란 것은 한국가의 지도자가 되기 위한 공적년령이다. 민수기 4:3에 보면 "곧 30세에서 50세까지 회먁의 일을 하기 위하여 그 역사에 참가할만한 모든 자를 계수하라" 한것을 본다. 구약시대에 성전에서 봉사하려는 자도 30세부터 였음을 보여주는 말씀이다. 삼하 5:4에 보면 다윗도 왕위에 나아갈 때에 그 나이 30세라 했다. 예수께서 공생애에 들어가신 것이 30세인 것도 이러한 관례를 다른 것인줄 안다. 하나님께서는 그 때를 기다리시면서 요셉을 2년간이나 더 감옥에 머물러두게 하신 것이 분명한 것 같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섭리가 얼마나 기묘한가? 요셉이 그것을 알았을리 없다. 그러나 후일 요셉도 이런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의지하는 신앙이 더욱 깊어졌다. 창45:5에 보면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께서 생명을 구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하나님의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들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에 보내셨나이다.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니이다." 하신 말씀이 있다. 억은 그가 애굽의 총리가 된 후 자기의 형들 앞에서 한 말이다. 형들이 욧베을 만나고 옛날의 죄악을 생각하고 당황해 할 때에 요셉은 그들을 위로 하면서 하는 말이 "나를 이 애굽으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여, 하나님이시라"고 했다. "우리의 생명을 구하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이곳에 보내셨다."고 하면서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음을 근심하지 말고 한탄하지 말라고 오히려 위로 했다. 이것은 모든 불행까지도 다 합동하여 유익하게 하신다는 하나님의 섭리로 요셉은 굳게 믿은 증거가 되는 줄 안다. 요셉의 형들도 요셉의 그말을 듣고는 진정으로 과거를 뉘우치며 회개했다. 요셉은 또한 그들이 회개하는 것을 오히려 그들을 측은히 여겨서 슬피 울었다. 여기에서 특별히 요셉이 그 형들에 대한 애정과 또 진정으로 회개한 형들이 어떻게 되었는가를 생각해 보자.

 

    창 42장 이하여 요셉이 슬피 울었다는 기록이 7번이나 나타나 있다. 네번은 자기 형들을 만나 후 울었고, 한 번은 자기 동생 베냐민을 만나고 울었고, 한번은 자기 동행 베냐민을 만나고 울었고, 한번은 자기 아버지를 처음 만났을 때요, 또 한번은 자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 울었다. 이것은 요셉의 애정이 얼마나 두터운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제 그것을 한 두가지로 생각해 보자. 창 42:24 에 보면 "요셉이 형들을 떠나가서 울다가 다시 돌아와서 그들과 말하더니 " 한 말이 있다. 그 내용은 잘 아는대로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요셉의 형들은 곡식을 구하려고 애굽의 총리 요셉에게고 갔다. 그들은 요셉을 몰랐으나 요셉은 그들을 알았다. 거기에서 요셉은 그 형들을 시험해 보았다. 창42:9에 보면 "너희 정탐이라 이 나라를 엿보러 왔느니라"고 요셉은 말했다. 그는 그들을 3일 동안 가두어 두었다가 풀어 주면서 또 하는 말이 창42:17이하에 보면 "너희 한 사람만이 인질로 남아 있고 다른 형제들은 양곡을 가지고 가서 가족들의 주림을 구하고 마지막 아우 베냐민을 데려 오라. 그리해야 너희들이 죽지 아니 하리라"했다. 그 때 그 형들이 서로 하는 말이 "우리가 아우 요셉을 인하여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 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그러므로 그의 피값을 내게 되었도다" 했다. 그들은 옛날 요셉을 팔아버린 그 일을 크게 뉘우치게 됐던 것이다. 어린 요셉이 애걸하던 그 모습이 그들에게는 생생하게 되 살아 나게 되었다. 그들이 통역을 세웠으므로 요셉이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줄 알고 서로 말하며 탄식했다. 이렇게 그 형들의 슬퍼하는 말을 들은 요셉은 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물러가서 42:24에 있는 그대로 "골방 에 들어가서 홀로 목놓아 슬피 울었던 것이다. 그러나 요셉은 자기의 눈물을 그 형들에게 보이지 않았다. 자기의 정체를 알리지 않았다. 자기 형들의 철저한 회개를 시험해 보려 했던 것이다. 창44:17에 보면, 그것은 가서 베냐민을 종으로 남겨 두라고 했겠는가? 그것은 이유가 있다. 베냐민은 그 어머니 라헬의 소생으로 요셉과 같은 어머니의 아들이다. 과거에 요셉을 미워하던 그 형들 이 이제 자기의 친 동생인 베냐민에 대해서는 그 태도가 어떠한 가를 보려 했던 것이다.

