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복음을 다시 들어야할 이유
복음을 다시 들어야할 이유 로마서 15:14-21 2008.9.7(주일예배)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 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인하여 더욱 담대히 대강 너희에게 썼노니,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이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이 일로 인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함이니라. 기록된 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함과 같으니라”(14-21절) 들어가는 말 우리는 어릴 때 옛날이야기를 즐겨들으며 자라났습니다. 할머니를 통하여 동네 아저씨를 통하여 옛날이야기를 들으며 때로는 무서운 이야기를 듣고 화장실을 가지 못하고 여럿이 함께 화장실에 간 적이 기억납니다. 때로는 슬픈 이야기를 들으며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때로는 우스운 이야기를 들으며 박장대소하며 웃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릴 때 들은 이야기가 어른이 된 후에도 가끔 생각납니다. 그것은 옛날이야기가 인상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아픈 추억은 빨리 잊고 싶어하지만, 즐거운 추억은 항상 기억하기 원합니다. 그런데 우리 성도들이 항상 기억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구원의 이야기입니다. 옛날이야기보다 더 긴장되고 더 기쁜 이야기가 우리의 구원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구원받은 사실을 자주 잊어버리고 흘러간 옛날이야기처럼 희미하게 기억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사실은 옛날이야기처럼 단지 추억의 이야기가 되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의 이야기는 옛날이야기처럼 단지 지나간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에도 구원이 진행되고 미래에 구원이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구원의 이야기를 가장 실감나게 들을 수 있는 것은 복음입니다. 복음을 통하여 우리는 항상 자신이 지금도 하나님의 구원의 과정 속에 있음을 깊이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도 복음을 다시 들어야합니다. 1. 복음을 다시 들어야할 이유 로마교회의 배경 로마교회는 사도들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가 아니라, 예루살렘에 올라갔던 유대인들이 오순절 성령강림 때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심한 후 로마에 돌아와서 복음을 전함으로 세워지기 시작했고 그 후에 스데반의 핍박이 있을 때 예루살렘에서 도망친 성도들에 의해서 더욱 복음이 확장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교회는 점점 더 부흥하고 그 소문이 고린도지역에서 사역하던 바울 사도에게까지 전해지자 바울이 그들에게 복음을 더 구체적으로 기록하여 보낸 것이 로마서입니다. 그러므로 로마교회는 이미 복음을 듣고 구원받은 자들로서 나름대로 성숙된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는 율법주의에 빠진 자도 있었고 믿음을 가진 자로서 합당치 못한 모습을 지닌 자들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복음을 온전히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교회 안에 들어왔지만, 복음을 구체적으로 알지 못한 자들은 단지 구원받은 것에만 기뻐할 뿐 구원받은 자로서의 삶에 대해서는 무지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어서 교회가 세상을 향해서 빛을 발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하고 복음을 방해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다시 복음을 적어서 편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들으면 들을수록 성도의 믿음이 더욱 견고해지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다시 쓰는 사도의 마음 당시 로마의 성도들에게 약간의 불화와 갈등은 있었지만(14장) 전체적으로 볼 때 로마 교회는 신앙의 성숙한 면모가 가득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들의 신앙의 성숙함을 ‘선함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서로 권하는 자’라고 인정합니다. '선함'은 선천적 기질로서의 '선함, 착함'이 아니라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인해 삶 속에서 드러나는 '새사람의 인격의 덕성 및 도덕적인 성숙함'을 의미합니다. '모든 지식'은 로마의 성도들이 더 배울 것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해로서 저희에게 필요한 구원의 지식이 다 있어서 안전하고 확실하게 일을 진행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더 나아가 지식('그노시스')이라는 단어는 구원에 관한 지식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대한 통찰과 이해를 나타내므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오해했지만 로마의 성도들은 바울이 지금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과 계획을 잘 이해하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고후 2:14; 4:6; 10:5; 빌 3:8). ‘서로 권하는 자’는 로마의 성도들이 갖춘 성숙한 신앙의 또다른 면을 말하고 있다. ‘서로’는 약한 자들과 강한 자들 즉 유대인 신자들과 이방인 신자들을 가리킵니다. 