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예수님의 탄생의 목적
예수님의 탄생의 목적 마태복음 1:18-25 2008년12월21일(성탄주일예배) “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19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하여, 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2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24 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 왔으나, 25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마 1:18-25) 들어가는 말
매년 12월이 되면 이곳저곳에 크리스마스트리로 장식되어 밤이 되면 아름답게 반짝이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상점마다 크리스마스 선물용품을 진열해 놓고 있습니다. 어쩌면 크리스마스가 상점에서부터 오는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전세계 사람들이 12월24일은 크리스마스이브로 12월25일은 크리스마스로 서로 선물을 주고받으면서 즐거워합니다. 서로가 “메리크리스마스”라고 말하며 상대방을 축하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마스의 유래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채 크리스마스를 즐기고만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크리스마스를 산타크로스가 탄생한 날로 알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원래 ‘크리스마스’의 어원은 ‘그리스도’라는 말과 ‘미사’라는 말의 합성어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뻐하며 예배드리라는 말입니다. 이 날은 성탄절이라고 부르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하신 것을 기념하여 예배드리는 날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탄생하심은 우리 인류에게 커다란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날부터 이 세상의 역사가 새로 시작되었으므로 예수님의 탄생한 날이 역사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성탄절을 기준하여 만든 것이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카렌다입니다. 이것은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정한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가 정하는 것을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전의 인류의 역사는 소망이 없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이 세상은 새로운 빛이 비추이게 되었으며, 모든 인류는 이제 새로운 소망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인류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1.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예수님의 탄생 오늘 본문을 보니까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서 소개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이것은 예수님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내용을 구체적으로 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는 요셉이라는 청년과 정혼했습니다. 정혼한 상태는 법적인 결합을 의미하는 것으로 결혼에 대한 구속력을 지닙니다. 이는 분명 오늘날의 약혼보다는 더 엄숙한 관계였고, 간음으로 인하지 않고는 결코 파혼할 수 없는 사실상의 기혼상태였습니다. 이런 이유에서 본문의 요셉과 마리아도 정혼에 의해 남편과 아내로 일컬어지고 있습니다(19절). 또한 대략 1년 정도의 정혼 기간을 가지는데, 바로 그러한 상태에서 남편이 사망하면 그 여자는 자동적으로 과부가 되었고, 만약 그 기간 중에 부정을 저지르면 간음으로 간주되어 죽음의 형벌을 받을 수도 있었습니다(신 22:23, 24). 본문에서는 정혼 기간에 성관계를 갖지 않는 유대인의 관례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이 비상한 것이었음을 넌즈시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마리아가 요셉과 결혼하기로 정하고 동거하기 전에 예수님을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당시에 정혼한 처녀가 동거하기 전에 아이를 잉태했다는 사실은 비상한 관심을 가질만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성적인 결합은 남편이 그의 아내와 함께 동거하기 위해 아내를 자기 집으로 데려 왔을 때 벌어지는 혼인 잔치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일정한 혼인예식을 끝내고 동거했을 때만이 성적 결합이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마리아에게서 잉태된 징조가 숨기고 있던 수치나 죄악이 비로소 발각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역사로 잉태되었음이 '분명해졌다'는 의미입니다. 즉 예수님의 실제 아버지는 요셉이 아니라 단지 성령으로 잉태되어서 마리아를 통하여 이 땅에 탄생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요셉은 마리아의 잉태사실을 알고 정혼식에 의한 남편으로서의 권리를 행사하려 했습니다. 여기서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라는 것은 그가 청렴결백하여 불의에 굴하거나 흔들림이 없는 상태를 지칭합니다. 실로 그는 공의롭고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율법에 따른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살고자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적어도 여자가 부정했을 경우 돌로 쳐죽여야 한다는 모세의 율법(신22:20-24)을 한번쯤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의 이러한 내면적 갈등은 정혼한 마리아와 파혼하려 마음먹은 데서 발견됩니다. 여하튼 그는 마리아를 혹독하게 다루어 자신이 참 유대인임을 증명할 수도 있었겠으나 그는 율법의 칼날을 휘두르지 않고 대신 율법의 핵심인 사랑과 용서(롬 13:8-10)의 미덕으로 문제 해결을 지으려 했습니다. 그는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했습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마리아가 공개적으로 모욕당하기를 원치 않았고, 부정한다고 생각되는 마리아와 양심상 결혼할 수 없었기 때문에 조용히 파혼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 당시 요셉은 법적으로 허락되는 한도내에서 은밀하게 마리아와의 관계를 끊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였습니다. 즉 그는 마리아에게 큰 피해가 돌아가지 않는 사소한 문제를 빌미로 두 사람의 증인 앞에서 그녀의 손에 이혼증서를 '가만히' 줌으로써 이 일을 조용히 묻어버리려 한 것입니다. 