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11:25-30
2009년2월22일(주일예배)
들어가는 말
한국전쟁이 끝난 후 시골에 버스가 잘 다니지 않던 때의 이야기입니다. 한 할머니가 무거운 짐을 이고 가고 있는데 그곳을 트럭을 몰고 지나가던 군인이 할머니를 불쌍하게 여기고 트럭에 타게 해주었습니다. 마침 할머니가 가고자 하는 방향과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한참 트럭을 몰고 가던 군인이 백밀러로 보니까 할머니가 낑낑거리며 머리에 짐을 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차를 세우고 할머니에게 물었습니다. “할머니 왜 짐을 바닥에 내려놓지 않고 계속 이고 있습니까?” 그러자 할머니는 “아유 차 태워준 것도 고마운데 어떻게 짐까지 바닥에 놓겠소.”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때때로 무거운 짐을 진 것처럼 힘든 때가 있습니다. 그 짐은 우리가 만나는 문제들입니다. 직장의 문제나 사업의 문제나 가정의 문제 등으로 우리는 괴로워하며 번민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문제를 자신의 힘으로 해결해보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안되면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구합니다. 그래도 안되면 탈출구를 찾다가 끝내는 절망하며 자신의 생명을 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1. 하나님을 아는 자
본문의 배경
예수님은 복음을 선포하시기 시작한 이후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말씀하시며, 자신의 메시야 되심을 직접 입으로 말씀하시지는 않으셨지만, 그분의 모든 사역과 하나님나라에 대한 말씀 선포를 통하여 알 수 있도록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둔하고 자신의 지혜를 자랑하는 바리새인들과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이 자신들의 지식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배척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갈릴리지역의 마을에서 많은 이적을 베풀었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많은 이적을 보았으면서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을 책망하십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시며 많은 이적을 베푸시고 병자들을 치유하셨지만, 예수님을 메시야(그리스도)로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과 어린아이들
예수님은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은 누구입니까? 그들은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는 자들인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과 제사장들을 말씀합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율법학자들과 제사장들은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율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들만이 지혜롭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르치심에 대하여 언제나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단지 나사렛 마을의 목수 요셉의 아들로만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이나 사역에 대해서는 언제나 경계만 하였지, 왜 예수님이 그렇게 가르치시고 또한 어떻게 그런 놀라운 능력으로 사역하셨는지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몇몇 사람들만이 예수님을 인정하고 하늘로부터 오신 선생이심을 고백합니다(니고데모, 아리마대 요셉). 심지어는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능력에 대하여 의심하면서 예수님이 사단의 힘을 빌려서 그렇게 하신다고까지 비난합니다. 오늘날도 자신이 지식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인정하고 받아들인 어린아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어린아이들처럼 순진하게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가난한 자들과 세리와 창기들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소위 있는 자들에게 언제나 소외되고 무시되어왔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르치심을 듣고서 예수님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 세상은 아무런 소망도 없고 항상 가진 자들과 지식층에 의해서 무시함을 받고 업신여김을 받아서 살 소망까지 끊어진 상태에 있던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말 그대로 복음이었습니다. 정말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자신들이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단지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받아들이고 믿기만 하면 자신들의 인생이 바뀌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때까지 아무런 소망이 없었던 그들의 삶이 새로운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자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시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잠 3:34; 약4:6). 사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자는 하나님 아버지외에는 없으십니다. 성부하나님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알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성부하나님과 예수님은 한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자신과 하나님 아버지는 하나라고 말씀하십니다(요 17:21,23). 또한 하나님을 아는 자는 예수님과 예수님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당시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기 위하여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말씀대로 산다고 했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들만이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어린아이들과 같이 순진한 믿음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성경을 많이 연구하고 안다고 해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처럼 순전하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자만이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2. 예수님께로 나아가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
그러므로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지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초청하고 계십니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인생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구원을 얻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지식을 동원하고 경험을 동원하고 자연을 통하여 무엇인가 하나님을 발견할 만한 것들을 찾기에 수고하였고 지쳐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 가까이 가보려고 율법을 지키면 되는 줄 알고 무거운 짐을 지고 그것을 행하기에 힘썼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나는 일은 실패했고 얻은 것은 우상숭배뿐이었습니다. 자기 나름대로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자신이 만든 우상들에게 절하는 모습뿐입니다. 이 세상의 종교는 모두가 인간들이 자기의 사상 속에 만든 신들의 모습입니다. 그곳에는 하나님이 아니 계십니다. 세상의 것을 통하여서는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인생의 여러 가지 무거운 짐을 지고 있습니다. 염려와 근심, 의심과 유혹, 슬픔과 고통, 죄책과 두려움, 탐욕과 야망 등의 짐을 지고 있습니다. 이 짐을 벗어버리고 싶어도 할 수 없기에 고통하고 있습니다.
