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성도의 영적 예배
성도의 영적 예배 로마서 12:1-2 2008.8.10(주일예배) 들어가는 말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 가운데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하루는 아비가 큰 아들에게 가서 오늘 밭에 가서 일을 하라고 하니까, “예, 아버지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아비는 작은 아들에게도 가서 오늘 밭에 가서 일을 하라고 말하니까, “싫어요, 오늘 바빠서 안돼요.”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작은 아들이 시간이 지나서 생각해보니 자신이 아버지에게 잘못 대답했다고 느끼고 밭에 나가서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밭에 나가서 일한다고 대답했던 큰 아들은 밭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정말 아버지의 말을 들은 자는 누구입니까? 라는 것이 예수님의 질문입니다. 물론 이 비유의 내용에서는 작은 아들이 아버지의 말을 들은 아들입니다. 이 비유는 신앙생활을 할 때 말만 잘하고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바리새인들에게 경고한 말씀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교회공동체 안에 들어와서 가장 많이 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예배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자의 가장 기본적인 행위이며 최상의 행위입니다. 즉 하나님은 예배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러나 예배만 잘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던 바리새인들처럼, 과거 이사야 선지자 시대에 이스라엘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예배는 그럴듯하게 드리면서 그들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는 엉터리 삶을 살았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은 그들의 드리는 예물이 지겹다고 말씀하십니다. 성도의 예배를 가장 기쁘시게 받으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백성들의 드리는 예물을 지겹다고 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백성들이 예배를 드리고 돌아가서는 악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함이 없이 죄를 반복적으로 짓는 이스라엘백성들의 예물을 받으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를 드리는 성도가 하나님을 온전히 경외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릴 때 그 예배를 기쁘시게 받습니다. 즉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며 자신의 공로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됨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받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1-11장 사이에서 하나님의 의를 얻는 것은 인간의 어떤 수고나 공로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설명합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의에 이르려하다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하나님의 의에 이르는데 실패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복음을 듣는 순간 지금까지 하나님을 모른채 살았던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의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은 자들이 하나님의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고 구원받은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 구원받은 성도답게 살아야하는데 그것은 모든 삶속에서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산제사입니다. 1. 너희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근거한 권고 바울은 이제까지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에 대해서 설명해왔음으로 로마의 성도들이 바울의 가르침을 충분히 깨달은 줄 알고 구원받은 성도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할지 설명하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로마의 형제들에게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권합니다. 바울이 로마의 성도들에게 “형제들아”라고 말한 것은 수신자(受信者)들에 대한 사랑의 감정 어린 표현입니다. 바울이 이 단어를 수신자에게 적용시킬 때마다 사도는 깊이 감동되어 있는 것입니다(1:13; 7:1; 8:12; 10 :1).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로마 성도들을 ‘형제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로마교회를 권고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권고가 아닌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근거한 권고입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의 자비를 얼마나 덧입고 사는 가를 깨닫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행할 수 없습니다. '모든 자비하심'은 '자비'(고후 1:3;빌 2:1;골 3:12) 혹은 '불쌍히 여김'(히 10:28)으로 번역되는 단어로서 복수 형태입니다. 이는 '큰 자비'나 '동정'의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 '라하밈'(삼하 24:14;대상 21:13;시 25:6)이라는 복수 형태를 따른 것입니다. 이는 복수를 취하여 강조하는 표현으로, '모든 자비하심'으로 번역된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근거하여 권한 것입니다. “권하다”는 말은 여기에서 명령과 간청의 양면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바울이 사도적 권위를 가지고 호소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이 단어는 본절의 성격을 지시하면서 나머지 다섯 장(12-16장)의 성격도 권면으로 이어짐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우리가 교회 안에서 누구를 가르칠 때 우리의 권위가 아닌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근거하여 말씀에 따라서 권고해야할 것을 교훈합니다. 거룩한 산제사 바울의 권고는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너희 몸”에 대해서, 어떤 이는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는 육신을 가진 인간의 존재라 하기도 하고, 삶의 구체적인 실재(realities) 속에 있는 개인적 제사의 체현(體現)이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의 몸은 몸과 마음, 즉 온 인격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봄이 바람직합니다(Calvin). 그러므로 '너희 몸'은 '너희 자신'을 뜻하며, 우리의 인격 전체를 형성하는 모든 요소를 포함합니다. 