저희가 이렇게 서로 권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 선한 마음과 충분한 지식이 있어서 저희 믿음과 생활에 필요한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아직 방문하지 않은 로마 교회는 목회자들이 있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항상 피차 권면하여 진리에서 이탈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 가운데 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살전 5:11). 사도는 로마 교회의 사정을 잘 알 수 있는 어떤 근거에 의해서 확신한 것입니다. 로마교회의 성숙된 믿음을 위하여 로마교회가 바울의 확신을 받을 만큼 신앙의 성숙을 보이고 있으나, 바울이 그들에게 복음을 쓰고 있는 이유는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입니다.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의 뜻은 '어떤 교리를 반복한다'는 의미입니다. 즉 그들이 알지 못한 어떤 새로운 것을 가르친다는 뜻이 아니고 이미 알고 있는 복음의 진리를 회상시킨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바울은 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했을까요? 그 이유는 복음의 원리와 명령을 안다고 하면서도 그들의 행함에 부족함이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더 굳건히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성숙한 신앙적 면모를 갖춘 로마 교회였지만 온전함에 이른 것이 아니었기에 바울은 다시 한 번 진리를 일깨워 주어 로마 교회를 튼튼하게 세우려고 하였을 것입니다. 여기서 가르친다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구태여 '생각나게 하려고'란 용어를 쓴 것은 바울의 신앙 인격의 겸손한 표현법입니다. 이는 형제를 권면할 때에 상대의 인격을 존중해 주는 모범을 보여줍니다. 바울의 받은바 은혜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은혜는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서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이 되어서 이방인들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것이 되기 위함이라고 밝힙니다. 로마의 성도들과 마찬가지로 바울에게 있어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특별한 의미와 감회를 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는 사도적인 직분과 사역에 관련된 고백으로서 바울은 자기의 사도 직분을 하나님이 주신 은혜라고 말합니다(행 9:15; 고전 15:9-11; 엡 3:7-9; 딤전 1:12, 13). 교회와 믿는 자를 핍박하여 주님을 대적했던 죄인 중에 괴수인 자신을 불러 구원해 주실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이방인의 사도'로 삼아주신 것이야말로 은혜 중의 은혜라고 간증하는 것입니다(롬 1:1, 5; 갈 1:1, 15;2:9). 사도바울은 그의 다른 서신보다도 본서를 '더욱 담대한 마음으로' 썼다고 말합니다(12:3;14장). 바울은 자신이 로마 교회를 세우지 않았고 또한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갖고 있었으나 하나님께서 은혜로 택정하시고 이방인의 사도라는 막중한 사명을 맡겨 주심을 생각할 때 그들을 권면할 자격을 찾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담하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대제사장의 명을 받아 기독교도들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던 중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 이방인을 위한 복음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게 되었습니다(행 9:15; 26:14-19). 즉 사도직의 은혜가 이방인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숭고한 사역의 성취를 위해 바울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 후에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온 생애를 드린 것입니다. 바울의 이방인 사도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바울에게 맡기신 사도직은 범세계적인 직무로서 복음 전파의 직무는 물론 제사장적 성격을 띤 직무였습니다. 즉 바울의 사명은 이방 세계를 하나님이 받으심직한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일과 관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란 말은 '거룩한 사명을 수행하다', '제사장으로 봉사하다'의 뜻을 가집니다. 이러한 사명을 받은 바울의 역할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제사장 직무를 맡은 바울의 역할은 언제나 자기 자신의 인격은 물론 모든 청중, 곧 이방인의 인격을 하나님께 바치는 구원의 메신저로서의 봉헌 행위였습니다. 