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의 중보기도
골1:9-14
골
1:9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골
1:10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골
1:11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골
1:12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골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골
1: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I.
들어가는 말
교회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중보기도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각자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자신의 신앙을 위해서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하여 그리고 자신의 영성이 보다 깊어지기 위하여 기도합니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는 중보기도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성도들이 우리 주님 앞에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인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주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신 후 3일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여 성부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지금도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골로새교회의 성도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할 때마다 감사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믿음과 성도에 사랑과 하늘의 소망을 인하여
감사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바울은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을 위하여 더 깊은 중보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기도를 통하여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해야하는지를 배우기를 원합니다.
II.
사도바울의 기도
1.
기도하기에 그치지 않음
(1)성도를
위해 기도하기를 그치지 않음(9절상반절)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사도바울은
골로새교회의 소식을 듣던 날로부터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여기서부터는 골로새 교인들을 위한 바울의 중보
기도가 이어지고 있는데 이는 에바브라의 귀환과 골로새에 대한 소식의 청취에서 강하게 동기지워진 것입니다. 바울이 에바브라를 통해 들은 골로새
교회의 상황은 감사를 드릴 수 있는 상황, 즉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열매 맺는 생활을 하는 것도 있었지만, 다소 불안한 점도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혹자는 본절에 대해 골로새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불만이 점잖은 방식으로 표현되기 시작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사도바울은
골로새교회의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않겠다고 약속합니다. 일시적으로 기도하다가마는 그런 기도가 아니라 우리 주님이 지금도 보좌우편에서
성부하나님께 우리를 위하여 끊임없이 중보기도를 하시듯이 계속해서 골로새교회의 성도들의 영적성장을 위하여 기도하겠다는 말씀입니다.
2.
기도의 내용
(1)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기를(9절하반절)
1)“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공동번역은
이를 '성령께서 주시는 모든 지혜와 판단력'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분명 '지혜와 총명'은 성령의 역사의 산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지혜와 총명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 지혜와 총명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을 계시라고 말합니다. 계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기 때문에 성령께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 각 사람의 마음에 부어주시는 지혜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분이 원하시는대로
순종하기 위하여 힘쓸 것입니다.
2)“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성령께서
주신 지혜와 총명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데까지 나아가야 비로소 의미를 지닙니다. '아는 것으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텐 에피그노신'에서
'알다'는 피상적인 인식이 아니라 근본적인 인식을 뜻합니다. 이 지식은 하나님의 요구, 뜻을 깨달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이
지녀야 하는 온전한 지식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살기를 원하는 성도들은 더욱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우리에게 부어지는 지혜를 구해야합니다. 성령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그 말씀을 조명해주시어서 깨닫게 하시고 그 말씀을 어떻게 순종해 나가야할지를 가르쳐주십니다. 그리고 성도가 그리스도와 완전한
연합을 이루어가도록 날마다 우리의 심령속에 세밀한 음성으로 말씀해주십니다. 그 음성을 듣기 위해서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 앞에 엎드려 주님의
십자가 보혈의 능력으로 우리의 심령을 깨끗이 씻음 받아야만 합니다.
(2)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기를(10절)
1)“주께
합당히 행하여”
본문은
당시 교회들에서 사용되었던 정형화된 격언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엡 4:1 ; 빌 1:27 ; 살전 2:12). '주께 합당히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의 필연적인 전개라고 할 수 있습니다(9절). 이것은 기독교의 지식이 지식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적
행실을 지향하는 것임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주께
합당히 행하는 자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 어떤 분이신지 안다면 그분께 합당하게 행할 것입니다. 만일에 우리 중에
하나님을 잘 안다고 하면서 주님께 합당하게 행하지 낳는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잘 모르는 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더해갈
수록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가 신경을 쓸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이 어릴 때는 부모에게 요구만하지만, 자라면서 부모를 알아갈 수록 부모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며 얼마나 자신을 위하여 수고하는지 알면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행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효입니다. 믿음이 연약할 때의 성도는 하나님께 자신만을 위하여 구합니다만, 믿음이
성장할수록 하나님의 뜻을 구하게 됩니다.
