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예수님의 마음과 새 계명
예수님의 마음과 새 계명
요한복음13:34-35
2010.1.24(후카야교회 주일예배)
우리는 어릴 때부터 부모의 교훈을 들으면서 자랍니다. 그런데 어릴 때 부모에게 여러 가지 교훈을 들으면서 우리는 그것을 매우 귀찮고 성가신 것으로 생각하고는 했습니다. 그런데 후에 성장해서 생각해보니 그것은 전부 우리가 성인으로서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가르침이었습니다. 만일 어릴 때 부모님의 가르침이 없었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다른 사람들과 여러 가지 마찰을 일으키면 살고 있을 것입니다. 아이들이 부모의 가르침을 이해하든지 못하든지 그 가르침은 아이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즉 부모는 아이를 사랑해서 아이에게 필요한 교훈을 가르친 것입니다.
저의 아버님은 매우 엄하셨습니다. 특히 식사시간에는 매우 엄하게 가르치셨습니다. 사람이 제일 예의를 드러내는 것이 식탁문화라고 하면서, 특히 젓가락 사용법에 서툴면 사람들에게 무시당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은 젓가락이 없어도 포크를 사용하는 아이들이 있지만 우리가 자랄 때만해도 포크를 사용하는 것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젓가락 사용법을 잘 배웠더니 일본에 와서 매우 유용합니다. 저도 결혼해서 아이들을 키우면서 젓가락 사용법을 엄하게 가르쳤습니다. 혹시 다른 집에 가서 실수하지 않도록 말입니다. 어느날 조카가 우리집에 놀러와서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조카가 젓가락을 잘 사용하지 못하여 가르쳤습니다. 그때 그 아이는 젓가락을 사용하지 못하면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우리 아이들의 말을 듣고 긴장해서 배웠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자라서 하는 말이 그때 이모부가 젓가락 사용법을 가르쳐주지 않았다면 지금도 서툴렀을 것이라면서 감사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처럼 엄한 가르침은 아이들의 장래를 위한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명을 주신 것은 우리의 영적인 성장을 위해서 주신 것이지 결코 우리를 괴롭게 하시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에 대해서 오해를 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이 어렵다고 불평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명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도록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계명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사랑 때문에 주어진 것입니다.
1. 새 계명을 주신 이유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본문은 요한복음 13:1에 예수님이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말씀과 함께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식사를 하시면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고 나서 그들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신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심을 나타내시며 그들의 발을 씻겨주시고 그들에게 새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예수님이 제자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유월절 식사를 마치고 나면 제사장들과 유대인들의 장로들에 의해 체포되어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므로 어찌하든지 제자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전해주신 것이 새 계명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제자들에게는 이미 구약 성경의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는데 왜 새로운 계명이 필요했을까요? 예수님이 새 계명을 주신 것은 이미 옛 계명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옛 계명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출애굽기 20장1-17절의 십계명을 의미합니다. 옛 계명은 하나님께서 모세에 의해서 이스라엘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후 시내산에서 이스라엘백성과 언약을 세우고,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신 후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백성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 자신들이 잘나서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은혜로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 때문에 된 것임을 기억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을 지켜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는 율법을 지킬 수 없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하나님만 신뢰하며 살아야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열방에게도 전하여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복음을 전해야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보다는,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인 것과 자신들만이 할례를 받고 율법을 가진 것을 자랑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을 사랑하지 않고 무시하며 업신여겼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이방인에게 전해서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일에 실패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옛계명을 지키는 일에 실패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보다 우상숭배를 하는 일이 빠진 결과 유다왕국이 멸망하고 예루살렘은 파괴되었습니다. 그리고 왕족들과 귀족들과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70년후에 바벨론포로에서 유다 땅으로 돌아오게 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고난 을 당하면서 많은 선지자들에 의하여 예언되었던 메시아(구세주)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이 땅에 메시야를 보내셨습니다. 그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아담의 범죄로 타락한 인류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하나님나라를 전하시며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관심을 갖게 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유대인들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전한 메시야를 기다렸지만,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보내시는 이유를 알려고 하기보다는 자신들이 목적을 이루어줄 분으로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로마의 속국에서 해방되기를 바란 것입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조상이 하나님만을 섬겨함에도 불구하고 이방의 신들을 섬김으로 하나님의 진노로 바벨론의 포로가 된 사실과 포로에서 귀환한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실패함으로 계속하여 고난을 당하며 메시야를 기다리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당시의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기다렸지만 자신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게 하실 분으로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 병자를 고치시고 이적을 베푸시는 것을 보고 메시야로 환영하였지만, 실은 자신들의 왕을 삼으려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다른 유대인들과는 달리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인 것을 믿고 따랐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게 되고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배웠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시기 전에 제자들과의 유월절 식사를 함께 하시면서 그들에게 새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2. 새 계명의 내용
예수님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천하 만민을 한 혈맥으로 지으셨기 때문에(행 17:26), 사람들로 하여금 남들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구약에도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계명이 있습니다(레19:18). 구약의 이스라엘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서로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만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서로 사랑하는 일에 실패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새 계명으로서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신 “사랑하라”는 계명은 구약의 예언적인 것이 성취된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받았지만 순종하지 못하고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 안에서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킬 수 있기에 그들에게 새 계명으로 주신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보혈로 이루신 속죄를 믿는 자들은,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 같이 다른 신자들을 위하여 희생하며, 필요하면 그들을 위하여 죽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비록 이 땅에 함께 살아도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마침내 영원히 나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하여 구원 받은 형제들은 영원히 나누이지 않고 마침내 하나님 앞에 한 자리에서 영원히 함께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서로 사랑해야하기에 새 계명으로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려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이미 우리를 위하여 희생하시는 것으로써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이 지극한 사랑이라고, 1절은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겸손이지만, 그가 그들의 죄를 씻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실 것을 비유하기도 합니다(10-11).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의 죄를 대신 담당하심으로 그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로마서 5장 8절에 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이 이상 더 큰 사랑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성도들은 모두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중에 누가 예수님의 이처럼 엄청난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해주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3. 새 계명을 지키려면
우리는 예수님이 자신을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해야합니다.