둘째는 모든 교회들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셋째는 구체적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행위를 포함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란 표현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바울의 사도직은 제사장적 직무를 수행하는 기능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이방인'과 '제물'을 동격으로 취급하여 복음에 의하여 얻어진 이방인을 사도가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 즉 영적인 희생 제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제물'이란 제사 의식에서 마지막으로 바쳐지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받으심직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이방인들에게 단순히 복음을 전파할 뿐만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복음을 순종케 함으로 하나님께서 받으심직한 제물이 되도록 그들의 영혼을 성결케 해야 한다는 사명인 것입니다. 이런 뜻에서 사도직의 기능을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함으로 묘사했고, 사역의 대상인 이방인을 구약의 제사에서 제사장이 드리는 제물로 비유하여 나타낸 것입니다. 당시 복음을 통해 회개한 이방인 신자들이 할례를 받지 않았다고 하여 불결하다고 주장하는 유대인 신자들이 있었기에 여기에 대한 대답으로 바울은 이방인 신자들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고’ 깨끗하게 되어 하나님께서 받으심직하게 된다고 말한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는, 성화(聖化)가 성령의 내주하시는 역사로 칭의와 최종적인 구원 사이에서 이루어져 가는 과정임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우리는 또한 성령께서 신자를 하나님이 받으심직한 상태로 창조해 가시는 주체임을 보게 됩니다. 거룩한 삶은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8:2, 4). 2. 이방인의 순종을 위해 사도로 일한 바울 그리스도 안에서 자랑하는 바울 그러므로 사도는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것에 대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할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말은 바울의 애용구로서 바울 신학의 기본어(key word)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란 말의 의미는, 바울의 자랑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는 것으로 자랑의 근거라는 것입니다. 즉 그의 자랑은 자기 자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높이는 것임을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란 말은 바울이 자랑할 수 있다고 말하는 그 모든 것의 근거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을 한층 강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말은 사도의 모든 사역의 근거요 내용과 목표였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는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하나님께 관한 것'입니다. 이 표현은 어떤 특정한 것을 가리킨다기보다는 하나님께의 섬김을 가리키는 것으로 '하나님의 일'에 관련된 것에 있어서만 자랑한다는 자랑의 범위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 용어는 예배 직무를 수행하는 유대인의 예배 의식적 표현에서 나타나는 일종의 전문 술어로서(히 2:17;5:1) 앞절(16절)의 '제사장 직무'와 '일군'과 일맥상통합니다. 바울이 자랑하는 구체적 내용은 16절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이방인들이 복음을 순종함으로 하나님께 드려진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바울이 유달리 자랑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도구로서의 축복을 받은 사실입니다(고전 15:31; 고후 1:12-14; 7:4, 14; 8:24). 이것을 바울은 자기의 면류관이요 기쁨이라고 했습니다(살전 2:19). 복음을 자랑하는 이유 사도가 이처럼 자신이 전하는 복음에 대하여 자랑할 것이 있다고 말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이방인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바울을 통하여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이외에는 말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이방인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순종하도록 이끄는 것이야말로 바울의 소원이었으며, 또한 그의 부르심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것을 다시 상기시킴으로 로마의 성도들에게 자신의 사역에 대한 열매를 확실하게 가르치면서 이런 성과가 어떻게 무엇으로 성취되었으며 그 성격은 어떤 것인지를 규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역사하심'을 말합니다. 바울은 여기서 이방인을 순종케 하기 위해 자기가 수고한 것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자기 자신은 주님이 쓰시는 복음 전도의 도구요 하나의 통로였음을 명백히 밝히는 표현을 쓴 것입니다. 복음을 위해 사용된 하나님의 도구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바울 사도를 통해 쓰신 도구, 즉 방편과 원리가 무엇이었는지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한 것입니다. '말'은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를 위한 사도 바울의 모든 노력을 총체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대개 그의 가르침과 설교(복음 증거)를 말합니다. 