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성도의 구원과 성령의 역사
성도의 구원과 성령의 역사
로마서 8:26-30
2008.9.21(주일예배)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26-30)
들어가는 말
한국영화 “아버지”라는 영화의 내용 중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남자고아 아이가 미국으로 입양하여 갔는데 그곳에서 양부모의 사랑가운데 자라나서 청년이 된 후, 자신의 정체성을 알고 싶은 마음으로 양부모와 상담해서 한국의 친부모를 찾기 위해서 일부러 군에 입대하여 주한 미군으로 한국에 옵니다. 수소문 끝에 자신을 낳은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는 죄를 짓고 교도소에 갇혀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입양을 주선한 단체의 도움으로 자신의 어릴 때 사진과 기록을 토대로 아버지를 찾습니다. 청년은 자신이 친아버지를 찾는 과정 속에서 자신의 양아버지가 병으로 쓰러진 소식을 듣고 근심합니다. 그리고 친 아버지를 찾는 일을 중단하고 돌아갈 것도 생각하며 고민합니다. 그러나 양아버지는 아들에게 그래도 친아버지를 찾는 일을 중단하지 말고 끝까지 포기하지 말 것을 부탁합니다. 그때 비로소 청년은 자신의 진정한 아버지는 자신을 낳아준 아버지가 아니라 자신을 양자로 삼고 길러주신 양아버지인 것을 깨닫고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서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고백합니다. 교도소에서 한 죄수가 자신이 그 사람의 아버지라고 말하며 방송사를 통해서 입양자 청년에게 연락을 하여, 청년은 매주 교도소에 찾아와서 그 죄수를 면회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난 후 이 청년의 친 아버지는 살인자라는 사실을 알고 청년은 괴로워하지만, 모든 사실을 받아들이고 미국으로 돌아갑니다. 청년은 자신의 아버지가 자신을 사랑으로 권면해준 지금의 양아버지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때로는 자신을 키워주고 사랑해주신 양아버지의 사랑을 의심하고 친아버지를 찾으려 했던 입양청년처럼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의심하고 방황하는 때가 있습니다. 많은 성도들은 자신의 환경이 조금만 어려워지면 마치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이것은 대단히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치르신 엄청난 대가를 잊어버릴 때 우리는 구원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증거되었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을 통하여 지금도 끊임없이 하나님의 사랑하심은 증거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증거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사실입니다.
1. 성령의 간구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의 간구(26절)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고 구원받은 자들로서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지금의 고난을 인내를 하면서 몸의 구속을 기다려야하며, 성도가 몸의 구속을 바란다면 참음으로 기다려야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성도는 자신의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바르게 이해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후 새 생명으로 거듭났고, 성령께서는 성도들이 받은 구원이 무엇인지 깨닫도록 도와주십니다. 그러나 실제로 몸의 구속이 이루어질 때까지 성도는 탄식하면서 양자될 것 곧 몸의 구속을 참음으로 기다리게 됩니다.
이때 성령께서 우리 성도들의 연약함을 도우십니다. 성령은 성도를 양자로 보증해 주는 것으로 끝내지 않으시고 최종적으로 구원이 완성될 때까지 도와주십니다. 성도는 연약한 육신을 입고 있기에 성령께서 성도 가운데 계시면서 성도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며(요 16:13), 양자로서의 보증이 성도 안에서 확실히 성취되도록 도와주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령은 보혜사이십니다(요 14:16, 26;16:7). 성령께서는 성도가 연약해 있을 때에 성도의 무거운 짐을 덜어 주고 곁에서 일으켜 세워주며 붙들어 주십니다.
성령께서 이처럼 우리 성도들을 도우시는 때는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는” 때입니다. 성도는 연약하기에 영적 힘을 공급해주는 통로인 기도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어떻게 기도해야 좋을지 모른 채 당황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기도하던 사람도 문제가 생길 때 너무나 당황한 나머지 기도하지 못하고 난감해하는 성도를 봅니다. 때로는 단지 자신의 현상의 문제만을 이야기하면서 하나님과 자신과의 문제에 대해서 인식하지 못한 채 기도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기도함에 있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인됨을 철저하게 자각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성령의 도움을 간구해야 합니다. 성령의 도움이 아니면 기도의 능력도, 기도할 내용도 찾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성도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할 때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십니다.” 성령께서 연약한 성도들을 위해 일하고 계신 것입니다. 즉 성령께서 성도들 편에 서서 그들이 의식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사실들을 미리 아시고 성도들을 위해 성부 하나님께 간구하고 계십니다. 이런 면에서 기도는 성도 안에 계신 성령의 사역이라고 일컬어질 수 있습니다. 성도가 갈등으로 인해 탄식하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성령께서도 성도보다 더 심한 탄식으로 성도를 위해 간구하신다는 이 사실이야말로 성도에게는 가장 큰 위로이며 구원에 대한 보증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을 위해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시는 성령을 의지해서 기도할 때 비로소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성령(27절)
왜냐하면 성도를 도우시는 성령의 간구하심은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연약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한 채 기도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계시며 하나님 또한 성령님의 생각을 잘 알고 계십니다.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은 성령의 생각을 아시고 성령은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하십니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 하나님과는 독립된 인격체이시며, 성부 하나님과 성령은 각각 활동하십니다. 그러나 ‘성령의 생각’은 하나님의 구원 계시와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그 구원 계시를 바탕으로 해서 성도를 위해 이루어진 것입니다(요 14:26;16:7-14). 즉 성령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잘 알고 계시고 그 구원의 계획에 따라서 역사하시며, 성도들이 구원 얻도록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십니다.” ‘하나님의 뜻대로’는 ‘하나님을 따라’란 의미로서, 성령과 성부 하나님이 구속 사역을 위해 긴밀한 관계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성령은 성부 하나님과 별개로 활동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께서 세워 놓으신 거대한 구원 계획에 따라 활동하십니다. 성령께서 성도를 위해 기도하시는 것도 성부의 구원 계획을 완성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2. 하나님을 구원의 역사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구원의 계획(28절)
성부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완성시키시기 위해서 성령께서 성도를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계신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성도들을 위해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여기서 성도가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은 것’이 ‘하나님을 사랑한 것’에 대한 보답으로 주어졌다는 인상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성도를 선택하시고 부르시는 것은 인간의 어떤 행위에 대한 보답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성도로 선택함을 받은 것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에서 비롯됩니다.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은 자이며,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은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고 구원함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구원을 위하여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됩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은 ‘모든 것이 선을 위해 함께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즉 만물 또는 모든 일이 선을 목표로 하여 협조한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여기서 나타내는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께서 만물로 하여금 선을 위해 역사하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만물은 하나님의 섭리안에 포함되어 있으므로, 그 모든 것은 선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따라서 성도를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되는 원동력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해 간구하신다는 사실에 있습니다(27절). 즉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이루어지도록 성령께서 간구하심으로 성도들 위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미리 정하심(29절)
