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내어버려두신 자들
롬1:24-32
롬
1: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롬
1:25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롬
1:26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롬
1:27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롬
1:28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롬
1: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롬
1: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롬
1: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롬
1:32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I.
들어가는 말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하여 말씀을 전한 후, 그러한 진노에 해당하는 자들에 대하여 말씀을 전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스스로
지혜 있다고 하나 우준하여서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버러지의 형상으로 바꾸는 자들에게 임합니다. 그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진노는 그들을
내어버려두심으로 시작합니다.
II.
하나님이 내어버려두시는 자들
1.
하나님이 내어버려두심(24-25절)
(1)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 두사(24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24절)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죄인을 인하여 노를 발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노는 인간의 악행을 그대로 버려두심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고로, 내버림이 되어 모든 부도덕한 일을 행하게 된 것입니다. 종교를 바로 가지지 못한 것이 모든 죄악의 근원이 됩니다.
하나님에게 버림 받은 때부터 이렇게 인간은 죄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에게 버림 받은 자들은 음행으로 떨어집니다. 몸은 하나님의
전인데(고전 6:19), 하나님이 계신 동안은 그 몸이 깨끗할 수 있으나 하나님이 떠나시는 그때부터는 불결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2)
하나님의 진리와 우상의 거짓(25절)
하나님께서
저희를 내어버려두신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25절)
1)"하나님의
진리"란 것은 하나님 자신의 진실성을 가리킵니다. 곧, 하나님은 참(眞)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여러 가지 성질을 계시하시는 중에도
특별히 그의 진실성을 힘있게 계시하셨습니다. 민 23:19에 말하기를,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진실성 때문에 모든 영적 행복을 누릴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심은 그분의 진실함을 인함 입니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고전
1:9)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의 신실에 근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줄 앎이라"(히
11:11)
하나님의
진실은 약한 신자들에게 위로가 됩니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딤후
2:13).
하나님은
그분의 진실성 때문에 신자들을 무모한 시험에 인도하시지 않으십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간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하나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에 죄를 고하는 자들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2)"우상은
거짓 것"입니다. 우상을 거짓 것이라고 할 이유는 우상 숭배는 감각주의에 의하여 영혼의 요구를 만족시키려 하는 까닭입니다. 우상 숭배는
감각주의를 만족시킬 예배 대상을 찾습니다. 감각주의는, 영혼의 요구와는 정반대되는 것을 즐기기 때문에, 영혼은 유한한 물질세계에서 살 수
없습니다. 영혼을 물질로 만족시키려는 종교는 모순된 것입니다.
2.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받은 자들(26-27절)
(1)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경배하는 자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은 성적으로 타락하는 모습입니다.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26절)
몸은
하나님의 성전인데(고전 6:19), 그것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므로, 하나님은 떠나시고 죄는 그 몸에서부터 세력을 얻게 되어 먼저
음행이 나타납니다(고전 6:18). 성경은 성적 죄악이 몸에게 대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고전
6:18). 이 말씀의 의미는 그 성적 죄악이 주님의 성전 된 몸의 거룩을 범한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다른 죄악은 남들에게 손해를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적 죄악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손해를 주는 것입니다. 특히 그 손해 중에 영적인 것이 더욱 큽니다. 성적 죄악은 도덕
방면에 속한다고 할 것이나 역시 종교적 죄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전
6:15-17).
그러므로
인간이 그 몸을 가지고 음행을 범하면 그것은 주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죄, 즉 하나님의 거룩함을 범하는 죄에 해당되며, 주 앞에 정절을 지키지
않는 훼절의 죄에도 해당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상 숭배자들을 가리켜서도 "음란한 자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시 50:18 ; 렘 3:8 ,
5:7, 7:9, 9:2, 13:27, 23:14, 29:23 ; 겔 23:43 ; 호 7:4 ; 말 3:5). 이렇게 성적 죄악은 이중
죄악입니다. 곧 도덕상으로 인륜을 어지럽게 하는 죄악이고 영적으로도 하나님 앞에 거룩을 범하는 훼절하는 죄악입니다.
