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말씀 - 설교

[스크랩] 생명의 성령의 법

kaporet 2008. 6. 29. 14:52

생명의 성령의 법

로마서 8:1-11

2008.6.29(주일예배)


들어가는 말


    어린아이가 새 옷을 입고 밖에 나가서 놀 때에 평소와는 달리 조심스럽게 행동합니다. 흙탕물 근처에도 안가고 흙장난하는 아이들과도 함께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깨끗한 옷이 더러워질까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놀다가 넘어졌을 때 대부분의 아이들은 울고 맙니다. 아이들이 왜 웁니까? 자신이 넘어져서 아픈 것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옷이 더럽혀진 것 때문에 엄마한테 혼이 날까봐 웁니다.

    우리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았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모든 죄를 깨끗이 씻음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롭다고 인정해주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새 옷을 입은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을 새 옷을 입은 사람답게 조심스럽게 살게 됩니다. 바로 이런 모습이 성도의 거룩한 삶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성도의 고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도 거룩한 삶이 잘 되질 않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예수님과 함께 살려고 애를 쓰면서 조금 거룩한 모습을 사는 것 같더니, 시간이 지날수록 아무리 거룩한 삶을 살려고 노력을 해도 때때로 실수하고 넘어지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좌절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새 옷을 더럽힌 아이처럼 울며 고민합니다. 왜 이렇게 거룩한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하나 마음 아파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만의 고민이 아니라 사도바울도 한 때 그러한 체험을 하였다고 로마서 7장에서 고백합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하나의 진리를 발견했는데 그것은 성도가 자신의 힘으로는 거룩한 삶을 살 수 없더라도 낙망치 말 것은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지금은 비록 거룩한 삶이 잘 안되어도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점점 더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1.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1-4)


    그리스도 안에서 정죄함이 없다


    우리 성도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나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 마음속에서 순전하게 일어나는 생각으로 하나님의 법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또 한편에서 우리의 육체의 정욕으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우리 안에서 죄의 소욕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도 온전하게 거룩하게 사는 삶이 어렵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죄의 법이라고 말하며 죄의 법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므로 우리의 거룩한 삶이 온전히 되질 않음을 고백합니다. 우리는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며 그것을 행하기를 소원하지만 항상 죄의 법이 성도의 육신을 사로잡아 마음이 원하는 바를 못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고도 거룩한 삶을 살 수 없는 성도의 연약한 모습이 가련하게 보입니다. 이로 인해 성도는 심한 정죄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성도가 결코 정죄당하지 않는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서 우리를 하나님의 법에 따라서 살도록 돕는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라고 말하는 것은 지금까지의 문제의 해결이 이제부터 말하는데 있는 것을 말합니다. 즉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것입니다.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정죄함이 없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를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할 때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와 내주하심으로 가능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이미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는 것은 죄의 문제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되면 우리는 더 이상 죄의 굴레로 인해 고통당할 필요없이 자유롭게 됩니다. 비록 육신이 연약하여 다시 죄에 빠질지라도 근본적인 죄의 문제를 해결받았음으로 더 이상 죄에 대한 책임을 지질 않습니다. 다만 우리는 죄에 대해서 회개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살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는 정죄로부터 진정으로 그리고 완전하게 해방되었습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역사하심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정죄함을 받지 않는 이유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였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 성도들에게 생명을 주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6절). 따라서 생명은 성령과 불가분리의 관계에 놓여 있으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이란 표현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속의 원리를 가리킵니다. 성령은 이 원리에 따라 성도들에게 생명을 주는 역할을 담당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생명의 성령의 법’이 역사하게 됩니다. 이처럼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이라는 표현을 수식어로 사용함으로써 ‘생명의 성령의 법’이 나오게 된 원천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은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죄의 법은 율법을 통하여 우리 안에서 역사하여 우리로 정죄를 받게 합니다. 비록 ‘율법’ 그 자체는 ‘선하고 의롭고 거룩’할 지라도(7:12) 죄는 그 율법을 가지고 성도를 정죄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은 죄와 사망이 인간 가운데서 역사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법이 우리를 죄의 법에서 해방시켜줍니다. 성도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정죄함을 받지 않게 된 것은 성도들을 성령께서 도우시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율법의 요구를 이루게 하심


    성령의 법으로 성도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정죄함이 없게 하신 일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그것은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대신 이루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죄에게 종노릇하는 육신으로 하여금 율법 자체의 요구를 이루게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율법은 육신을 지닌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없음을 깨닫게 해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 보겠다고 노력하면 할수록 비참함을 경험하게 됩니다(7:24).