그리고 '일'은 복음을 위한 그의 행적과 고난 즉 실천적 행실이 있는 삶을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를 통해 나타나는 이런 것들을 거룩한 도구로 쓰셔서 구원 사역을 이루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방인을 향한 효과적인 전도 사역을 위하여 바울로 하여금 표적과 기사의 능력을 행하게 하셨습니다(행 13:7-12).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행 2:22)과 사도들의 사역에서도 나타났습니다(행 5:12). 여기서 '표적'은 영적인 의미로서 인간들의 눈앞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초월적인 역사를 의미합니다. 즉 영적으로 볼 수 없는 실재를 눈앞에 나타내준 증표인 것입니다. 그리고 '기사'는 놀라운 일을 뜻하는 것으로서 일반적으로 볼 수 없는, 즉 자연 법칙을 초월하는 기적을 말합니다. 이로 보건대 표적과 기사는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자임을 증명할 뿐만 아니라 그가 전한 복음이 하나님이 계시하신 진리임을 증거합니다. 아울러 무엇보다도 그 복음이 가리키는 하나님 나라가 지금 역사상에 현실로 임했음을 일깨워 주는 표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한 것’은 사도의 사역이 성령의 능력의 역사가 아니고는 불가능했음을 나타내 줍니다. 성령의 능력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신의 구원 사역을 이루시기 위해서 사도에게 주신 능력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능력은 사도를 충만케 한 거룩한 능력입니다. 성령의 능력은 사도의 복음 전파를 열매 맺게 한 실질적인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능력'이야말로 그리스도께서 이방인을 순종케 하기 위해서 사도를 통해 나타내신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을 가능하게 한 장본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이 아니고는 복음 전파의 열매가 맺혀질 수 없습니다. 거룩한 성령께서 모든 방편들을 들어 도구로 쓰실 때 하나님 나라의 열매가 있을 것이니 모든 사역자들은 능력의 근원인 성령을 의지해야 할 것임을 암시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말씀의 능력과 표적과 기사의 능력과 성령의 능력이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한 것만을 말하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본절의 의미는 '나는 그리스도께서 이방인을 순종케 하기 위해서 나를 통해 말과 일, 표적과 기사의 일을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는 어떤 것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3. 이방인에게 복음전파를 위해 수고한 바울 사도바울의 복음 사역지 사도바울은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여러 지역을 다녔습니다. 바울은 세 차례에 걸쳐서 소아시아와 지중해 북부 지역을 두루 다니며 전도 여행을 하였습니다(행 13-21장). 그가 복음전도를 시작한 것은 다메섹과 아라비아 지방에서부터였으며(행 9:19, 20), 본격적으로 이방인의 사도로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한 것은 안디옥에서였습니다(행 11:25, 26;13:1-3). 그런데 어째서 그의 전도 사역의 출발점을 예루살렘으로 말했을까요? 그것은 복음 전도의 출발점과 중심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사도행전 1:8에서처럼 복음은 예루살렘으로 시작해서 땅끝까지 전파될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루리곤'은 아드리아 해의 동쪽 연안, 마게도냐에 근접해 있는 로마의 속령으로 오늘날의 유고슬라비아 영토에 해당합니다. 공식 명칭은 일루리아(Illyria)로 바울은 3차 전도 여행 중 고린도에 체류하는 동안 일루리곤 지역을 방문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행 20:1, 2). 아무튼 사도는 여러 해에 걸친 자신의 사역의 결과를 언급하는데서 자기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나 회심자의 수효, 또는 이러한 사역에 뒤따른 고난 등에 관한 설명을 생략하고 단지 자기가 수고한 경로를 표시하기 위해 서 '예루살렘으로부터 일루리곤까지' 이르는 넓은 지역을 인용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라고 말하는 것은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일루리곤까지 이르는 넓은 범위의 지역을 나다니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렇다고 목적지를 향해 곧바로 서둘러간 것도 아니었습니다. 단지 그는 복음을 편만하게 전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편만하게 전하다'는 '부족한 것을 보충하고 완결짓는다'는 의미입니다. 칼빈(Calvin)은 이것을 '바울이 부족된 것을 보충하면서 복음 전파를 넓게 퍼뜨렸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통하여 바울의 전도 활동을 짐작해볼 수 있는데 그는 전도 여행을 하면서 큰 도시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그곳에 교회를 세운 다음 그 지역의 새로운 회심자들에게 그 교회를 맡겨 그들로 하여금 그 주변 지방들을 보다 강력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복음화시키도록 한 듯합니다. 