다 내게로 오라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만이 문제 해결의 유일한 길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오신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십니다. 예수님 자신이 “진리”이십니다. 예수님 자신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시는 “생명”이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방법으로 해결방법을 찾지만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문제의 해결자이신 하나님을 만나지 않고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데, 하나님을 만나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쉬게 하리라
그러면 예수님께로 오는 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어떻게 해주십니까? 예수님은 약속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쉬게 하신다는 말씀은 안식을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안식이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을 때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평안과 기쁨입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깨어진 인간은 결코 안식할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과 원수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십니다. 언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지 모르는 자들에게 어떻게 안식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제 인간에게 안식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과 화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인인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과 화평할 수 있겠습니까? 죄인이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가는 날 그날이 바로 심판의 날입니다. 죄인이 하나님을 만나면 죽음이요 심판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하나님과 화평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죄인인 인간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인간의 모든 죄의 값을 대신하셨고 하나님이 예수님을 다시 살리심으로 새로운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다만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죄의 사함을 얻고 구원받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와 하나님과의 화평을 허락하십니다(요일 4:10; 롬 4:25; 롬 5:10).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받아들이고 믿는 자들은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고 그 화평을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진정한 안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3. 예수님께 배우자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 마음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안식을 얻으려면 예수님께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온유함은 주님의 성품이십니다. 하나님은 늘 온유하심으로 우리를 대하십니다. 주님의 온유하심이 아니면 이 땅에 존재할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온유하심은 이 땅에 오셔서도 그대로 나타나십니다(삼하 22:36; 시 18:35).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이신 당신의 자리를 비우시고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시기까지 겸손하신 모습을 보여주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기까지 낮아지신 모습을 보이십니다(빌 2:7-8).
교육학에는 '하아로우의 실험'이라는 이론이 있습니다. 심리학자인 하아로우교수가 이런 실험을 했습니다. 젖을 먹는 아기 원숭이들 앞에 엄마 원숭이 대신 두 개의 인형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두 개의 인형 중 하나는 철사로 엄마 원숭이처럼 만들어 그 철사로 만든 인형 원숭이의 가슴에 우유병을 넣어 두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부드럽고 두꺼운 천으로 엄마 원숭이를 만들어 우유를 빨아먹을 수 있도록 가슴에 우유병을 넣어 두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아기 원숭이들이 어떻게 하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첫날에는 아기원숭이들이 두 인형 속에 있는 우유를 모두 빨아먹었습니다. 그러나 다음날부터는 철사로 만든 인형에게는 가지 않고 천으로 만든 인형에게만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부드럽고 두꺼운 천으로 만든 엄마 원숭이 인형의 우유를 아기 원숭이들이 먹었습니다. 이러한 실험에서 보듯이 동물들도 부드럽고 온유한 것을 원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관계도 그렇습니다. 날카롭고 딱딱하고 매정한 사람보다 부드럽고 온유한 사람을 서로 찾습니다. 같은 재능, 같은 기술, 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도 사회에서 원하는 사람은 온유한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부드럽고 온유한 사람에게 친구가 있고, 이웃이 있기 마련입니다. 온유한 마음이 있는 곳에 훈훈한 인간관계가 형성되고 건전한 사회생활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의 온유함과 겸손함을 배우지 못함으로 안식을 얻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잘못하거나 나쁜 말을 하면 분해서 견디지 못합니다. 그러나 상대방을 용서하면 마음에 평안을 얻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이 자신보다 우월하다고 생각되면 견디지 못합니다. 그러나 겸손하게 상대방을 자신보다 낫다고 인정하면 오히려 그를 칭찬하고 격려하면서 마음에 기쁨을 누립니다. 그런데 이런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은 우리의 노력으로 얻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배워야합니다.
