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영적인 삶의 실제(2): 세상을 섬기는 삶
세상을 섬기는 삶
로마서 12:14-21
2009.11.22(주일예배)
성도의 영적인 삶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삶’입니다. 그러한 삶의 실제는 먼저 교회공동체를 섬기는 삶입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에 대해서도 섬기는 자세로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교회공동체가 서로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교회공동체를 통하여 세상에 전해질 때 세상사람은 교회공동체에 대해서 관심을 갖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들도 교회공동체 안으로 들어오고 싶어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공동체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모습을 세상을 향하여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을 향하여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빛을 발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되어갈 것입니다. 오늘은 성도들이 세상을 향하여 어떠한 자세로 살아야 하며 또 그 삶을 통하여 그들을 섬길 수 있는지에 대해서 배우기를 원합니다.
1. 모든 사람과 평화하는 삶
(1)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성도가 세상 사람들을 대할 때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14절)는 것입니다. 당시의 로마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습니다. 자신들의 문화와 맞지 않는 종교를 전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미웠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세상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가치관과 다른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들을 핍박하는 사람들을 저주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비그리스도인들을 저주하지 말고 축복하라고 권면합니다. ‘축복하라’('율로게오')는 말은 '좋게 말하다', '칭찬하다'의 뜻입니다. 이 말을 신자가 하나님에 대해 쓸 때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되며,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사용하면 복주신다는 뜻이며, 우리가 다른 사람에 대해 사용하면 축복하는 것이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우리를 향하여 핍박한다고 하도라도 우리는 그들을 축복해야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그렇게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핍박하는 자, 즉 원수를 축복한다는 것에는 용서와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는 내용도 포함됩니다. 그런데 인간의 본성 자체로는 이것을 행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나로서는 할 수 없는 것을 내가 하기 위해서는 나의 본성의 법이 아닌 성령의 법에 따라 행해야 합니다(갈 5:16).
(2)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울라
세상사람들에 대한 두 번째 자세는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15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감정에는 매우 예민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감정에는 무관심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참다운 성도라면 다른 사람들의 감정에도 관심을 갖고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본절은 우리가 슬픔 중에 있을 때에도 즐거워하는 자들과 즐거워하며 우리가 즐거울 때에도 슬픔 가운데 있는 자들과 슬퍼하라는 권면입니다. 다른 사람의 처지를 동정하는 것, 즉 감정과 처지와 조건을 같이 하는 것은 사랑으로써 가능하며(눅10:27), 성령으로 인도받아야(갈5:16) 한 마음이 될 수 있습니다(빌2:2). 이와 같은 마음을 품는 것은 성도들 사이에서 뿐 아니라, 14절과 관련하여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과의 사이에서도 필요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우셨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선한 것을 즐거워하는 자들과 선한 것을 함께 즐거워하며(빌 2:18) 곤경과 불행으로 우는 자들에 대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지체로서 같은 슬픔을 갖습니다(마 5:4;눅 6:21).
(3)서로 마음을 같이하고 겸손하라
세상 사람들에 대한 세 번째 자세는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16절)는 것입니다. 이 말은 교회공동체 안의 사람들에게도 중요한 태도이지만 세상 사람들에 대해서도 매우 중요한 태도입니다. '마음을 같이 한다'는 표현은 로마서 15:5, 고린도후서 13:11, 빌립보서 2:2, 4:2에 나오는데, '같은 마음이 되는 것'이나 '같은 마음을 품는 것'을 뜻합니다. '서로'는 '서로를 향하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외부로 나타나는 행동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또한 14절이나 17-20절로 비추어 보아 저자가 특히 성도들의 행동이 외부에 나타남으로써 미칠 영향을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같은 목적을 지향하고 같은 생각을 갖는 것은 빛된 선행으로 나타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마 5:16). ‘높은 데 마음을 두는 것’은 인간이 자기의 수준을 망각하고 분에 넘치는 기이한 일에 뜻을 품는 것입니다(시131:1). '낮은 데'는 '비천한'(눅1:52;약1:9), '겸손한'(마11:29;고후10:1)의 뜻입니다. 따라서 '낮은 데' 처하라는 것은 자신을 생각함에 있어서 겸비(謙卑)하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지혜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미련한 자들 즉 지혜 없는 자들의 생각입니다(잠3:7). 이를 히브리어식으로 표현하면 '높은 것에 대해 심사숙고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는 남들보다 뛰어나길 원하고 우월 의식을 갖기보다는 다른 사람을 진중(珍重)하게 대하고 온순함을 가져야 할 것을 보여줍니다. 그렇지 않고 스스로 지혜있다 하는 오만함은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데에서 비롯됩니다.