2)“범사에
기쁘시게”
'주께
합당히 행함'은 구체적으로 '주를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기쁘시게'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레스케이안'은 거의 아부에 가까울
정도로 상대를 만족시켜 주기 위해 미리 알아서 행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모종의 반대급부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주께
합당히 행자는 자는 주님의 기뻐하시는 일만 생각합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아이가 언제나 부모의 안색을 살피며 부모의 기뻐하는 일을 위하여 애쓰는
것처럼, 주께 합당히 행하는 자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범사에 찾아서 합니다. 범사에 기쁘시게 하는 일은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함께 사는 동안 평범한 삶속에서조차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나타냅니다.
3)“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열매를
맺게'는 현재 시제로 되어 있는데 이는 성도의 삶이 계속해서 열매맺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선한 일에 열매를 맺는 것'은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과 더불어 '주께 합당하게 행하는 것'의 구체화입니다.
주께
합당하게 행하는 자는 모든 일에 선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의 선한 일을 할 마음을 주시므로 그는 언제나 선한
열매를 행하기에 힘쓸 것이요 기도할 것입니다. 그 결과 그는 선한 열매를 맺어 주님을 더욱 기쁘시게 해드릴 것입니다.
4)“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나님을
아는 것'과 더불어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같은 의미일 수 있으나 전자가 후자보다 더 깊은 영적 성장을 암시한다고 보는 것이 합당합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를 통하여 체험되는 지식을 말합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과 교제할 때, 그
사람과 직접 만나고 상대방을 눈으로 보고 귀로 그 음성을 듣고 손으로 상대방을 만져보듯이, 우리가 주님과의 교제를 할 때도 기도를 통하여 주님의
음성을 우리의 심령으로 듣고 주님의 임재를 영적으로 느끼고 주님의 말씀을 읽을 때도 주님의 성령께서 주신 지혜로 깨닫게 됩니다. 이것은 체험하는
지식입니다. 그냥 배운 지식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것은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아는 것입니다.
(3)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기를(11절)
1)“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바울의
기도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주께 합당한 삶, 그리고 열매 맺는 삶을 넘어 하나님의 권능을 골로새 교인들이 체험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능하게 하시며'는 현재형으로, 성도에게 발휘되는 능력은 하나님으로부터 임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받아야 하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한편 '영광의 힘'은 인간의 지성으로는 더듬어 올라갈 수 없는 초월적 영역에서 오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덤의 예수를 일으킨
능력이요, 환난 중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2)“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견딤'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포모넨'는 정해진 목표 지점을 향해 고난을 무릅쓰며 정진하는 것을 뜻하는데, 경주자가 총력을 기울여 달려가는 것에 대해서도
사용되는 말입니다(히 12:1). 결국 '견딤'은 유혹과 저항을 물리치고 한 곳 목표만을 향하여 묵묵히 달려가는 것을 뜻합니다. 또한 '오래
참음'은 무거운 짐에 눌리거나 실패를 당하여도 좌절하지 않고 밀고 나가는 불굴의 투지를 가리킵니다. 분명 '견딤'과 '오래 참음'은 즐거움과
거리가 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기쁨으로 감당한다는 것은 바로 '영광의 힘'을 좇아오는 하나님의 능력에 기인합니다.
(4)성도의
기업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심(12절)
1)“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기업'에
대한 언급은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 영토를 분배받았던 것을 연상시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옛 백성들에게 주어진 '육적인
기업'이라고 한다면, 미래에 그리스도인들이 받을 분깃은 '영적인 기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합당하게'에 해당하는 헬라어
'히카노산티'는 근본적으로 '충분하게 하다', '적절하게 하다'는 뜻으로 갖추어진 자격을 의미합니다. 이 자격은 인간이 자생적으로 구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여해 주시는 것인 바 자격없는 자를 회개시켜 빛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2)“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본절의
요지는 '감사'입니다. '감사'는 '열매 맺음', '자라남', '능하게 됨'에 이어지는 신앙의 중요한 덕목으로 성도의 필연적인 삶의 양식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격없는 자에게 은혜를 베풀어 자격을 주며 장차 받을 영적 기업까지 허락하셨으므로 감사는 그 은혜에 대한 합당한 응답이기
때문입니다.