따라서
안셈은 말하기를, "다른 죄들은 대항하여 싸우므로 이길 수 있으나 성적 죄악은 피하므로 이긴다"고 하였습니다.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고전
6:18).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이긴 방법도 그 자리를 피한 것이었습니다(창 39:1-18).
(2)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죄악의
많은 종류들 가운데 매력을 가지고 유인하는 것들이 있는데, 성적 죄악이 거기 속합니다. 성적 죄악은, 외모의 미를 가지고 사람을 꾀어넘기는 독한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독사의 이빨에서 나오는 살인독과 같습니다. 독사의 살인독을 현미경으로 검사하면, 말할 수 없이 아름답다고 합니다.
성경은
이 죄에 끌려가는 것이 마치 "소가
포주로 가는 것 같고 미련한 자가 벌을 받으려고 쇠사슬에 매이러 가는 것과 일반이라 필경은 살이 그 간을 뚫기까지에 이를 것이라 새가 빨리
그물로 들어가되 그 생명을 잃어버릴 줄을 알지 못함과 일반이니라"(잠
7:22-23)고 말씀합니다. 그런 죄를 범하는 집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
집은 음부의 길이라 사망의 방으로 내려가느니라"고
말씀합니다.(잠 7:27).
3.
합당치 못한 일을 하는 자들(28-32절)
죄는,
인간에게 대하여 병균과 같이 신속한 번식성을 가지고 인간을 아주 점령해 버리고 또 살해합니다. 몸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죄(21-23)는, 번식하여 무서운 죄의 수렁에 이르렀으니 그것을 29-32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1)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28절)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이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을 실용적 지식으로 가질 가치가 없다고 생각함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하거나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이미 하나님이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불필요하다는, 그들의 잘못된 마음을 그대로 내버려둠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를 거부하는
자들을 내어버려두시어, 그들이 제멋대로 행하게 합니다. 그 결과 그들은 합당치 못한 일을 행합니다.
(2)합당치
못한 일
합당치
못한 일은 인간의 본분과 책임에 부합하지 않는 행동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인간의 요점일 뿐 아니라, 그것에 있어서 전
가치(全價値)를 의미하는 것입니다(전 12:13).
여기
기록된 죄악의 목록을 분류하면 다섯 가지니 ⑴ 불의, 추악, 탐욕, 악의는, 사람이 자기에게 대한 취급을 잘못하는 범죄요, ⑵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은, 사람이 남들과 경쟁하는 관계로 생기는 범죄요, ⑶ 수근수근하는 것과 비방은, 사람이 남을 언론(言論)으로 해하는 범죄요,
⑷ 하나님을 미워함과 능욕, 교만, 자랑, 악을 도모함은, 사람이 자기를 높이는 범죄요, ⑸ 부모를 거역함과 우매, 배약, 무정, 무자비는,
의리(義理)를 반역하는 범죄입니다.
1)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
"불의"는
헬라어로 "아디키아"니 그 아랫말에 기록된 모든 부도덕한 일들을 개괄적으로 지명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이 명사는 하나의 죄명(罪名)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불법적으로 취하는 이기적 행위를 가리킨다고 보아집니다. 불의를 행하는 자가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하겠지만, 실상은, 그것이
자기를 유익하게 못하고 도리어 해롭게 합니다. "악인의
강포는 자기를 소멸하나니 이는 공의 행하기를 싫어함이니라"(잠
21:7) "불의의
재물은 무익하여도 의리는 죽음에서 건지느니라"(잠
10:2)
"추악은
"포네리아"인데, 도덕적 부패의 해독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내부적 패역성을 의미하는 "악의"란 말과 달라서 악한 결과와 해독을 가리킵니다.
어떤 사본에는 이 말 다음에 "포르네이나"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정당한 결혼 생활 아닌 모든 불결한 남녀 교제를 말합니다.
"탐욕"이란
말은 "플레온"이란 말(더한다는 뜻)과 "에코"란 말(취한다는 뜻)과의 합성어(合成語)인데, 더 가진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탐심은 다른 것이
아니고 불의한 일을 해서라도 물욕을 채우고 또 채우고자 하는 심사를 가리킵니다. 탐심은 사람으로 하여금 물질에 채우고 또 채우고자 하는 심사를
가리킵니다. 탐심은 사람으로 하여금 물질에 매어서 하나님의 말씀과 천국에 착심할 수 없게 하므로(시 119:36), 우상 숭배와 같은
죄입니다(골 3:5). 탐심을 품는 자는 성공하려 하지만, 결국은 실패로 돌아갑니다.