세상과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구체적인 삶으로 표현되는 삶의 양태까지 포함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란 하나님께 전 인격적으로 우리의 몸을, 생애 전체를 드리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생애를 통해 계속적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일에 힘쓰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룩한'이란 말은 흠이 없이 순전(純全)하다는 의미입니다(엡 1:4; 빌 2:15; 골 1:22). 그러므로 거룩한 제사란 죄의 종이었던 우리가(6:16, 17; 엡 2:1, 5)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 받아 그가 주신 새 생명으로 그를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6:4-7, 13, 14, 22; 갈 2:20). '산제사'는 '지금 살아있는 제사'란 뜻으로, 이 말은 구약적인 제사, 즉 짐승을 죽여 피를 흘림으로써 드리는 제사와 대조됩니다. 또한 당시에 이교(異敎) 사회에서 성행했던, 몸을 부정(不淨)한 일에 악용했던 것을 염두에 두고 한 말입니다. 즉 '산제사'는 구약 시대의 동물 제사처럼 다른 존재로써 드리는 것이 아니라 바로 살아있는 자기 자신을 드리라는 것이며 또한 지역이나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제사로서 살아 움직이며 생활하는 자체로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예배가 단순히 예배시간만을 드리는데 그치지 말고 우리의 삶 전체와 우리의 인격을 다하여 예배할 것을 말씀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주일날 예배는 드리면서도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예배와 삶이 연결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일날 예배를 드리고 돌아가서 죄를 지었던 이스라엘백성들처럼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살 때 우리의 드리는 예배는 산제사로 드리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의 드릴 영적 예배 우리의 거룩한 산제사야 말로 ‘우리의 드릴 영적예배’입니다. 즉 우리의 드려야할 예배는 단순히 예배시간에 나와서 참석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다 드리는 예배여야 하는데, 바로 그런 예배가 우리의 드릴 영적 예배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거룩한 산제사를 ‘영적 예배’라고 말씀한 것은, 이방인들의 미신적인 행동들을 염두에 두며, 하나님이 요청하시고 기뻐하시는 예배, 즉 하나님께 가장 합당한 예배를 강하게 표현하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이는 이스라엘 성전 예배의 외형적 의식과 대조하여 ‘영적 예배’라고 말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예배’는 구약의 제사를 지칭하기도 했는데, 여기서는 단순히 제사 행위를 의미한다기보다는 삶으로서의 예배를 의미합니다. 즉, 삶의 모든 가치와 의미를 주께 두고 주님을 섬기는 삶을 사는 것에 역점을 두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로서 변화된 인격으로 살아갈 때 그 삶 자체가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예배이고 그 예배야말로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삶이 주일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한 주간의 모든 생활이 하나님께로 향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게 될 때, 이것이 우리의 영적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2.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성도가 자신의 삶을 드리는 거룩한 예배, 영적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먼저 이 세상과 구별되어야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의 옛자아가 죽었고 우리는 죄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합니다. “이 세대”의 '세대'('아이온')는 '세계', '세상'을 의미하는 '코스모스'와 비슷한 의미를 가졌는데, 일반적으로 '코스모스'가 공간적이고 현상적인 세상을 의미하는데 반해 '아이온'은 시간적이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의미합니다. 유대교 종말론에서는 시간을 '현 세대'(present age)와 '올 세대'(age to come)로 구분하는데 바울도 이와 같이 종말을 기점으로 크게 둘로 나누어 사용하였고 바울이 사용한 '이 세대'라는 말 속에는 대부분 이러한 유대교적 종말론의 개념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이 세대'가 시대 구분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신' 혹은 '공중의 권세 잡은 자'가 다스리는 '악한 세대'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세대는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있는 하나님 나라의 적대 세력을 의미할 뿐 아니라 '이 세대'의 삶의 방식과 가치 기준 등 시대정신도 포괄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 세상신이 지배하는 이 세대를 본받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본받지 말라'는 말은 표면적이고 흘러가는 ‘이 세상 풍습을 받아들이거나 순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고도 실패의 삶을 사는 것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이 이미 세상으로부터 구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본받아서 세상풍습을 따라서 살려고 할 때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백성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세상 사람들과 같이 동화되어서 세상의 사고방식을 따라서 삽니다. 그러므로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수 없게 되고 결국에는 믿음마저도 잃어버리는 파산한 자와 같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 성도가 거룩한 삶을 위해서 세상의 풍습을 따라가지 않으면서 하나님 앞에 행하여야 할 일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생각과 이해가 새롭게 계속 변화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마음’이란 도덕적 활동과 관련된 이해력이나 사고력 등을 말합니다. 즉 성도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을 때 심령의 변화가 먼저 일어납니다. 자신의 인격의 결함과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도저히 설 수 없다는 죄책감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죄 용서함을 받는다는 사실이 얼마나 축복인지 깨닫습니다. 그러므로 회개와 믿음을 통하여 거듭나게 된 성도는 다시는 자신의 마음이 이때까지의 습관적인 사고를 따라서 사는 것이 아닌 새로운 마음으로 살 것을 각오하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의 마음이 새롭게 될 때 우리 안에 인격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여기서 '변화를 받아'라는 말은 현재 수동태 명령형으로, 곧 이 말은 자신이 아닌 타자(他者)에 의해서 변화하며 일시적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꼭 그렇게 되어야 함을 나타냅니다. 