(4)모든 사람에게 선한 일을 도모하라
세상사람들에 대한 네 번째 자세는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17절)는 것입니다. ‘악으로 악을 갚지 말라’는 것은 인간이 가진 본성을 제한시키는 가르침입니다. 일반적으로 악행하는 자에게 보다 큰 악으로 갚으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심리인데, 이는 이러한 인간의 자연 욕구를 제재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눈은 눈으로...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출21:24, 25)는 공식적인 형벌을 말한 것이며 이런 규정을 세운 것도 개인적으로 보복하는 것들을 금하기 위한 것입니다(잠 20:22;24:29). 바울은 인간의 어두워진 마음(1:21)을 잘 알았으므로 인간에게 이런 교훈이 필요함을 느낀 것입니다. 또한 본문과 데살로니가전서 5:15과 베드로전서 3:9은 서로 유사한데 이는 예수의 가르침(마5:38ff.)을 따라 일정한 교리가 형성되어 전승되어 왔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고 하면서, ‘악으로 악을 갚지 말라’ 소극적인 권면에서 발전하여 이제 적극적인 권면으로 나아갑니다. '모든 사람'은 신자나 불신자 모두를 가리킵니다. '모든 사람 앞에서'는 또한 '주님 앞에서'(고후8:21)와 버금가는 권위를 갖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과의 영적인 관계가 사람들과의 현상적인 관계와 별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선한'이라는 말은 일반적인 아름다움, 즉 자연적이고 도덕적인 '선한 일'을 나타냅니다. ‘도모하다’는 말은 ‘미리 생각하다’, ‘간구하다’, ‘몰두하다’의 뜻을 갖습니다. 따라서 어떤 일에 반응하여 선을 행하라는 소극적인 명령이 아니고, 미리 솔선수범하여 선을 행하라는 적극적인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선한 일’에 너희 자신을 몰두하라는 뜻이 됩니다.
(5)모든 사람과 평화하라
세상사람들에 대한 다섯 번째 자세는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18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과 평화를 유지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피해를 입힌 사람들과는 멀리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절은 성도들이 가능한한 모든 사람과 평화하려고 애써야 한다는 것을 교훈합니다. '할 수 있거든'이란 표현은 인간관계에 있어서 화합(和合)을 향한 욕구가 아무리 강력해도 소용이 없는 경우가 있음을 시사합니다. 진정한 평화는 인간의 애씀만으로는 이뤄지지 않습니다. 평화를 위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으며(눅 2:14), 하나님과 죄악된 인간을 화목케 하시려고(골 1:20, 22)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이는 다른 사람과 조화를 이루면서 평화를 이루어야하는 궁극적인 근거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죄악된 인간과 평화를 이루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처럼 신자들도 평화를 위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골 3:15). 그러므로 신자들은 화평케 하는 자들입니다(마 5:9).
2.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삶
(1)원수를 친히 갚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라
지금까지는 일반적인 세상 사람들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할지에 대해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원수들에게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말씀을 듣습니다. 먼저 우리는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느니라”(19절)는 말씀을 듣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원수를 갚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악은 악으로 갚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전혀 다른 각도에서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바울은 로마 성도들을 향해 ‘내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하면서 자신의 사랑하는 마음을 전합니다. 바울은 우리가 직접 원수 갚는 일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고 권면합니다. ‘진노하심에 맡기라’를 직역하면 '진노의 자리를 주라'입니다. 여기서 '진노'는 하나님의 진노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절대 공정하게 나타나는 것이므로 지나치게 관대하거나 지나치게 냉혹하지 않습니다. 또한 심판의 권위는 하나님께로부터 유래하고 악인을 심판하는 주권은 하나님께만 속합니다. 따라서 사람이 원수를 개인적으로 보복하는 것은 공정성(公正性)면에서도 문제가 되지만 하나님의 주권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 됩니다. 바울이 자주 그러했듯이 본 구절에서도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자신의 주장이 정당하다는 것을 뒷받침합니다. 구약성경의 본문 신명기 32:35에는 “보수는 내것이라 그들의 실족할 그때에 갚으리로다”로 되어 있습니다. 신명기의 문맥에 비추어 보면, 적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능욕하며 기뻐하면, 하나님께서 그 백성의 원수를 갚기 위해 개입하실 것이라는 것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복수는 자신의 적들에게 뿐만 아니라 그들이 섬기는 거짓 신에게까지도 미칩니다. 이처럼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의 권한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권한과 권위를 확실히 인식함으로써 많은 수욕(受辱)과 고난(苦難)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보복하지 않고 기꺼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벧전 2:23). 우리에게 대한 진노를 그리스도로 인해 거두어 가심(8:1)을 생각하며 우리의 억울함에 대한 보복은 포기되어야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앞에서 언급한 내용의 절대적 권위와 확실성을 언급하기 위해서 ‘주께서 말씀하시느니라’고 말합니다.
