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문제해결의 열쇠
문제해결의 열쇠
마가복음 2:1-12
2009.3.22(주일예배)
들어가는 말
현대를 사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문제로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질병의 문제는 모든 희망을 앗아가는 것처럼 사람들을 절망에 빠지게 합니다. 얼마전 TV에서 어린아이가 태어나면서 심장병에 걸려 고통을 당하는 가운데 그 부모가 아이의 병을 고치기 위하여 애를 쓰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부모는 아이가 나을 수 있다면 어떤 희생을 하더라도 아이가 치료받기를 바라며 애를 쓰는 것입니다. 이처럼 한 사람이 병에 걸리면 그 가족은 물론 주위사람들이 그로 인해 함께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암이나 심장병이나 중풍병이나 신장병은 좀처럼 치료하기 힘든 병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한 중풍병자를 치료하기 위하여 그의 친구들이 그를 예수님께로 메어오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오늘 그들의 믿음의 행위가 중풍병자를 치료하는 기적이 일어나는 놀라운 이야기를 들을 것입니다.
1. 예수님께 나아가는 믿음
하나님의 말씀이 우선되는 현장
이야기의 배경은 가버나움입니다. 가버나움은 팔레스틴 북부지역인 갈릴리지방의 마을로서 예수님의 집이 있는 갈릴리 전도사역의 중심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을 떠나신 뒤에 갈릴리의 여러 지방을 두루 다니시다가 갈릴리 사역의 활동 중심지였던 가버나움에 돌아오시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을에 들어오시자 그 소문은 곧 인근 각처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들어가시어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리자 많은 사람들이 집으로 몰려들어 집 문 앞에 서있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한번 만나보기 위해 예수님이 계신 집 앞에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때 그들이 기대하는바 이적을 행하시기보다는 오직 도(道)를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도'(道)란 과연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성경에서는 흔히 이 말이 ‘구원의 메시지’, ‘복된 소식’, ‘복음’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특별히 '하나님 나라의 비밀'(4:11)이란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인기에 영합한 일시적 문제 해결로서의 이적을 행치 않으시고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 참 생명의 진리를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온 사람들
그때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가지고 예수님께로 왔습니다(3절). 이 중풍병은 스트레스에서 오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중풍병은 스트레스로 인해 혈관이 막혔을 경우 갑작스런 충격을 받을 때 발생합니다. ‘중풍병’은 뇌일혈 등으로 인해 신체의 일부나 반신 또는 몸 전체가 마비되어 사용할 수 없게 되는 병입니다. 신경계의 수술이나 혈관 수술을 마치고 어느 정도 회복이 되어도 완치를 위해서는 계속적인 물리치료와 함께 정신적인 안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중풍병 환자는 말하는 것을 물론 걸을 수도 없고 몸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도 없었기에 타인의 도움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병에 걸린 사람들은 전신마비나 반신마비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며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 있어야만 살 수 있으며, 중풍병의 치료도 주변의 사람들의 도움이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중풍병자는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어 그의 생활은 불편하기 짝이 없습니다. 하루 이틀이 아닌 자신이 병에서 나을 때까지 아니면 죽을 때까지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 살 수 없는 환자의 마음은 병든 몸처럼 아주 연약해지기 쉽습니다. 그때 그에게 용기를 준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기 등장하는 '네 사람'은 그 환자를 위해 아낌없는 헌신을 다하는 참된 의미의 동료요 형제요 친구였습니다. 그들은 중풍병자를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서 자신들의 친구인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가기만 하면 그가 치료받을 수 있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친구를 살릴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밖에 없음을 알았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아가기만하면 자신들의 친구가 반드시 나을 수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예수님께 나가기를 힘쓴 사람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의 계신 집에 왔으나 사람들로 인하여 예수님께 데려갈 수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헌신적인 4명의 동료들의 도움으로 병자가 예수님께서 계신 집에 당도했으나 수많은 군중들이 입추(立秋)의 여지도 없이 그 문 앞에 둘러서 있었기 때문에 정작 만나 뵈어야 할 예수님께는 도무지 다다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4명의 동료들은 포기하지 않고 모든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들은 낙심하지 않고 우회하는 방법이지만 가장 적극적인 행동을 취했습니다. 그 집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 내려서 예수님 앞에 놓았기로 한 것입니다(4절). 즉 바깥 계단을 통해서 지붕 위로 환자를 메고 올라가 지붕을 뜯어내고 예수님이 있는 곳으로 환자를 달아 내렸습니다. 중풍병자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희생을 각오하고서라도 예수님께 중풍병자를 데려가자는 마음이 일치한 것입니다.