요셉은 이렇게 함으로써 의로움과 율법을 무난하게 조화시키려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그에게 ‘마리아 데려오기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실로 요셉은 이러한 곤란하면서도 슬픈 사실에 직면하여 최선의 해결책을 찾고자 극심한 고민에 빠져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 당시 요셉은 자기 조상 다윗에게 말씀하신 바, 메시야 탄생에 대한 약속(삼하 7:12-16)이 바로 자신과 자신의 아내 마리아에게서 성취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기에 나타난 '주의 사자'는 구약에서 흔히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전달하는 사명을 맡은 메신저를 가리킬 때 이같은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창16:7-14;22:11-18;출 3:2-4:17). 그런데 이 '사자'는 때로 하나님의 직접적인 현현이기도 했으며, 많은 경우에 있어서 인간의 모습으로 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인간의 역사에 깊이 관여하고자 하시는 그 계획을 당신의 메신저의 대화를 통해 요셉에게 밝히 드러내신 것입니다. 꿈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달하시는 한 방법으로서 성경이 완성되기 이전에 간혹 사용되었습니다(창 20:6;삿 7:13;삼상28:6). 마치 야곱의 아들 요셉이 꿈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창 37:5, 9, 19) 것처럼 여기 야곱의 아들(16절) 요셉도 꿈을 통하여 하나님의 지시를 받습니다. 주의 사자가 말한 '다윗의 자손 요셉'이란 앞에 나온 족보를 연상케 하며. 요셉으로 하여금 다윗의 혈통이 감당해야 할 이 놀라운 역할, 즉 메시야 탄생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본문의 '두려워 말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사자를 통해 요셉에게 관여하셨을 때, 그는 이미 마리아를 데려오고자 하는 마음을 내심 굳히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본 구절을 달리 '마리아 데려 오기를 결코 주저하고 망설이지 말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즉 이 말은 천사가 요셉에게 이미 정혼했으니 신부를 집으로 데려오기 망설이지 말라고 지시한 것이며, 그로 인해 받게 될 죄책이나 비난을 개의치 말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리아의 잉태는 음행으로 인한 '불결한 잉태'가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은 '거룩한 잉태'였기 때문입니다(18절). 물론 이 말을 요셉이 완전히 이해할리 만무했지만 평범한 유대 신앙인이었던 요셉에게 '성령'에의 언급은 그로 하여금 예수님의 출생비밀을 이해하고 인간적인 고민과 갈등 및 두려움과 의심에서 벗어나게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의 법적인 남편인 요셉과의 관계 속에서 예수님이 탄생해서 법적으로는 요셉이 아버지이지만, 실상의 아버지는 요셉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그러면 예수님은 누구의 아들입니까? 본문과 관련 있는 누가복음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누가복음 1:35) 마리아가 성령으로 인하여 예수님을 잉태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마리아를 덮으심으로 되는 것임을 설명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성령을 통하여 마리아의 몸을 빌려서 예수님을 잉태하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이 세상의 구원자로 보내시면서 인간의 어머니는 주셨지만 아버지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동시에 인간의 아들, 곧 완전한 신(神)이시자 완전한 사람이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것은 성령이 임하시고 하나님의 능력이 마리아를 덮음으로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친히 마리아의 몸 안에 들어오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마리아의 몸에 들어올 때 마리아의 몸 안에 태동하는 생명은 어떤 존재일까요? 하나님의 능력으로 잉태되는 생명은 곧 하나님 자신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자신이 자신의 능력으로 마리아의 몸 안에 들어오셔서 잉태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영적인 존재인 하나님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리아의 몸 안에 생명을 부여하시고 들어오신 것입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이신데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시기 위하여 마리아의 몸을 통하여 잉태되고 이 땅에 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탄생의 신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면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2.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 자기백성을 구원하시려 오신 예수님 천사는 요셉에게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것을 전합니다. 이로써 요셉은 두려움을 완전히 물리치고 오히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영광에 자신을 동참케 한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했을 것입니다. 그는 여전히 사랑하는 마리아의 남편으로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마리아에게서 날 아들이 다름 아닌 "기묘자요, 모사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요, 평강의 왕"(사 9:6)이신 메시야, 바로 그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태어날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는 지시를 듣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녀에 대한 명명권은 아버지에게 있었습니다(창 4:25). 본 명령에서 하나님께서는 아이의 이름을 직접 지시하심으로 친부권을 행사하고 계시며, 예수님의 법적 아버지 요셉을 그의 양부로 임명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는 히브리어 '여호수아' 라는 이름의 헬라어 표기입니다. 이는 '여호와는 구원이시라'는 의미를 지닌 이름으로서 그가 오신 목적, 곧 마리아의 아들 예수가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종말론적 구원을 베푸실 분으로 이 땅에 오셨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수'란 이름은 주로 '그리스도', 곧 메시야와 연결되어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적어도 예수가 유대인이 대망하던 바로 그 메시야로 오셔서 인류의 죄를 속량해 주신 분이라는 신앙 고백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예수’라는 이름에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자기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의미입니다. 