성경은
“불의의
재물은 무익하다”(잠
10:2)고 하였고, 또 "속이는
말로 재물을 모으는 것은 죽음을 구하는 것이라 곧 불려 다니는 안개니라"(잠
21:6)고 하였고, "처음에
속히 잡은 산업은 마침내 복이 되지 못하느니라"(잠
20:21)하였고, "내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잠
23:5)고 하였습니다.
"악의"란
말은 헬라 원어로 "카키아"인데, 이것은 마음이 구부러진 패역성을 가리키는 바, 선한 권면이나 교훈에 대하여도 까닭 없이 반역하며, 남의 자선
행위까지도 방해하는(자기 자신도 하지 않으면서) 잔인성 같은 것입니다. 요컨대 이것은 선(善)에 대한 까닭 없는 반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반역은 실로 극악한 심사인데, 그것을 고집하는 자는 더욱 현저하게 벌을 받습니다. 그 이유는 이런 악한 마음은 무식, 혹은 연약에서 생긴 것이
아니고, 고의적으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
"시기"는
헬라 원어로 "프도노스"인데, 남의 잘 되는 것을 보고 스스로 통감(痛感)을 가지고 해할 수만 있으면 해하려는 악한 마음입니다: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이니라"(잠
14:30) "투기
앞에서 누가 서리요"(잠
27:4).
클락(Clarke)은,
이 잠언 말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예화를 소개했습니다.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탐심 있는 자요, 다른 한 사람은 시기가 있는 사람이었다. 이 두 사람에게 누가 말하기를, 너희는 무엇이든지 내게
청구하여라, 그런데 먼저 청구하는 자에게 그 청구한 것을 주고, 다음에 청구하는 자에게는 그 갑절을 주겠다고 하였다. 그 때에 그 탐심 있는
자는 많이 받을 야심으로 먼저 청구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그 시기 있는 자는 그 탐심 있는 자의 많이 가지게 되는 것을 싫어하여 역시
잠잠하고 있다가 하는 말이, "내 눈을 하나 뽑아 주시요"라고 하였다.”
"시기"는
이와 같이 남과 나를 해하는 악독한 마음이니, 결국 자기도 망하고 남도 망하는 것입니다. 사기를 없애는 방법은, 상대편을 시기하는 대신에 그를
모본 또는 사표(師表)로 알고 그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⑴ 나보다 우수한 자는 나의 선생이니 그를 나의 선생으로 알 때에 기쁘지
않겠습니까? 선생이 없는 사람은 인도자 없는 소경입니다. ⑵ 이 세상에는 할 일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것을 다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보다 우수한
선생들이 많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시기"의 죄가 교회에 큰 손해를 끼친 사실이 있습니다.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교권자 데오빌로 감독의 시기로 말미암아
마침내 억울하게 파면을 당했으며, 사막에 망명하여 거기서 종신하였고, 사무엘 루더포드(Samule Rutherford)도 교권자 사이드센프의
시기로 인하여 투옥되어 수난을 당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들의 시기로 말미암아 잡혀서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히시었습니다.
"살인"은
헬라 원어로 "포노스"인데 아주 무서운 범죄이므로, 그것에 대하여는 모든 자연까지 노할 정도입니다(창 4:10,23,24). 살인이 그렇게
극악시(極惡視)되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임)을 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창 9:6). 요일 3:15에 의하면, 남을
미워함이 벌써 살인이라고 하였습니다. 증오는 살인과 같은 것이기에, 증오가 있는 곳에는 생(生)의 의의(意義)가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잠
15:17에 말하기를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말씀합니다.
"분쟁"은
헬라 원어로 "에리도스"인데 이것은, 단체 생활의 생명을 끊어 버리는 죄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잠 17:1에 말하기를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신에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분쟁은 언제나 미연에 방지함이 지혜롭습니다. 그 이유는, 그것은 확대될 위험성이 있고, 확대되면 수습하기 곤란하기
때문입니다: "너는
급거히 나가서 다투지 말라"(잠
25:8).