팔레스틴의 전형적인 서민 주택은 보통 흙벽돌로 된 단층 슬라브형으로 지붕이 평평하며, 방은 하나로 되어 있는 조그마한 형태입니다. 그리고 바깥은 지붕으로 계단이 놓여 있어 지붕 위로 올라갈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지붕은 보통 나무로 들보를 놓은 후, 짚으로 엮어 그 위에 놓고 그 사이를 흙으로 채워 비를 막도록 되어 있습니다. 가끔 들보 위에 기와를 놓고 다시 그 위에 짚과 흙으로 덮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중풍병자를 지붕 위로 올려 온 사람들은 지붕을 덮고 있는 흙과 짚, 석회, 판자, 기와 등을 떼어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보일 때까지 계속하여 지붕을 뜯어내어 구멍을 낸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드디어 막 드러난 들보 안으로 그 환자를 달아 내렸을 것입니다.
이때 분명히 먼지가 집 안으로 쏟아졌을 것이고, 이로 인해 방안에 있던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중풍병자를 메고 온 사람들이 예수님앞에 환자를 내려놓기 위해 애를 쓴 것은 예수님만이 중풍병자를 치료하실 분이라는 확실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때때로 어려운 문제에 부딪힐 때가 있으나, 믿음을 가지고 우리의 문제를 예수님께 가지고 나가서 구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우리도 예수님께 나아가 우리의 문제를 내려놓읍시다. 때로는 예수님께 나가려고 할 때 장애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망치 말고 믿음으로 극복하면 예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예수님은 우리의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주실 것입니다.
2. 죄사함의 선언
믿음을 보신 예수님
그때 예수님은 지붕을 뜯고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에 내려놓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가의 죄가 사함받았다고 선언하십니다(5절).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현명함과 또 열심있는 믿음을 보셨습니다. 여기서 '저희'란 단지 침구를 메고 온 4명의 동료만이 아니라 중풍병자까지를 포함한 5명을 함께 지칭하는 말입니다. 사실 본 사건을 통해 중풍병자의 믿음을 전혀 배제할 수 없는 것이, 예수님께서 바로 그 환자에게 '죄 사함'의 은혜를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중풍병자는 자신의 친구들에 의해 들 것에 실려 예수님 앞에 놓여질 때 그의 눈빛으로 예수님께 호소했을 것입니다. “예수님 나를 도와주세요.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나를 고쳐주세요”
믿음에 대한 축복의 선언
그러므로 예수님은 환자의 병을 고쳐 주는 대신 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병을 치료하는 것보다 그의 죄를 사하는 것이 먼저임을 아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병은 죄로 말미암은 마음의 고통에서 생기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 환자가 필요로 했던 바가 죄의 용서가 아니라 바로 중풍병의 치료였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다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다는 사실과 모든 고통은 인간이 하나님에게서 떠남으로 기인되었다는(사 59:1, 2) 구약성경의 가르침을 통해서 그 환자는 어떤 죄에 빠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예수님께서는 인간에게 가장 절실히 필요한 죄의 문제를 먼저 관심을 가지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병을 고쳐줄지라도 이는 또 하나의 뚜렷한 이적에 관한 내용으로 머물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예수님께서 육신의 병을 고치러 온 자에게 영혼의 죄까지 사해 주신 사실을 통해 육신의 병고침은 한시적(限時的)인 것이지만 영혼의 죄사함은 영원함을 가르쳐주십니다.