3.
기도의 근거
(1)우리를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심(13절)
1)“흑암의
권세”
사도바울이
골로새교회를 위하여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기도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사랑과 은혜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어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을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로 옮기셨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흑암의 권세”는 앞절의 '빛 가운데서'와 대조됩니다. 이러한 대조는 조로아스터교의 이원론에 나오고 쿰란의 문서들에서도 발견되는 개념이나,
바울이 여기서 그들의 개념을 빌어서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악한 세력'으로 상징되는 '흑암'과 '선한 세력'으로 상징되는
'빛'의 대조는 보편적인 인간 세계의 개념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본문의 '흑암의 권세'는 일찍이 예수께서 십자가 처형 직전에
체포되셨을 때 예수를 대적하는 악한 세력에 대해 언급한 것과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는 바(눅 22:53), 그 세력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성도들을 탄압하거나 오도하는 인간들을 의미한다기보다는 그들의 배후에서 하나님께 대적하는 비가시적인 사단의 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사랑의
아들'은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아들'이란 뜻이며, '나라'는 종말론적이고 영토적인 의미라기보다는 골로새 교인들의 마음에 현존하는 하나님의
나라이며(요 3:3-5) 인간의 마음을 다스리는 그리스도의 주권적 통치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장차 기업으로 받을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를
전혀 배제할 수도 없습니다.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는 미래적인 것이며 반드시 유업으로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미래적인 것에
머무르지 않고 이미 현재에 도래해 있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 나라는 지금 성도들의 마음에 현존하는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2)우리가
죄사함을 얻음(14절)
1)“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을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시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리스도안에서 구속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구속'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폴뤼트로신'은 '값을 지불하고 어떤 대상을 획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흑암의 권세에 매여 종노릇하던 우리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취하였음을 말해줍니다(롬 3:24, 25 ; 엡 1:7 ; 히 9:14, 15). 성도는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를 통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속 곧 죄사함을 얻은 성도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나라에 옮겨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속을
받은 골로새교회의 성도들을 위하여 바울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골로새교회 성도들이 하나님나라의 삶을 잘 살 수 있도록 사도바울은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중보기도의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았으며 그 나라에 들어갈 소망을 가졌으면, 동일한 믿음으로
구속함을 받은 다른 성도들을 위해서 그들이 하나님나라의 삶을 잘 살도록 기도해야할 것입니다. 자신만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서 좋아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나라의 삶, 즉 하나님의 통치아래 있지 못하고, 육신의 모습대로 사는 모습을 보면서도 그를 위해서 기도하지 못한다면 그는 사보의
마음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모르는 것입니다.
III.적용:
중보 기도하는 삶
우리는
골로새교회를 위하여 중보기도를 하는 사도바울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전도하지도 않았지만 에바브로를 통하여 세워진 골로새교회의 소식을
들은 날로부터 성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기를 쉬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교회생활을 하면서 다른 성도들을 위하여 중보기도를 하고 있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하여 중보기도를
해야할 이유는 우리 또한 연약한지라 다른 사람의 중보기도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기도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을 위한 중보기도를 더 잘 들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지금도 우리를 위해서 중보기도를 하실 때 하나님 아버지께서 들어주신 것처럼,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중복기도를
하는 자의 자세는 첫째, 예수님의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중보기도가 하나님께 열납되어져 응답이 있어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결국 자신이 중보기도를 하여도 그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께 드리시는 분은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자는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기도할 뿐입니다.
중보기도
하는 자의 두 번째 자세는 중보기도의 대상이 하나님을 온전히 알 때 까지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하나님을 아는 데까지 자라갈 때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궁극적인 목표는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거룩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보기도를 하는 자는 자신이 기도하는 그 대상이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온전한 인격으로 세워질 때까지 그를 위하여 기도하며 그가 믿음으로 서갈 때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교회가 주님 안에서 온전하게 든든히 세워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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