"다투는
시작은 방축에서 물이 새는 것 같은즉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시비를 그칠 것이니라"(잠
17:14).
"노엽게
한 형제와 화목하기가 견고한 성을 취하기보다 어려운즉 이러한 다툼은 산성 문빗장 같으니라"(잠
18:19).
그런데
다툼이란 어떻게 일어나게 됩니까?
⑴
서로 시비를 지혜 없이 말하다가 일어납니다. ⑵ 범죄를 좋아하는 자들 측에서 일어납니다: "다툼을
좋아하는 자는 죄과를 좋아하는 자요"(잠
17:19). ⑶ 과격한 말로 인하여 일어납니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잠
15:1). ⑷ 미련함으로 인하여 일어납니다: "다툼을
멀리하는 것이 사람에게 영광이어늘 미련한 자마다 다툼을 일으키느니라"(잠
20:3). ⑸ 교만함으로 인하여 일어납니다. "거만한
자를 쫓아내면 다툼이 쉬고 싸움과 수욕이 그치느니라"(잠
22:10). ⑹ 말장이로 인하여 일어납니다. "나무가
다하면 불이 꺼지고 말장이가 없어지면 다툼이 쉬느니라"(잠
26:20). ⑺ 탐심으로 인하여 일어납니다. “마음이
탐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나”(잠
28:25).
"사기"란
말은 헬라 원어로 "돌로스"인데, 거짓은 모든 죄악의 인도자요, 또 엄호자(掩護者)의 역할을 합니다. 마귀가 아담과 하와를 죄로 인도할 적에도
"거짓"을 사용했습니다(창 3:1-7). 죄는 거짓을 쓰고야 활동할 수 있습니다. 누가 악을 행하면서 그것을 악이라고 광고하면서 행하는 자
있겠습니까? 선을 행하노라고 하면서 악을 행합니다(잠 12:20). "사기"는, 우리 마음에 깊이 뿌리박고 있어서 많이 속입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남을 속여 가면서 죄를 범하게 하고, 또 자신을 속여 자멸의 길을 밟게 합니다. 그러므로 렘 17:9에,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남도 속이고 자기도 속이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니 거짓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기 제 마음을 잘 지켜서 남을 속이지 말고 또 자기
스스로도 속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남을 속이는 그것도 벌써 자기를 속임이니, 그 이유는 남을 속여 유익을 도모함은 결국 자기를 해함이 되기
때문입니다.
"악독"은
헬라 원어로 "카코에데이아"인데 그 뜻은 "간악"을 가리킵니다. 퀴일(Kuhl)은 해석하기를, 이는 간책(奸策)과 궤계를 가지고 남을 해하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사람은 외모로는 최선을 다하여 남을 도와주는체 하지만, 이면과 실제에 있어서는 남을 해하는데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노골적으로 직접 남을 해하는 자 이상의 중벌을 받을 것입니다.
3)수근수근하는
자
이런
자들은 공중이 모르게 은밀히 남을 훼방하는 자니, 이는 독사보다 악독한 자입니다. 독사는 접근하는 사람만을 물어서 해할 수 있지만, 수근수근하는
자는 몇 만리 밖에 있는 자들을 해할 수 있습니다.
4)비방하는
자
이것은
공적으로 남을 악평하는 자입니다. 레 19:16에 말하기를, "너는
네 백성 중으로 돌아다니며 사람을 논단하지 말며 네 이웃을 대적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고
말씀합니다. 남을 말로 매장함은 잔인한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런 죄를 범하는 자는 벌을 받나니 그것은 그 자신이 역시 악평을 받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고
하셨다(마 7:1).
5)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
이
죄들은, 사람이 자기를 과중시(過重視)하여 남들을 무시함입니다.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는 헬라 원어로 "데오스튀게이스"인데,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라고 번역할 수 있는 것입니다.