3. 죄사하는 권세
예수님을 알지 못한 자들의 어리석은 생각
이렇게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 대해 죄사함을 선포하시자, 이것을 들은 서기관들이 마음에 의논하여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분 이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라고 말합니다(6-7절). 누가복음 5:17에서는 서기관들이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온 것은 단순한 호기심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즉 그들은 신학적인 관점에서 예수님을 어떻게든 책(責)잡기 위해서 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군중들 틈에 끼어 자리를 잡고 앉아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으며 그 마음은 예리한 칼날같이 모든 상황을 점검하며 서로의 의견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 죄 사함에 관한 말씀을 하시자, 그들은 좋은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전통주의적이요 사변적인 비평가들의 판단은 옳았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죄를 용서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잘못 이해한 것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의 속성과 메시야에 대해서입니다. 사실 그들은 메시야조차도 죄를 사할 수 없었고 오직 여호와 한 분만이 죄를 사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여호와와 메시야의 일체성을 전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즉 그들은 이 땅에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께서 삼위일체의 두번째 위격인 하나님의 아들(聖子)이라는 사실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사죄의 말씀을 하신 것은 하나님과 구별되지 않은 아버지 하나님(聖父)의 능력으로 그렇게 행하신 것입니다.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능력있는 사역은 그를 통해서 일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참람하다고 말합니다. ‘참람하다’라는 말은 하나님에 대해서 신의 특권을 탈취하거나 그분을 불경스럽게 모독한다는 뜻입니다. 율법(레 24:16)에서는 참람죄를 범한 사람은 예외없이 돌로 쳐죽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율법에 능통한 서기관들의 입장에서 갈릴리 목수 출신에 불과한 예수님의 사죄 선포는 분명 참람한 것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사실 그들이 생각한 대로 만약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단지 인간 예수에 불과했다면 그들이 주장하는 바가 옳았을 것입니다. 실로 그들은 영적으로 어두움에 거하던 자들로서 진리의 빛이 그들에게 비춰졌지만 감히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불행에 처하고 말았습니다(요 1:5).
하나님의 권능을 알리시려는 예수님
서기관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참람하다고 생각할 때 예수님은 그들의 중심을 아시고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의논하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8절).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행동에 관한 그들의 오해를 겉으로 드러내 놓고 표현하지는 않았습니다. 실로 그들의 마음의 표정은 얼굴과 분위기로써 넉넉히 표출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그들의 내면의 요동을 '당신의 영으로 감지(感知)하시고' 그들의 의도를 간파하셨습니다(마 9:4;눅 5:22). 이처럼 예수님께서 그 마음을 꿰뚫어 본 것은 분명 직관적으로 상대의 심령을 읽어내시는 당신의 초자연적인 능력에 연유한 것입니다. 하나님이시며(롬 9:14;빌 2:6;딛 2:13)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마 16:16)이신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했을 뿐만 아니라(마 11:27;요 17:1), 스스로를 하나님과 동등한 자로 여기셨습니다(요 5:18, 21;12:44, 45).
이어서 예수님은 서기관들에게 “중풍병자에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고 묻습니다(9절).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의 생각을 아시고 단지 구두(口頭)로써의 사죄 선언과 현상적으로써의 완전한 치유 이적 중 어느 것이 쉽겠느냐 라는 질문으로 그들의 답변을 구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미로는, 그 질문 중 어느 것도 더 쉽다고 답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 모두가 똑같이 불가능한 일이며, 하나님에게는 똑같이 쉬운 일입니다. 아마도 서기관들에게는 어느 누구도 죄 사함의 성취를 입증할 수 없으므로 죄 사함에 관한 말이 더 쉽게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일어나...걸어가라'고 말하는 것은 실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이므로 더 어렵게 생각되었을 것입니다.