다른 사람의 사역지에 복음을 전하지 않는 바울 사도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할 때 다른 사람이 전도한 지역에서는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자신의 사도직의 진실성을 확증하기 위해 지금까지 아시아에서의 자신의 활동이 거둔 성공에 대해서 언급하고(19절), 이제 유럽에서의 미래 사역과 로마 방문에 대한 생각을 피력하기 위해 그가 항상 자기 사역의 지침으로 삼아온 원칙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백은 이미 다른 전도자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한 곳에서는 전도하지 않겠다는 바울의 확고한 선교 정책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자기 자신에게 닥치는 희생과 고난이 아무리 많더라도 복음을 위한 길잡이가 될 책임을 맡겠다는 그의 소망을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전서 3:10에서 말한대로 그의 사명은 '터'를 놓아 다른 사람이 그 위에 건축할 수 있게 하는 것, 즉 남들이 아직 가지 않은 곳,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지 않은 곳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바울은 영예로운 일로 여겼고, 이 일을 사랑했으며 또한 최선을 다해 열정적 노력을 기울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해야 할 막중한 사명을 갖고 있는 바울이(1:8, 14, 15;행 1:8) 여기서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한다는 자신의 선교 정책을 말한 것은 단순히 사도직의 구별 의식이나 우월 의식에서 한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바울의 사역의 독특한 특징으로 땅끝까지 복음을 전해야할 신성한 일을 위해, 이미 복음이 전파된 곳에 또 가서 전하는 이중적 일을 하지 아니하여 하루라도 빨리 땅끝까지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파하고자 한 열망에서, 바울은 그러한 선교 원칙을 취한 것입니다. 아직도 미개척지가 많은데 한 곳에 사역자들이 모이는 것은 기독교 전체의 공동 사역이란 관점에서 볼 때 비효율적이므로 자신이 먼저 앞장서서 고통을 무릅쓰겠다는 순교적 자세를 바울은 항상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복음을 듣지 못한 자들에게 대한 복음전도 바울은 자신의 선교 정책이 자기 고집이나 자랑이 아님을 입증하기 위해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는 이사야서 52:15의 70인역(LXX)의 말씀을 문자적 인용합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의 이방인을 위한 전도 사역이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에 일치하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은 이사야서 52:13-15에서는 '왕들'로 표현되었으나 본문에서는 유대인과 대조되는 이방인을 가리킵니다. '듣지 못했다'는 것은 유대인들처럼 고난의 종되시며 메시야이신 주님에 관한 소식을 듣지 못했다는 뜻으로서 역시 이방인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그리고 '깨달으리라'는 말은 사도들이 전파한 주의 소식, 곧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메시야인 구세주로 알게 되어 믿음에 이른 것을 뜻합니다. 이렇듯 열방에 복음의 빛이 비춰지므로 주께 돌아온 자가 역사상에 일어난 것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새로운 시대가 도래한 것을 보여주는 획기적인 사건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바울은 자기의 선교 사명을 인식하고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자신의 선교사역의 결과를 증거한 것입니다. 나가는 말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사도바울이 로마 성도들에게 복음을 다시 쓰는 것은 로마교회 성도들이 비록 복음을 잘 이해하고 서로 권면할 정도의 성숙한 신앙을 갖고 있지만 그들이 복음을 다시 생각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것은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서 그들이 하나님께 거룩하게 드려지게 하기 위함입니다. 즉 성도는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구원받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하나님 앞에 거룩한 백성으로 드려져야함을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거룩한 백성으로 드려지고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드려지기 위해서는 복음을 다시 들어야합니다.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몸을 찢으시고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기억하며 날마다 그 십자가 앞에 나아가 우리의 더럽혀진 심령을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으로 깨끗이 씻음받고 거룩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사도바울을 통하여 들려진 복음을 다시 듣는 것입니다. 또한 지금 내가 주님 앞에 성결하게 살고 있어도, 더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하여 더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며 날마다 십자가에 자신의 옛 자아를 못 박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하게 씻음 받습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오신 성령님을 통하여 하늘 보좌의 생수를 마시기 위하여 힘써야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샘솟듯 주시는 생수를 날마다 마시며 영혼의 만족함을 느끼며 살아야합니다. 이러한 은혜는 성령께 온전히 의지하는 자에게만 주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엎드려 우리의 있는 모습그대로 내려놓고 주님의 은혜를 구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