    그러나 ‘하나님’은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우리의 ‘죄를 인하여’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는 분이셨으나(히 4:15) 인간과 동일한 육신을 입으셨기에 죄의 유혹을 받았고 연약함도 경험하셨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도 그는 범죄치 않으셨기에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온전히 순종하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지만 인간의 연약한 육신을 입으사 인류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면서도 죄의 유혹과 인간의 연약함을 체험하셨고 거룩하신 몸에 죄 정(定)함을 입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시사 인간의 죄와 허물을 대속해 주심으로써 죄많은 인간과 달리 하나님의 요구를 온전히 성취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오직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성취하셨다는 사실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이를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율법을 성취한 것으로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예수님을 죄있는 인간의 모습으로 보내신 것은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여기서 '육신'은 정죄된 육신을 가리킵니다. 이미 정죄된 육신을 좇는 것은 육신대로 사는 것이며(13절) 육신의 원리에 따르는 것이며 또한 인생의 목표를 육신을 만족시키는 데 두는 것입니다. 여기서 ‘육신을 좇는 자’는 성도가 선을 행하기를 원하지만, 육신에게 져서 비참함을 당하는 상태에 빠지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즉 선을 행하기 원하지만 육신에 져서 죄의 법아래 사로잡히게 되는 사람이 아니라, 전혀 하나님과 무관한 삶을 추구하는 자 곧 불신자들의 상태를 말합니다.

    성도는 매일의 삶 가운데서 연약한 육신으로 인하여 끊임없는 갈등과 고뇌의 삶을 사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육신을 좇는 자가 아니라 영의 원리를 따라 사는 자입니다. 이 영의 원리에서 가장 근본된 것은 복음이며, 성도는 성령을 통해서 복음을 받아들이며 양자됨과 기업을 이어받는 것에 대한 보증을 받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놓으신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신 것들을 성도들이 이루어지게 하십니다. 율법의 ‘요구’는 ‘의로운 행동’, ‘계명’, ‘규칙’ 등을 의미합니다.


2. 육신을 좇는 자와 영을 좇는 자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 8:5-8)


    육신을 좇는 자와 영을 좇는 자의 차이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육신을 좇는 자와 영을 좇는 자의 차이가 분명합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합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이 세상의 정욕적인 것에만 관심을 갖습니다. 그것이 육신의 일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합니다. 여기서 영이란 많은 학자들이 ‘성령’으로 간주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의 ‘영’은 성령이 아니라 다만 육신과 대조되어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이나 뜻을 의미합니다. ‘육신을 좇는 자’가 육신을 위해 모든 목표를 세우며 그것을 추구하는 자라고 하면 ‘영을 좇는 자’는 하나님을 위해 모든 목표를 세우며 그것을 추구하는 자입니다. 그리고 '영을 좇는 자'가 목표를 세우고 추구해 가는 모든 과정에는 성령의 개입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영을 좇는 자’라고 해서 연약한 육신을 이기고 마음으로 원하던 바를 모두 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영을 좇는 자’라 할지라도 그 속에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것과 그것과 투쟁하는 죄의 법이 공존합니다.

    그런데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사람은 가장 깊은 사고(思考)의 원천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육신’으로부터는 하나님과 아무 상관없는 생각 곧 자기중심적인 생각만이 나옵니다. 그리고 육신의 생각은 결국 사망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 없이 자신이 왕이 되어 사는 죄의 삶을 삽니다. 그리고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러나 ‘영’에게서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생각이 나옵니다. 그리고 영의 생각의 결국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영의 생각은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살게 되고 하나님께 생명과 평안을 받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항상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에 의해 갈등이 발생합니다. 그때 성도는 육신의 생각이 아닌 영의 생각을 따라야 합니다.


    육신의 생각의 결국


    왜냐하면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기 때문입니다.” 죄의 법아래 사로잡혀 있는 육신은 하나님과 어떠한 관계도 맺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육신이 도모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육신에 속한 자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구원을 거부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운 법에 순종치 아니하고 의지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된 증거요, 이는 모든 비참함의 근거입니다. 이처럼 육신의 생각에 따라 사는 자는 자신의 의도가 있든 없든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도전하기까지 합니다. 자연인의 전적 불능(不能)과 전적 부패성을 보여줍니다. 오직 성령에 의해 거듭난 자만이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기꺼이 순종하는 마음과 의지를 가질 수 있습니다.

    결국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생각을 하며, 이에 따라 육신의 일을 하게 됩니다. 즉 육신에 속한 자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전혀 생각지 않으므로 그에게서 나오는 모든 행동이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죄의 법 아래에만 있는 자의 실상(實狀)입니다.