즉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셔야했습니다. 죄가 있으면 인간을 구원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처럼 아버지와 어머니사이에서 육체의 관계를 통하여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처녀 마리아의 몸을 통하여 잉태되어 태어나야만 했습니다. ‘자기 백성’은 유대인의 통치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왕적 권위를 내포한 말로서 본래 유대인을 가리키는 말이나, 유대인에게만 한정적으로 사용되지는 않았습니다. 세례요한과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경건한 자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제자로 삼았으며(3:9;8:11), 따라서 이방인들도 '자기 백성'의 범주에 포함됩니다. 즉 '자기 백성'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와 그 통치를 전인적으로 인정하는 모든 '메시야의 백성'을 의미합니다. 자기백성이란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창세이전부터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여기서 '죄'(하마르티아)란 말은 화살이 과녁에서 빗나갔다는 의미의 동사 '하마르타네인'에서 유래한 말로서 하나님의 뜻(과녁)에 인간의 의지와 행동(화살)이 빗나간 상태를 일컫습니다. 즉 인간이 하나님의 뜻보다 지날 칠 때나 모자랄 때 모두를 가리키는데, 예수님께서는 바로 인간의 이 같은 연약함을 적극적으로 치유하고 덮어주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로마의 속박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며, 그 멍에에서 초래한 모든 악으로부터 백성들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정치적인 메시야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할'(20:28)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바로 그들의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인간의 범죄
그러면 왜 예수님이 범죄한 인간을 구원하기위하여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야만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말씀으로 6일간 천지를 창조하시면서 제6일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흙으로 인간을 빗으시고 그 코에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넣어 인간은 생령, 즉 산자가 됩니다. 그 사람을 아담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아담을 하나님의 동산 에덴동산에 두십니다. 아담은 에덴동산의 동산지기가 되이어서 동산을 지키며 다스리게 됩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동산인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행복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계명을 들어야했습니다. 그것은 동산중앙에 둔 선악을 알게 하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만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나님께서는 엄하게 경계하십니다. 선악과 이외에도 동산에는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도 있었으며, 생명나무도 있었습니다. 그 나무들은 인간이 자유롭게 먹어도 좋았습니다. 그러나 선악과는 먹어서는 안되는 나무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나무는 인간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일, 즉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한 일을 제대로 하는가 하지 않는가를 보는 시금석과도 같은 나무였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는 바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순종을 요구하는 것을 보기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반역이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행위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죄악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모두가 죄인이 된 것입니다.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나는 사람들은 모두 부모로부터 피를 물려받아서 인간에게는 죄가 흐르게 됩니다. 모든 사람은 죄가운데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제 아담과 그 후손은 모두다 자신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거역하고 죄를 범한 인간을 그대로 보아 넘길 수가 없습니다. 그는 심판을 받아야하고 형벌을 받아야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인간을 위한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인간을 심판하셔야합니다. 그러나 인간을 사랑하신 하나님은 인간을 심판하시되 또한 인간을 구원하실 수 있는 방도를 강구하시었습니다. 그것은 범죄한 인간을 대신하여 또 다른 인간이 대신 죽는 것입니다. 그러면 원래 범죄한 인간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누가 범죄한 인간을 위해서 죽을 수 가 있습니까? 죄가 없는 인간이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죄가 없는 인간이 한사람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담의 후손인 인류 모두는 아담의 범죄로 다 죄 가운데서 태어났기 때문에 죄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아담을 대신하여 또다른 인간을 창조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게 창조된 사람은 아담을 대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는 아담의 후손으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되 죄없는 몸으로 와야만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창세기 3:15에서 여인의 후손이 올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후손으로 죄없으신 몸으로 이 땅에 오시기 위하여 처녀인 마리아의 몸을 통하여 태어나야만한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보내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단 한 가지, 죄 가운데 빠진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여 다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하나님과 함께 살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 땅에 인간의 몸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은 십자가를 통해서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류를 심판하신 장소입니다. 