"능욕하는
자"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멸시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교만한
자." 이 말은 헬라 원어로 "훼페레파노스"인데 "높이 나타나는 자"란 뜻입니다. 실제적 내용은 없이 높은 사람인체 하고 자기를 나타내는 자도
있고, 혹은 실제적 내용이 있고서 그리하는 자도 있습니다. 실내용이 없이 그리하는 자는 외식하는 죄까지 범하는 자입니다. 잠 16:18에
말하기를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개인이나 단체나 교만하면 반드시 하나님의 벌을 받는 법입니다. 잠 19:29에 말하기를, "심판은
거만한 자를 위하여 예비된 것이요 채찍은 어리석은 자의 등을 위하여 예비된 것이니라"고
하였으니, 오만한 자(거만한 자)의 죄가 어떻게 큰 줄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자랑하는
자"는 자기 자신을 자랑하는 자니, 예수님으로 자랑하는 자와 반대되는 자입니다. 진실로 주 예수로 자랑하는 자는 전적으로 자기를 분토와 같이
천히 보아야 할 것입니다(빌 3:7-9). 그 이유는, 자기를 의뢰하는 것은, 예수님을 믿음에 대한 반대요소이기 때문입니다.
6)악을
도모하는 자
이것은,
"악한 일을 지어내는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 한 사람이 악을 행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악행의 길을 개척하여 주는
셈입니다. 이 얼마나 악한 것입니까? 수리아의 안디오코 에피파네스는 유대인을 괴롭게 한 자니, 그는 "모든 악을 도모하는 자"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7)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
이
죄목들은 애정과 의리(義理)를 배반하는 종류에 속합니다. 애정은 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것인데, 그것을 배반하는 자야말로 극도로 악한 자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를 거역하는 자"는 큰 죄인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불효자는 재판을 받게 하고 돌로 쳐 죽이도록 하였습니다(신 21:18-21).
신약 시대에는 그렇게 하지 않지만, 불효가 여전히 큰 죄악인 것은 틀림없습니다(딤전 5:8).
"우매한
자." 이것은 사람이 자기가 받은 사랑이나 긍휼에 대하여 지각(知覺)이 없고 그것을 감사하지도 않으며 기억지도 않음을 말합니다(사 1:2-3).
도탄 중에 빠진 자가 남의 동정을 구하다가 배척을 당할 때 그 마음이 아픕니다. 그러나 남에게 은혜를 베푼 자가, 그 은혜를 입은 자의
배은망덕의 태도를 볼 때에 느끼는 비통(悲痛)은 그 이상의 것입니다.
"배약하는
자" 성경은,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아니"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시 15:4).
"무정한
자." 어떤 학자는 말하기를, 여기 무정하다 함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대하여 무정함을 가리킨다고 하나, 그렇게 제한을 두어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인정이란 것은 인간에게 위로와 용기와 소망을 주는 것입니다. 인정이 활동하면 눈물의 골짜기도 변하여 희열의 낙원이 되는 것입니다.
"무자비한
자." 어떤 사람이 불쌍하게 된 원인이 그 자신의 저지른 죄악이었다고 해서 그 사람을 돌보지 않는다면, 그것도 혹시 무자비일 수 있습니다.
크리스챤의 자비는, 조난자(遭難者)의 육신 정형 뿐 아니라, 정황까지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3)악을
행하는 자를 옳다하느니라
죄를
범하고 그것을 부끄러워하는 자는, 고침 받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죄를 옳게 여기는 자는 고칠 소망이 없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악을 행한
결과 사형에 해당되는 것을 알고도 악을 버리지 않고 오히려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고 여기고 있으므로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만이 있을
뿐입니다.
III.
적용: 하나님의 돌아보심을 구하는 삶
이
세상에서 의를 행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악을 행하고서도 자신이 행한 것을 정당화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내어버려두십니다. 그 결과 그들은
더욱 악한 일을 행하게 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함을 받은 성도가 행하여야 할 것은 오직 하나, 하나님의 돌아보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지 아니하시면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 앞에 범죄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돌아보심을 구하는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주이심과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신 구세주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하나님만이
우리의 모든 삶의 왕 되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만이 우리로 승리하게 하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연약함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오늘도 죄에 빠질 수밖에 없음을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거룩한 삶을 살도록 간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눈을 우리 위에 두시고 늘 지켜주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숨결하나라도 주님의
보호하심 속에서 숨을 쉴 수 있음을 알고 주님의 자비하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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