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말씀 - 설교

[스크랩] 죄인을 부르시는 예수님

kaporet 2009. 6. 24. 12:20

죄인을 부르시는 예수님

마태복음 9:9-13

2009.6.21(주일예배)


들어가는 말


    얼마전 영국의 한 여성이 일약 유명인이 된 일이 보도된 바 있습니다. 그녀는 젊은 이들 틈에 섞여 가수 오디션에 응모했습니다. 심사원들은 그녀가 이미 42세라는 사실과 아름답지 못한 얼굴과 몸매를 가진 외모만을 보고서 그녀가 오디션에 응모한 것에 대하여 비웃는듯한 표정으로 그녀의 노래를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외모가 추하면 목소리도 추하다고 선입견을 갖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은 상태에서 사람들의 반응은 전혀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젊은 여성의 아름다운 목소리 자체였습니다. 그녀의 오디션 동영상은 인터넷을 통하여 전세계에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인터넷 접속회수가 늘어가면서 그녀는 유명인이 되어있습니다. 그녀가 유명인 된 것은 그녀의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아름다운 목소리 덕분입니다. 이와같이 이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어떤 분야에 입문하려면 자격을 갖추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르신 제자들은 갈릴리 어부출신들로서, 세상 사람들이 그들을 볼 때 인정할만한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들이 죄인이라고 불렀던 세리와 창기들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1.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신 예수님


    본문 배경

 

    본문에 소개되는 마태는 예수님의 12제자들 중 한 사람이요 마태복음의 저자입니다. 만일 마태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는 세리로서 자기 인생을 살다가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주님의 제자가 되고 복음 전파를 위하여 헌신하다가 끝내는 마태복음을 썼습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쓴 복음서이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메시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구약의 성경을 다른 복음서에 비해서 가장 많이 인용하면서 쓴 책입니다. 이처럼 놀라운 저작이 나오게 된 것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태를 만나시는 장면은 정말 극적입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호숫가의 가버나움 지방의 변두리를 지나가시다가 마태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셨습니다.


    세관에 앉은 마태

    

    마태라는 이름은 보편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란  의미를 가진 히브리식 이름 '맛다냐'(대상 9:15)에서 유래한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마가와 누가는 세리 마태를 '레위'란 이름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12제자의 명단에는 그를 '마태'란 이름으로 기록하였습니다. 이는 유대인들의 경우에서 흔히 볼 수 있다시피 동시에 두 서너개의 이름을 가졌던 때문인 것 같습니다. 아마도 레위는 소명받기 전의 이름이고 마태는 소명 후에 부여된 호칭인 듯합니다. 이는 마치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전에 ‘사울’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나 예수님을 만나고난 후 사도의 권위로서 말할 경우에는 '바울'이란 이름을 사용한 것과 비교할만합니다. 마가와 누가는 '레위'와 '마태'란 이름을 둘 다 사용한 반면 마태 자신은 '마태'란 이름만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마태가 예수님을 만난 후 변화된 것이 하나님의 선물로 말미암은 것을 기억하며 자신의 이름을 ‘마태’란 이름만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은 마태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셨습니다. ‘세관에 앉았다’는 말은 그 일에 종사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당시 세관은 유대를 속국(屬國)으로 하고 있던 로마를 위해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곳이었고 거기에다 분봉왕 헤롯 안디바의 정치 자금의 출처이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 이곳 가버나움은 상업과 교통이 발달했었던 다메섹과 갈릴리의 해안 도시들과 연결되는 길목에 위치했습니다. 따라서 육상 및 해상으로 운반되는 상품들에 대해 관세를 부과하기에 적합했던 곳입니다. 더욱이 이곳은 수리아와 애굽을 잇는 무역품에 대한 세금을 징수하기에 적절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당시 세관은 대로로 통행하는 상인들에게 관세를 부과키 위해 길가나 마을 입구에 간이 건물로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이곳 관리들은 밤낮없이 세관 업무에 종사했을 뿐 아니라 거의 모든 상품에 대해 세금을 부과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리하고 긴 막대로 곡식 자루 등을 찔러보아 그 속에 불법 상품들이 있는지의 여부를 알아보기도 할 정도로 철저했다고 합니다. 실로 그들은 세금의 강제, 부당 징수 등으로 유대 사회 내에서 가장 악질적 인물 중의 하나로 평가되기도 했습니다(5:46).