3. 그리스도의 사람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9-11)


    그리스도의 사람은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자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성도들은 육신에 속한 자가 아닙니다. “만일 우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우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습니다.” 성도는 누구나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고전 3:16;고후 6:16). 그러므로 성도는 육신에 속한 자가 아니라 영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자는 육신에 속하지 않는 자입니다. 즉 성도가 비록 선을 행하기를 원할지라도 그것이 뜻대로 되지는 않지만, 성도로서의 신분을 자신있게 내세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 그 속에 거하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합니다. 육신의 지배를 받고 있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성도는 그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심으로써 ‘영에 속한 자’의 신분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만일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며 또한 ‘그리스도의 영’이신 것처럼, 성령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불가분리의 관계에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이에 대해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는 “성령은 영원히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나오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성령은 성도 가운데 거하시면서 성도의 영과 더불어 활동하십니다(16절). 그러므로 성도가 ‘그리스도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에 의해서 뿐입니다. 성령께서 오심으로써 성도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여 믿게 하시며 또한 그분은 성도 안에 계시어서 하나님의 자녀로 인 쳐주십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는 성령이 거하는 자이기에 그리스도께서 거하는 자이고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은 산 자이다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고 말씀하시고, 또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요 17:3)고 가르치심으로써 사람이 믿음으로 ‘영생’을 이 땅에서부터 소유하게 됨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새 생명 가운데서 사는 자입니다. 몸은 죄의 도구가 된 육신으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으나 영은 이미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義)로 인해 살았습니다. 여기서 ‘살아 있다’는 의미는 1절의 ‘정죄함이 없나니’란 말씀과 2절의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는 말씀과 매우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즉 성도가 여전히 정죄받는 신분이라면 아직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지 않았으므로 살았다는 신분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는 정죄함이 없으므로,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속사람인 ‘영’은 죄의 포로가 된 육신과 심각한 갈등 관계에 있을지라도, 성도는 그리스도께서 값없이 주신 의로 인해 살아 있는 존재입니다.


    성령의 살리는 역사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있을 때 산 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하나님)가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그의 영(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죽을 몸도 살리실 것입니다.” 즉 성령이 내주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성령에 의해 예수님을 사망 권세로부터 살리심같이 다시 일으킴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성도는 영만 살아나는 것이 아니고 ‘죽을 몸’이 다시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죄를 인하여 죽은 것이나’(10절)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성령의 역사로 우리의 죽을 몸이 다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나 그렇지 않습니다. 즉 몸은 죄로 인해 죽습니다. 그러나 영은 의로 인해 살았습니다. 이와 같이 죽을 몸도 영이 성령에 의해 살게 된 것처럼 다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사는 삶


    우리는 다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고 고백하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로서,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시고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성령께서 우리의 생각을 영의 일을 생각하게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야하겠습니까?

    먼저 하나님 법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이미 율법을 다 이루어 놓으시고 우리에게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법을 따를 것을 요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님 안에 거하는 삶’을 요한복음 15장에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로 말씀하시는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주님안에 거하는 것은 주님의 말씀이 제자들 안에 거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제자들 안에 거하는 것은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그 앞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느니라”(요15:3)고 말씀하신바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으로 깨끗해진 제자들이 이제는 말씀이 그들 안에 거해야하는 것과 같이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야합니다. 우리는 이미 복음을 듣고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말씀이 제자들 안에 거해야하는 것처럼 우리 안에 거해야합니다, 그것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요구하시면 우리는 그대로 순종할 뿐입니다. 그에 대하여 변명을 하거나 자신의 환경을 핑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을 그대로 이루어드리도록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 내려놓고 주님께 순종할 때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 일을 이루도록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한 제자들에게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요 15:8)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따라 순종할 때 열매를 많이 맺게 될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타나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의 제자로 인정을 받을 것이고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힘쓰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6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라는 것들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확신하는 것이며 보이지 않는 세계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들을 그대로 믿고 따라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현재의 우리의 현상을 보고 좌절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비전을 보고서 나아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믿고 오직 주님만 의지하는 삶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2:20절에서 고백하기를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가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을 위해서 죽으신 그리스도를 믿고 전격적으로 신뢰하고 따라가는 삶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우리의 인생 전부를 그리스도께 맡기고 우리의 몸을 그리스도께 던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책임져주실 줄 믿고 주님만 신뢰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우리의 모습을 기뻐하실 것입니다. 


나가는 말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고 구원받은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서 예수님만 의지하며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살므로 우리의 생애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생애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센다바중앙교회
글쓴이 : kaporet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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