하나님께서 구원의 계획에 따라서 미리 아신 자들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하실 자들을 미리 아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막연한 것이 아니라 이미 창세전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을 자들을 아시고 그들을 미리 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 속에 미리 아신 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신 것입니다.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사건이 그리스도를 믿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때부터 계속 변화하게 되어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완전한 모습으로 변화 될 것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이미 그의 형상을 받은 자이며,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 상태입니다. 그러나 이 상태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므로 성도는 믿음의 눈으로 소망 가운데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성도들을 그리스도를 본받게 하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자녀들 중에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입니다.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됨으로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모습을 할 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중에 맏아들로 인정될 것입니다.
미리 정하신 자들을 부르시고 의롭다하시고 영화롭게 하심(30절)
하나님은 당신의 구원의 계획에 따라서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구원하시기로 미리 정하신 자들을 부르셨습니다. 복음을 통하여 구원받을 성도들을 부르심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만일 우리에게 누군가가 복음을 전해주시 않았다면 우리는 어떻게 자신의 죄인됨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통하여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또한 복음을 들을 때 그것을 믿게 하신 것도 은혜입니다.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게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고 언급했던 것처럼 구원의 모든 단계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신 성도들을 의롭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칭의는 법정적인 선언입니다. 우리의 실상은 죄인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성도가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음으로 하나님께서는 의롭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 또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함을 얻은 성도들은 성령의 역사로 점점 거룩한 모습으로 성화되어 갈 것입니다. 그래서 단지 법적으로만 의로운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의로운 모습이 그의 삶 가운데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하신 성도들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성도가 아직 육체가운데서 실수하고 있지만, 영적으로 이미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시민권을 갖고 살도록 하셨습니다.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의 심령 속에 오셔서 성도의 몸을 성전 삼으심으로 성도를 영화롭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성도는 그 육체도 영화로운 몸으로 변화할 것입니다. 바울이 이처럼 구원의 과정을 자세히 나열한 것은 성도로 하여금 성도를 향하신 하나님의 변치 않는(39절) 사랑을 알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이루어 가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예정과 부르심은 믿음에 의해서 확정되며, 칭의와 영화도 믿음에 의해서 성도에게 주어집니다. 이처럼 구원의 전 과정에 있어서 ‘믿음’이 전제되어 있으므로 바울은 굳이 그 단어를 삽입시킬 필요가 없었습니다. 본절에 나오는 동사 ‘의롭다 하시고’와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는 모두 과거 시제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그리스도의 재림시 궁극적으로 완성될 것이지만, 이미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확고하게 세워져 있음을 나타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성령을 통하여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게 하시며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임을 잊지 않고 늘 기억하게 하십니다. 성도들로 늘 구원의 확신을 깨닫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나가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구원의 궁극적인 것은 영화입니다. 즉 영광의 몸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이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서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심을 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것을 체험해야합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이루어지지만 그것을 체험하는 것은 우리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삶을 위하여 첫째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을 더욱 확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기 위하여 그리스도께 더욱 순종하기에 힘써야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더욱 알아야합니다. 이것은 오로지 말씀의 묵상과 기도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말씀을 묵상하며 그리스도에 대해서 더 깊이 알고 그리스도를 닮도록 기도하며 순종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얻기 위해서 자신의 유익하던 모든 것을 다 포기했듯이 지금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만나는데 있어서 방해되는 것은 전부 버려야할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를 만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그리스도를 알기 위하여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일과 영적인 도서를 읽는 일과 주님께 무릎 꿇어 기도하는 일에만 전념해야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성령께 모든 것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위하여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시는 성령을 의식하며 그분께 우리의 연약함을 맡기고 의뢰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으로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고 성령께서 주시는 말씀으로 말하고 성령께서 지시하시는 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연약하여서 실수를 하여도 낙망치 않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때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조금씩 변화되는 삶을 살 것이고 결국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영화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