 

    그 때에 그 형제들 중에 특별히 우리는 유다를 기억할 것이다. 창44:33에 보면 유다는 애굽의 재상 요셉에게 말하기를 "베냐민 대신에 자기가 종이 되겠다" 했다. 그 때 유다의 말이 "우리에게 아버지가 있으니 노인이요, 그 노년에 얻은 아들이 있으니 그 형 요셉은 죽고 그 동생하나 뿐이므로 그 아버지가 그를 사랑하나이다"했다. 과거에 그들은 요셉을 아버지가 유달리 사랑하는 아들인 때문에 죽이려 했지마는 이번에는 아버지가 특별히 사랑하는 때문에 베냐민을 살리려 했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회개가 아니겠는가. 과거의 태도와는 완전히 달랐다. 그 형 유다는 다시 말하기를 아버지를 이상 더 슬프게 할 수 없다고 하면서" 이 아이를 데려 가지 못하면 아버지가 그 아들이 없음을 보고 죽으리니 이같이 되면 종들이 우리 아버지의 흔 머리로 슬피 음부로 내려가게 함이니이다." 했다. 유다는 이처럼 아버지에게 더 죄는 범할 수 없으니 나를 가두어 종으로 삼아 달라고 애걸했다. 창45:1 이하에 보면 이 말을 들은 요셉은 주위의 모든 사람들을 물리친 후에 그 형의 목을 안고 방성대곡하니 그 우는 소리가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했다. 창 45:15에 보면 "그 형들과 입을 맞추며 안고 우니" 하는 말이 또 있다 여기의 요셉의 애정도 애정이려니와 회개한 형들은 얼마나 큰 복을 받았느지 모른다. 특별히 그처럼 철저한 회개한 유다가 받은 복이 무엇인지 성경은 우리에 게 분명히 가르처 주고 있다.

 

    본래 유다는 복을 받을만한 인물이 되지 못했다. 창38:2에 보면 그는 그 부모가 그렇게 금하는 이방의 여자를 아내로 얻어서 아버지의 마음을 슬프게 한 아들이었다. 그렇게 해서 낳은 아들인 "엘"과 "오난"은 악한 아들들로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었다. 또 유다 자신도 부끄러운 음란한 죄를 범하고 벌을 받았다. 그러므로 역대상5:1에 보면 자기에게로 돌아오는 장자의 명분을 잃어 버리게 됐다. 갑절의 기업을 받는 그 장자의 명분은 드디어 요셉에게 돌아가고 유다는 그것을 잃어버렸다. 꼭 유다의 행동은 에서와 같이 망령되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러한 유다가 앞서 본대로 크게 회개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얼마나 크게 축복했는지 모른다. 참으로 회개하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유다에게서 볼 수 있다.

 

    창 49:9-12 까지는 그에게 내린 하나님의 축복이 기록되어 있다."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찌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 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감히 그를 범하리요,홀(권세)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여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했다. 이것이 유다의 받는 축복인데 그 축복의 내용인즉 그와 그 후손은 12지파 중에서 가장 강한 지파가 될 것을 약속한 것이다. 이것은 사실 장자의 기업 이상의 큰 축복이다. 이처럼 유다는 요셉에게 대해서 지은 죄를 회개함으로 큰 복을 받은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출처 : 동경개혁신학교
글쓴이 : kaporet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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