(2)원수에게 먹이고 마시우라
성도의 원수에 대한 두 번째 태도는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놓으니라”(20절)는 것입니다. 원수 갚는 일을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는 것뿐만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그들에게 관용을 베풀라는 것입니다. 본절은 70인역(LXX) 잠언 25:21, 22을 거의 정확하게 인용한 것으로 원수가 궁핍하며 곤경에 처했을 때 선행과 친절을 베풀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원수를 먹이고 마시우는 것은 생명과 관계되는 행위이며 궁극적인 마시움과 먹임은 생수의 근원,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입니다. ‘숯불’은 '회개의 표', '마음의 불', '회개와 부끄러움의 가책으로 타는듯한 고통', '은혜', 즉 궁극적으로 은혜를 가져오는 '후회와 부끄러움에서 오는 고통'등으로 해석합니다. 대체로 숯불을 쌓는 것은 은혜를 베푸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이것만이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허락하신 유일한 복수 방법입니다. 은혜를 베풀므로써 원수가 자신의 행동에 대한 후회와 부끄러움을 갖게 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죄악에서 돌이키게 되어 서로에게 평화와 화해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3)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성도들의 원수에 대한 태도에 따라 악을 행하기도 하고 선을 행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수를 사랑함으로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21절)고 권면합니다. '악에게 진다'는 것은 원수의 악한 행위로 번민하거나 원수에 대해 악으로 갚으려고 악한 행위를 계획하는 것입니다. 즉 원수의 악한 행위로 인해 선한 상태를 떠난 것을 의미합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삶으로 곧 선행 구절에서 말한 겸손(3, 16절), 봉사(6-8절), 평화를 유지하는 것(18절)을 가리킵니다. 또한 20절의 원수에게도 친절을 베푸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이는 현재 삶에서 승리하는 생활을 말합니다. 이 승리는 자신의 노력, 열심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을 믿는 믿음과 우리를 인도하는 성령의 힘으로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나가는 말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성도는 핍박하는 자들에 대해서 축복하고 어찌하든 그들과 평화를 이루는 삶을 살아야하며, 원수 갚는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선으로 악을 이겨야합니다. 우리가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삶을 위해서는 먼저 성령으로 살아야합니다.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고 다른 사람과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우는 것, 모든 사람에게 선을 도모하는 것,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서 평화하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것은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삶을 성령으로 살아야합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살기위해서는 날마다 성령께 의지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살기에 힘써야합니다. 성령께서 내 심령속에 말씀하시는 것을 잘 듣기에 힘써야합니다. 성령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물론 기도해야하지만, 그전에 먼저 말씀을 많이 읽어야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말씀이 기억나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어서 우리가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읽는 일에 최선을 다해서 노력을 해야합니다. 말씀을 많이 읽으면 그 말씀이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어 생명력 있게 우리를 인도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성령의 능력으로 원수까지도 사랑하게 될 것이며 우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고 다른 사람들과 화평하며 모든 사람들에게 선을 도모하게 될 것이고 악을 이기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살려면 성령의 음성에 순종해야합니다. 성령으로 산다는 것은 성령으로 행하는 것으로 말씀합니다. 성령으로 행한다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즉각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성령께서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아무리 성령의 음성을 듣는다고 할지라도 순종하지 않으면 성령은 아무런 역사를 하지 못하고 맙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성령을 소멸치 않게 위해서 날마다 성령께서 말씀하실 때 즉각적인 순종이 필요합니다. 성령은 인격적인 분이시라 조용하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씀하십니다. 어느 때는 내가 너무 분주하여 성령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지나쳐버리는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음성을 듣지 못한 채 지나쳐버리는 일이 반복될 때 성령께서 더이상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않고 우리의 회개를 기다리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회개가 없는 한 더 이상의 성령의 역사도 나타나질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를 놓치지 말고 회개하여서 성령께서 말씀하시는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될 때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