예수님 멍에를 메고 배우라
예수님은 자신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우려면,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자신의 온유함과 겸손함을 배우기 위해 주님의 멍에를 메라고 말씀하십니다. 멍에는 농부가 밭을 갈 때 소에게 일을 시키기 위해서 사람의 요구대로 잘 들을 수 있도록 이끄는 도구입니다. 주님의 멍에란 주님과 함께 갈 때에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잘 갈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끄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멍에는 주님의 온유하심과 겸손하심을 배우며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이 한걸음 나아가시면 따라서 한걸음 나아가면 됩니다. 먼저 갈려고 할 필요도 없이 주님이 가르쳐주시는 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 마음이 쉼을 얻음
우리가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우면, 우리의 마음에 쉼을 얻게 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안식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에 쉼이 있습니다. 마음이 쉼을 얻는다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평안을 얻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의 평안은 우리가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주님 우리 마음에 평안을 주실 때 비로소 얻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 있을 때 우리의 심령 깊은 곳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평안을 주십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안식을 얻고자 할 때는 오히려 더욱 괴롭고 고통스러웠는데, 그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의 온유하고 겸손하신 마음을 배우게 되면 마음에 평안이 충만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멍에는 쉽고 예수님의 짐은 가볍다
주님의 멍에는 우리 혼자 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쉽습니다. 만일 우리 혼자 멍에를 지고 간다면 그것은 짐이 되고 힘들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제까지 자신이 스스로 짐을 지고 가보려고 했습니다. 그 결과 그 짐은 너무 무겁고 힘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의 짐을 대신 지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법을 우리에게 보이셨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대로 따라 가기만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제로부터의 삶은 단지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따라가되 성령을 의지해서 성령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대로 가면됩니다. 우리의 능력이 있고 없고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주님과 함께 있느냐 함께 있지 않느냐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우리에게 부딪히는 문제들을 자신의 힘으로 어떻게든지 해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실상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는 무한한 능력이 있으신 주님의 멍에를 주님과 함께 메고 있기만 하면 됩니다. 주님의 멍에를 멘다는 것은 주님의 원하시는 대로 우리의 삶의 기준을 맞추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까지의 삶의 기준에서 자신이 왕이 되었던 자리를 이제는 주님께 내어주고 주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인생의 왕이 되어 통치할 때는 정말 힘들고 어려웠습니다. 자기 멋대로 하는 즐거움은 있었는지 모르지만, 문제의 해결능력이 없는 자가 왕 노릇한다는 것은 죽기보다 힘든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다릅니다. 주님께서 다 이루어 놓으신 것을 잡기 위하여 좇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것도 혼자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갑니다. 주님이 잠시 쉬자고 하시면 쉬고 가자고 하시면 가면됩니다. 그러는 중에 우리의 목적지인 하나님 나라에 이르러 주님과 영원한 안식을 누리며 살게 될 것입니다.
나가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를 초청하시고 우리에게 쉼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께 나아가 우리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주님께로부터 안식을 받아 누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 감사함으로 주님께 기도함으로서 우리의 무거운 짐을 예수님 앞에 내려놓고 주님의 주시는 평안을 누리며 사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