우리가 받은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그 사랑으로 서로 사랑해야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배우면 예수님처럼 대속의 희생은 될 수 없으나, 남들의 짐을 자신이 걸머지게 되는 경우는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큰 사랑입니다(갈 6:2). 그런데 우리가 이 진리를 이론으로 배우면서도 실제로 남들을 위해 희생할 줄은 모릅니다. 우리가 남들에게 대하여 이렇게 무관심하게 되는 원인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내가 계명을 지켜야만 그리스도의 사랑 속에 나 자신이 머물게 됨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요15:10에 말하기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둘째는 내가 남들을 위하여 희생하는 일을 해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식을 기르노라고 온갖 희생을 한 어머니는, 그 기른 자식을 잊지 못하고 계속적으로 그 자식을 위하여 희생합니다. 그러나 어머니를 위하여 희생해 본 일이 없는 그 자식은, 어머니를 쉽게 잊어버립니다. 그러므로 내가 남을 사랑하려면 먼저 그를 위한 희생으로 시작해야 됩니다. 셋째는 성도가 영원한 나라를 기억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그 백성을 그렇게 사랑하시게 된 동기가 그의 가실 영광의 나라를 생각하심에 있었습니다(1,3). 32-34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영광을 받으시게 될 것을 염두에 두시고(32절) 이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내세에 대한 확신을 가지는 자는, 이 세상의 것은 그 무엇이든지 초개와 같이 생각하고 희생합니다. 우리는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 나라로 갑니다. 이 세상을 떠나면 우리는 더 이상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기회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곳에서 다시 만날 것입니다. 만일 이 땅에서 서로 사랑하지 못하면 그때에 서로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남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구속을 통하여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이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치면서 마태복음 6장 14-15절에서 “너희가 사람의 잘 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자신의 허물은 용서받기를 원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잘못하면 용서하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상대방의 허물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벧전4:8)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되질 않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실 사랑은 성령의 열매의 첫 번째 나타나는 덕목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으로 살기를 힘써야합니다 성령으로 사는 것은 우리 안에 내주해 계시는 성령을 의지하며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나타나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오신 성령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실 때 가능합니다. 사실 제가 일본에 와서 선교사역을 할 수 있는 것은 성령께서 내 마음에 부어주신 예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때로는 힘들고 어려울 때 모든 것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지만, 그때마다 주님께서 내 마음속에 주님의 사랑을 부어주시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한국 사람들은 일본하면 원수의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일본에 와서 일본사람들의 영혼이 구원받도록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주님의 사랑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제가 일본에 와서 처음 사역한 곳은 홈리스들을 상대로 복음을 전하는 교회에서입니다. 한국에서도 거지들을 바라볼 때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마음으로 바라보았던 내가 홈리스 출신의 형제들을 가르치는 성경학교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홈리스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주시고 은혜를 주셨기에 가능했습니다.
4. 새 계명을 지킨 자의 축복
우리가 새 계명을 지킬 때 얻는 복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인줄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우리를 예수님의 제자로 인정해줍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빛을 전하게 됩니다. 그 결과 그들도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인하여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우리가 받은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우리 안에 예수님의 사랑이 넘치도록 성령께 의지하며 기도하고 그 사랑이 넘쳐흘러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도록 힘써야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통하여 나타나는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 주변에 나타나야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그 일은 이제 우리가 서로 사랑하여 예수님의 제자로 인정받는 것은 통하여 이루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