    그러므로 마태는 평소 세관에 앉아 자신의 업무에 종사하면서도 항상 마음속에 자신의 직업에 대해서 회의를 느꼈습니다. 비록 세리의 직업이 수입이 많아 부를 누리는 직업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동족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고 그중에서 일부를 자신의 수입으로 삼는 자신을 마치 동족의 피를 빠는 자처럼 여기는 동족의 눈길을 의식할 때 견딜 수 없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가족에게도 자신의 직업이 올바른 직업이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가족들도 자신의 수입으로 생활을 하지만, 동족의 따가운 눈길을 의식하면서 살기란 쉬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마태는 돈을 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해야 진실하게 사느냐’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물질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참된 인생입니다. 참된 인생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마태는 항상 하나님을 아는 삶에 대해서 동경해왔습니다. 그러므로 마태는 마음속에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내게 ‘나를 따라오라’고 말씀하시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따라가리라” 그 마음을 아신 예수님은 마태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나를 좇으라


    그리고 예수님은 세관에 앉은 마태에게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좇으라'는 말은 현재 명령형으로 ‘조금도 지체하거나 주저없이 당장 좇으라’는 뜻입니다. 이는 신앙 결단의 시급(時急)성을 강조한 말로서 ‘내 제자가 되라’는 의미와 상통합니다(4:19; 19:21). 예수님이 자신을 향해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마태는 즉시 ‘일어나 좇습니다.’ 이는 미련이나 후회가 있을 수 없는 과거와의 완전한 단절을 나타냅니다. 마태는 자신의 인생의 참된 의미를 찾는 기회를 얻었기에 망설임 없이 즉시 일어나 예수님을 좇은 것입니다. 세관 자리는 새 사람으로 대치될 것이지만, 그는 그보다 더 영광스런 천국 일꾼의 자리에 앉게 된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누가복음의 평행 구절에는 마태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좇았다고 기록되고 있습니다(눅 5:28). 마태는 자신의 인생을 걸어왔던 세관에서 종사하던 일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마태는 단지 ‘일어나 좇았다’라고만 말합니다. 이는 그의 겸손한 면모를 강력히 암시하고 있습니다. 즉 그는 자신이 타인으로부터 훌륭하다고 칭찬받을 만한 사항은 언급하지 않은 것입니다.


2.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예수님


    예수님을 위한 잔치를 배설한 마태


    예수님을 따르게 된 마태는 예수님을 위하여 잔치를 배설했습니다. 마태는 이제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단한 후 그의 동료들과 죄인들을 불러서 예수님과 그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합니다. 이것은 마태가 자신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곳에는 마태의 친구였던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세리는 당시 비애국적이고 욕심많고 부정직한 세관원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백성들로부터 죄인 취급을 당했습니다. 본문에서 '죄인들'이란 비록 실정법에 따라 사법적 제재를 받는 죄수는 아니었지만 유대 사회의 도덕규범과 구전(口傳) 율법인 할라카(Halacha)및 랍비들이 주의깊게 규정해온 전통과 규례를 지키지 않고 무시하던 의식법상의 죄인으로서 여기에는 창기와 포주, 그리고 세리가 대표적인 부류였습니다. 마태가 예수님을 위해 베푼 잔치는 일종의 송별회 성격을 띤 것 같습니다. 즉 마태는 이 자리에서 자신의 옛 생활을 모두 청산하고 새 삶을 시작함과 동시에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제자의 길을 걸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자신은 더 이상 세리의 삶을 살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동료 세리들에게 작별을 고하는 것이요 모든 사람들 앞에 죄를 청산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동료 세리들과 죄인들에게 예수님을 만나게 해주는 전도 현장이고 합니다. 마태는 바로 이 자리에 옛 동료들과 세속적 친구들을 초대하여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말씀을 듣도록 의도했던 것 같습니다. 자신만 믿고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만난 예수님이 얼마나 놀라운 분이신가를 그들에게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음식을 함께 먹는 의미