즉 우리가 외부의 환경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변화했다가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격 내부에 변화를 일으키는 원동력이신 성령에 의해 마음이 새롭게 계속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라 이제 마음의 새롭게 됨으로 변화된 인격을 소유하게 된 성도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해야’합니다. 여기서 '분별하다'라는 말은 '입증하다', '시험하다', '인정하다'라는 뜻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한다는 말은 판단하거나 시험한다는 의미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알아야 하며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뤄가야 합니다(엡 5:8-10;빌 2:12). 먼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분별해야합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나서 그것을 보시고 좋았더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좋았다는 말이 선하다는 말입니다. 즉 선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좋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선하다”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특별하게 주신 말씀을 기준으로 규정되는 '선'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일반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개념으로서의 '선'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 '선'의 개념을 교회 안에서(9절), 사회 속에서(21절) 그리고 국가에 대한 관계 속에서(13:3ff.)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선'의 기준을 하나님께 두고 있습니다. 즉 모든 선의 기준은 하나님이 좋게 여기시는 것이어야 합니다. 아무리 인간의 생각에 선하다고 여길지라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좋게 여기실만한 것이 못되면 그것은 선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좋게 여기실 것인지 아닌지 먼저 분별해야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분별해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뜻이 이뤄지거나, 그의 뜻과 일치될 때 기뻐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자신의 기쁨을 위해 뜻을 가지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 뜻에 합당하게 생을 영위하거나, 피조 세계가 원래 목적대로 진행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반드시 상 주신다는 사실을 믿을 때 기뻐하십니다(히 11:6). 바울은 우리의 삶 속에서 믿음으로 좇아 행하지 못하면 그것은 죄라고 말씀합니다(롬14:23). 그리고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분별해야합니다. 온전하다는 말은 인간의 불완전한 모습을 상기시켜줍니다. 인간의 뜻은 타락한 욕심이 작용하기에 그 어떤 뜻도 온전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뜻을 세워도 그것을 이룰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불완전합니다. 하지만 계시된 하나님의 뜻의 뛰어난 특성은 그 자체가 온전한 것입니다. 신앙과 행위의 충분한 규범으로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것입니다(딤후 3:16, 17). 이는 그 뜻을 가지신 하나님 자신이 온전한 분이기 때문입니다(마 5:48).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뜻은 온전합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이든지 우리의 불완전한 뜻을 내세우기 보다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여 그 뜻을 이루어드리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합니다. 물론 우리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이루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나아가야할 것입니다. 3. 거룩한 삶을 살자 우리는 이 시간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영적인 예배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우리의 삶 전체가 거룩한 삶을 이룰 때 그것이 하나님 앞에 드릴 영적예배임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삶을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러한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몇가지 묵상합니다. 첫째,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육체를 정과 욕심과 함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입니다(갈 5:24). 그러므로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은 더 이상 그 육체를 따라 살지 않게 됩니다. 그의 삶은 이 세상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어 더 이상 정욕된 삶을 추구하지 않을 것입니다(갈 6:14). 그러한 모습이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사람입니다. 둘째, 날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으로 우리의 심령을 씻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속에서 더렵혀진 심령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씻음 받고 새로워진 마음으로 갖고 주님 앞에 더 가까이 나아가는 것입니다. 비록 이 세상에서 실패하였어도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다시 씻을 때마다 우리의 더렵혀진 심령이 깨끗함을 받게 되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보좌 앞에 더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심령을 씻습니다. 에베소서 5:26에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읽을 때 우리의 더렵혀진 심령이 깨끗하게 씻음받고 말씀을 순종함으로 거룩함에 이르게 됩니다. 그때 우리의 마음이 새롭게 되어 변화되는 삶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넷째, 성령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면 우리는 쉽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살 수가 있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찰하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고전 2:10; 롬 8:27). 성령을 따라 살 때 성령으로 행합니다. 모든 것을 성령께 의뢰하며 자신의 생각이 아닌 성령께서 주신 생각으로 삽니다. 이러한 삶을 사는 것이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나가는 말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구원받은 성도로서 거룩한 삶을 살므로 하나님 앞에 영적 예배를 드리기를 소원합니다. 날마다 하나님께서 좋아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살피면 그 일을 위해서 열심을 내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온전한 뜻을 이루기 위해서 힘을 다하여 섬기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