죄사함의 권세를 알리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고 말씀하십니다(10절). ‘인자’를 직역하면 '사람의 아들'로서 그리스도께서 즐겨 사용하신 자기 자신에 대한 메시야적 명칭이자 타인으로부터 쉽게 공격을 받지 않는 당신의 인성(人性)을 강조한 표현입니다. 즉 '인자'란 인간으로서 우리와 함께 거하시기를 기뻐하시는 겸손한 예수님의 모습(identity)은 물론, 이 땅에서의 그리스도의 거룩한 권위(authority)와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 '인자' 개념은 주로 심판주로서의 메시야란 의미와 더불어 이 세상의 죄인을 지금 용납하시고 그 죄를 지금 사유(赦宥)하시는 하나님과 동등한 신분으로서의 메시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2:28; 14:62). 즉 그분은 심판의 시점까지 기다리시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 당신의 직권(職權)으로 죄를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이제 모든 사람이 그가 실제로 죄를 사하는 권위와 능력을 소유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치유의 기적을 행하십니다.
4. 중풍병자를 치료하심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나는 현장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11절)고 선언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지니신 신적 권위를 대변하는 말입니다(마 5:22, 28). 즉 이는 예수님 자신이 죄의 결과인 질병에 대한 지배력을 갖고 있는 하나님이심을 공언하시는 절대 권위자로서의 선언입니다. 예수님은 동료 4명의 도움에 의해 들것에 실려왔던 그 환자에 대한 완전한 치료를 선언하시는 3중적 명령 “일어나, 가지고, 가라” 고 말씀 하십니다. 실로 예수님의 권위에 찬 명령은 그 자체 내에 역동적 능력이 있어 그 명령하신 바가 그대로 성취되도록 합니다(12절). 이러한 완전한 치료는 바로 죄 사함을 입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일어나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분명히 병 고침이 일어난 것처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씀의 결과로 이제 죄 사함이 실제로 일어난 것입니다.
기적은 하나님을 찬양케 함
중풍병자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자신의 침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자, 사람들은 이 일을 보고 다 놀라서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고 고백합니다(12절). 실로 치료는 즉각적이었습니다. 특히 ‘모든 사람 앞에서’, 즉 모든 무리와 죄를 사하시는 예수님의 권위에 대항했던 서기관들 앞에서 그는 일어나 상을 가지고 나갔습니다. 먼저는 상이 그를 들고 왔으나 이제는 그가 상을 들고 간 것입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서기관들에게 아무 말 없이 그들의 비뚤어진 심사(7절)에 일침(一針)을 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진실의 확증을 위해 필요한 2, 3인의 증인보다 더 많은 증인들이 예수님의 탁월한 능력을 확신함으로써 더 이상의 변론이 아무런 가치가 없게 되었습니다.
‘놀라다’는 말은 '제 정신을 잃다'는 뜻으로 그 충격의 여파가 매우 큼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이적을 목격한 무리들이 크나큰 충격 앞에 복합적인 감정을 지니게 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실로 이 같은 충격과 공포는 적어도 그들이 하나님의 임재나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느끼게 되었음을 말해주는 동시에 자신들의 본원적인 죄의식이 싹트기 시작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사 6:5). 그러한 사실은 대변이라도 하듯이 그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실로 이 송영(頌榮)은 그들이 마침내 그들 앞에 계신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 보내신 자, 곧 하나님의 능력을 대변하는 자, 다시 말하면 메시야로 믿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간접적인 모습입니다.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는 말은 그들이 과거에 이런 일을 전혀 보지 못했지만 이제 처음으로 이런 일을 본다는 것입니다. 실로 이 중풍병자의 치유는 그야말로 잠자던 유대인들의 심령에 들어닥친 하나님의 기습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시고 그 병을 고치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임했음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나가는 말
오늘 우리는 믿음으로 중풍병자를 메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신 예수님이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신 후 그 병을 치료하신 말씀을 들었습니다. 어찌보면 우리는 다 영적으로 중풍병자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도움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우리들을 위해서 누군가가 중보기도를 해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신 것을 경험했습니다. 우리의 어떤 문제도 예수님을 만나서 아뢰기만 하면 해결됨을 믿고 우리의 문제를 예수님께 아뢰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또한 누군가의 도움을 기다리고 있는 영적인 중풍병자들을 찾아가 그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여 그들로 예수님을 만나게 하고 예수님으로부터 죄사함의 선언을 듣게 하도록 중보기도에 힘써야할 것입니다. 내 주변에 누가 도움을 필요로 하는지 살피고 그들을 위해서 중보기도를 하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