아담의 범죄로 죄 가운데 태어나는 인류를 위해서 예수님이 대신 심판받으시고 죽으셔야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보시고 우리의 죄를 없다고 인정하시고 용서하십니다. 이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공의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하여 인간의 모든 죄를 심판하시고 인간의 죄를 없다고 인정해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사망에서 3일만에 부활시키심으로 예수님의 의로우심을 보이시고,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자신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하나, 예수님이 우리의 죄 때문에 대신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것을 믿기만 하면 죄 용서함을 받고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것은 그들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함입니다(요 3:16). 3. 우리와 함께 하시려 오신 예수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보라 처녀가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본문의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말씀(사 7:14)인데 예수님의 탄생으로 성취된 말씀입니다. 이 예언은 북이스라엘과 아랍의 동맹군이 침략해 올 때를 배경으로 합니다. 이때 여호와틀 떠나 이방 앗수르에게 도움을 구하는 유다 왕 아하스에게 선지자 이사야가 책망하며 하나님께서 친히 그에게 '징조'를 주실 것이라 예언하는 장면입니다. 즉 예언된 임마누엘(7:14)은 결국 유다 땅을 소유하게 될 것이며(8:8), 그의 모든 원수들의 계획을 좌절시키며(8:10),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빛이 되시기 위해(9:2) 이방의 갈릴리(9:1)에 나타나실 것입니다. 이 임마누엘은 한 아기요 한 아들이며, 그 이름은"기묘자요, 모사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요, 평강의 왕"(9:6)으로서 다윗의 위에 앉아 나라를 굳게 세우고 영원토륵 공평과 정의로 왕국을 보존하실 것입니다(9:7). 예수님의 이름이 ‘임마누엘’이라고 합니다. 임마누엘의 뜻을 번역한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의미인데, 더 정확히 말하면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메시야와 예수가 되실 뿐 아니라 그분이 곧 죄악으로 인해 절망가운데 있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친히 이땅에 내림하신 하나님,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분이심을 강조한 호칭입니다. 실로 죄로 인해 원수되었던 하나님과 인간들을 화해시키기 위해 십자가에서 화목제물이 되어 주실(요일 4:10) 중보자이신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다가(요1:14)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시는(마 28:20) 영원한 하나님 그자체이십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죄사함을 받고 그분의 실존을 날마다 인정하는 백성들은(21절) 모두가 하나님과 더불어 살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를 우리의 죄에서 구원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함께 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예수님이 우리를 하나님과 함께 살게 하실 수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자기의 구세주로 믿고 고백할 때, 성령께서 우리의 심령에 들어오시어 내주하심으로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성령님은 제3위의 하나님이시므로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있게 하십니다.
나가는 말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이 탄생하신 날을 기념하는 성탄절을 맞이하여 예수님의 이땅에 오신 목적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시기위해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며 예수님과 함께 살기에 힘써야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 백성답게 살기를 결단해야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살기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살려면 예수님을 자신의 주로 고백해야합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주로 고백하는 것은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주인으로 고백한다면 이제부터는 나의 인생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고 이제부터는 예수님 때문에 살아야합니다. 무엇인가 생각을 해도, 잠을 자도, 밥을 먹어도, 직장에서 일을 해도, 친구들과 만나는 것도, 모두 예수님 때문에 합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삶은 모든 인생의 문제를 다 예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자신의 삶을 자신이 어떻게 해보려고 해왔습니다. 그러다가 잘 안되면 하나님 탓을 합니다. 정말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했다면 처음부터 우리의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해야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인정하고 예수님께 자신의 문제를 다 내어놓고 기도합니다. 그리할 때 예수님이 우리의 문제를 하나님 아버지께 아뢰어서 모든 것을 다 들어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살려면 예수님과 함께 시간을 같이 보내야합니다. 성경을 읽고 기도를 통하여 예수님과 시간을 보내고, 무슨 일을 하든지 예수님 앞에서 하는 것처럼 마음을 예수님께 쏟으며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슨 말을 하거나 생각하거나 행할 때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라고 생각하며 행하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