    예수님이 마태의 집에서 많은 사람들이 함께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모습을 누가는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눅 5:29)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누가의 기록에 나타나는 '큰 잔치'란 말을 표현하지 않고 있는데, 이것 역시 그가 자화자찬에는 매우 인색한 겸손한 사람이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는 부분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한없이 겸손하신 주님과 더불어 이와 같이 겸손한 주님의 제자의 모범을 또한 본받아, 자기를 내세우고 자신을 칭찬하는 일에는 극도로 인색한 반면, 타인을 칭찬하고 타인을 내세우는 데는 적극적이어야 하겠습니다. 한 알의 밀알 같이 '나'란 자아는 완전히 썩어질 때 비로소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 '앉아 잡수신다'는 말은 유대인의 전통 식사법에서 보는대로 식탁에 거의 눕다시피 기대어 먹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유대 사회에서 함께 식사를 나눈다는 것은 상호 인정과 우의, 평화와 사랑, 언약 공동체의 확인을 의미하는 표시였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일반 백성들이 멸시하며 상종조차 하지 않던 이들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앉아 식사를 한 것은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관점에서는 가히 혁명적인 행동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종교지도자들은 율법을 어기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이방인과 같은 이 죄인들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할 수 없으며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지자라면 결단코 이들 죄인들과는 자리를 같이 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심판하고 벌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구주요 친구로서 그들을 죄에서 해방시켜 자유함을 주려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불평을 말하는 바리새인들


    그때 바리새인들이 보고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라고 불평을 말합니다. (11절) 이 당시 바리새인들은 식사에 초대된 것 같지 않고, 대신 그들은 자칭 율법의 수호자들로서 예수님의 기이한 행동에 따른 율법의 파괴 여부를 관찰, 감시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 같습니다. 따라서 분명 자기 의(義)에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던 이들 바리새인들은 세리와 죄인 또는 이방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은 율법을 더럽히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아마도 이와 같은 어처구니없는 잔치를 끝까지 지켜보며 예수님의 결점을 확보해 두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제자들에게 와서 죄인들과 어울리는, 따라서 죄인과 동류(同類)인 그를 어찌하여 선생으로 두고 따르느냐는 듯이 비난하면서 선생과 제자 사이를 이간(離間)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권능을 행하신 예수님께(2-6절) 직언(直言)할 수 없을 만큼 용기가 부족했던 자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의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는 불평의 말은 예수님이 종교적 사회적으로 버림받은 패거리들과 함께 어울리는 이상, 그는 결단코 의인이 될 수가 없다는 논리인 것입니다. 그 당시의 시대적 배경뿐만 아니라 율법에 의해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불의를 도모하는 자들과 교제를 나누어서는 안되었던 것이 분명하며 단지 세속적인 문제로 거래를 해야 할 경우만은 예외였던 것 같습니다.


3.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병든 자를 치료하는 의사 예수님


    바리새인들이 제자들에게 불평을 말하는 것을 들으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12절) 바리새인들의 비난을 들으신 예수님은 그 당시 흔히 통용되던 본문의 속담을 그들에게 들이대셨는데, 병든 자만이 의원의 도움이 필요하므로 의원이 있어야 할 자리는 병자들 곁이란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죄인들을 구하려고 오셨으며, 죄인들과 함께 있는 것이 자신의 임무임을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의롭다고 주장하는 바리새인에게는 예수님의 도움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절대 의인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롬 3:10). 오늘날 우리 시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죄인임을 안타깝게 여기고 절망에 빠져 있는 자들에게 필요한 분으로서 그들과는 언제나 함께 있지만, 자신의 영적인 질병인 죄를 깨닫지 못하고 의인인 체하는 바리새인과 같은 신앙인에게는 예수님이 함께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긍휼을 배우라


    그리고 예수님은 호세아서 6:6을 인용하시어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13절)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면서 율법을 빙자해서 예수님을 비난하려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성경을 다시 배워야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가서...배우라”라는 말은 랍비들이 성경을 더 공부해야할 필요성이 있는 사람들을 깨우치고자 할 때 흔히 사용하던 상투어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성경에 능통하다고 자위하면서, 참 종교의 핵심이요 내용인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게을리하면서 외적인 의식과 형식에만 매달려 있었습니다. 즉 이들은 모양만 갖추면 종교적인 임무를 다 한 것이라고 착각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점을 지적하기 위해, 즉 그들이 성경도 참 종교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냉소적으로 랍비들이 흔히 사용하던 이 말을 빌어 바리새인들의 자만을 질타(叱咤)하신 것입니다.

    '긍휼'(사랑, 자비)이란 말은 히브리어로는 '헤세드'인데 구약에서 ‘인자하심’, ‘자비’등으로 번역됩니다. 이 말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 맺어진 언약에 준한 사랑을 뜻합니다. 즉 여호와의 종교는 여호와의 사랑과 긍휼을 실천하는 종교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를 섬기며 여호와의 율법을 지킨다고 하는 종교 지도자들은 호세아 당시, 종교의 핵심은 잊고 형식적인 의식에만 치중했던 제사장들과 똑같이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등한시 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이와 같은 현상이 재현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은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이 불행한 일을 당한 자에겐 그가 누구든지 사랑의 손길을 펴서 그리스도의 긍휼의 정신을 보여주어야 할 터인데, 이러한 예수님의 사랑을 보이지 않고 그가 이방인이며 불신자란 이유로 외면하는 경우가 허다하며 또한 바리새인들처럼, 기독교의 외형적 상식에만 어긋나도 마치 그를 사단의 자식인양 질타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서도 종교적 의식만 준수하고 외형적 틀 내에만 있다면 자기가 의인인 것처럼 목을 곧게 하는 것을 종종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라는 말은 제사가 필요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종교적인 의식보다는 소외된 자에게 베푸는 사랑과 자비를 우선적으로 여기신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긍휼과 제사는 둘 다 필요하고 선한 것이지만 긍휼이 보다 더 선한 것이며 제사보다 먼저 베풀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제사와 같은 모든 희생 제물은 타락한 인간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무한하신 긍휼과 사랑을 지적하기 위해 의도되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사의 핵심과 내용은 긍휼과 사랑인 것이며 이것들이 결여된 제사란 아무런 실체가 없는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이어서 예수님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인간을 의인과 죄인 두 부류로 나누시기 위해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모두가 죄인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실로 인간은 본래부터 의롭지 못합니다(시 14:3; 롬 1:18-32;  3:10-18). 따라서 스스로 의인인 체하였던 바리새인들도 역시 죄인이었던 것입니다. 이들이 죄인이긴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부르려고 온 것은 아닌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오히려 방해하고 죄를 뉘우치려고 하지 않은 자칭 의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는 말씀은 메시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 자신의 사역의 본질, 곧 죄인에게 은혜를 베풀며 버려진 죄인들을 구원키 위해 오셨음을 밝히신 말씀입니다. 누가는 이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2)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르다’는 말은 ‘초대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죄인들을 불러 천국의 기쁜 잔치에 초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고유한 사역은 바로 이런 무리들을 구하고자 오신 것이며 소외된 무리들과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나가는 말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마태는 예수님을 만나 후 그의 인생이 완전하게 바뀌었습니다.  세리였던 마태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3년동안 훈련을 받고서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 성령 충만함을 받은 후 그는 복음 전도를 위해 힘썼고 마태복음을 쓰는 위대한 일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일은 예수님이 마태의 세리로서의 삶을 다 용서하시고 그를 깨끗케 하시고 말씀으로 훈련시키심으로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복음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영접하고 구원받았습니다.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이 우리를 만나 주시고 우리를 변화시켜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 우리가 마태처럼 되지 못하는 것은 온전하게 예수님을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온전하게 따라가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가야’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말씀으로 훈련을 받아야하며 예수님과 함께 사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오늘부터 우리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일과 예수님과 함께 사는 일을 위해 힘을 써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인정받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 : 센다바중앙교회
글쓴이 : kaporet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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